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다 보니 야외에서의 활동을 거의 하지 못하는 관계로 종일 집에 머무르며 나름 여가 활동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과거에 내가 읽었던 책들을 찾아서 읽어보기로
마음을 먹고-그 중에 실제로 의외로 재미있던 책이 하나 있기는 했다-, 그 책들을 넣어두고 있던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하였다.
예전에 읽었던 책을 넣어두기 위해 마련한 곳은 2 곳으로서, 첫 번째는 집 근처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창고로서, 이전에 집에 살던 이를 위했던 책들이지만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 것들이요, 두 번째는
작은 방에 있는 책장들로서, 거주 공간으로 활용하지는 않고, 도서관에서 옮겨진 책들을 비롯해 각종 물품들을 넣어두는 곳이며, 그래서 거주할 수 있는 곳 자체는 상당히 좁은 편이다.
첫 번째 장소는 본래 큰 흥미가 없어서 잘 이용하지 않으나, 두 번째 장소는 가끔 들르고는 한다. 특히, 지난 10 년 즈음 전에는 집 안에서 공사를 한 탓에 다른 공간에 머무를 수 없어서 평상시에는
밖에 있다가 집에 올 때 즈음이면 두 번째 장소에 머물렀고, 이후에 임시로 마련한 침실에서 잠을 청하고는 하였다. 그래서 그 이후로 지금까지 그 두 번째 장소에 머무르고 있다 보면 그 당시의 추억이
상기되고는 한다.
내가 들른 곳은 두 번째 장소로서 그 안에 있던 책들 중 하나를 찾아서 읽으려 하는데, 문득 이번에는 그 두 번째 장소의 한 곳에 놓아두고 있던 커다란 나무 상자 안에 들어있는 것을 찾으려 하였고,
그러면서 그 뚜껑을 열어 안에 들어있는 것들을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하였다.
한 때는 자물쇠로 잠가놓기까지 할 정도로 소중히 여기었던 나무 상자-실은 도둑맞을 것이 염려된 탓이었다-. 그 안에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중등 학교에 다니며 바빠지기 시작할 무렵까지의 일기가
들어있었다. 일기는 처음에는 두루마리에 적었다가 나중에 책으로 엮었으며, 10 여 년 동안 매일 한 장씩 쓰고 있었기에 일기 쓰기를 중단할 때까지 총 15 권의 책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그 일기들은 '나
자신의 옛 기억' 을 되살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수단이었기에 항시 소중히 보관하고는 하였는데, 한 동안 관심을 두지 않다가 간만에 비가 와 집 안에 항시 머무르게 된 일을 계기로 들추어보게 된 것이었다.
그 중 내가 꺼낸 것은 9 권으로서 AR 430 년부터 1 년 간 내가 썼던 당시의 일기들이 모인 책자. 그 책자에 금속으로 만들어진 활자로 새로이 찍힌 글들을 바라보면서 옛 기억을 조금씩 돌아볼 수
있었다. 아직 어렸던 탓에 감정적인 글들이 많았으나, 그런 면이 그 시절에 내가 얼마나 솔직했는지를 바로 보여주는 것 같다는 느낌을 전해주기도 한다. 그 때 당시 내가 기록했던 일기 중에 몇을 추려
여기에 실어본다.
430 년 1 월 15 일 - 날씨 : 눈
오늘은 눈이 많이 내렸다.
눈이 많이 내려서 세상이 온통 하얗다. 그래서 세상이 어제보다 완전히 달라 보였다.
그런데 어제 교회에서 신부님께서 이야기를 하시는데, 천국은 온통 하얀색으로만 가득하단다.
그렇다면 오늘부터 이 세상은 천국이 된 것이다, 눈이 내려 세상이 모두 하얗게 변했으니까.
그 하얀 세상 아래에서 나와 내 친구들은 신나게 눈싸움을 했다.
그런데 책에서 볼 때에는 아이들이 눈싸움을 무척 재미있게 하던데, 정작 눈을 잡으니 손이 너무 차가웠다.
눈을 만져도 차갑고, 눈을 맞아도 차갑다. 차갑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아프기까지 해서 눈을 잡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눈을 잡으며 신나게 놀 수 있을까, 문득 그에 대해 궁금해졌다.
430 년 4 월 5 일 - 날씨 : 해맑음
교회의 신부님께서 오늘은 나무를 심는 날이라 하여 나무 심는 곳에 갔다.
그런데 한 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이미 산에 한 가득히 나무가 심어져 있는데, 어디에다가 나무를 또 심어야 하는지, 그게 궁금했다.
하지만 신부님을 따라 산길을 걸어보니, 이럴 수가! 산의 한 구석이 황무지처럼 황폐해져 있었다.
신부님께서 말씀하시길, 이전에 산불이 나서 그 일대에 있던 나무들이 전부 불에 타 죽어서 그렇다 했다.
친구들과 함께 나무를 계속 심었다, 나는 3 그루 심었고, 그러면서 나무들이 불에 타지 않기를 기도했다.
그러다가 하나의 의문이 들었다.
누가 왜, 산에 불을 내 나무를 불타 죽게 만드느냐는 것이다.
신부님께서도 잘 말씀하시지 못하셨지만 분명 무언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신부님께서 숲이 한 번 저절로 회복되려면 50 년 넘게 시간이 기다려야 한다는데,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산에 불을 내려 하는 사람이 있으면 따끔히! 혼을 내 주었으면 좋겠다.
430 년 7 월 13 일 - 날씨 : 맑음
12 일, 그러니까 어제 밤에 공포 체험을 한다 하여 신부님께서 아이들을 교회 인근의 묘지로 데려가셨다.
아이들이 바람 소리가 들릴 때마다 무서워하며 소리를 질렀지만,
나는 가만히 있었다. 아니, 왜 묘지에서 유령을 보면 사람들이 무서워하는지 그것에 대해 전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신부님께서 아이들을 놓아두고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혼자 신부님을 찾으러 나가 보았다가, 한참 시간이 지났을 때, 이상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신부님께서 교회 안에서 한 여자를 끌어안고 있는 것이었다.
물가에 있지도 않은데, 수영복을 입고 있는 이상한 여자였다.
이상한 옷차림을 하면 자칫하다가는 마을 경비대에 끌려가 혼날 수도 있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혹시 유령이었을까.
그리고 그 다음 날, 신부님께서는 마을의 언니들께 엄청나게 혼나셨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신부님께서 잘못을 저질러 멀리 추방을 당하신다고 하는데,
그래도 아쉽다, 신부님께서는 분명 좋은 분이신데, 다시 못 보는 걸까.
430 년 11 월 16 일 - 날씨 : 눈
아직 12 월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눈이 왔다.
또래 친구들은 눈이 왔다고 무척 좋아했지만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눈은 겨울에 온다는데, 그리고 겨울은 12 월부터 시작된다는데, 아직 겨울도 되지 않은 11 월에
왜 눈이 내리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1 년 만에 다시 잡아보는 눈이었지만, 여전히 눈은 차가웠고, 그래서 잡기 힘들었다.
그래서 눈싸움은 전혀 하지 못하고, 거리에서 눈 구경만 하다가 돌아왔다.
그러다가 동네의 언니들이 만든 커다란 눈사람을 발견하였다.
보통은 2 개의 눈 덩어리를 쌓아 만드는데, 이번에는 3 개의 눈 덩어리가 쌓여 있었다.
그래서 눈사람이 거인처럼 보였다.
언젠가 어떤 아주머니께서 이야기를 한 것이 떠올랐다.
눈사람이 마치 사람처럼 살아나, 아이를 데리고 여러 세상을 오가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처럼 눈사람이 살아나서 나를 멀리까지 데리고 갔으면 좋을 텐데.
그런데 그렇게 눈사람과 함께 있으면 무서울 것 같다, 너무 크니까.
그렇게 하루하루의 일상을 기록해 나아갔던 일기-물론 일부 빠지기도 했지만-를 가만히 지켜보면서 그것을 통해 옛 일을 하나씩 상기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그 어렸을 적, 나의 은사 중 한 분이셨던 신부님, 니콜로(Niccolo) 의 모습이 떠올랐다. 꽤 나이 많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어렸던 아이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전해주셨던 분이었지만, 상기된
일기와 관련되어 있는 7 월 13 일에 결국 '법도를 어기었다' 라는 죄로 교회에서 추방당하고 말았다. 두 번 다시 교회에 들를 수 없게 되었으며, 교회 출입이 당분간 금지되었음은 물론이다.
그 이후, 니콜로 신부께서 어떻게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게다가 이미 61 년이 지났는데, 당시 그 분의 나이는 50 대였다니 지금 즈음이면 돌아가셨을 것이다-인간으로서 110 년 넘게 사는 일은
거의 무리에 가깝다-. 추방된 이후, 한 동안은 기억하고 있었지만 언젠가부터 기억하지 못하더니 너무 늦게 다시 떠올린 것 같아, 그 분께 무척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늦었지만 어린 시절 나의 은사였던 그 분께 한 마디 인사를 건네고 싶다, 그 때 당시의 과오가 일생을 넘어 이후의 삶에까지 누를 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고.
※ 나중에 알아낸 사실로서, 니콜로 신부는 지금으로부터 15 년 즈음 전, 그러니까 AR 486 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향년 108 세. 세상을 떠난 장소는 대륙의 서쪽 바다 건너에 위치한 라르니온(Larnion)
북부에 있는 한적한 마을 루아나이(Ruanaj) 인근의 타이가 숲 지대. 신부 역할 이외에 달리 일을 하지 못한지라 소로에나를 떠난 이후로는 아르나이와 그 서부 해안, 더 나아가 루데스(Ludes) 7 개 군도 등에
이르렀다가 이후에는 라르니온 각지를 전전했던 모양이었다. 오랜 삶을 살았지만, 교회에서 파문된 자였기에 그 분의 유해는 타이가 숲에 있는 어느 작은 오두막 부근에 비목 하나에 의지한 채, 쓸쓸히
잠들고 있다고 한다. 이미 무덤으로 향하신 지는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뒤늦게나마 고인의 후생이 복되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