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로 가는 김에 바다에 어울릴만한 옷 한 벌 사 가는 것은 어떻겠냐는 질문, 그런 질문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입고 있던 보라색 민소매 셔츠와 보라색 짧은 바지로 이루어진 옷차림에 어느 정도 질린 상태였다. 물론, 옷차림이 나에게는 편했고, 그래서 늘 평상복으로 입고 다니고는 했지만 그 옷차림을 오래 입고 다니다 보니, 뭔가 새로운 옷차림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솟아나기 시작했고, 그래서 평상복으로 좋을 만한 새로운 옷을 원하고 있었는데, 때 마침 세니아로부터 새 옷을 사 보는 것은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은 것이다.
"잘 된 일이네, 그렇지 않더라도 새 옷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리고서 나는 이왕 그렇게 된 김에 보다 시원한 옷차림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옷을 사 보자고 청하기도 했다. 이에 예나는 활짝 웃으면서 "좋은 일이네요." 라고 나와 세니아의 대화에 대한 생각을 밝히고서 얼른 도시로, 그리고 시장으로 가 보자고 청했다. 그리고 옷을 사는 데 필요한 자금은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말하기도.
일행의 도시의 성벽을 향하는 발걸음이 이전에 비해 보다 빨라지고 있었으며, 그것에 맞춰 나에티아나의 비행 역시 빨라지고 있었다. 올라갈 때와 달리 내려갈 때에는 다른 말 없이 모두 다급한 듯이 산길을 통해 산을 내려와 도시의 북부 경계 지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일행은 하미르로 돌아가기 전에 하미시의 시장에서 옷을 새로 사기로 했다. 옷을 사기로 한 이는 나 그리고 세니아였다. 세니아는 자신의 옷차림이 겨울에 맞는 것이라 여름에 맞는 옷을 새로 마련할 필요가 있었는데, 예나가 자금 지원을 해 주겠다고 하니, 옷을 사기로 했다고.
일행이 다시 하미시의 중앙 광장에 이르는 동안 어느새 하늘의 빛이 밝아오면서 본격적인 아침 시간이 시작되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지만 중앙 광장 서쪽에 자리잡은 시장 거리의 가게들은 문을 활짝 열고 손님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앞장서서 길을 걸으면서 주변에 괜찮은 옷 가게가 있는지를 두리번거려 보았다.
"아르사나! 저길 봐!" 그러다가 내가 고개를 왼편으로 돌리고 있던 어느 때에 카리나가 나의 오른편에서 나를 불러서 자기가 서 있는 방향을 바라보도록 했고, 그 방향을 보면서 나는 결코 낯설다고 할 수 없을 무언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EL JOYERIA (엘 호예리아, El Hoyeria)', 후아나 (Juana) 혹은 로사 (Rosa) 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의 옷 가게였다. 전통 의상을 주로 취급하는 곳으로 루이즈가 입고 있었던 전통 의상은 그의 가게에서 급히 구매한 것이었다. 그 가게도 현관문을 활짝 열고 있으면서 손님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점장인 로사 역시 전통 의상을 화사하게 차려 입고-모자까지 썼다-, 가게 정비를 하고 있었다. 혹시나 일행을 알아보거나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흠칫 했지만 다행히도(?) 로사는 가게를 지나쳐 가는 일행을 미처 알아보지는 못한 것 같았다. - 그렇다기보다는 가게 일이 바빠서 일행을 마주할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 더 옳은 말이었겠지만.
"그나저나, 루이즈 씨, 그 옷차림 마음에 들어요?"
그 무렵, 일행의 세 번째 대열에서 나에티아나가 오른편 곁에서 동행하던 루이즈에게 옷이 마음에 드는지 여부를 물었고, 그 물음에 루이즈는 "괜찮아요." 라고 답을 했다. 그러자 카리나는 그 이후에도 그런 루이즈에게 정말 괜찮냐고 물었고, 루이즈는 그런 그의 물음에 이렇게 답을 하고 있었다.
"편하지는 않지만, 이렇게라도 입을 수 있으니,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이전까지 입었던 옷에 비하면 너무 좋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이전까지 입은 옷이라면 내가 한 번 입어보기도 했던 그 로브와 가면이었을 것이다. 나야 변장을 위해 입고 다니기는 했지만 그런 옷을 일상적으로 입고 다니려면 여러모로 심기가 불편했을 것이다. 케레브 족의 광신자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그런 옷을 늘 입고 다니다가 바깥 세상으로 나아가 바깥 세상의 옷을 입게 됐으니, 어떤 옷인들 좋아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예나 씨, 루이즈도 새 옷을 입었으면 하는데......."
"물론요!" 이후, 잔느 공주가 예나에게 루이즈에게도 새 옷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하자, 예나는 곧바로 당연히 새 옷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답했다. 그리고 나에게 어디로 가고 싶은지를 물었고, 이에 내가 잘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나의 왼편에서 뒤따라 걷고 있던 세니아가 "여기는 어때?" 라고 나를 불렀고, 이에 나는 세니아가 가리킨 가게를 찾아가려 했다.
주로 가벼운 의상들을 취급하는 곳으로 가게 이름은 'Los Tiempos de Verano (Los Tiempos de Berano)'. 번역하자면 '여름의 시간 (Yermï Jelukh)' 즈음 되는 이름을 가지는 가게였다. 주로 여름 의상이나 겨울 의상을 취급하는 가게로 시기마다 가게 간판을 다르게 한다고 알려져 있기도 했다. 그 곳에 진열된 가벼운 반소매 티셔츠들을 보면서 나는 그 곳이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러면서 그 가게 안으로 가 보자고 세니아, 예나, 세나 등에게 청했다.
"그 옷들이 마음에 드셨나 봐요?" 그러자 세나가 나에게 그렇게 물었고, 이 물음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후에 가게 안으로 들어섰으며, 그와 함께 세니아, 잔느 공주 그리고 루이즈도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이들은 가게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내가 선택한 옷은 하얀 색의 얇은 티셔츠 한 벌 그리고 치마 안에 받쳐입고 있던 타이트하고 짧은-허벅지를 전부 노출할 정도의- 바지 길이만한 아주 짧은 청바지 하나였다. 아무래도 여름 분위기가 나는 곳으로 가는 만큼, 그 정도의 가벼운 옷 한 벌 정도면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전까지 넣어두고 있던 은 원반이 들어있는 상자는 청바지의 왼쪽 주머니 안에 넣어 두었다. 바지가 어찌나 짧았던지 셔츠의 하단에 바지가 가려질 정도였다.
- 세니아는 다른 것은 놓아두고 상의만 소매 없는 것으로 갈아입었으며, 다리를 감싸는 천 역시 허벅지를 감싸는 정도의 것으로 바꾸었다.
가장 난처했던 경우는 역시 루이즈로, 루이즈는 가슴 크기가 유난할 정도로 커서 (아체 (H) 급이었다!), 옷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점장이 달리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크나큰 가슴에 비해 허리는 가늘고, 골반이 그것에 대비되어 굵기까지 했으니 옷을 가볍게 맞추기가 여러모로 난감했을 것이다. 사실 잔느 공주에게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고, 샤르기아의 옷 가게인 세프테티아 (Septetia) 의 점장인 이리니아 (Irinia) 가 옷을 잘 맞춰 주어서 큰 문제는 없었지만 이후로 잔느 공주는 새로 옷을 마련하거나 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옷을 맞추는 것이 여러모로 쉽지 않은 일이라 차마 새 옷을 갖고 싶다는 말을 하지 못했던 모양.
"E (에) 급 정도면 문제가 없지 않아?"
그것에 대해 세니아가 묻자, 내가 바로 답했다, 잔느 공주와 루이즈의 그것들은 E (에) 나 V (에브)/F (에프) 급을 넘어서는지라 일반적인 의상은 잘 맞지 않다고. 그래서 옷을 새로 사려면 맞춤은 필수이고, 옷을 맞추는 일이 여러모로 수고스러운 일인데, 그런 일을 계속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렇다고 샤르기아에 있는 이리니아의 가게에서처럼 옷을 맞추려고 해도, 돈도 돈이지만 무엇보다도 시간이 오래 걸리기에 가급적이면 빠른 시기 내로 하미르로 가는 기차를 타려 했던 내 입장, 일행의 입장에서는 달가운 일은 아니었던지라, 쉽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었다. 그래서 무슨 뾰족한 좋은 수가 없을까하며 고민하고 있던 그 때, 예나가 가게 안으로 들어오면서 루이즈에게 이렇게 청하는 목소리를 냈다.
"루이즈 씨, 루이즈 씨께서는 일단 그 옷차림을 그대로 하시고 계세요. 루이즈 씨께 어울릴만한 복장은 저의 비행정으로 오시면 그 때 가져다 드릴게요."
그리하여 나와 아네샤가 옷을 바꾸어 입고, 원래 입던 옷은 나에티아나가 가방 안에 넣어 두었다. 이후, 예나가 나에티아나를 불러서는 그에게 하미르에 도착하면 그 옷들을 자신에게 가져다 줄 것을 부탁하였고, 그리하여 옷 가게에서 옷을 새로 장만해서 갈아입기까지 모든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옷 가격은 반 정도는 일행이 모아서 냈고, 반은 예나가 내 주었으며, 이에 대해 예나는 옷 가격은 굳이 예나가 돈을 내 주지 않아도 일행이 충분히 낼 수 있을 정도였지만 그럼에도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겠다고 해서 돈을 보태 주려 했다고 말했다.
"아르사나, 새 옷은 마음에 들어?"
"응, 조금 더 편한 느낌이 있어." 새로 옷을 바꾸어 입은 이래, 처음으로 거리를 걷고 있을 그 때, 세니아가 나의 왼편 곁으로 다가가서 물었고, 그 물음에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밝게 목소리를 내며 답했다. 확실히 이전보다는 편하고 가벼운 느낌이 있는 옷이었다. 세니아 역시 이전보다는 다소 가벼워진 옷차림을 하면서 조금은 더 시원해진 것 같다는 느낌을 가지는 듯해 보였다.
그 무렵, 일행은 중앙 광장의 서쪽 시장 거리에서 다시 중앙 광장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나와 세나가 앞장서 가고, 그 뒤를 카리나와 세니아가 따라 갔으며, 그 뒤로 예나와 잔느 공주 그리고 루이즈가따라가고 있었다. 나에티아나는 이런 일행의 사이에 있으면서 같이 발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일행이 중앙 광장을 지나 문화 광장에 이르렀을 무렵, 예나가 루이즈를 불러서 하미시의 북쪽 경계 부근으로 가자고 했다. 예나의 비행정이 그 부근에 있다고 했으며, 비행정에서 옷을 가져다 줄 겸, 그를 비행정을 통해 하미르로 데려가려 하였을 것이다.
"하미르에서 다시 만나기로 할 텐데, 어디에서 다시 만나면 될까요?"
"갈라마 역사 입구 앞에서 다시 만나기로 해요." 그러자 내가 바로 답했다. 원래는 갈라마 역사와 멀지 않은-강을 건너야 하기는 했지만- 문화의 거리 한 곳에서 만나고 싶었지만 문화의 거리의 어떤 장소를 지목해야 하는지 마땅히 생각나는 곳이 없어서 간단하게 일행이 기차를 타고 내리는 갈라마 역사 앞으로 정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서로 갈 길이 달라진 일행과 예나 그리고 루이즈는 중앙 광장에서 헤어지기로 하고, 예나와 루이즈는 문화 광장의 북쪽 길 너머로, 그리고 나를 비롯한 일행은 남쪽 길 너머로 나아가게 되었다. 잔느 공주는 루이즈와 친한 사이였지만 그럼에도 나를 비롯한 일행과의 인연을 더욱 중요시하고 있었고, 그래서 나를 비롯한 일행을 따라 나서게 되었다.
"예나 씨께서 루이즈 씨께 잘 해 주셨으면 좋겠는데."
"잘 해 주시겠지, 잔느 공주님께도 잘 해 주신 것 같았는데."
루이즈가 예나와 함께 일행과 멀어지는 동안 쓸데 없이 마음 속에 자리잡기 시작한 노파심에 일행과 헤어지게 된 루이즈의 멀어져 가는 뒷 모습을 잠시 바라보며 혼잣말을 하자, 내 오른편 곁으로 카리나가 다가오면서 그런 나의 말에 화답하는 목소리를 내었다. 그리고서 그는 나에게,
"그러고 보니, 하미르에서 만났던 그 여자애 기억 나?"
"하미르에서......?"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이가 하나 있었다. 미냐 (Migna, Minya) 라는 이름을 가진 밝은 연둣빛 긴 머리카락의 그 어린 소녀. 한참 동안 나, 카리나, 나에티아나와 동행하고 있었던 어린 소녀였다. 갈라마/하미르 행 기차를 타기 위해 하미시 역사로 나아가는 동안 그 소녀와 잠시 인연을 맺었던 카리나가 그를 언급하려 하자, 내가 그 이유를 물으려 했다.
"미냐를 말함이지? 그 여자애는 왜?"
"그냥...... 하미르로 돌아가면 그 애를 다시 만날 수 있겠다 싶어서."
그러자 카리나는 다른 의미 없이 미냐를 다시 만날 것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있었을 뿐이라고 화답했다. 그러면서 새로 일행에 들어온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미냐가 많이 놀랄 것 같다고 미냐에 대한 예상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렇겠지, 소소하게 돌아다니던 이들이 어느새 패거리를 몰고 다니게 됐으니까 말야."
이런 말에 나는 장난스럽게 목소리를 내며 화답했고, 이러한 나의 대답에 카리나도 조용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 대화를 이어가면서 보인 그의 장난기 어린 듯한 표정을 보며 나도 슬쩍 장난기가 들어 그렇게 화답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분께서도 이렇게 우리가 모인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무서워 하시지는 않으실 것 같아요."
"정말일까?" 이후, 세나가 활짝 웃으며 나와 카리나에게 내가 만났던 그 어린 소녀-미냐-가 주변 사람들이 많아진 나와 카리나의 모습을 보면서도 그렇게 놀라거나 당황하지는 않을 것 같다고 말했고, 그 이유로써 나에게 이렇게 말을 건네려 하였다.
"아르사나 씨, 카리나 씨 그리고 나에티아나 님도 그렇고, 여기 계신 분들 모두 인상이 좋으신 분들이라, 수가 많아졌다고 해도 그렇게 무서워하시지는 않을 것 같아서 그래요."
"하기사, 너희 아르사나, 카리나 그리고 나에티아나에 아무리 봐도 착하고 예쁜 세나에 내가 더해졌을 뿐이잖아. 기존에 있던 애들에 2 명이 더해졌을 뿐인데, 패거리라고 할 것도 없기는 하지. 그건 그렇고, 그 여자애 이름은 뭐고, 어떻게 생겼어? 그것에 대해 대충이라도 알아야 어떤 사람을 만날 수 있겠구나, 하는 정도의 기대는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
그러자 세니아가 곧바로 나에게 이렇게 말을 건네었고, 그러면서 나와 카리나 등이 하미르에서 만났던 그 소녀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려달라 요청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질문을 하는 어조에서 아무래도 세니아는 순수하게 소녀의 외견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고, 엉큼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바로 이렇게 핀잔을 주는 듯한 목소리를 내며 화답했다.
"그냥 어린 여자아이야, 쓸데 없는 기대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렇구나." 그러자 세니아는 조용히 웃음을 띠며 나에게 말을 건네었다. 그리고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면서 그에게 연두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나와 카리나를 바로 알아보는 이가 있다면 그가 내가 언급했던 여자아이라 생각하면 된다고 말하고서, 이어 그에게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알려 주었다.
"미냐라는 이름을 갖고 있구나, 알겠어. 어떤 아이인지는 직접 만나보면 알겠지."
이후, 세니아는 알겠다고 말했다. 그 이후에는 카리나가 세니아에게 하미시 행 기차를 처음 탔을 때의 소감이 어떠하였는지에 대해 물었고, 이 물음에 세니아가 이렇게 답을 했다.
"산길을 오르는 기차일 뿐이지, 그것을 놓고 보면 여느 기차를 탈 때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던 것 같아. 여태껏 가 보지 않은 곳으로 가 보는 것에 대한 흥미와 기대감이 있기는 했지만 그 정도라고 할 수 있으려나. 그래도 기차의 차창 너머로 보이는 경치는 볼 만한 것...... 아니, 감탄스러웠지. 차창 너머로 잠깐 보고 지나가기에 아까운 곳들도 몇 있었어."
나도 하미시 행 기차는 그 때 처음 타 보았지만 밤 시간에 탔던지라 차창 너머의 풍경에 집중하거나 하지는 못 했었다. 아니, 풍경을 볼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당장에 주어진 일이 일이었던 만큼, 풍경에 집중하거나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하미르로 돌아가는 기차에 탈 때만큼은 기차가 지나가는 주변의 풍경에 눈길을 기울여 볼 생각도 갖고 있었다.
"그래도 이제는 당장의 싸움도 끝났겠다, 여기서 할 일도 끝났을 테니, 당분간은 마음 놓고 기차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감상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렇지 않아?"
"그렇지." 이후, 카리나가 나에게 건네는 물음에 나는 그러하다고 답을 했다.
그렇게 이른 아침을 맞이하는 고요한 길을 따라 나아가면서 일행의 눈앞으로 하미시 역사의 모습이 조금씩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역사를 보면서 이제 조금 있으면 도착이다, 라고 혼잣말을 하면서 일행이 역사에 이를 때와 가장 가까운 시간 대가 언제일지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소르나는 여전히 그 하나엘리스라는 산 위에 있겠지?'
그러면서 나는 소르나가 어떤 식으로든 예나의 도움을 받거나 아니면 기차에 타서 가브릴리아로 갈 것이라고 예상을 했었다. 다만, 원래의 모습대로 예나를 찾아갈 것 같지는 않았다. 당장에 예나는 나와 동행하던 이와 함께 하고 있었고, 그가 나를 제외한 일행과 당장에 마주하려 하지는 않았던 만큼, 예나와 직접 동행하지는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라면 어떤 식으로든 가브릴리아로 가려 할 것임은 분명해 보였다, 어쩌면 나를 비롯한 일행 그리고 예나 등보다도 먼저 가브릴리아에 와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르사나, 무슨 생각을 그렇게도 진지하게 하고 있어?"
그렇게 생각을 이어가면서 길을 걷는 도중에 그런 나의 우측에서 카리나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도 열심히, 진지하게 하고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아무래도 나를 지켜보면서 뭔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아차린 듯해 보였다.
"아니, 별로 대단한 생각을 한 것은 아니야." 이 물음에 내가 답했다. 그리고 그 동안 있어왔던 곳을 떠나려 하니,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서 그랬다고 그에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에 대한 언급을 했다. 다행히도 카리나는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에 대해 자세히 알거나 하지는 못하는 듯해 보였다.
"가브릴리아는 해안 지대이지요?"
"그렇지." 이후, 나에티아나가 일행이 걸어다니는 그 근방에 이르러서 건네는 물음에 세니아가 바로 그렇다고 답했다. 그리고 해안 지대답게 한 번 더워지기 시작하면 공기부터 아주 뜨거워지는 곳이라고 이어 밝혔다.
"이런 곳에 간다고 하면 보통 같아서는 가장 먼저 기대되는 것이 하나 있는데."
"물놀이 가는 것이지?" 이후, 세니아가 하는 말에 대해 카리나가 묻자, 그는 바로 그렇다고 답했다. 그리고 물놀이를 가려면 수영복이 있으면 좋을 텐데, 라고 말하다가, 곧 물놀이가 목적이 아니니 어쩔 수 없겠다고 이어서 말하기도 했다.
"세니아, 물놀이도 해 보고 싶어?"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내가 세니아에게 물었지만, 세니아는 "굳이 그것까지는 할 필요 없을 것 같아." 라고 답을 했다. 물놀이를 하고 싶어 보였지만 이래저래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음을 나타내고 있는 듯한 대답이었다. 그런 대답을 들으며, 나는 시간적 여유가 되면 같이 물놀이 하러 나름 괜찮은 해안을 찾아가 보려 하였다.
"그래도 물놀이 하러 가시면 좋아하실 텐데. 그래서 말씀 드릴게요, 가브릴리아에서 주어진 일을 마치고 나면 그 이후에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해변으로 놀러가기로 해요."
"그래, 그것이 좋겠다." 그러자 세니아는 환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그리고서는 세나를 비롯한 주변 이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
"이렇게 세나의 말을 듣고 나니까, 앞으로 가브릴리아에서 우리가 해야할 일을 무사히 끝내고, 꼭 해변으로 놀러가야 하겠다고 그렇게 생각해 버렸어. 앞으로의 일이 그렇게 가벼운 일은 결코 아닐 텐데 말이야, 그렇지?"
"세니아, 하미르에서 배를 타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알고 있지?"
그러자 카리나가 세니아에게 이제 일행이 배를 타고 가야하는 곳이 어디인지에 대해 기억은 하고 있는지에 대해 물었고, 그 물음에 세니아는 바로 "지브로아 근방에 있는 기억의 사당 아니야?" 라고 되묻는 듯이 답했다. 그러자 카리나는 잘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고 밝게 목소리를 내며 그에게 말했고, 그런 목소리가 드러내는 분위기에 세니아 역시 조용히 미소를 띠고 있으면서 좋아하고 있음을 바로 드러내고 있었다. 다만, 세니아는 물놀이에 대해 더 말을 건네려 하는 듯해 보였으나, 벌써부터 물놀이에 대한 기대를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그것에 대해서는 더 언급하지 않으려 했다.
그렇게 친구들끼리 서로 대화를 주고 받다가 어느새 일행은 역사 앞에 이르게 되었다. 역사 앞에 이르자마자 내가 역사의 정문 너머으로 뛰어갔다, 역사의 현관 안쪽의 한 곳에 갈라마(하미르) 행 열차 시간표를 보기 위함이었다.
"지금 시각이 7 시 20 분 즈음으로 되어 있구나."
당시 시각이 7 시 21 분 즈음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갈라마 행 첫 차의 시각은 5 시 35 분이었으며, 1 시간 간격으로 기차가 오가도록 되어 있었다. 그 당시 시각과 가장 가까운 시간 대에 오는 기차는 7 시 35 분에 오도록 되어 있었고, 기차는 역사에 출발 시각 5 분 전에 도착하도록 되어 있었으니, 기차 도착까지 남은 시간은 대략 9 분 남짓이었다.
"기차 도착까지 얼마나 시간이 남았어?"
"7 시 35 분 출발, 7 시 30 분 도착 예정이니까, 9 분 정도야. 조금 여유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승강장까지는 뛰어!"
카리나가 내 곁으로 다가가서 묻자, 내가 다급히 답하고서 역사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매표소로 가서 다급히 기차표 구매부터 시작했다. 이후, 세나가 다급히 내 곁으로 다가가서 나와 함께 기차 운임을 지불했고, 그리하여 6 명의 차표값을 내어 기차를 탈 수 있게 되었다. 일행이 타게 될 좌석들은 3 번째 열차, 10 번째 대열에 있었다. 내가 탈 좌석의 명칭은 10G 로 옆의 10D 에는 잔느 공주가 앉기로 했다. 건너편의 10A, 10B 좌석에는 카리나와 세니아가 앉았으며, 앞쪽의 9G, 9D 에는 세나 그리고 나에티아나가 앉기로 했다.
기차표 구매를 마치고 역사의 건너편 출입문 너머에 있는 기차 승강장에 이르렀을 무렵, 이미 기차는 도착해 있었고, 그래서 기차의 3 번째 열차를 찾아서 바로 열차에 탑승했다. 다급히 기차를 타느라 아침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나와서 배가 많이 고플 것 같았지만 그 대신 점심 식사를 하미르에서 제대로 하자고 했다.
"이제 다시 하미르로 가는 것이지요?"
"그렇지요." 기차에 탑승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옆에 앉은 잔느 공주가 나에게 물었고, 이 물음에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그리고 하미르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고, 그 물음에 그는 예나와 함께 있을 때, 이것저것 많이 들어봤다고 답하니, 그 대답을 들으며 나는 예나가 일 때문에 잔느 공주를 데리고 있었겠지만 단순히 일을 위해서만 데리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며, 세니티아어를 비롯해 이것저것 가르쳤을 것이라 짐작해 볼 수 있었다.
"하미르 그리고 하나야스 지역에 관해서 뿐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들에 관해서도 알려주신 것 같아요, 그렇지 않나요?"
"예, 많이 가르쳐 주셨어요." 이후, 내가 건네는 물음에 잔느 공주는 활짝 웃으면서 답했다. 그리고 무척 좋은 사람인 것 같다고 예나에 대해 말하기도 했다. 그 때, 세니아가 그런 잔느 공주에게 예나의 과거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었느냐고 물었으나, 거기에 대해 잔느 공주는 베라티사 (Beratisa) 라는 행성계에서 마녀의 자손으로 태어난 이로서 마도학자의 길을 걸으려 했다는 이야기만 들을 수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는 동안 기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쪽의 저지대를 향하는 철로를 따라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 아침 이른 시각이었지만 의외로 기차에는 많은 이들이 타고 있었고, 친구, 가족들끼리 온 이들도 적지 않아서 기차 내부의 분위기는 나름 활기가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 역시 그 시절의 친구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한 사람이 있었다, 어린 시절, 내가 어머니와 함께 슈라일의 호반에 있는 집에 살고 있던 시절, 한 번씩 집으로 찾아왔던 어린 시절의 그 친구. 어린 시절에는 늘 함께 있으려 했던 그 친구는 그 무렵에는 내 곁에 없었다. 아주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고 샤하르로 갈 무렵에 헤어졌으며, 그 이후로 샤하리아에 있을 때에는 그 역시 베라티사로 이주해, 그 곳에서 학업을 이어가고 있었기에, 그와 마주한 적은 없었다. 다만, 우연히 마주하게 된 적은 있었던 것 같다, 우연이었을 것이다.
"아르사나 님께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했던 친구 분이 있었나요?"
"있기는 했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그런 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잔느 공주가 나에게 옛 친구에 관해 물었고, 그 물음에 나는 있었다고 답했다. 그리고 어린 시절에는 늘 함께 있었던 이였다고 그에 대해 말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친구 분과 헤어지게 되었나요?"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제가 샤하르로 이주하고 난 이후의 일이었을 거예요. 제가 샤하르로 떠나면서 어머니께서 마녀로서 전수받으셨던 지식, 기술 등을 그 친구가 물려받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많은 것을 어렸을 때부터 배우고 공부할 수 있었다고 하네요."
"그리고......."
"그 이후로, 그는 더 많은 것을 배우겠다면서 그 역시 집을 떠나 베라티사로 갔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당대의 재사였던 다마나티엘 박사, 예나 씨를 만나 그에게 사사를 받기도 했었다는 소식도 얼핏 들은 적이 있어요."
내가 샤하르에서 어릴 때부터 이런저런 일을 하며 지내고, 또, 모험가, 사냥꾼으로 가져야 할 기본 지식이라도 익히기 위해 샤하르의 학교에서 이것저것 닥치는대로 배우고 있는 동안, 그 친구는 베라티사에서 엘리트 과정의 교육을 받으면서 마도학자의 길을 걷고 있었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들으면서 나는 그는 이미 나 따위는 잊은지 오래이고, 베라티사에서 인연을 맺은 이들과 더욱 친해지고 있을 것이라 여기면서 나 역시 그에 대해서는 그런 존재가 있었다는 것 정도만 기억하고, 그에 대해서는 잊으려 했었다. 설령 내가 그를 어찌어찌해서 만날 수 있게 된다한들, 그가 나를 기억해 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품게 된 것이었다.
"우연히 마주한 그 친구 분이 아르사나 님을 알아 보실지도 모른다는 희망 자체를 아예 포기하신 거예요?"
"그런 헛된 희망은 없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했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그는 이미 나를 기억하지도 못하고 있을 텐데, 내가 그를 기억해 봐야 얼마나 큰 의미가 있겠어요. 그렇게 된 이상, 나 역시 그를 추억의 한 곳에 두는 편이 옳겠다고 여긴 것이었지요."
이후, 나는 조용히 미소를 띠면서 잔느 공주가 건네는 물음에 대한 답을 하였다. 그 때, 그 대화를 들으며 문득 생각난 바가 있었는지 카리나가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천문대에 있을 때에 말야, 소르나가 너에게 특별히 이것저것 선물을 해 주었잖아, 그 때의 일 기억 나?"
기억하고 있었다. 그 때, 소르나가 레테사를 통해 나를 위한 특별한 선물이라면서 온갖 잡동사니 물건들을 하나씩 주기적으로 가져다 준 일이었다. 그런데 그 때의 잡동사니 물건들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 가죽으로 만든 공, 나뭇가지, 줄넘기 줄, 어린 시절의 동화책들, 나비 채 (잠자리 채) 를 비롯한 곤충 채집 도구들....... 이들 모두 내가 어린 시절에 가지고 있던 물건들이라는 것이었다. 소르나가 그런 물건들을 어디에서 입수해 왔는지, 천문대에 있으면서 무슨 보물이라도 된 것마냥 모으고 있다가 하나씩 나에게 건네준 것이었다.
"대체 어떻게 그리고 무슨 이유로 소르나가 그런 물건들을 모으고 있었는지를 모르겠더라고. 분명 슈라일의 집 창고에 있다가 없어졌을 물건들이었을 텐데, 어떻게 가지고 있던 거야?"
"그것에 대해서는 제가 소르나 씨로부터 들은 적이 있어요. 아르사나 씨의 친구 분으로부터 받아서 갖고 있었대요. 옛 친구가 어린 시절에 갖고 있던 물건들이 집에 몇 남아 있었는데, 이것들을 처분할 필요가 생겨서 가장 친한 사람이었던 본인에게 가져다 준 것이라고."
이에 세나가 소르나와 만났을 때, 그 물건들에 대해 들은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 주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소르나가 그 옛 친구가 나였음은 어떻게 알아차리고, 나에게 물건을 주려 했는지, 그 의도에 대해서는 확실히 아는 것이 없었지만, 소르나가 그 사람의 옛 친구가 나였을 것이라 짐작한 것에 대해서는 소르나가 내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그 옛 친구라는 사람이 나일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들어서 그랬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했다고 밝혔다.
여기서 세니아가 무언가 짐작되는 바가 있었던 모양인지 세나 그리고 나를 보면서 이렇게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
"그런데, 그런 것이 있더라. 아르사나, 네가 여기로 오고 나서 소르나가 너와 마주했을 때, 소르나가 흠칫 놀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더라고. 그 때, 내가 그를 보면서 물었어, 예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었느냐고. 소르나는 그런 적 없고, 다만, 근방에서 제법 능력 있는 괴물 사냥꾼이라는 소문이 있어서 데려왔을 뿐이라 답을 했었지. 그랬는데, 그 이후로 소르나가 한 번씩 아르사나, 너에게 이런저런 이상한 물건들을 주려고 하더라고. 너도 봐서 알 거야, 어린 아이들이 가지고 놀 법한 그런 장난감들이었잖아. 그것을 보면서 나는 아르사나 그리고 소르나에 대해 예전에 서로 알던 사이인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해서......"
"그래서 그 이후에 나한테 물었잖아, 소르나에 대해 예전에 아는 사이였냐고."
"맞아. 그 때, 내가 소르나가 그 친구와 아는 사이라서 그 친구를 대신해 나에게 물건들을 보내주려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었지."
이후, 세니아가 물음에 내가 그랬었다고 답하고서 소르나에 대해 그 친구가 나를 기억해 줄 것이라고 믿고, 선물을 해 주면 내가 그 친구에 대한 추억을 기억해 줄 것 같아서 선심을 쓰려 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건 그렇고, 소르나는 예전에 어떻게 살았대? 그 애는 과거에 대해서는 잘 이야기를 안 해서 말야."
이후, 카리나가 소르나의 어린 시절 등에 대한 물음을 건네려 했고, 이에 그와 자주 만나왔던 세나가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세나가 밝힌 바에 의하면 소르나는 베라티사로 유학을 가기 전에는 나와 마찬가지로 슈라일 (Shurail) 에 살았다고 했다. 세나가 어린 시절의 생활 그리고 소르나에게 유학 생활이 어떠하였느냐는 질문을 하자, 소르나는 그럭저럭 평범했었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 이외에 소르나가 이전에 마도학당의 교수로 재직 중인 예나 그리고 내가 재학했던 샤하리아 중앙 학교의 교감이자 역시 학당의 교수였던 올리비아 (Olivia) 와 만난 적이 있다는 이야기 정도를 제외하면 그가 천문대에 있기 전후에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었다고.
"올리비아라면 베라티사의 그 올리비아 사반 바메메이 (Olivia Savan Vamemey) 교수를 말함이지? 소르나가 예전에 그 바메메이 교수에 대해 굉장히 안 좋게 말했었던 기억이 나."
세나의 이야기 이후에 세니아가 그에게 바메메이 교수에 대해 소르나가 안 좋게 이야기를 했음을 밝히고서, 평소에는 늘 온화하고 다정한 표정을 짓던 소르나가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심히 정색을 하며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표독한 인상에 탐욕스러운 행보를 이어간 여자였다고 말했었더라. 아르사나, 네 학교의 교감이었던 사람이잖아, 그 사람에 대해 들은 뒷 이야기 같은 것은 있어?"
이후, 세니아는 나에게 학교의 교감이었던 바메메이에 대해 들은 바 있느냐고 물었지만 나는 딱히 아는 바는 없었다고 답했다. 애초에 그 모습을 보인 적도 없고, 학교에 출근하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아 학교에서는 그의 일을 부교감이 대행하고 있었던지라 학생들 중에서는 학교 사정에 대해 나름 아는 몇몇 정도만이 그 모습을 초상화로나마 볼 수 있을 정도였던 인물이었다. 내가 샤하르의 그 학교에 입학할 즈음에 학교감으로 취임했고, 그 이후로 나름 오랫동안 교감직에 있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하는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 아르사나, 예전에 친구였다가 베라티사로 유학갔다는 그 사람하고 소르나하고 행적이 비슷하지 않아?"
그 때, 카리나가 나를 보면서 이렇게 물음을 건네려 했다. 소르나 그리고 나의 옛 친구의 행적이 우연치고는 꽤 비슷해 보였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세니아도 의심을 해 본 바 있었던 모양으로 그것에 대한 질문에 나는 이렇게 답을 할 따름이었다.
"우연히 같은 행적을 보인 사람이 있겠지. 베라티사로 유학을 간 이가 그 친구 뿐이겠어?"
"그러하겠지." 이에 카리나, 세니아 모두 나름 동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으며, 그래서 베라티사로 유학 간 나의 옛 친구 그리고 소르나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더 언급을 하지 않았다.
"소르나가 천문대를 떠나게 된 것이 개인 사정이 있어서 그랬다고 했었는데, 무엇 때문이었더라?"
이후, 세니아가 소르나가 천문대를 떠나게 된 것에 대해 나를 비롯한 주변의 사람들에게 물어보려 했었다. 하지만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 물어본다고 해서 그 사정에 대해 딱히 말할 수 있거나 하지 않은 것이, 그들 역시 소르나가 천문대를 떠난 경위에 대해 자세히 알거나 하는 것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르나가 천문대를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르사나와 대면을 했었잖아. 그래서 어쩌면 아르사나라면 알고 있을지도?"
그러다가 그가 천문대를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났다는 나를 주목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세니아가 바로 나에게 그것에 대해 물으려 했다.
"소르나가 어떻게 일행의 곁을 떠나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나도 자세히 아는 바가 없어. 나도 마지막 만남 때에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 받다가 갑자기 천문대를 떠나게 되었음을 알렸거든.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천문대에서 다른 말도 없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지."
관리인이 사라지면서 관리인이었던 소르나가 기용했던 이들이 각자의 길을 찾아 하나둘씩 떠나가고, 나 역시 천문대를 떠나게 되었지만 그 이후에도 한 동안 천문대에 적을 남긴 채로 소르나의 행방을 수소문했지만 행성계의 어디에서도 그 행방을 찾을 수 없었고, 그래서 결국 그의 행방이나 근황을 찾아보는 것을 포기하고 천문대를 완전히 떠났다.
그 이후, 그에 대해 들은 바는 우연히 샤하르에 있는 친구 아잘리의 집을 찾았다가 그와 함께 칵테일을 같이 취급하는 샤하르 중앙 거리의 어느 찻집에 가서 아잘리로부터 소르나라는 이름을 가진 마도학자가 베라티사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전부였다. 아잘리도 베라티사 성계에 있는 미녀 마도학자라고 해서 관심을 잠깐 가졌을 뿐이고, 그에 대해 깊이 관심을 가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 때, 아잘리는 나에게 그에게 유난히 관심을 가지는 것에 대해 그와 혹시 아는 사이냐고 물었고, 이 물음에 나는 천문대 동료이기는 했지만, 그 이상의 인연을 가진 적은 없다고 밝혔었다.
기차는 내리막길을 따라 나 있는 선로를 통해 남쪽 방향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렇게 기차를 타고 있던 어느 때에 나에티아나가 자기가 소지한 돈으로 간식 류를 이것저것 사서는 일행에게 한 묶음씩 나누어 주었다. 그 묶음은 삶은 계란 하나와 탄산수가 들은 병 그리고 크래커 과자 5 개 묶음이었다. 같은 것을 두고 먹는 방식이 다양하기 마련인데, 일단 나는 계란을 먼저 먹고 그 다음으로 크래커 과자를 먹고, 마지막으로 탄산수를 마셨다.
간단한 간식인지라 다들 먹는 데에 오랜 시간을 들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간식을 먹고 나서 창가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잔느 공주의 모습도 같이 보이기는 했지만 크게 신경이 쓰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창가 너머로 산자락과 숲의 모습이 보였다. 짙은 하늘색을 띠는 하늘 위로 구름들이 지나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두터운 구름의 형태를 두고 솜 같다고 흔히 비유하고는 한다. 그러한 비유가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싶은 모양의 작은 구름들이 마치 바다 위의 섬들처럼 곳곳에 떠 있었다.
저길 봐! 저 구름들이 보여?
응, 보여.
저 구름들을 예전부터 사람들은 솜과 솜털에 비유하고는 했었대. 저 덩어리 같은 것들은 솜 뭉치, 얇고 희미한 것들은 솜털 같다고 말했어.
그런데, 저런 구름이 모이면 하늘을 가리고 비가 내리잖아.
그렇지만, 이렇게 파란 하늘 곳곳에 흩어진 모습을 보면 너무 예쁘지 않아?
그래. 너무 예쁜 것 같아.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이 저렇게 모인 모습은 세상의 다른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것 같아.
그런 것이지.
그 빛나는, 찬란한 천사들이 사는 곳이잖아. 그런 곳의 아름다움은 이 주변의 다른 무엇보다도 더 할 것 같지 않아?
.......
XXX, 이런 이야기가 있더라, 천사들은 구름 궁전에서 산다는 이야기. 저 구름들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해, 천사가 되면 구름을 밟으며 살게 될 것이라고.
사나, 천사가 되고 싶은 거야?
잘 모르겠어. 하지만 너라면 언젠가 천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나? 나는 그럴 생각이 없는데.
왜?
나는 예전부터 착하게 살아오지 못 해서...... 천사가 되기는 커녕, 천국에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래서 천사가 된다면 어쩌면 그것은 너일지도 모른다고, 늘 그렇게 생각해 왔어.
......
너하고, 네 엄마하고...... 엄마께선 착한 일을 제대로 하셨었잖아. 그러니까, 천국에서도 좋은 대접을 받으며 지내실 거야.
아르사나 님, 지금 뭐하시고 계신 거예요?
"내가 깜빡 졸았나 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시 기차 안이었고, 내 곁에 앉은 잔느 공주가 나를 깨우려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를 불렀다가 대답이 없어 나를 가만히 살펴보니, 졸고 있었고, 그런 나를 깨우려 했었던 것 같았다.
"어린 시절이 생각났었어요."
창가를 바라보는 채로 잔느 공주에게 말을 건네었다. 그 어린 시절에 슈라일 호수가와 그 호수가 위로 펼쳐진 하늘을 옛 친구와 함께 구경하다가 천사들이 구름 궁전에 산다는 이야기를 통해 나 그리고 그 친구가 서로를 향해 천사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물음을 주고 받았던 기억. 그 기억이 꿈을 통해 드러났음을 밝히기도 했다.
"그 때에는 내심 천사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마음 속에 품고 살았었는데......"
"지금은 그런 소망은 품고 있지 않으신가 봐요."
"예." 그리고 잔느 공주가 건네는 물음에 이제는 천사가 되고 싶은 소망은 없다고 답했다. 그런 소망은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샤하르로 가서 온갖 일을 하며 다닐 즈음에 그 친구와 함께 있으며 지냈던 추억을 기억 저편에 묻어 버리면서 그와 함께 버렸고, 더 이상 그런 소망을 갖고 살아가지는 않고 있다.
"늘 온화하고 순수하게만 살아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애초에 어둠의 기운과 맞닿은 곳에서 사는 이에게 그러한 삶은 가당치 않았던 것 같아요."
잔느 공주에게 그렇게 말을 건네면서 조용히 쓴 웃음이 나오고 있었다. 옆에서 그런 나를 보던 잔느 공주는 그것에 대해 뭐라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두고 그런 나의 심경을 눈치채지 못했다고 바로 장담하기는 어려웠다. 그 모습을 보던 잔느 공주의 표정 역시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는 듯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카린은 어린 시절에는 어떻게 지냈어?"
이후, 세니아가 카리나에게 어린 시절이 어떠하였는지에 대해 물었고, 그 물음에 카리나는 그냥저냥 여느 평범한 아이들처럼 보냈다고 답했다. 다만, 카리나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그 시절만큼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강하게 느꼈던 때, 그리고 크나큰 꿈을 가졌던 때는 없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때에는 무슨 꿈을 갖고 있었는데?"
카리나는 아주 어렸을 때에는 과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고 한다. 과학자가 되어 수많은 흥미로운 실험을 해 보는 것이 그의 소망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어렸을 때에 과학 서적에 관심을 많이 가졌고, 그래서 과학에 관한 이야기를 참 많이도 보았었다고. 하지만 그런 그의 재능은 과학에 대한 흥미 그리고 열망에 미치지 못했고, 결국 그는 과학자가 되겠다는 소망 자체를 포기했다. 나이를 먹으면서 다른 쪽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하나의 이유라 할 수 있겠다.
"이후에는 무엇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검하고 방패를 만드는 일이었는데, 그것도 재능이 모자라서 그만 못 했지."
세니아가 다시 건네는 물음에 카리나가 그렇게 답했다. 그리고 하고 싶은 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냥저냥 살아가다가 재능 하나를 발견해서 그 재능 가지고 그럭저럭 살고 있는 것 같다고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세니아는 예술가가 되고 싶었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미술 등에 대한 학습을 이어갔고, 그림도 몇 번 그려 봤고, 유리 공예, 도자기 공예를 배우기도 해 보았지만, 재능이 신통치 않아 미술을 가지고 직업을 갖지는 못하게 됐다고 밝히고 있었다.
"이전부터 세니아가 미녀들의 외견에 늘 관심이 많았었는데......."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세니아에 대해 물음을 건네려 하자, 세니아 자신이 그림을 그리면서 한 번씩 미녀들의 모습을 그릴 때가 있었고, 그러다 보니, 여성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을 하게 됐음을 밝혔다. 그러면서 시간이 지난 이후에도 그 동경은 여전히 자신의 마음에 남게 된 것 같다고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얘가 선을 넘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크게 문제 될 일은 없을 거야, 아르사나,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렇지." 이후, 카리나가 나에게 묻자, 나도 세니아의 그간 행적을 떠올리며 동감을 대답으로써 드러냈다.
그렇게 서로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 받다 보니, 어느새 기차는 산악 지대를 벗어나 평야 지대에 이르고 있었다. 평야 지대에 이르렀으니, 곧 갈라마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갈라마에 도달한 이후에는 다리만 건너면 하미르에 이르게 된다. 곧 도착하는 만큼, 도착하고 난 이후의 일을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도착할 즈음이라면 아직 점심 먹을 때는 아니겠지요?"
"하미르 시내에 도달할 즈음에는 점심 먹을 때일 거예요."
카리나를 대신해 내 앞에 앉은 나에티아나가 묻자, 세니아를 대신해 그 옆에 앉은 세나가 답했다. 이후, 세나는 나에게 하미르에 이르러서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면 어디로 갈 것이냐고 물었고, 그 물음에 나는 딱히 생각나는 것은 없지만 시가지에서 조금 시간을 보냈다가 오후 즈음에 하미르 동부 지대로 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 미냐라고 했던가요, 그 아이를 보고 싶은 생각도 있으신 것이지요?"
이후, 나에티아나가 묻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렇다고 답했다. 그리고 미냐 때문은 아니더라도 그 화려한 시내 거리의 모습을 한 번 제대로 보고픈 소망은 갖고 있음을 밝힌 이후에 나에게 물음을 건넨 나에티아나에게 이렇게 되묻고 있었다.
"나에티아나도 그 하미르 시가지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은 생각이라면 너도 갖고 있잖아, 그렇지 않아?"
"그렇기는 하지요." 이에 나에티아나는 조용히 미소를 띠며 답했다. 그리고 나에게 프라에미엘 (Praemiel) 을 보고 싶은 생각은 갖고 있느냐고 물으니, 이에 내가 그런 나에티아나에게 이렇게 되물었다, 프라에미엘이 일행이 하미르에 도착할 즈음에 시내 혹은 하미르 동부에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느냐고.
"우리가 그 곳으로 갈 무렵에는 오지 않을까요?" 그러자 나에티아나가 답했다.
이후, 세나는 자신이 서점에서 사 온 책을 나에티아나의 짐에서 꺼낸 후에 책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갈라마 역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아직 1 시간 정도 남았기에 그 시간 동안 자신이 샀던 책을 읽어보려 했던 것 같다. 그가 하미시의 서점에서 샀던 책은 옛 문명 시대 중 한 작은 시대를 배경으로 한 추리 소설로 어떤 책인지 책의 표제조차 보지 않아서 내용을 알 거나 할 수는 없었다. 물론 옆에서 그와 함께 책장을 본다면 그 내용을 대략 알 수 있을 것 같기는 했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책의 내용을 알거나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르사나 씨께서는 탐정이 되거나 하고 싶은 적이 있으세요?"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바가 있었는지, 그가 나에게 물음을 건네었다. 그 물음에 나는 천문대에 오기 전에는 탐정이 되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고 답하고서 범행에 대한 증거라든가 증언을 토대로 범인을 찾아내는 일에는 흥미가 없었음이 그 이유였음을 밝혔다. 그리고 만약에 탐정이 되려 했다면 고양이 행적이나 찾아다니는 그런 소소한 일이나 하는 탐정이 되었다가 그 일을 그만두려 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그 이유를 말하자면, 증거와 증언을 통해 누군가의 행적을 캐내는 일을 전문적으로 해내거나 하지는 못해서, 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그러하셨네요." 이에 세나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런 일을 거듭하다 보면 온갖 사람들이 의심스럽게 보일지도 모른다고 이전에 내가 밝힌 이유에 이어 언급을 하기도 했다. 이후, 세나는 그런 나를 보면서 차분히 목소리를 내며 이렇게 말을 건네었다.
"소르나 씨가 말한 바대로네요, 아르사나 씨께 어울리는 것은 거대한 악과 맞서는 것, 그리고 악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지켜내는 것이라고, 그가 말했지요."
거대한 악과 맞서는 것, 악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지키는 것, 용사들의 자질 그리고 덕목으로 늘 지겹도록 들은 말이다. 나는 용사가 되는 것을 딱히 원하지는 않았다. 어머니께서 예전에 용사이셨고, 내가 용사가 되는 것은 그런 어머니의 그림자 밑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늘 올바른 언행과 덕목을 지켜오셨고, 젊을 때에는 검무를 게을리하지 않으셨었다고 했다. 내가 마법의 길을 걷고, 거친 삶을 추구했던 것은 그런 어머니와 조금이라도 닮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르사나 씨께서는 용사의 길을 딱히 원치 않으셨던 것 같아요, 어머니와 너무 닮은 길을 가고 싶지 않았다고 하시면서 말이에요."
그리고서 나에티아나는 나에게 나의 어머니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느냐고 물었고, 이런 그의 물음에 나는 이전에도 말했듯이, 들은 것은 다 들었다고 답했다. 이에 나에티아나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한 말을 건네더니, 그런 나에게 말했다.
"늘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반드시 어머님과 다른 길을 걸어가거나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어머님 못지 않은 재능을 가진 사람으로 후세에 기억될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래...... 그 말도 일리는 있어." 이에 나는 그 말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을 해 주었다. 나도 사실, 어머니를 닮는 것이 옳지 않은 일이라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 때의 나는 어머니와 비교가 되어 어머니보다 낫네, 못하네 하는 말을 듣는 것에 우려를 하고 있었고, 그래서 그렇게 비교되는 것을 원치 않아 어머니와 다른 삶을 추구하려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나의 심정을 나에티아나에게 토로를 하는 동안 세나는 그런 나를 잠시 바라보며 무언가 깊은 생각에 사로잡힌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런 것에 아르사나 님께서 너무 연연하시거나 하시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어머님은 어머님이시고 아르사나 님은 아르사나 님이시니까."
이후, 나에티아나는 차분히 목소리를 내어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프라에미엘이 자신을 잠깐 만났을 때, 나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나를 만난다면 이런 이야기를 꼭 전해줄 것을 요청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프라에미엘의 나를 향한 전언을 그가 대신 전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프레미 (Premy) 가 은근 좋은 말을 많이 해 주었었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프레미가 보고 싶네."
자신이 이전에 했던 말에 대해 프라에미엘이 전해달라 한 것이었다고 나에티아나가 밝히는 모습을 보며, 새삼스레 프라에미엘의 모습이 떠올랐고, 그러면서 그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에티아나, 세나에게 프라에미엘의 근황에 대해 아는 바 있느냐고 물었고, 그 물음에 책을 읽고 있던 세나를 대신해 세니아가 답했다.
"요 근래에는 가브릴리아 (Gabrilia) 그리고 미하엘리스 (Mikhaelis) 일대를 돌아다니고 있다고 했어. 그러면서 곤경에 처하거나 어려움에 처한 이들이 있을 때마다 도움을 주고는 한다는데...... 지브로아에 괴물이 출몰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면 아마 그 곳으로 갔을지도 몰라."
그리고서 일행이 하미르 동부로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날갯짓을 해서 지브로아에서 하미르로 갔을 수도 있으니, 어떻게든 일행과 마주할 때가 있을 것이라 이어 추측의 말을 건네었고, 그 이후에 그는 프라에미엘과 만날 가능성에 대해서는 더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는 자신의 전망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후에도 시시콜콜한 일상 이야기나 소설의 내용에 대한 대화를 주고 받다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차창 너머로 갈라마 역사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니, 우선 세나가 자신이 읽고 있던 책을 나에티아나의 가방 안에 넣고, 이어서 나에티아나가 가방을 정리했다. 일행이 간식을 먹으면서 남긴 병들은 내가 전부 수거해서 역사로 나오는 순간에 병을 담아두는 통에 넣기로 했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날 무렵, 기차는 갈라마 역에 도착했다. 그 시점에서 일행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문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출입문이 열리자마자 카리나, 세니아부터 잽싸게 밖으로 튀어 나갔다. 나는 나에티아나, 세나와 함께 가장 나중에 내렸으며,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쓰레기통을 찾아서 그 쓰레기통에 그간 모아두었던 병들을 승강장의 쓰레기통들 중에서 병을 버리는 통에 버렸다.
갈라마 역사의 출구 바깥에는 풀밭이 펼쳐져 있었으며, 역사의 출입문 우측 근방에는 바위 하나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 오른편 곁에 자리잡은 팻말에 바위에 관한 전설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그 내용인 즉, 과거 전설의 검이 꽂혀 있던 바위라는 것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역사와 그리 멀지 않게 시냇물이 풀밭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었으며, 물줄기의 한 부분에 시냇물을 사람들이 편하게 건너갈 수 있도록 다리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 근방에 살았다면 시냇물을 가로질러 갔을 수도 있겠지만 여행 중에 온 곳이었고, 굳이 옷을 젖게 할 필요는 없어서 다리를 통해 시냇물을 건너갔다. 시냇물을 가로질러 가는 이들이 과연 있을까 싶기도 했지만, 카리나의 이야기에 의하면 시냇물을 통해 건너가는 이들이 있기는 한 모양.
다리를 건너는 동안 근처를 둘러보다가 오른편 근처에서 어떤 아이들이 물가에서 종이 접기나 나무 공예로 만든 작은 배를 띄우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들은 종이배 위에 종이 접기로 만든 혹은 풀밭에서 꺾은 꽃을 올려놓고 배를 띄우고 있었으며, 그 종이배는 물의 흐름을 따라 일행이 길을 걷는 방향의 왼편으로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이 배들이 물결 위에 떠서 물의 흐름을 따라 격렬히 흔들리며 움직이는 모습을 아이들이 제법 진지하게 구경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애들 중에 배를 만들고 싶다는 꿈을 가지는 애들도 있겠지?"
"그렇지." 다리를 지나면서 배를 구경하고 있는 동안 나의 왼편에 있던 카리나가 나에게 물었고, 이 물음에 나는 바로 그렇다고 답했다. 그리고 이렇게 사소하게 작은 배를 만들다가 이후에 보다 큰 모형 배를 만들려 하는 이들도 본 적이 있다고 이전에 말한 적이 있지 않았냐고 물었고, 이 물음에 카리나는 그랬던 기억이 있다고 밝혔다.
"내가 어렸을 때에 모형 배를 만드는 애들을 몇 봤어. 그럴 듯하게 잘 만들더라."
이후, 카리나는 자신이 어렸을 때, 모형 배를 만드는 학우들을 몇 본 적이 있었음을 밝히고서 정말 그럴 듯하게 잘 만들어서 감탄했던 적이 있다고 그것에 대해 말하기도 했다. 또, 어느 박물관에 어떤 왕국의 마지막 왕자가 어린 시절에 만들었다는 모형 배가 있었는데, 실물이었으면 수많은 장치가 장착되어 있었을 거대한 전함을 세세하게 잘 만들어서 감탄했었다고 그 배를 보았던 소감에 대해 밝히기도. 그 때, 그의 왼편 옆에 있던 세나가 그런 카리나에게 말했다.
"그 모형 배는 이전에 저도 본 적이 있어요. 어느 옛 왕국의 마지막 왕자가 조금씩 시간을 들여 소소하게 만들었다는 배라고 해요."
이에 카리나는 자신도 그 이야기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음을 밝히고서 안내 팻말에 쓰여있는 문구였음을 밝혔다. 그리고 마지막 왕자는 끝내 국왕과 왕비를 비롯한 왕가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해되고 그의 유산들은 몰수되었다는 이야기만 전해지고 있어서 그 배의 행방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어서 그 오랜 세월 동안 여러 나라를 헤매다가 구 세계가 멸망하면서 어느 땅에 묻혀있지 않았을까, 하는 정도로 배의 행방에 대한 추측을 한 바 있다고 밝혔다.
"저도 그렇게 알고 있어요.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를 드리자면, 그 배는 왕국의 마지막 왕족들이 왕국을 멸망시킨 나라의 장병들에 의해 처형되기 전, 그 나라의 장교들 중 하나의 아들에게 넘겨졌대요. 아마도 그 아들은 그 배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는 채로 아버지가 가게에서 사 준 선물 정도로 생각했다는 이야기가 있었지요. 이후, 그 아들이 장난감을 어떻게 다루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지만 그 이후로 계속 여러 사람들 손을 오간 것을 보면 적어도 그 모형 함선이 자신의 보물이 아닐 지언정, 그 배를 험하게 다루려 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겠지요."
이후, 세나로부터 들려온 이야기였다. 만약에 아버지로부터 선물로서 모형 함선을 받은 이가 그 함선을 험하게 다루었다면 오랫동안 그 배가 온전한 상태로 남아있지는 않았겠지만, 그 모형이 상처 하나 없이 온전히 보전되어 왔다면 적어도 그 모형 함선이 그에게 있어서는 값진 보물로 소중히 다루어졌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함선들도 그렇고, 모형들을 세워두는 것이 의외로 손 많이 가는 일 아니야?"
"그렇지. 실물들도 그렇지만, 세밀하게 설계된 것들은 의외로 주변 환경에 예민하더라. 그래서 나도 모형에 잠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있기는 하지만 유지 보수가 귀찮다고 해서 금방 관심을 끊었어. 내 손 재주는 세세힌 부품들을 다루기에는 너무 거칠어서 말야."
"그 전에는 돈 때문에 어렵다고 했었잖아."
"그것도 사실이기는 해." 이후, 나는 카리나와 함께 모형에 관한 질문을 잠시 주고 받았다. 어렸을 적에 모형 함선이나 범선, 악기 류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고, 그 중에서 모형 피아포르 (피아노) 는 만들어 보고 싶어했던 적도 있었지만, 손 재주가 거친 사람으로서 그런 세세한 작업이 잘 맞지 않았음을 깨닫고는 그런 취미를 가지는 것을 포기하게 되었다. 이런 모형을 만들기 위해 들여야 하는 돈이 적지 않았고, 어렸을 적에는 생활이 넉넉치 않아 그런 취미를 가지는 것이 쉽게 엄두가 나지 않은 것도 있었는데, 천문대에 있을 무렵에는 카리나, 세니아 등에게 그것에 대해서만 밝힌 바 있다.
다리를 건넌 이후, 곧바로 시내로 발걸음을 향했다. 그러는 동안 눈앞으로 도시의 가장자리 구역 그리고 그 너머의 보다 번화한 구역들의 모습이 차례로 다가왔다가 나를 지나쳐 가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하미르 (Hamir) 서부의 문화의 거리에 이르렀다. 그 때가 언제인지 물어보니, 11 시 즈음이라고 했다. 조금 있으면 점심을 먹을 때인 만큼, 문화의 거리에서 괜찮은 식당을 찾아보기로 했다, 이전에 하미르에 있었을 때에는 거리에서 저녁을 먹었던 만큼, 이번 점심 식사는 식당에서 그럴 듯하게 먹기로 했던 것.
"이러다가 당분간은 거리에서 먹겠지?"
"그렇게 되겠지." 이후, 세니아가 나에게 묻자, 나는 조용히 미소를 띠며 그렇게 답했다. 그리고 식사를 하고 나면 잠시 거리를 둘러보다가 동부 구역으로 가자고 말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문화의 거리 한 가운데의 광장 구역에 이르렀다.
한낮을 맞이하는 문화의 거리 중심에 자리잡은 분수대 구역은 처음 들렀을 때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분수대를 중심으로 남북 방향으로 이어지는 물길도, 물길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자리잡은 수정 조각상들도 이전 때와 다를 바 없었다. 나에티아나의 이야기에 의하면 수정 조각상들이 밤이 되면 찬란하게 빛난다고 했지만 이번 여행 때에는 밤이 되기 전에 다른 곳으로 가야 할 것임이 분명해 그 풍경을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일행은 세나와 나에티아나가 식당을 알아본다고 분수대 구역 근방을 돌아다닐 무렵, 남은 이들은 분수대 근처에 머무르며 잠시 쉬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다음에 여행을 하게 되면 여기로 가면 어떨까?"
분수대 주변을 둘러보며 내가 왼편 곁에 서 있던 카리나에게 물었고, 이 물음에 카리나는 다음에 함께 여행할 일이 생기면 그 때, 한 번 논의해 보자고 답하고서, 이후에도 같이 여행하기 좋은 곳들을 보게 될 테니, 먼저 가 볼 곳을 정하는 것도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고 이어 말했다.
"소르나도 같이 갈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그런데, 소르나는 이런 여행에 딱히 관심 있어 보이지는 않던데."
이후, 카리나는 세니아에게 소르나도 같이 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하자, 세니아는 그런 카리나에게 소르나는 여행에 취미가 있는 사람 같지는 않아 보였다고 그에 대한 추측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에 카리나는 "그러하겠지." 라고 말하더니,
"바깥 나들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아침이나 저녁 운동을 할 때를 제외하면 딱히 밖으로 잘 나가지도 않았었어, 그런 면이 시설의 관리자로서 적격이었겠지만, 그런 일면이 나에게는 답답해 보이기도 했어. 그래서 한 때에는 '답답이', '공부벌레' 라 칭한 적도 있었고."
라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러다가 아르사나에게 한 번 혼났었지? 그것을 대놓고 이야기하면 어떡하니."
이에 세니아가 조용히 웃으면서 그 때의 일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무렵, 분수대 근방은 여러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각자 다른 표정을 지으며 길을 가고 있었으며, 그 분위기는 대체로 평화롭다고 말할 수 있어 보였다. 이 즈음에 카리나는 분수대 왼편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자신의 바로 앞에서 건물들을 둘러보고 있던 세니아에게 선생이 되고 싶다고 말한 적도 있지 않았느냐고 물었고, 이 물음에 세니아는 천문대를 떠난 이후에 모교를 방문해서 모교의 교사들과 상담을 하기도 했고, 교사 일을 하겠다는 제의를 받기도 했었음을 밝혔다.
"그런데 왜 교사가 되지 않기로 한 거야? 너는 가만 보면 교사 자질이 충분히 있어 보였는데."
"상담을 받으면서 나도 교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었고, 그래서 잠시나마 학교에서 교직원으로 일해 보기도 했었어. 이전부터 사람을 가르치는 일을 동경해 왔고, 그래서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을 조금 해 보기도 했지만 혼자서 여러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이 그렇게 만만치 않다는 것을 2 년 정도 일해 보고나서 알았지."
"여러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은 혼자 혹은 몇 사람을 가르치는 것과는 분명 다를 거야."
그 때, 카리나가 그런 세니아의 우측 근처로 다가가서 그것에 대해 말했고, 이에 세니아는 미소를 띠며 조용히 그러할 것이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세니아는 그 이후, 자신은 교직을 떠나게 됐고, 그 이후로 우연히 만나는 검술, 마법을 동경하는 아이들에게 뭔가를 가르치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음을 밝혔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공방을 차리고 조각상이나 검을 만들어 주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었지?"
"응, 무나일 남쪽 교외에 공방을 차렸다고 말했잖아. 주로 결정으로 검, 조각상 등을 만들어주는 일을 하지만, 간혹 그림을 그려주는 일도 하고 있다고 했지. 학교 졸업 이후로는 미술에 대한 관심을 거의 끊다시피했고, 그 이후로도 미술과는 다시 인연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다시 미술에 연을 두게 되었네."
이후, 카리나가 건네는 물음에 대한 답을 하고서 세니아가 조용히 미소를 띠며 다시 미술에 관한 일을 하게 됐음을 밝혔다. 그리고서 그는 그래도 잘 됐다고 말하고서 싸움 없이도 생활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했음이 그 이유라고.
"무나일 근방에 공방을 차렸다고 하니까, 가 보고 싶네. 그 동안 공방을 차린 줄도 몰랐잖아."
"내가 이야기를 안 해 줬으니, 딱히 눈에 띄는 곳도 아니고."
이후, 카리나는 공방 건물은 어떻게 마련했느냐고 세니아에게 물었고, 이 물음에 그는 무나일 남쪽 근교의 강가에 낡은 집 하나가 있어서 그 집을 고쳐서 지었음을 밝혔다. 그러다가 곧, 그는 그 집에 전 주인이 남기고 간 물건들을 발견할 수 있었음을 밝혔다.
"소지품이라고?"
"응, 몇 가지 종이하고 필기구라든지, 잔들이 남아 있었는데, 아르사나가 남긴 것들이더라. 그래서 아르사나의 행방을 수소문하다가 세나의 집에 얹혀 살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무나일 거리의 중심가에 있는 세나의 집으로 그것들을 보냈었어."
그리고서 그 집은 예전에 내가 살았던 집이었을 것이라 여기고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면서 무나일 남쪽 근방의 집에 대해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 무렵, 나는 잔느 공주와 함께 분수대 좌측 근방의 의자에 앉아서 문화의 거리 일대를 둘러보거나 아니면 세니아, 카리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 때, 세니아가 나를 향해 다가가서 물음을 건네는 목소리를 들었다. 무나일 남쪽 근방에 있는 집에서 내가 소지했던 물건들을 발견한 일을 두고 그 집에 대해 알고 있는지,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집에 거주한 적이 있는지에 대해 물음을 건네려 한 것이었다.
그 집이라면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으니, 그 나무 집은 천문대에 가기 전에 휴식을 하고 잠을 잘 수 있는 곳으로서 그 근방에 대충 지었던 집이었다. 용병이나 사냥꾼 생활을 하면서 정처 없이 떠도는 삶을 거듭하고 있었지만 어느새, 천막에 의지해서 혹은 타인에게 신세를 지는 것보다는 나만의 거주 공간을 원하게 됐고, 그러면서 지은 집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원래 바깥 생활을 주로 했었기에 거주 공간 자체는 침구와 몇몇 가구들 정도만 갖추려고 했다가 어느새 이것저것으로 집을 꾸며놓고 살게 되었다.
"그러다가 천문대에서의 삶을 살게 되면서 집에 있던 것들을 천문대로 옮겼었지?"
"그랬었지. 그러다가 천문대를 떠나면서 갖고 있던 것들을 세나 등에게 나누어 주면서 다시 떠돌이 생활을 하려다가 세나의 권유를 받아 그 집에 살게 된 것이고."
이후, 세니아가 건네는 물음에 그렇게 답했다. 그 무렵, 세나와 나에티아나가 분수대 앞쪽에서부터 다급히 뛰어오면서 괜찮은 집을 하나 마련해 왔음을 밝히고서 가자고 청하니, 일단 대화를 그치고 나에티아나 그리고 세나를 따라 그들이 찾았다는 식당을 향해 뛰어가려 하였다.
세나가 찾은 식당은 분수대 북서쪽 근방의 주소 번지가 018 이라 되어있는 건물에 있는 곳이었다. 밀국수를 주로 취급하는 식당으로 주로 취급하는 요리로 삶은 계란이 하나씩 들어있는 밀국수가 있었다. 해당 식당에서는 밀국수와 더불어 복숭아 과즙이 포함된 에이드, 과일 샐러드가 같이 나오는 세트를 주문했고, 자리 하나에 여섯이 모여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입구를 등지는 방향에 세니아, 카리나 그리고 나에티아나가, 그리고 입구를 향하는 방향에 나와 세나 그리고 잔느 공주가 앉았다.
그렇게 한참 식사를 하다가 식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될 즈음, 카리나가 나를 보면서 예전, 그러니까 천문대 생활을 하기 전에 무나일 남쪽 근방에 짓고 살았던 집에 대한 이야기를 해 달라고 부탁했다, 집에 머무를 때에는 주로 무엇을 했느냐는 것이었다.
"집에 머무를 때에는 근처에 천막을 짓고 낚시를 하거나, 아니면 근교에서 수련을 하고는 했었어. 간혹 근방의 숲길을 거닐기도 했고. 그것들 외에는 특별히 하는 일이 있거나 하지는 않았어."
그러다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그 집을 거주지 삼았던 시절, 특별한 인연을 가졌던 것으로 지금 내 곁에 있는 소녀, 세나를 그 곳에서 처음 만났던 것이었다. 그 당시의 일들을 떠올리며 나는 곧바로 카리나, 세니아에게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맞아, 내가 세나를 그 시절에 처음 만났었어, 실로 우연한 일이기는 했지만."
"어떤 일이었는데?" 그러자 카리나가 바로 흥미를 느끼면서 건너편에 앉은 나에게 물었고, 그 물음에 나는 이렇게 이야기를 해 주었다 : 세나가 근방을 떠돌던 거대 악령을 쓰러뜨리다가 위험에 처하자, 그를 도와주었고, 그 이후, 부상을 당한 세나를 치유하기 위해 거처로 데려간 일이 있었으니, 그것이 그와의 첫 인연이었다고.
"천문대에 있기 전이라면...... 최소 10 여 년 전 즈음의 일이었을 텐데."
그러다가 카리나는 그 무렵에 무나일 남쪽 근방에 악령이 떠돌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카리나는 무나일 토박이였고, 무나일에 오래 거주했던 사람들과도 친했기에 그 쪽 소식에 나름 통달한 편이었음에도 그런 소식을 들어보지 않았기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의 신빙성에 의심을 하는 듯해 보였다. 하지만 곧, 세니아가 알려지지 않은 악령 같은 것들이 숲 속 깊은 곳 등에 자리잡고 있던 것을 세나 그리고 내가 발견했을 수도 있지 않겠냐고 그런 카리나의 의심에 대한 반박을 하고서 이어 내가 여행을 시작할 즈음에 있었던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전에 레테사가 이런 이야기를 해 주더라, 아르사나가 무나일 서쪽 교외의 지하에 셰올 (Sheol) 이라 칭해지는 어둠의 공간을 발견했고, 그 곳에 자리잡고 있던 어둠의 근원을 멸했다는데, 그 때의 일에 관해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잖아."
"그렇구나. 사람들이 모르는 사이에 그런 일도 있을 수도 있겠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난 이후에 카리나는 내가 하는 이야기가 사실일 수도 있겠다고 납득을 하려 하였다. 그리고서 그는 나에게 그 때, 세나가 얼마나 다쳤느냐고 물었고, 그 물음에 나는 심하게 다치지는 않았음을 밝히고서 치유 마법을 이용하고 치료제를 조금 사용해 주니, 금방 회복되었다고 답했다.
"그리고 안정을 취할 필요가 있어 보여서 며칠 정도는 집에 머무르도록 했어, 그 이후로는 집에 가도 좋다고 했고."
"내심 며칠 정도 지나고 나면 얼른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지?"
이후, 세니아가 건네는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랬었지." 라고 답했으니, 그 당시에는 내 집에 누가 머무르는 것 자체를 부담스러워 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는 무슨 일이든 어지간하면 혼자 해결했고, 사는 것도 혼자 살았다. 외로움보다는 혼자서 내 멋에, 내 뜻하는 대로 사는 즐거움이 더욱 컸던 시절이었다. 여기서 확언할 수 있는 바가 있다면, 그랬던 나의 사고 방식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던 때가 바로 그 세나를 만났을 때였다.
"하지만 막상 같이 지내다 보니, 그를 보내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겠더라. 그래서 가도 좋다는 말을 선뜻 하지 못한 때도 많았어."
"네가 보기에도 세나가 보통 예쁜 애는 아니었잖아, 그렇지?"
"그렇기도 했지." 이후, 세니아가 장난스럽게 건네는 물음에 나는 조용히 미소를 띠며 그런 그의 물음에 인정을 한다는 듯이 답했다. 그리고서 며칠 동안 같이 살면서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음을 밝히고서 처음 그를 만났을 때, 한 가지 나를 놀라게 한 바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냐고 카리나, 세니아가 묻자, 이렇게 화답했다 :
"너희들도 그렇고, 나 역시 동화책이라든가, 아니면 아동 도서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이야기 등을 읽거나 보잖아. 그 때, 내가 책장에 이런 어린이들을 위한 책들을 몇 꽂아두고 있었는데, 세나가 그 이야기 책들에 깊은 흥미를 느끼고 있는 거야. 그게...... 추억 거리를 찾았을 때의 느낌이 아니라, 마치 자신의 인생에서 처음 보는 것들에 대한 호기심이 그의 표정에서 느껴졌어. 그래서 그런 이야기 책들을 이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어 : 자기는 한 번도 이런 책을 본 적이 없다고."
그리고서 놀라워하는 세니아, 카리나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래서 내가 당황하면서 어렸을 때, 이런 책들을 보지 않았으면 대체 무슨 책들을 보았냐고, 그렇게 물었지. 그러니까, 이렇게 답을 하더라, 자기는 어렸을 때부터 사후 세계나 죽음을 맞이한 영혼의 길 혹은 장례 의식에 관한 책들을 보고, 그 내용을 공부하며 살았다는 거야."
"아니, 뭐라고!?" 이러한 나의 이야기에 카리나, 세니아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고, 더 나아가, 카리나가 세나에게 사실이냐고 묻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세나는 내가 자신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부터 말 없이 나를 비롯한 세 사람이 이야기를 주고 받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 그 때까지 몰랐던 것으로 세나의 표정이 평소의 모습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진지했다.
"아르사나, 믿겨지는 이야기야, 그게?"
"나도 믿을 수 없었는데, 자기 말로 그렇다는데 어떡하겠니. 그러더니, 세나가 말하더라, 자기는 어렸을 때, 이런 동화들을 본 적이 없다고. 그러면서 타향의 아이들은 어렸을 때 동화책을 보고, 어린이들을 위한 교재들로 공부를 하며, 어른들이 들려주는 동화 이야기를 들으며 잠을 청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지, 자기를 포함해서 고향의 아이들은 그런 거 모른다고 하면서."
그리고서 "끔찍하네." 라고 말하며, 충격의 심정을 어찌하지 못하는 카리나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이후, 세나는 타향의 아이들이 누렸던 것을 자신도 늦게나마 누리고 싶다면서 이제는 거의 보지도 않는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책, 교재들을 하나씩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들 즈음에 나한테 뭔가를 요구하는 듯했지만 차마 요구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뭘 원하는데? 원하는 게 있으면 지금 확실하게 이야기를 하든가 해. 얘기를 못하면 나도 뭘 해 주어야 할지 모르니까."
그러자 세나는 부끄러워하면서-얼굴색이 약간 붉어지고 얼굴이 달아올랐음이 느껴졌다- 차마 이야기를 못하는 듯한 모습을 한 동안 보이다가 간신히 입을 열며 나에게 이렇게 부탁을 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제가 곧 자려고 하는데......."
"네가 잠들 때, 동화책을 읽어달라고?"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잠들 때, 내가 동화책을 읽어주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더 묻지 않고 내가 책장에 꽂아 두었던 동화책들을 뒤지기 시작하면서 세나에게 물었다. 무슨 책을 읽기를 원하냐고. 그 때, 세나는 어떤 것이든 상관 없다고 답했고, 이후, 나는 책장에 꽂혀있는 것들 중 무작위로 하나를 꺼내서 손에 들었다.
'이렇게 누군가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게 될 줄이야.'
그 무렵, 세나는 침대 근처에 머뭇거리고 있었다. 잠들려 하고 있었지만 침대에 잘 수 있는지를 알 수 없어서 근처에 머뭇거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침대에서 자도 좋다고 말하고서 당분간은 그 침대를 이용해도 좋다고 말했다.
"그러면 주인님께서는 어디에 주무시려고요?"
"나는 바닥에서 자도 괜찮아. 아니면 밖에 천막이 있는데, 거기서 자도 되고."
그리고서 나는 세나에게 나를 '주인' 이라 칭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처음 보는 소녀에게서 '주인' 이라는 말을 듣기는 다소 아니 꽤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이후, 나는 옷장에 있는 몇 안 되는 옷들을 보여주면서 그 옷들 중 하나를 빌려서 입어도 좋다고 말하기도 했다. 잠옷도 몇 벌 안 됐지만 그것들 중 하나를 빌려주기로 했다. 그 때, 세나는 잠옷들을 둘러보더니, 네글리제 하나를 입고서는 침대에 누웠다.
그렇게 그가 잠자리에 드는 모습을 보자마자 나는 조용히 그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는 내가 가져왔던 책을 펼치고서 책의 이야기를 읽어주려 하였다. 예전에 어머니께서 동화책을 읽어주실 때를 상기하며, 그 때의 목소리를 재현하려 하였다. 그 때의 어머니와 비슷한 목소리를 낼 수 있음에 대해 딱히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세나는 만족하고 있었다.
"몰랐어요. 이렇게 상냥한 목소리를 내실 수 있다니."
"내가?" 세나의 그 목소리에 나는 그저 조용히 미소를 짓고 있을 따름이었다. 당시, 나는 최대한 노력해서 차분하고 온화하게 목소리를 내어 책을 읽어주겠다고 했었고, 그 시점에서 상냥함이란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기었기에, 그런 세나의 말은 나에게 있어서 완전히 뜻밖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더니, 세나는 자신의 말을 듣고 놀라워하는 나를 응시하면서 그런 나에게 조용히 미소를 띠며, 나에게 이러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의 내면에 상냥한 마음씨가 내재되어 있음을 의미하며,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을 수 있고, 당사자도 모를 수 있지만, 이러한 내면은 언젠가 반드시 드러날 때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말하고서 나 역시 상냥한 내면을 가진 사람일 것 같아 보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무슨 되도 않는 소리를...... 그런 헛소리는 대체 어디에서 들었니?"
"고향의 아이들이 가르쳐 주었어요."
믿거나 말거나 같은 그런 이야기에 듣자마자 터무니 없음을 참지 못해 절로 웃음이 나왔고, 그러면서 대체 어디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냐고 묻자, 바로 세나에게서 고향에서 들었다는 답이 나왔다. 그렇게 눈앞에서 어이 없음을 드러내는 실소를 터뜨리는 모습을 보였지만 세나는 그런 나의 모습에 별로 개의치 않는 듯해 보였다. 혹시나 내 표정을 보고 당황할지도 모른다고 내심 생각했는데, 그런 예상과 달리 그저 평온한 모습을 보일 뿐인 세나를 보면서 나는 처음에는 이를 두고 의외라 여기었다가, 곧 그의 평탄하지 않았을 과거를 연상하며, 납득하려 하였다.
"하기는, 어렸을 때부터 정신적으로 강해져야만 했을 텐데, 이 정도 즈음이야."
그리고서, 나는 조용히 미소를 띠면서 세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면서 미소 짓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던 세나에게 조용히 그리고 차분히 목소리를 내려 하면서 이렇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네가 말한 대로, 내가 정말 그러할 수 있으면 좋겠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나는 이전보다 약간 밝게 목소리를 내며 정말 그러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화답했었다. 이후, 나는 동화책을 읽는 도중에 잠들어 버린 세나를 보면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기라도 하면서 그가 얼마나 평범한 생활과 상냥함을 갈구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고, 이러한 삶을 통해 그의 내면이 변해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 때, 세나는 왕궁의 시녀들이나 하녀들이 입을만한 그런 옷을 입고 있었어, 다소 수수한 인상의 옷이었지. 그 정도로 예쁜 애에게는 너무 과분한 옷 같았고, 그래서 그 애를 위해 좋은 옷을 마련해 주기로 했었어."
이후, 세니아가 세나에게 하녀들의 제복을 입었었느냐고 묻자, 그 물음에 세나가 그렇다고 답했다. 그리고 나를 대신해 내가 어떤 옷을 주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저를 근방의 옷 가게로 데려가셔서는 옷을 하나 맞춰 주셨어요. 그 때, 아르사나 씨께서는 옛 친구가 입었던 옷을 바탕으로 옷을 하나 맞춰 달라고 옷 가게 주인 분께 부탁을 하셨고, 그렇게 해서 맞춰 온 것이 지금 제가 입고 있는 옷이에요."
"아르사나의 옛 친구라면, 베라티사로 갔던 그 옛 친구를 말함이지?"
그 이야기를 듣고서 카리나가 나에게 그 친구에 대해 물었고, 그 물음에 나는 그렇다고 답을 했다. 그리고 그 친구가 예전에 옷 위에 멜빵 바지 차림을 자주 하고 다녔었던 것이 기억난다고 말하기도. 이후, 나는 카리나, 세니아 그리고 나에티아나 등에게 말했다.
"남자애처럼 머리를 깎고, 집 주변 곳곳으로 놀러 다녔었던 애야. 마을에 간 적도 있다고 하더라고. 모험을 너무나도 즐기던 그런 애였지."
그리고 조용히 미소를 띠면서 평생 모험가로 살 줄만 알았던 그런 어린 아이가 학문을 위해 베라티사로 유학을 떠나가게 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그러자 카리나가 그런 나를 보면서 조용히 미소를 띠면서 밝게 목소리를 내면서 그런 나에 대해 이렇게 말을 건네려 하였다.
"그 분께서도 아르사나, 네가 이렇게 살고 있을 줄은 전혀 모르고 있을 것 같아, 그렇지?"
"그러하겠지." 그러자 나는 그렇게 대답을 하고서, 그라면 분명 그러할 것이라 답한 이후에 애초에 나와 헤어진지도 이제 오래된 만큼, 나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하지 못할 것이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것에 대해 뭐라 말할 수도 없을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만약에 그 분께서 아르사나 씨를 기억하신다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 이러한 나의 말에 세나가 바로 의구심을 드러내며 물었지만 이 물음에 나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나는 세나에게 뭔가 아는 바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보기도 했지만 그것에 대해 달리 말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옛날 친구라고 하더라도 오랫동안 헤어져 있으면 서로 잊거나 하는 경우가 많지요?"
"일반적으로는 그래요." 이후, 잔느 공주가 세나에게 물음을 건네자, 세나는 그 물음에 그렇다는 의미의 답을 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렇다고 답을 하는 것이 모종의 여지를 남긴 것 같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잔느 공주가 그 의미를 물었다.
"일반적이라면...... 뭔가 예외 같은 것이 있나 봐요?"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예전에 저와 같이 지내던 소르나라는 분께서 한 번씩 '사나' 라는 이름을 거론하셨어요. 옛 친구라던데,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으셨어요."
식사를 마치고, 일행은 문화의 거리 한 가운데에 위치한 분수대 근처에 다시 모였다. 이후, 자유 시간이 주어져서 하미르의 중앙 광장에서 모이기로 하고 일행은 2, 3 명씩 무리를 지어 흩어졌다. 세나는 잔느 공주와 함께 문화의 거리 북쪽 방향으로 가고, 세니아는 나에티아나와 함께 동쪽 방향의 어딘가로 떠나가면서 나에게 시장 거리로 가려고 했었다고. 그리하여 분수대 근처에는 나와 카리나, 둘이 머무르게 되었다.
"오랜만에 나하고 너 둘이 있는 거네."
이 광경에 카리나가 활짝 웃으면서 말을 건네었지만 나는 조용히 미소를 짓기만 할 뿐, 그것에 대해 달리 대답을 하거나 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답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내가 오랜만에 카리나와 둘이서 같이 있는 것에 대해 모종의 감회를 느끼고 있음을 그 표정을 통해 카리나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무렵에 이르러서는 본격적으로 아침 시간이 시작되면서 아이들이 한데 모여 거리 일대를 뛰어다니며 놀거나 각종 공 놀이를 하면서 노는 광경이 보이고 있었다. 이전에 즐겼던 배구, 테니스 등을 즐기는 이들의 모습도 보였으며, 마법 장치를 이용해 타블라 테니스를 즐기는 아이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서 뭔가 해 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이들의 놀이에 간섭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그들의 모습을 그냥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 순간, 나의 뒤쪽 어딘가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이전에 자신을 만난 적이 있지 않느냐고 묻는 목소리가 나의 귓가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아니나 다를까, 이전에 하미르에서 만났던 아이들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연두색 긴 머리카락을 가진 하얀색의 소매 없는 무릎 높이의 원피스 드레스 차림을 한 어린 소녀 그리고 그 곁에 서 있던 검은색의 긴 머리카락의 정수리 뒤쪽 한 부분을 리본으로 묶어 내린 이로 하얀 블라우스와 짧은 청바지 차림을 한 소녀가 있었다. 이들이 바로 이전에 나와 마주했던 미냐 그리고 베야였을 것이다. 베야는 이전과 머리 모양이 달랐지만 그 모습을 보자마자 그리고 미냐와 같이 온 모습을 보면서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너희들, 미냐하고 베야 아니니?" 그 모습을 보자마자 바로 나는 그들이 미냐 그리고 베야임을 알아보고 물었고, 이에 미냐가 나를 보더니 활짝 웃으면서 그렇다고 답했다. 그러더니, 잠시 놀러 왔음을 밝히더니, 며칠 만에 다시 보는 것 같다고 말하고서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간 어디에 계셨어요?"
"하미시에 갔었어." 이 물음에 나 역시 그에게 다가가 미소를 띠면서 답했다. 그리고 하미시에서 많은 것들을 보러 왔다고 말하려 하던 때에 베야가 나를 보더니, 하미시에서 무엇을 보고 왔느냐고 묻는데, 마치 자신에게는 너무도 낯선, 그러면서도 너무도 궁금한 것들에 대한 호기심, 신기한 이야기를 향한 순수한 동경이 그 표정에서 바로 드러나고 있었다.
"우리가 갈 곳이 있는데, 같이 가면서 같이 이야기를 들어볼래?"
그 모습을 보며, 내가 그들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앉으면서 말했다. 그러는 동안 카리나는 그런 나를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나와 카리나는 시내 중부에 자리잡은 해안가 벼룩 시장을 향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수많은 건물들을 지나쳐 가며, 나는 카리나 그리고 미냐, 베야를 이끌고 시장의 입구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나와 카리나 모두 나를 따라오는 아이들에게 하미시에 있을 때 보았던 것들을 이야기해 주고 있었다. 다만, 하미시 근방의 고대 유적지에서 벌어진 사건, 고대 유적에 케레브 족들이 결성한 사교도 집단이 있었고, 그 집단에 의해 그들이 신으로 떠받들던 유적 지하에 자리잡고 있던 '괴물' 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그런 이야기까지 굳이 꺼낼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딱히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아직 어렸던 미냐, 베야에게 내가 해 주는 이야기는 너무도 낯설고 신기한 이야기 그 자체였던지라 해 주는 이야기마다 흥미롭게 들어주고 있었다.
"그런데, 언니들, 이름이 어떻게 돼요? 이렇게 계속 언니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제 이름을 알아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해서 그래요."
"이름?" 그러자 나는 두 아이들에게 이름을 가르쳐 줘야 할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해서 그들에게 이름을 가르쳐 주기로 했다. 우선 나부터 이름을 가르쳐 주고, 그 다음으로 카리나가 자신의 이름을 알려 주는 것으로 나와 카리나 모두 두 아이들에게 이름을 가르쳐 주게 되었다.
"나에티아나 언니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그라면 지금 다른 친구와 함께 문화의 거리 동쪽 인근으로 갔다고 했어. 아마 시장에 가면 마주할 수 있을지도 몰라."
미냐가 건네는 물음에 카리나가 바로 답을 했다. 그리고서 시장으로 어서 가자고 청했다. 그러다가 아이들을 이끌고 시장을 찾아 나서는 나를 나의 오른편 곁에서 가만히 보더니, 카리나가 나에게 조용히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아르사나, 방금 전까지 너를 계속 보고 있었는데."
"왜?" 그러자 카리나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환하게 미소를 띠면서 나에 대해 이렇게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아르사나는 아이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미소가 멈추지 않는 것 같아. 전에 카티야 등과 함께 있을 때에도 너 자신은 몰랐을지 몰라도, 유난히 표정이 밝더라. 어린 아이들과 함께 있을 동안 만큼은 참 즐거워 보이더라고."
"그래?"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조용히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카티야 등과 함께 있을 때라면 내가 샤하리아, 슈라일에 있을 그 때였을 것이다. 나는 의식하고 있지 않았지만 카티야 그리고 그 때의 미냐, 베야와 함께 있을 때에는 유난히 발걸음도 가벼웠었고, 유난히 천진한 밝은 표정을 짓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카리나도 그렇고, 나에티아나도 나를 보면서 유난히 그러한 편이었다고 말했었다.
"나중에 이 아이들하고 같이 뭐라도 하자. 배구 같은 것은 어때? 아니면 테니스라든지."
"그것보다는 어린이와 큰 이들이 같이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것을 해 보자, 우선 시장을 들르고 나서."
이후, 카리나가 아이들과 함께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무언가를 해 보자고 청하자, 내가 큰 아이들 그리고 어린이들이 같이 즐길 수 있는 놀이를 해 보자고 청하고서 시장을 들르고 나면 해변가로 가서 놀이를 같이 즐겨보자고 청했다. 그 때, 떠오른 것이 '사방치기 (Zeninemi)' (*) 라 칭해지는 놀이였다.
"그런 놀이도 있었어?"
"응, 어른들도 할 수 있는 거야, 원래 병사들의 훈련 수단이었다잖아."
이후, 중앙 구역의 시장 입구로 가자마자 나부터 앞장서서 시장 구역에 들어섰다. 내가 처음 들렀을 때와 마찬가지로 시장 거리에는 수많은 가판과 상점들이 들어서 있었으며, 현지인, 외지인 가릴 것 없이 워낙 많은 이들이 오가는 곳이라 그러한지 분위기는 언제나 분주했다.
"아르사나 언니, 언니는 어쩌다가 옷을 바꿔 입게 된 거예요?"
"앞으로 갈 곳이 바닷가라서, 그 바닷가에 어울리는 옷을 입어야 할 것 같아, 이렇게 바꿔 입게 됐어."
미냐가 나의 바뀐 옷차림에 관해 물음을 건네자 내가 바로 답했다. 그리고 이전 옷차림은 나에티아나가 가방 안에 넣어 두었다가 아는 사람-예나였지만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다-에게 전달해 주기로 했다고 이어 밝히기도 했다.
"바다라면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가브릴리아 쪽." 그리고 베야가 그런 나에게 이전 때보다도 더욱 흥미로워 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물음을 건네자 내가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간단하게 답했다. 하지만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았다. 혹시 카리나가 지브로아를 언급할까 우려를 하기도 했지만 다행히도 언급은 하지 않았다. 지브로아는 아직까지는 위험해서 혹시라도 동행하는 일이 생기거나 해서는 안 됐기 때문에 직접 그 지명까지는 언급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 쪽으로 가면 저에게도 연락 주세요, 저도 같이 가게요."
베야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자세하게 묻지는 않았다. 다만, 나에게 가브릴리아로 가게 되면 연락을 달라고 부탁을 하면서 같이 가고 싶다는 소망을 드러냈다. 어지간해서는 그 요청을 거절할 것 같지만 어린 아이의 순수한 열망 어린 요청을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막막할 따름이었다. 사실, 거절할 수 있는 표현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기는 하지만, 괜히 잘못 말했다가 어린 아이가 서운해 할 것 같아서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에 대해 깊이 생각을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때가 되면 언젠가 부르겠지만, 지금은 언니들이 그 곳에서 해야할 일이 있어. 일을 마치고 나면, 그 때에 나에티아나에게 요청해서 네가 가브릴리아로 갈 수 있도록 할게."
그 때, 카리나가 말했다. 그리고 좋은 사람들이 지금 자신과 함께 하고 있고, 그들이 미냐와 베야를 데리고 갈 테니, 기다리고 있어 달라고 부탁하고서 곧 때가 올 것이라 당부하기도 했다. 그 역시 뭔가 잘 아는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고, 아이들의 부탁에 대해 머뭇거리며 잘 대답을 하지 못하는 나를 대신해 자신이 뭐든 대답을 해 줄 필요가 있어서 그랬다고. 다행히도(?) 미냐, 베야는 그렇다면 기다리고 있을 테니, 자신들을 꼭 기억해 줄 것을 당부했다.
"좋아, 너희들의 모습은 계속 기억해 두고 있을 테니까, 걱정 말고, 기다리고 있어."
이에 내가 카리나를 대신해서 그렇게 화답하고서 그들에게 잠시 내 앞에 서 있어 줄 것을 요청한 이후에 그들 앞에 앉아서 빛의 기운, 감빛 기운을 모두 소환해 그들 근처에 머무르도록 했다. 그들의 모습을 볼 겸, 그들의 모습을 빛의 기운, 감빛 기운이 기억하도록 하기 위한 일이었다.
이후, 나는 나에티아나, 세니아와 만나서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 이후에 예나에게도 그들에 관해 이야기를 해 줘야 하겠다고 생각을 했고, 그 이후에 카리나에게 그 생각을 밝히고서, 혹시 내가 그것을 잊었다, 싶으면 그것에 관해 꼭 이야기를 해 줄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벼룩 시장의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가판대, 상점에서 보여주는 것들을 하나씩 보려 하였다. 의류가 주를 이루고 있었으며, 이외에도 빵이나 제과 류, 식재료들, 음식들 그리고 각종 소품들을 내놓는 곳들의 모습도 보이고 있었다. 아이들은 장난감, 사탕 류에 관심이 많은 듯해 보였다. 다만, 미냐는 장난감보다는 빵, 사탕 등에 더욱 관심이 많아 보였고, 베야는 사탕 등의 화려한 외관에 더욱 눈길을 주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나 역시 하얀 사탕들을 보면서 사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기는 했으니, 하얀 사탕을 어렸을 때, 좋아했었기 때문이었다.
"너도 어렸을 때에는 사탕 좋아했었구나."
"응, 하얀색을 띠는 알사탕 같은 것들을 좋아했었어. 하지만 많이 먹으면 어머니께 야단 맞을까봐 어지간해서는 그냥 안 먹었지만."
이에 카리나가 어머니에 대해 어지간해서는 나를 야단치거나 한 적이 없지 않았느냐고 묻자,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 어머니께서 야단을 치시거나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아이들이 함부로 해서는 안 될 일에 대한 이야기들은 많이 있고, 그런 일을 했다가는 정말 야단 맞을 것 같아서 차마 하지 못하고는 했었다고.
"그랬었구나. 아르사나의 어머니께서는 착하고 온화하신 분이셨다고 하니까, 실제로는 야단치거나 꾸지람하는 일은 거의 없었을 거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에 카리나는 조용히 미소를 띠며 이렇게 화답했다. 그리고 어머니에 관한 미담에 대해서는 이것저것 들어본 바 있음을 밝히고서, 오죽하면 어머니를 동경한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어머니를 동경한다니, 누가......?"
물론, 나에게는 의아한 이야기였던지라 그런 사람이 누구였느냐고 카리나에게 바로 물었고, 그 물음에 카리나가 이렇게 답했다.
"소르나가 세나에게 해 준 이야기가 있었고, 그것을 몰래 엿들어서 알았지. 소르나가 세나에게 이야기를 해 주던데, 예전에 자기가 알던 애가 아르셀, 그러니까 네 어머니를 무척 동경해서 그를 따르려 했었다더라. 그런 이야기가 있었어."
"그 사람 이름이 누구였는지는 알고 있어?"
이후, 내가 다시 물음을 건네었지만 카리나는 그 사람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그가 어머니를 동경하고 따르려 했는지에 대해서는 미처 듣지 못했음을 밝혔다. 다만, 그가 어머니를 한 평생 동경하고, 그처럼 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소르나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것이 전부였다고.
"네가 그 사람에 대해 모험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었다고 했잖아. 그런 사람이 베라티사로 유학을 떠나게 된 것도 어쩌면 그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몰라. 아르셀, 그 분께서 어떤 분이셨는지에 대해 잘 아는 바가 없기는 하지만, 그처럼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그 때, 카리나로부터였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어머니를 동경하며, 그와 같은 길을 걷고자 했다면 마땅히 그렇게 하려 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가 베라티사로 유학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샤하르에 처음 지낼 당시에는 왜 그러하였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제 와서는 모두 납득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고 보니, 네가 어렸을 때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있었지, 세나로부터 받아온 것인데, 너한테는 아직 보여준 적은 없었네."
그러다가 카리나가 갑자기 치마의 주머니를 뒤지더니, 그간 자신이 넣어두고 있었다는 자그마한 종이를 꺼내 들더니, 나의 오른편 곁으로 다가가서는 그 종이를 내게 보여주었다. 그 종이에는 소르나로부터 받았다는 나의 어린 시절 그리고 어머니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자그마한 종이에 연필로 그려진 그림, 거칠게 그려진 그림의 한 가운데에는 긴 머리카락을 가진, 하얀 드레스 차림의 소녀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고, 그 왼편에는 짤막한 머리카락을 가진, 민소매 셔츠와 반바지 차림을 한 소년(?) 이 서 있었으며, 오른편에는 하얀 드레스 차림을 한 어머니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이 그림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 어렸을 적에 그 그림이 완성된 모습을 실제로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본은 큰 그림이었으며, 당연하게도 작은 종이에 그려진 것은 사본이다.
카리나는 이 그림을 세나로부터 받았다고 하며, 나중에 밝힌 바로, 세나는 소르나로부터 이 그림을 받았었다고 했다. 세나가 소르나와 가장 친분이 많았고, 그래서 그로부터 이것저것 받아온 것이 많다고 했었는데, 그 물건 중 하나였던 것 같다.
"그 그림을 보면서 오른쪽의 여성 분은 바로 알아봤어, 네 어머니였겠지? 그리고 누가 아르사나였는지는 잘 모르겠던데...... 왼쪽이 너일 것이라 생각했어."
"그렇다면 가운데는?"
"잘은 모르겠는데, 소르나가 가지고 있었다고 하니까, 소르나였겠지. 그 애가 말하는데, 예전에 네 어머니를 만난 적이 있었대. 그리고 네 어머니와 함께 어떤 그림의 모델이 된 적이 있었다고 했는데, 그 때 그려진 그림이 이거였나 봐."
"그래......." 하지만 그 그림의 실체를 아는 사람이다보니, 카리나가 잘못 알고 있었음은 잘 알고 있었다. 왼쪽의 사람은 내가 샤르기스 인근의 유적 탐험에 나섰을 당시에 머리카락이 짧았다는 증언을 통해 나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었던 모양으로 실제로는 모험가를 꿈꾸었던 그 사람으로 일단 그는 내가 아니다. 그리고 가운데의 소녀는...... 아직 밝힐 수는 없다. 아니, 밝혀서는 안 될 것이었다. 아마 지금 즈음에서 그 사람에 대해 밝힌다면 나에 대해 아는 모든 사람들이 충격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왼쪽의 사람에 대해서도 나는 일단은 내가 맞다고 카리나에게 말해 주었다.
"그렇게 머리카락이 짧았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게 된 거야?"
원래 이 행성계의 사람들은 머리카락이 자라나는 속도가 아주 빠른 편이다. 세니티아의 정령들, 특히 바람의 정령들-과장 섞어서 자르면 바로 자라난다고 하더라-에 비하면 아니겠지만 세상에 마력이 존재하는 한, 영혼의 기가 존재하는 한, 그 영향을 받아 머리카락이 금방 자라난다고 했다. 그래서 머리카락을 짧게 유지하려면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한데, 어렸을 때에는 같이 살던 할머니께서 그 역할을 해 주셨었다. 하지만 그 할머니께서 사정으로 고향으로 돌아가시면서 내 머리카락을 관리해 줄 사람이 없어지고, 그 이후로 머리카락을 짧게 하는 것을 포기하면서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게 된 것.
"...... 그런 것도 있고, 실은 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리사 (Lisa) 라는 이름의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어, '아르사나는 머리카락이 긴 쪽이 어울린다' 라고."
"그랬었구나." 이에 카리나는 조용히 미소를 띠며 답했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하고서 머리카락이 짧은 나는 어째 상상하기 힘들다고 말하기도. 그 그림은 일단 카리나에게서 받아서 바지의 왼쪽 주머니 안에 넣어 두었다. 내 어린 시절과 관련된 것인 만큼, 내가 가지려 한 것. 그러면서 나는 카리나에게 언젠가 그 때의 그 사람 본인 혹은 그 사람을 알 만한 지인을 보게 되면 그 때, 그 그림을 보여주겠음을 알리는 말을 건네었다.
그 때, 미냐와 함께 앞서 시장 거리를 따라 뛰어가던 베야가 갑자기 나를 향해 다가오더니, 나에게 그 너머에 재미나게 생긴 장난감들이 많이 있음을 알렸다. 그러자 내가 바로 베야를 따라 나서며, 그가 가리킨 것을 보려 하였다, 그가 대체 무엇을 보아 재미나게 생긴 장난감이 많다고 나에게 외치려 했는지 궁금해진 것이 이유였다.
베야가 뛰면서 찾아간 곳은 어느 큰 가판대로 수없이 많은 장난감들과 장신구들이 가판대 위에 놓여 있었다. 여러 형태의 장난감들과 장신구들, 목걸이, 브로치들이 놓여 있는 가판대 주변으로 가판대 위의 물건들에 흥미를 느꼈을 사람들이 잠시 구경하다가 떠나가는 광경이 보이고 있었다. 마냐는 가판대 앞에 이르자마자 베야에게 무슨 신기한 장난감을 보았느냐고 물었고, 이에 베야가 가판대의 가운데 쪽 한 곳에 놓인 어떤 장난감을 가리켰다.
베야가 가리킨 것은 앞 부분이 새파란 부품으로 이루어졌을 새 혹은 비행기 모양처럼 보이는 장난감으로 새하얀 새의 날개 한 쌍의 동체의 좡에 달려 있으며, 동체 윗 부분에도 작은 새의 날개 하나가 달려 있었다. 앞 부분은 파란색을 띠는 보석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날카로운 칼날처럼 보여서 아이들이 자칫 그 부분을 잘못 만졌다가 찔려서 다칠 수 있다는 우려를 불러오기에 좋아 보였다.
'아이들이 갖고 노는 물건이라면 끝 부분이 너무 날카로워서는 안 될 텐데.'
그렇게 혼잣말을 하고서 그 장난감을 왼손으로 들어보려 하였다. 상당히 가벼운 물질로 만들어졌을, 얼핏 보면 비행기처럼 보였던 그 장난감은 가까이에서 보니, 마치 마법사의 지팡이를 축소화시킨 듯해 보였다. 날개 장식이 큰 지팡이를 토대로 만들었을 것이다.
- 앞 부분이 푸른색 투명한 결정을 깎아 만들었으며, 자루, 날개 부분 역시 고급 소재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좋은 소재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 아니, 이것은 마법사들이 지팡이와 거의 같은 재질로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마법사들의 마도구에 쓰일만한 소재를 이렇게 허투루로 사용하는 경우는 일반적이지는 않을 텐데, 이런 장난감치고는 고급스러운 물품이 어느 상인의 가판대 위에 올려져 있는 것에 적지 않게 놀라기도 했다.
지팡이의 모양부터 색 배치까지 그것은 필경 그 사람이 갖고 있는 혹은 갖고 있었을 그 지팡이의 모습과 무척 닮았다. 하지만 그 모습이 그 사람의 지팡이를 연상케 한다고 해도, 반드시 그 장난감이 '그것' 과 관련 있는 물건일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 이외에 그렇게 생긴 지팡이를 가진 사람은 분명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그 이외에 그렇게 생긴 지팡이를 가진 사람은 이적지 보지 못했다고 해도.
"그거, 소르나가 갖고 있던 지팡이를 닮지 않았어?"
"맞아, 그 애가 갖고 있던 것 같아." 왼손의 손바닥 위에 고급 장난감을 올려놓고 그 모습을 왼편 곁에서 가만히 바라보더니, 카리나가 나에게 물었고, 이 물음에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그리고서 곧바로 그렇게 생긴 지팡이를 가진 사람은 소르나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라 말했다. 그리고,
"그 애라고 해서 별 것 있겠어, 이렇게 생긴 지팡이라면 얼마든지 있겠지."
라고 말하는 것으로 소르나와의 관련 있는 물건은 아니리라고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리고서 장난감을 다시 가판대 위에 내려놓고서 물건이 놓여있던 가판대를 보려 하는데, 그 장난감이 놓인 자리 바로 앞에 이런 자그마한 팻말이 보이고 있었다.
SOLO PARA EXPOSICIÓN. NO LO SAQUES.
(HOZI LAYAYOI ÜHA. =ËNI HANYEALA)
(전시용입니다. 가져가지 마세요)
"이런 전시용 물품을 가판대 위에 올려놓는 경우야 얼마든지 있기는 했는데 말야."
가판대 위에 전시용 물품을 올려놓는 경우를 지금까지 몇 번 보아왔고, 그 지팡이 모양의 장난감 역시 그런 물품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런 물품들 중 대부분은 만져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만 허락 없이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가판대 근처에는 가판대의 주인인 상인이 있었고,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서 가판대의 전시용 물품에 대해 물어보기로 했다.
그 후, 다급히 상인에게 다가간 나와 카리나는 그 곳에서 그로부터 의외의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지팡이 모양의 장난감이 상인의 소장품인 줄 알았던 것과 달리, 그 물품은 상인이 우연히 길바닥에서 주운 물건이었다고 했다, 귀중해 보이는 물건으로 그래서 전시용으로 올려놓은 것이었다는 모양으로 만져보는 것 정도는 문제 없다고 했다-물론, 훼손은 안 된다고 했으며, 그 정도는 나도, 카리나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마법사의 지팡이 모양 같지 않냐는 카리나의 질문에 그 상인은 그것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어서 잘 몰랐다고 답변을 나와 카리나에게 들려 주었다.
"그건 그렇고, 아가씨, 장신구 하나 장만하시지 않으실래요? 뭔가 목걸이라도 하나 걸치시면 더 좋아 보일 것 같아요."
"그래요......" 필요 없다고 거절하는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내심으로 목걸이 하나 정도는 걸쳤으면 하는 바람이 있기는 했었기에 딱히 그렇게 말을 건네거나 하지는 못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장신구를 사거나 할 수는 없었던 것이, 그런 것을 위한 자금 여유가 별로 없었음이 그 이유. 그래서 상인의 그런 제안에 이렇게 답을 했다.
"뭔가 사거나 하고 싶기는 하지만...... 돈 여유가 없어서 못하겠네요."
"그래요...... 아쉽네요. 아가씨 같은 미인께 어울릴만한 목걸이를 하나 알고 있는데."
미인이라,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던가.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일단 흥미가 생겨서 어떤 물건이냐고 묻고서, 그 물건을 내게 보여달라 요청을 했다. 그러자 상인이 보여준 것은 파랗게 빛나는 끈에 매달린 파랗게 빛나는 하얀 장식이 달린 목걸이로 하얀 장식은 천사의 모양을 조각으로 형상화하고 있었다.
'이런 천사의 조각상이 내게 어울린다고?'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내심으로는 그렇게 혼잣말을 하면서, 그와 더불어 그렇게 보인다고 하니, 일단 관심을 갖기로 했다. 그리고 당장에 살 수는 없었던 만큼, 그 모습과 제품 명 정도만 알아두기로 했다. 모습과 제품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면 다른 곳에서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의한 일이었다. 그리고서 나는 상인으로부터 그 목걸이 이름이 '엘레아스 (Eleas)' 라는 것을 듣고, 그 이름 정도는 기억해 두기로 했다.
"고맙습니다. 언젠가 여기로 다시 올 때에는 꼭 다시 찾아올게요."
이후, 나는 그와 헤어지고서 다시 길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그 때, 카리나와 미냐 그리고 베야가 나를 따라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들은 나와 카리나가 정체 불명의 비행기 혹은 지팡이 모양의 장난감을 만져 보다가 상인에게 그 장난감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던 중에 하나씩 주머니 안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자그마한 장난감을 산 듯해 보였다.
이후, 나는 미냐 그리고 베야를 따라 시장의 여러 갈림길들을 둘러보며 그들이 사 준 빵, 과자들도 몇 얻어 먹었다. 사실 이런 것들은 조금 더 큰 나와 카리나가 사 줘야 마땅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일행에게는 돈이 그리 많지 않고, 그나마도 아껴야 했던지라 그런 것들을 아이들에게 사 줄 여력이 없었는데,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냐와 베야가 이것저것 사면서 나와 카리나에게도 몇 개 건네 주었던 것이었다.
"너희들, 평소에도 이 시장 거리를 자주 돌아다니니?"
카리나가 물었다. 그러자 베야가 그렇다고 답하고서 여러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활발한 분위기가 좋다고 그 이유를 말해 주었다. 그러더니 나에게 어렸을 때, 시장 거리를 자주 돌아다니거나 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물음을 건네려 했다.
"아르사나라면 어렸을 때에는 시장 거리를 자주 다니지는 않았던 것으로 아는데."
그러자 나를 대신해 카리나가 나에 대해 언급을 하는 답을 하였다. 그리고 아주 어렸을 때에는 슈라일의 호수가에서 살았고, 그 이후, 샤하르에 있었을 때에도 시장 거리에 머무른 적이 있기는 했지만 놀러 다니기 위해 간 것은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여러 곳을 전전하며 일을 해 왔던지라 놀러다닐 여유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좋았다.
"...... 그래서 어렸을 때에는 일터에서 살고 잠도 잤다고 했었어."
"그렇다면, 학교에는 다니실 수 있었어요?" 그러자 표정이 급 우울해진 미냐가 나를 보며 묻자, 그 때에도 카리나가 나를 대신해서 누구나 초등 교육과 하급 중등 교육 과정, 그러니까 1 학년에서 18 학년까지는 의무적으로 거쳐야 하는 만큼, 이를 위한 학교에 곧 다니게 됐음을 밝히고서 그러면서 학교 교사들의 소개를 통해 샤하르의 동부 거리에 있었던 어느 할머니의 집에서 살았음을 밝혔다.
"아르데이스 출신의 드벨파 족 여자 분이셨다고 했었어."
"좋은 분이셨나요?" 이후, 미냐가 나에게 묻자, 이번에는 내가 답했다.
"정말로 좋은 분이셨어. 외롭게 사시던 와중에 가족으로 내가 들어왔었지. 나를 정말 자신의 손자 대하시는 듯이 대하셨었어."
당시, 그 할머니께서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자식들 그리고 손주들과 헤어져 홀로 살아가게 되면서 여생을 보다 평화로운 곳에서 보내려고 이 행성계로 이주를 하셨다고 한다. 당시에는 그 분께서도 이주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고,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아르데이스에 있을 때와 같은 외로운 삶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 때, 내가 집으로 온 것이었다.
할머니께서는 갓 학교에 진학했던 나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 주셨다. 글자부터 시작해서 식사를 비롯해 생활에서의 기본 예법이라든가, 착하게 사는 법, 꽃, 나무의 이름 등을 가르쳤고, 밤이 되면 동화라든가, 전설 등의 여러 이야기들을 나에게 들려주시기도 하셨었다. 머리카락을 짧게 유지해 주시기도 했었다. 할머니께서는 전문적으로 머리카락 손질을 배우거나 하시지는 않으셨지만 머리카락 모양에 대해 깊이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던 나는 그것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았었다.
간혹 할머니께서 외출을 하시면서 교외로 놀러가기도 하셨는데, 그 때 만큼은 어머니와 함께 호수가 등을 거닐던 때가 생각나기도 했다. 하지만 어머니에 대해서는 깊이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그저 어머니와 함께 호수가나 산의 풍경을 같이 감상하기도 했었다는 옛 추억이 떠오르기도 했었다는 이야기를 전할 따름이었다.
집의 유일한 가족이었을 나를 할머니께서는 마치 친 손자처럼 대하시려 하셨고, (당시에는 머리카락을 짧게 잘라서 뭇 사람들에게 소년처럼 보였다. 내가 있었던 아르나이 유적 탐사대에 있던 이들 중에 나를 남자아이였던 것으로 알았던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인지 나를 모질게 대하지는 않으셨다. 엄격히 교육을 시키려고 해도, 이미 그 분께서는 내가 집에 들어올 시점에서 나이가 많으셨고, 그래서 사람이 모질게 성질을 내며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른다.
할머니와 함께 사는 동안에는 격려와 충고 속에서 살면서 할머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고 많은 노력을 했었다. 여타 아이들이 여기저기 놀러다닐 때에도 공부와 독서 등에 전념했고, 운동도 열심히 하려고 했었다. 그렇게 해서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학교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면 나를 손자처럼 생각하고 보살피는 할머니의 은혜에 깊이 보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그 할머니께서 아르사나 언니의 가장 큰 은인이라 하실 수 있겠네요."
미냐의 물음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베야는 나에게 그렇다면 이후, 할머니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고, 그 물음에 내가 조용히 답했다 : 내가 5 학년 과정을 마치고 6 학년 과정에 들어설 무렵에 갑자기 아르데이스에서 왔다는 드벨파 족 사람들이 할머니의 집을 방문했고, 이후에 할머니를 데려갔다고.
"아마도 할머니의 자녀들이었겠지. 할머니께 수많은 자식들이 있었던 모양이야. 그런데, 서로 가까운 사이여야 할 형제, 자매들의 서로를 바라보는 표정은 그렇게 밝지 않았지. 아무튼, 그 드벨파 족 형제, 자매들이 할머니를 데려가면서 집에는 나 홀로 덩그러니 남겨지고 말았던 거야."
할머니께서는 직접 말씀하시지 않아 알 수 없었지만, 뒤늦게서야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할머니의 건강 상태가 그 해 들어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고 했으며, 그것에 대해 우려한 할머니의 장남 일가가 할머니를 자신의 집에서 모시겠다며 할머니를 데려간 것이었다. 하지만 장남 일가와 동행했던 그의 형제, 자매들은 할머니 그리고 그 남편의 재산 상속 건 때문으로 서로가 서로를 불편히 여기니, 그 모습이 마치 서로가 서로를 타인 보는 듯했다.
그 실상을 듣고 나서 나는 어떻게든 그런 몰지각한 어른들로부터 할머니를 구해 주고 싶어했다. 그런 사욕으로 가득찬 어른들이 아닌 나야말로 할머니의 진짜 자식 같은 존재라 믿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행방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어떻게든 할머니와의 추억이 깃든 집에서 버티려 했지만 결국 그 집에는 새 주인이 들어섰고, 이렇다 할 힘이 없었던 나는 집을 떠나, 다시 떠돌이가 되었다. 이제는 누구의 보살핌도 기대할 수 없다는 생각에 다시 일터로 나가기 시작했으며, 학업과 일을 병행하며 살아갔다. 학업도, 수면도 일터의 숙소에서 가졌었다.
"...... 짧게 유지하던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기 시작한 것도, 그 때부터야. 당시에는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는 것이 못마땅했어도 어쩔 수 없었어. 머리카락을 짧게 유지해주시던 할머니께서는 떠나신 이후로 머리카락을 자를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지. 아르데이스 등의 이발사를 찾아가면 된다지만, 이를 위해 굳이 아르데이스까지 가고 싶지는 않기도 했어."
"그랬었군요." 그러자 미냐가 나의 길게 늘어지고, 또 한 부분이 리본으로 묶인 나의 머리카락을 보면서 말했다. 그 때, 베야가 나를 보더니, 나에 대해 머리카락이 길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에 나는 조용히 미소를 띠며, "그래?" 라고 말하고서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
"이후, 학교에서 만났던 어느 선생님께서 그러시더라, 나는 머리카락이 긴 쪽이 어울린다고. 그리고, 그 이후에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다시 보라고 말씀드리셨어."
이전에 카리나에게 했던 그 이야기였다. 선생님이 누구인지만 밝히지 않았을 뿐, 거의 그대로였다. 그 이야기 이후에 카리나는 나에게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는 것을 못마땅해 했던 이유가 무엇인지를 말해 달라 부탁했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그저 '소년처럼 보이는 것이 좋아서' 라고 답을 했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학업하고 일을 병행해서 하면 많이 피곤하지 않아? 운동도 했다면서."
"그랬지." 카리나가 건네는 물음에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용병 일에 관심을 가진 것은 그것이 위험해도 많은 돈을 챙길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임을 밝히고서, 그것이 아니었다면 무술이나 마법 수련의 시간을 가지려 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너도 참....... 일을 하면서 학업하고 수련도 같이 하기가 쉬운 게 아닐 텐데, 그것을 어찌 해낸다는 게, 그것도 보통 아닌 수준으로 말야. 가만 보면, 너 같은 독종이 세상에 얼마나 있나 싶기도 해."
그리고서 카리나는 나에게 그 대가로 내게 주어진 것은 '막 된 성질 머리' 가 아닐까하는 말을 건네고서, 나에게 그런 가시밭 같은 길을 굳이 걸으려 한 이유에 대해 물었고, 그 물음에 나는 차분히 목소리를 내며 이렇게 답했다.
"그것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해도 될지도 모르겠네,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
'엄마를 난데 없이 잃은 불쌍한 아이' 라는 목소리가 주변에서 계속 들려왔었지. 사람들은 나를 그저 고귀한 성녀의 홀로 남은 가련한 아이로 여기었을 뿐이란 말야. 그게 나는 너무 싫었어. 또, 이런 것도 있어. 어머니의 유산은 별로 없었지만, 성녀로서의 명성과 자식에게 주어질 후광이 있었지. 그 후광 속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나는 너무 싫었던 거야.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을 모두 던지고, 나 홀로 샤하르로 발걸음을 옮기기로 했었어.
"...... 그래서 지금까지 어머니와 닮았다는 말이라든가, 어머니와 같은 길을 걸어가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던 거야. 그래서 어머니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가져가지 않고 샤하르로 갔던 것이고. 그 대신으로 이전부터 언급했던 베라티사로 유학을 갔던 그 친구가 어머니의 유산들이라든가, 내가 집에 남겨두고 갔던 것들 중 일부를 물려 받았지."
"그리고 소르나가 그 친구로부터 물건들을 받았겠지?"
이후, 카리나가 건네는 물음에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이후, 나는 그 친구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해 주었다. 어렸을 때, 모종의 인연으로 어머니와 가까이 지내게 되었고, 그러면서 어머니의 과거에 대해서도 대략 알게 됐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친구는 그 이후로 어머니와 같은 삶을 동경하게 된 것 같았어. 어머니처럼 살고 싶다고 몇 번이고 나한테 말했었지. 그러면서 언젠가는 열심히 배우고 노력해서 어머니와 같은 재능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도 이야기를 했었어. 그러면서 어머니의 유산도 나를 대신해 일부 물려 받고, "
그리고서 성녀가 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음을 밝혔으며, 애초에 자신은 성녀가 될 정도로 선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고 해서 그러하였다고 그 이유를 언급하기도 했다. 그렇게 베라티사로 유학을 떠나가며 샤하르에 있던 나와 완전히 헤어지게 된 이후로 내 집에 있던 물품들을 소르나에게 전해준 것을 보면 나와 만날 수 있는 형편이 못 되고, 그로 인해 나와도 소원해지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헤어질 때에는 언젠가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겠지?"
이후, 카리나가 건네는 물음에 나는 조용히 그렇다고 답했다. 그리고 어렸을 때의 약속이 끝까지 이어지지 못하는 경우라면 얼마든지 있지 않겠느냐고 이어 말한 다음에 그에게 어렸을 때의 약속 중에 지키지 못한 것이 있지 않았느냐고 물었으나, 카리나는 그런 나의 물음에 이제 와서는 기억나지 않는다는 답을 할 따름이었다. 이에 나는 거짓말 아니냐고 핀잔 주는 듯이 물었으나, 카리나는 정말이라고 답하고서 애초에 무언가 중요한 약속을 하거나 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고 이어 말하기도 했다.
"그래도 다행이야, 그 친구가 소르나와 친해서 네가 소르나와 만나는 것으로 어린 시절의 물건들을 돌려받을 수 있었으니까. 그 친구와 소르나는 서로 친했나 봐?"
"응, 그랬어. 성향은 많이 달랐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이상하게 친했지. 그래서 그 친구가 유학을 떠나기 위해 탄 배에서 소르나를 만났을 때, 그를 두고 무척 반가워했다고 소르나가 나에게 그렇게 이야기를 전한 적도 있어. 이제 그 친구는 그런 소르나와도 헤어져 인연이 끊어진 것 같지만."
"아쉽네." 이에 카리나는 조용히 미소를 띠며 답했다. 이후, 카리나는 나에게 그 친구의 이름이 궁금하다고 말하고서 그 이름이 무엇인지 나에게 말해줄 수 있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런 그의 물음에 나는 곧바로 그 이름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렇게 언급을 했다.
"소리 (Sori). 그게 그 애의 이름이야. 나는 그렇게만 알고 있었어. 하지만 그게 본명인지 아닌지는 아직도 몰라."
"소리? 소르나와 비슷한 이름 아냐?" 그러자 카리나는 바로 의심스럽다는 듯이 이렇게 물었다. 아무래도 소르나라는 이름과 대충 비슷해 보이는 이름으로 애칭으로 쓰일 법한 이름인지라 동일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게 된 모양. 그런 그의 물음에 나는 이렇게 답했다.
"서로 다른 사람끼리 서로 비슷한 이름을 가지는 경우야 얼마든지 있겠지."
그리고서 나는 세나 그리고 세니아의 경우를 언급하면서 이름만 들어보면 서로 비슷해 보이는 이름으로 서로가 서로의 본명 혹은 애칭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닮은 점 하나 없는 완전히 다른 사람 아니었느냐고 되묻기도 했다.
"그래, 그러고 보니, 그러네. 세나하고 세니아......." 이에 카리나는 조용히 미소를 띠는 표정을 지었다. 나의 이야기에 바로 납득할 수 있었던 모양.
사실을 말하자면, 나 역시 소르나는 이름을 듣자마자 처음에는 흠칫하며 놀랐었다. 소리(Sori) 라는 옛 친구의 이름이 절로 생각나는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소르나는 소리가 가졌던 내 어린 시절의 물품들을 여럿 갖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소르나는 소리와는 너무도 다른 인상의 사람이었고, 내가 언급했던 세나, 세니아라는 서로 비슷한 이름을 갖고 있지만 서로 전혀 다른 인상에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이들이 있기도 해서 소르나와 소리의 유사점에 대해서는 언급의 가치도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수많은 식당, 과자가게, 빵집, 옷 가게, 잡화점 등을 지나쳐 가면서 시장 구역의 북쪽 끝 부분에 도달했다. 시장 구역의 끝은 해안과 근접한 도시의 북부 지역과 이어지고 있었다. 해변가에 이르자마자 미냐, 베야 모두 바닷가 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했고, 그런 그들을 보면서 나 역시 그런 아이들을 따라 빠르게 해변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카리나도 그런 나를 쫓아가고 있기는 했지만 나처럼 아이들을 빠르게 쫓아가거나 하지는 않고 있었다.
미냐와 베야는 해변에서 모래밭 위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이들은 동쪽 방향으로 뛰어가고 있었으며, 그래서 나 역시 그들을 따라 발걸음을 빨리해서 모래밭 위를 걸으며 동쪽 방향을 따라 나아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조금 빠르게 걷는 정도로 이들을 따라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들은 시간이 지날 수록 더욱 빨리 뛰어가고 있어서 나중에는 가볍게라도 뛰어야 했다. 시간이 지나도 지치는 모습 하나 보이지 않는 아이들의 활기에 감탄하고 있었다.
"아르사나, 이런 아이들을 보면 여행길에 데리고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내가 다니는 길이 보통 위험한 길이 아닌 줄 알잖아." 그러자 내가 답했다. 내 여행길이 평화롭기만 하다면 얼마든지 그들을 동행시킬 수 있겠지만 그러할 리 없다는 것이 문제라도 이어 말하기도 했다. 이에 카리나가 조용히 미소를 띠면서 나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러니까, 그 아이들에 대한 욕심이 있기는 하다는 것이지?"
이런 그의 물음에 나는 부정하는 대답은 하지 않았다. 이런 활기찬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장차 카리나, 세나 같은 위험한 곳에서도 활약할 수 있는 아이들이 될 가능성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들에 대한 욕심이 있을 뿐이지, 조건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동료로 삼고 싶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고 있었다. 동료가 될 수 있을만한 이들이라면 고향인 슈라일에서 만났던 카티야 그리고 에이샤가 있으며, 실제로 나는 그들을 나의 후배 혹은 후계자로 삼으려 한 바 있다. 다만, 샤하르에서 오랫동안 함께 지냈던 아잘리의 경우에는 그에게도 자기 일이 있어서 그렇게 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물론 그에게 나를 따라가겠다는 의향이 있다면 좋겠지만, 거기까지 기대하거나 하지는 않고 있다.
"카티야하고 에이샤라면 슈라일에서 만난 두 아이들이지? 그 애들이 마음에 들었나 봐?"
이에 나는 조용히 미소를 띠며 그렇다고 답했다. 그리고 미냐, 베야에 대해 그들이 마음에 들었느냐고 묻자,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그들을 자주 만날 수 있는 이들이라면 그들과 동행해도 좋을 것 같다고 말하고서 그들을 자주 만날 수 있을만한 이들로 누가 있느냐고 물었다.
"나에티아나나 프라에미엘, 두 천사들 정도가 있지 않을까? 그들이라면 이 일대를 자주 돌아다니니까."
그러는 동안 아이들의 발걸음은 해안의 동쪽, 먼 저편에 그 동안 보였던 시가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거리가 보이는 구역들 그리고 그 너머에 가브릴리아의 섬들로 추정되는 작은 섬들이 보이는 곳에 이르렀다. 이런 거리와 섬들이 보이는 풍경이 좋았던 것일까. 아이들의 뜀박질은 그 곳에서 멈추었다.
"언니들도 따라왔네요." 이후, 그들은 자신들을 따라온 나를 보더니, 베야가 나와 카리나에게 물었고, 이에 나는 두 아이들이 어디까지 가는지를 보고 싶어서 따라가 봤다고 답했다. 그리고서 저 너머에 있는 풍경들을 보려고 그 곳까지 갔던 것이냐고 물었고, 이에 베야가 그렇다고 답했다.
"동쪽 구역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서쪽 구역과 너무나도 다르다고 이야기를 들었었어요. 집에서 그 곳들은 너무나 위험해서 함부로 가는 곳이 아니라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가 보고 싶은 곳이고, 지금은 이렇게 바닷가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어요."
"그렇구나." 이후, 내가 그렇게 화답을 하자, 베야가 물었다, 자신들을 데리고 그 곳으로 갈 생각이 있느냐고. 이런 물음에 내가 차분히 목소리를 내며 답했다.
"나도 그렇게 하고 싶을 때가 있기는 한데, 지금 어린 네가 멀리 나가려 한다면, 집에서 사랑하는 가족들이 너무나 걱정할 거야. 어디로 가서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가족들이 걱정하지 않을래야 할 수밖에 없고, 그런 가족들의 마음을 내가 달래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지금 나하고 저 언니는 위험한 일을 하고 있고, 자칫하면 너희들이 그 일에 휘말릴 수도 있어. 아무리 그래도 너희들이 그런 일에 휘말리는 것 자체를 나는 원치 않아."
그러면서 그 아이들에게 조금 더 크고 강해지면 그 때에 같이 가자고 말한 후에 아쉬운 대로 해변가에서 같이 놀자고 말했고, 이에 아이들은 좋다고 말하면서 서쪽 방향으로 뛰어가기 시작하니, 그런 그들을 따라 나섰다. 이번에는 나도 본격적으로 뛰었고, 아이들이 그런 나를 따라가는 모습을 보였다. 카리나는 그런 나와 아이들을 뒤에서 조용히 뒤따라가기만 했다.
"말리지 못 하겠다니까, 정말로." 카리나에게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이후, 나는 아이들과 함께 해변가에서 이런저런 놀이를 즐기며 시간을 보냈다. 같이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그 덕분에 요즘 아이들의 노래를 몇 알아가기도 했다. 아이들의 노래를 같이 불러주는 것은 참 부끄러운 일 같아도 아이들이 즐거운 일이라니, 그 모든 것들을 참아가며 해 주었다. 한 동안 그렇게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나는 그 광경을 여러 의미를 품은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나를 지켜보고 있던 카리나와 함께 다시 시내 중앙 구역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었다. 아이들 역시 그런 나, 카리나와 동행하며 중앙 구역으로 나아갔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까지는 계속 일행과 같이 있고 싶어했던 것 같다.
해변가에 머물렀던 나의 발걸음은 성당을 향하고 있었다. 한낮 시간의 성당을 그저 한 번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변을 벗어나 성당을 향하는 발걸음을 옮기는 나를 보면서 카리나는 그런 나에 대해 이렇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성당을 향하는 발걸음이 참 자연스러운 것 같아."
"여기서 가장 볼 만한 건축물이잖아." 그러자 나는 바로 그렇게 화답을 하고서 성당 쪽을 향한 발걸음을 이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나의 눈앞으로 성당의 모습이 참으로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하미르 대성당, 하미르의 역사와 함께 해 왔다는 이 오래된 성당에 이르자마자 나는 그 정문 부근에 이르러 그 부근에 잠시 머무르려 하였다. 그러다가 계속 나를 따라온 베야 그리고 미냐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그들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이 예배당에 가 본 적이 있었지?"
"예." 그 물음에 미냐와 베야 모두 그렇다고 답했다. 그리고 유치원에 있을 시절에 친구들 그리고 선생님들과 함께 갔었다고 말한 이후에 성당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었다고 말하고서 미냐의 경우에는 그 때 만났던 선생님으로부터 피아노 교습을 받은 적도 있었음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랬었구나." 그 말을 듣자마자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을 하면서 '십자가의 길' 이라 칭해지는 성당 주변에 모여있는 14 개의 표식들을 하나씩 둘러보는 그 때, 나를 따라다니며 베야가 나에게 물었다, 어렸을 때에 성당에 가 본 적이 있었느냐고 물은 것이었다.
"어렸을 때, 어머니를 따라 샤하르 성당에 간 적이 있기는 했어. 그 때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간 것이기는 했지만."
이후, 그 때가 유일하게 성당에 갔던 때였음을 밝히고서 그 이후로는 한 동안 성당 구경을 해 본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다만, 어렸을 적에 어머니를 따라 성당에 갔을 때, 성당에 들르는 어머니의 기도하는 목소리를 바로 옆에서 들은 기억은 있었다고 이야기를 하고서, 당시에는 그 기도 내용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고 이어 밝히기도 했다.
"그런데 그 때의 일로 성당이나 교회 등을 나름 동경했던 것 같아, 저 아르사나가. 학교 진학을 거의 마칠 즈음에 체험 학습을 했던 곳이 수도원이었으니까."
"정말이에요?" 그 때, 미냐가 놀라면서 카리나에게 정말이냐고 묻자, 그가 즉답으로 그렇다고 답하고서, 수도원에서 있었던 일을 내가 늘 이야기 해 왔기에 잘 안다고 이어 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어서 이렇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 그런 것치고 성질머리는 다소 거칠지만 말야."
"그건 그렇고, 저 표식들을 보면서 15 번째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은 해 본 적 있어?"
이후, 나는 마지막 표식 근처로 다가가서 나를 따라오던 두 아이들에게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소녀들은 무슨 의미인지 잘 몰라서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그 때, 카리나가 그런 나의 왼편 곁으로 다가가더니, 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르사나는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대."
이후, 카리나는 나에 대해 수도원에서 생활할 때에 14 개의 표식에 대해, 15 번째는 왜 만들지 않았느냐고 진지하게 물어본 적도 있었음을 밝혔다. 참 부끄러운 일이지만 모두 사실이다. 아니, 부끄럽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모르는 것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배우는 사람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기는 하니. 그 질문에 대해서는 수도원장이 직접 나서서 답변을 해 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15 번째 처소가 왜 없는지에 대해서가 아닌,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이 왜 생겼고, 왜 14 처인지,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제법 진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조금 시간이 지났을 무렵, 카리나는 예배당의 열려있는 문을 발견하더니, 베야 그리고 미냐에게 안으로 들어가 보지 않겠느냐고 물었고, 이어서 두 아이들을 이끌고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려 하였다. 나는 안 되는 것 아니냐고 말하려 했지만 그 시점에서 이미 카리나는 문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고, 애초에 지켜보는 사람들도 없어서 들어가도 괜찮지 않을까하고 생각하며 조용히 카리나를 따라갔다.
예배당 안에는 드벨파 족으로 추정되는 노인 한 사람만 있었다. 붉은 비행사 코트 차림을 한 이로 원래는 쓰고 있었을 모자 그리고 코트는 회중석 한 곳에 벗어두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회중석에 앉아 있을 뿐으로 뒤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아직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 그를 향해 다가가서 그의 왼편 옆 모습을 보려 하였다. 그는 다름 아닌 이전에 만난 적이 있던 알프레드 노인이었다.
'정오 예배 시간은 이미 끝났을 텐데...... 여전히 주무시는 중이신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알프레드 노인의 옆 모습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정오 예배는 이미 끝났을 텐데, 그것을 알지 못하는 채로 노인이 계속 잠들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노인에게 다가가서 그를 깨우려 하면서 노인의 옆 모습을 자세히 보려 하였다.
'주무시는 게 아니었잖아!' 분명 노인은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있었지만 잠들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고개를 깊이 숙인 채로 무언가를 열심히 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옆 모습으로 계속 시선을 향하고 있으면서 조용히 그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를 보려 하는 그 때, 갑자기 노인이 화들짝 놀라면서 자신이 보던 책을 다급히 덮으며 탁상 안의 서랍 안에 그것을 집어넣는 모습이 보였다. 이후, 노인이 자그마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어르신에게 갑작스레 다가가는 것은 아닐세!'
그러다가 고개를 기웃기웃거리다가 자신이 앉은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그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나 그리고 그 왼편에 서 있던 카리나의 모습을 보더니, 우선 나를 바라보면서 나에게 조용히 목소리를 내며 말을 걸었다.
"...... 아르사나로군. 어...... 예배 시간..... 이미 끝나지 않았...... 아니, 끝났을 텐데."
"저 할아버지, 오늘 따라 왜 저렇게 말을 더듬으시니?"
"......" 카리나가 당혹스러워하며 물었으나, 나는 일단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감정을 추스르고 나서 노인에게 물었다, 혹시 많이 피곤하거나 하지는 않았느냐고. 그 물음에 노인은 딱히 그런 것은 없었다고 답했다가, 다급히 '아차!' 라 하더니, 곧바로 지난 밤에 이런저런 일을 하느라 피곤했다고 말했다.
그런 노인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지난 밤에 무슨 일을 했었는지에 대해 물어보려 했었지만 곧 그만두었다. 딱히 의미 있는 질문 같지는 않았음이 그 이유. 그리고서 노인에게 이후에 갈 곳이 있는지에 대해 물었고, 그 물음에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언젠가 나를 만나면 꼭 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음을 밝히고서 그래서 나를 만날 때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하미르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고 말하더니, 이어서 근처의 찻집으로 같이 가도록 할 것을 청했다. 그러더니,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미안하다만, 먼저 밖으로 나가주지 않겠나? 여기서 정리할 것이 있어서 말일세."
"그 서랍 안의 책 말이지요?" 그러자 내가 되물었다. 그리고서 책은 잘 꺼내서 밖으로 가져가라고 답한 다음에 밖으로 나갈 때까지 내가 지켜보고 있겠음을 밝혔다. 그리고서 카리나에게 미냐, 베야를 데리고 먼저 성당의 정문 쪽으로 나가줄 것을 청했다.
"이 보게! 내가 알아서 나간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게 말씀하시고서는 안 나가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그래요." 이에 나는 이렇게 화답을 하고서 책을 가지고 나가는 모습까지 전부 지켜보고 같이 가겠음을 다시 한 번 알렸다. 그리고서 노인에게 대체 무슨 책이기에 내가 책을 가지고 나가는 것을 지켜보지 못할 정도인지에 대해 묻기도 했다.
카리나가 베야 그리고 미냐를 데리고 밖으로 나갈 무렵, 알프레드 노인은 잠시 주변 일대를 기웃거리더니, 책을 서랍에서 몰래 꺼내려 하였다. 그리고 그 책을 들고 회중석을 나가는 순간, 재빨리 노인에게 다가가 그를 두 팔로 뒤에서 끌어 안으며 붙잡았다.
"아이고, 아이고! 어르신에게 무슨 짓인가!"
이후, 나는 고개를 내밀고 그가 들고 있는 책을 가만히 보았고, 그 이후에 그를 붙잡고 있던 두 팔을 다시 놓았다. 노인이 두 팔로 안고 있으면서 어떻게든 보이지 않으려 했지만, 책의 표지 등이 살짝 보여서 그것이 무슨 책인지 바로 그 모습을 보며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할아버지......" 당시 알프레드 노인이 무슨 책을 보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차마 밝힐 수는 없다. 다만,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성당과 같이 신성한 전당에서는 함부로 보아서는 안 되는 부류의 책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 무렵의 노인에게는 여전히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의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이는 곧, 노인은 이미 인생의 황혼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해도, 그 마음에 젊음의 샘이 아직 메마르지 않았음을 의미하기도 했기에 그런 삶을 살아가는 노인에 대한 기쁨을 느낄 수도 있었다.
"미안하네. 아가씨들 앞에서 엄청난 실례를 범했어."
나와 동행하면서 주눅 든 노인을 보며, 내가 환하게 웃으며, 괜찮다고 답했다. 그리고 여전히 젊게 살려 하고 있고, 또 그러한 노인의 모습을 보며, 너무나 다행이라고 화답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곧, 그에게 이렇게 말을 건네려 하였다.
"그래도...... 성당에서는 그런 거...... 함부로 보시고 그러시면 안 돼요. 저야, 교회와 딱히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 별 문제는 아니지만요, 성당 신부님께 들키셨다면 큰일 날 뻔했어요."
그리고서, 그에게 미소를 띠며, "잘 숨기세요~." 라고 말한 다음에 이번 일에 대해서는 카리나 등에게 잘 말해 줄 테니, 그것에 대해 너무 걱정하지는 말아달라 당부하기도 했다.
이후, 나는 노인에게 그 일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노인이 행여 이상한 일을 벌인 것이 나에게 발각되거나 경우에는 그 때의 일에 대해 적나라하게 언급할 수 있음을 넌지시 경고하기는 했다. 그렇게 조용히 넘어가는 가 싶었지만, 노인이 앞장서 근방의 찻집을 찾는 동안, 카리나가 조용히 나에게 다가와서는 물었다.
"아르사나, 잠깐 이리와 봐." 그러더니,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나에게 이렇게 밝히는 것이었다.
"네가 어르신 붙잡은 거, 다 봤어." 그리고서 무슨 책인지 대충 알겠다고 말하더니, 그 책이 무슨 부류였는지에 대한 추측을 바로 나에게 했다. 거의 정답이었다. 그 당시, 카리나는 밖으로 나간 듯한 행동을 취했으나, 실제로는 정문 근처에서 몰래 그 광경을 기웃거리며 보고 있었고,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바로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더니, 조용히 웃음을 띠며 나에게 이렇게 물음을 건네는 것이었다.
"다른 곳에서 보면 되는 것을 문제 될 일도 아니었던 것을 가지고, 왜 굳이 그런 것을 성당에서 보시겠다고 하신 거야?"
"...... 잘 모르겠어." 그 때 내가 건네었던 대답은 이러하였다. 이후, 노인은 문제의 그 책을 적어도 내 앞에서는 꺼내보지 않았으며, 그 이후로 그 책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노인이 가리킨 곳은 교회 옆에 있는 비교적 큰 찻집으로 교회 신도들이 예배를 마친 후에 들르는 곳으로 유명하다고 했다. 찻집 이름은 '상크투아리오 (SANCTUARIO, Sangktuario)' 로 현판에 쓰인 글자들을 보면서 참 솔직한 이름이라 생각했었다. 이 앞에서 카리나와 미냐 그리고 베야는 나 그리고 알프레드 노인과 다른 탁상을 쓰기로 했으며, 원래는 카리나와 내가 따로 찻값을 내기로 했으나, 알프레드 노인이 일행 모두를 위한 찻값을 내 주기로 해 돈을 쓸 일이 없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라 생각이 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이전의 일로 인해 나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해서 나에게 이것저것 사 주려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노인은 나에게 차 뿐만이 아니라 조각 케이크 (Latsthok) 도 하나 사 주었다. 다만, 케이크는 내가 원하는 것으로. 나는 찻집에 진열된 케이크들 중에서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하얀 크림으로 덮힌 케이크를 주문했었다. 그러면서 노인에게 카페에는 그런 케이크가 어울린다고 말했었다.
"아르사나, 자네가 가장 좋아하는 색이 무엇이지?"
노인과 나의 우유 카페가 도착했을 때, 노인이 자신과 마주보며 앉아있던 나에게 물었고, 그 물음에 내가 바로 답했다, 검푸른색 혹은 검보라색이라고. 이전까지는 어두운 보라색 옷을 늘 입고 다녔으며, 신발과 모자 등도 어두운 색으로 맞추고는 했었고, 그래서 나와 어지간히 가까운 사람들이 아니면, 내가 어두운 색을 좋아한다고들 많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의외구먼." 노인이 말했다. 완전히 뜻밖이라는 감정이 그 대답과 함께 전해지는 듯했다. 그런 그를 보면서 내가 왜 그러냐고 물으려 했을 그 때, 노인에게서 이런 말이 들려왔다.
"언젠가 자네를 잘 안다는 어떤 사람이 찾아왔어. 어렸을 때, 너와 무척 친했다고 하더군."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나는 바로 당황하면서 나와 어렸을 때에 함께 살았다는 사람을 떠올려 보았다. 친한 사람의 정의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기는 하겠지만 나와 무척 친했다고 할 만한 사람이라면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소리 (Sori)' 라는 이름을 가졌던, 지금은 나와 인연이 끊어졌다고 여기었던 사람. 그 사람 정도였고, 애초에 어렸을 적에는 슈라일의 호수가에서 어머니와 함께 단 둘이서만 살았고, 호수가의 집 근처를 잘 떠나가지는 않았던지라 가까웠던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 사실, 소리 이외에도 내가 자주 만난 사람이 또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나와 친한 사람이라고 말하기는 여러가지 의미로 어려웠다. 소르나가 소리와 친했다고 하는데, 내가 그를 직접 만나보거나 한 적은 없었던 것으로 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노인에게 물었으나, 노인은 그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그저 '아르사나라는 사람과 어렸을 때 친했던 사람 정도로 알아달라' 라는 말만 남기고 급히 사라졌다고 했으니, 그를 생전 처음 보았을 노인이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 리가.
"그 애가 와서 자네에 대해 말했어, 자네가 하얀색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야. 그것도 성스러운 빛을 연상케하는 하늘색 기운을 띠는 하얀색을 가장 좋아하고, 그 다음으로 순백색을 좋아한다고 하더구나. 그것도 자네가 어렸을 때부터."
그는 노인에게 내가 좋아하는 색깔에 대해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으로 말했다고 노인이 말했다. 그런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여러모로 놀라고 있었다. 나의 취향에,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던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나를 오랫동안 관찰한 사람이 있음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대체 어떤 사람이야?' 이런 생각이 우선 들었다. 그러면서도 그 사람이 언젠가, 그 어렸을 때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슈라일 혹은 샤하르에서 나와 잠시나마 인연을 맺은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을 했다.
"아무튼, 그 사람이 너한테 전해 달라고 한 가지 물건을 가져와서 나한테 주더군. 그러면서 나한테 이렇게 말했어, 물건을 전해주지 못할 때에는 18 시 즈음에 성당의 정문 앞으로 와 달라고 말이야. 그랬는데, 물건을 전해줄 수 있어서 다행이구먼."
그러더니 왼쪽 주머니에 왼손을 집어넣고 주머니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나에게 반짝이는 무언가를 왼손으로 건네려 하였다.
"자, 받게." 그것은 다름 아닌 머리띠였다. 하얀 결정을 가공해서 만든 머리띠로 한 가운데에 파란 빛을 발하는 자그마한 파란 보석이 자리잡고 있었다. 노인에 의하면 이 보석은 원래 투명한 색이지만 마력의 작용으로 파랗게 빛난다고 하며, 그 보석의 색이 붉거나 검게 변하면 착용한 사람의 신변에 이상이 생긴 것임을 의미한다고 했다.
"이 보석은 원래 투명한 색이라 하더군. 이게 아마 동물의 뼈를 가공해서 만든 보석이었다고 들었다네. 마력의 작용을 통해 하얀색이나 파란색 빛을 발하지만, 붉은색이나 검은색으로 변하면 이 머리띠를 착용한 사람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음을 의미한다고 했어. 그 점 잘 기억해 두게나."
이후, 나는 머리띠를 바로 착용했다. 머리의 정수리 부근에 머리띠를 올렸다. 그 모습을 본 노인은 껄껄 웃으면서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또 한 가지 물건이 있다면서 주머니 안에서 꺼냈다. 그것은 파란 빛을 발하는 새하얀 끈으로 만든 목걸이. 목걸이에는 천사의 모습을 형상화한 장식이 있었다. 그것 역시 나를 위한 선물로서 그 사람이 노인에게 건네었을 것. 목걸이를 건네받자, 나는 곧바로 그 목걸이 역시 목에 걸었다. 당시의 나는 하얀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덕분에 목걸이의 은은한 파란 빛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노인을 통해 나에게 보석이 박힌 머리띠 그리고 목걸이를 건네었던 그 사람. 누구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그 사람이 나를 해코지하거나 위협할 사람은 아닐 것임은 일단 확신할 수 있었다. 이렇게 선물까지 줘 놓고, 막상 내 앞에서 적으로 만난다면 참 골 때릴 노릇.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기는 했지만 행여 만날 수 있다면 적어도 나를 위한 선물을 건네준 것에 대해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렇게 누구인지 모를 나와 인연이 있었다는 사람으로부터 받은 목걸이 그리고 머리띠를 착용하고 난 이후, 알프레드 노인이 그런 나를 보며, 이제 슬슬 지브로아로 갈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었고, 그 물음에 나는 조용히 미소를 띠며 "그렇지요." 라고 답하고서, 정중히 목소리를 내며 이어 말했다.
"이전에 말씀드린대로, 뱃길을 이용해 가려고 하고 있어요. 그 전에 이 곳에서의 일들 역시 차분히 정리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떠나려 해요."
"그렇구먼." 이에 알프레드 노인은 그렇다면 한 가지 이야기를 해야 하겠음을 밝혔다. 바로 기억의 사당이 위치한 가브릴리아의 북서부 지역, 지브로아에서 전승되어 왔다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에 대해 기억의 사당 관계자들에게도 전승되고 있으며, '괴물' 과의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그런 이야기라 노인이 밝혔다.
"그 날 이후로 하미르에 있으면서 여러 사람들로부터 수소문을 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네."
그리고서 여러가지 놀라운 이야기들을 알 수 있었음을 밝히고서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는 모습을 보이더니, 이어서 나에게 이렇게 물음을 건네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
"...... 혹시, 자네, 역사 상으로 가장 유명한 학살 사건으로 알고 있는 것이 뭐가 있나?"
느닷 없는 듯이 알프레드 노인은 나에게 과거 역사의 유명한 학살 사건에 대해 질문을 건네고 있었고, 그러한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모 행성계의 학살 사건과 같은 끔찍한 사건이 이 행성계의 먼 옛날에도 있었고, 지브로아의 괴물은 그 학살 사건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그와 더불어 지브로아의 북쪽 해안에 있는 '기억의 사당' 역시 그 학살 사건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서 루마 제국의 동북부 지역에서 발생했던 이제흐 (Iser, Izekh) 혹은 이제르의 학살 사건 그리고 통일 루마 제국 중부에서 발생했던 바스티아 (Vastia) 에서 발생한 학살 사건이 있겠지요."
"그렇지. 바스티아 학살 사건은 루마 제국의 동서 분할 이전의 사건으로 루마 제국에 바스티아 일대를 정복하면서 발생했던 포로 학살 사건이었고, 이제르 학살 사건은 동서 분할 후, 서 루마 제국 (Luma Occidenta, Lume Occidentale) 에서 발생한 일로 알고 있다."
서 루마 제국, 이후의 뤼므 (Lume) 왕국에서 발생한 이제흐의 학살 사건은 정복 전쟁 이후에 격렬히 저항했던 군인들이 희생자였던 전쟁 범죄인 바스티아 학살 사건과 달리, 루마 제국에서 발생했던 학정에 대한 민중의 저항에 의해 발생했고, 그것이 제국군에 의한 시민들의 학살로 마무리 지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 이후, 서 루마 제국의 동북부 지역으로 알레마니아 (Allemania) 와의 접경 지역에 있던 이제흐는 이후, 제국에 대한 깊은 적개심을 갖게 됐으며, 결국 알레마니아의 침략 때에 알레마니아 측에 귀속, 알레마니아의 영토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부여된 알레마니아 식 이름은 이절론 (Iserlohn, Izëhlohn). 서 루마 제국의 악명 높은 '어둠의 기사' 가 이 이제흐 혹은 이절론 출신으로 부모가 이제흐 학살 사건 당시에 살해당해 고아가 되었다고 알고 있다.
서 루마 제국 이후의 뤼마 왕국의 가장 큰 상흔이라 할 만했던 이제흐 학살 사건의 주범이었던 사람은 장 오귀스틴 기욤 (Jean Augustine Guillaume) 이었다. 이 중에서 장 오귀스틴 기욤은 본래 루마의 본토였다가 동서 분할 후에 교황령으로 독립했던 라테눔 (Latenum) 혹은 라테오 (Lateo) 출신으로 라테오 식 이름은 '조반니 아구스티노 오르마네스코 (Giovanni Agustino Ormanesco)' 였다고 한다. 아우로스는 이후, 반란 진압의 공적을 황제로부터 인정받아 루마 군 사령관으로 취임했다가 이후에 암살당했다고 하며, 기욤은 그 이후에 있었던 동 루마 제국 혹은 루미아 / 루메아 (Lumea) 왕국과의 전쟁에서 졸전을 거듭해 문책을 당했고, 이후 처형당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제흐의 학살 사건에 대해 언급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그러자 노인이 답했다. 그 사건 역시 삶을 원했던 민중을 군인들이 잔혹하게 짓밟고 죽여간 사건이었음이 그 이유였다고. 그러면서 노인은 말했다,
"아르사나, 네가, 그리고 알 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듯이, 이 행성계 역시 과거에는 옛 인류에 의해 발생한 문명이 자리잡고 있었고, 수많은 인간들이 문명을 기반으로 생활하고 있었지. 이 행성계의 어디든 인류의 문명이 미치지 않은 곳은 없었어."
하지만 모종의 이유, 아마도 기후의 변화 때문이겠지. 그런 이유로 인해 인류의 생활은 험난해지고, 여러 지역들이 수몰되거나 살기 어려운 땅이 되었지. 지금의 가브릴리아 일대는 원래는 드넓은 대지가 자리잡고 있었단다. 그 대지 위에 나라의 민중이 재난을 피해 피난 온 도시가 있었지. 지금은 바위섬들이 모여있는 지브로아의 북쪽 일대에 그 도시가 자리잡고 있었을 게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 대부분이 수몰되어 사라졌지.
그 지역은 하나의 군 부대가 관할하고 있었다고 하더구나. 제법 큰 부대가 있었지. 재난 속에서 '괴물' 들이 다수 생겨나 그 지역 일대를 위협하고 있었으니, 당연히 제법 큰 규모의 부대가 그 근방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그 부대에 소속된 장갑 보병들이 도시에 들어오기 시작했지. 부대의 장갑 보병들은 원래 '괴물' 들로부터 도시를 지키기 위해 도시의 변방에 배치되어 있었어. 그 장갑 보병들이 도시로 쳐들어와 인간들의 거주지를 무분별하게 공격해 파괴하기 시작했던 것이지. 사람들은 경악했지, 자신들을 지키겠다고 온 군이 자신들을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으니 말이야.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군이 더 이상 자신들을 지켜주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을 죽이려 하고 있음을 알게 됐지. 군 부대가 도시에 인간들을 위협해 오던 '괴물' 들을 풀어놓아 민간인들을 잔인하게 학살하기 시작했던 게야!
더욱 끔찍한 것은 이런 일은 인간이 거주하는 모든 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이었지. 즉, 군 자체가 시민들을 배신하고 '괴물' 들과 협력해 시민들을 죽이는 데에 앞장서고 있었다고 해도 무방해.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말할 수 없다네.
그 무렵, 어떤 군인이 있었어. 그 부대 예하의 수도 경비를 맡은 부대의 부대장이었지. 계급은 대위였다고 되어 있지만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아. 그는 일련의 사태 속에서도 민중을 지킨다는 자신의 사명을 이행해 갔어. 지역 부대의 민간인 학살 소식 이후에 군 자체가 민중을 배신했다는 소식을 접한 이후, 그는 스스로 시민들을 수호하는 수호대의 대장이 되기로 하고 자신을 따르는 부대원들 그리고 시민들을 모아 하나의 작은 구역을 거점으로 삼았어. 모든 지역을 지킬 수는 없었다네. 부대원들의 숫자도 적어 도시의 모든 사람들을 지킬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게야.
그는 최선을 다해 자신의 부대원들과 함께 '괴물' 과 합세한 군의 전력과 맞서 시민들을 지키려 했지만 결국 '괴물의 무리' 그리고 그 무리와 합세한 군의 압도적 전력에 의한 희생양들 중 하나가 되고 말았다네. 괴물들을 앞세운 군인들은 수호대에 속한 부대원들 그리고 그들이 지키는 구역에 있던 시민들을 잔인하게 끌어내 무참히 죽였지.
'괴물' 그리고 군인들은 시민과 군인들을 잔인하게 살육했고, 살아남은 이들 역시 자신들의 거점으로 끌어내, 사브르 (Sabre) 로 하나씩 목을 쳐서 죽였다네. 땅에 묻은 채, 죽였다는 말도 있고, 사지를 절단했다는 말도 있다더군.
마치 살육을 즐기는 듯했던 군인들과 짐승들은 그들의 시체를 어딘가로 가져가 버렸다고 하더구나.
"그 '괴물' 들은 실제로는 기계들이었겠지요?"
"어떻게 알았나?" 이야기를 한참 듣고 있던 나는 곧바로 노인에게 곧바로 그렇게 물었고, 그 물음에 노인은 그렇다고 답하고서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었다. 이 물음에 내가 답했다. 샤르기스 유적의 깊은 곳을 탐사하면서 '푸투로 (Futuro) 계획', 그리고 그 계획을 관할했던 사람에 관한 기록을 보았다고 우선 그렇게 말했다.
"그 사람과 관련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하미시 근교의 고대 유적에서는 인간을 저주하는 석판들이 다수 발견되었고, 또, 유적의 지하 깊은 곳에는 거대 병기가 자리잡고 있었어요. 그 병기의 심부에는 플라즈마 반응로가 내장되어 있어서 인간의 몸에서 특정한 성분들을 추출해 플라즈마를 생성하기도 했을 거예요."
"인간의 몸을?" 이에 노인이 놀라면서 묻자, 내가 눈을 감으면서 이전보다 더욱 진지하게 목소리를 내며 그렇다고 답했다.
"이러한 사항들을 통해 어쩌면 인간을 증오하고 저주하는 사념 그리고 인간의 몸을 이용해 전력을 생산한 병기들의 존재가 그 사람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사람이 군대의 관계자들을 모종의 방식대로 선동하거나 세뇌해서 시민들을 학살하게 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는 않았겠지요."
이에 노인은 제법 정확한 추측이라고 말하고서 '괴물' 의 정체는 푸투로 계획의 관계자가 개발한 기계 병기들이었으며, 그 관계자는 자신의 추종자들을 통해 군 관계자들에게 보다 많은 인간들을 학살하도록 하니, 더 많은 시민들을 학살하면 할 수록 '선택받은 자' 로 간택될 가능성이 높아지며, '선택받은 자' 가 되면 재난을 피해 인류의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갈 우주선의 탑승 자격을 얻게 된다며 군 관계자들과 정치인들을 선동했었다고 그 때의 일에 대해 밝히고 있었다. 그리고,
"학살당한 민중의 시체들 그리고 포로가 된 사람들은 어느 거대 우주함에 끌려갔으며, 그 이후에 사라졌다고 하더구나."
"그렇군요. 만약에 인류의 보금자리를 찾아갈 수 있는 우주선을 푸투로 계획을 주관했던 사람이 실제로 건조했다고 하더라도, 그 동력원은 제가 언급했던 그 플라즈마 반응로였을 거예요. 그리고 그 반응로에서 전력을 생산할 플라즈마는 아마도......."
"그만하게." 이후, 나의 이야기를 노인이 저지했다. 그리고서 그는 그 사악한 군단에 의한 학살 속에서 살아남은 이는 단 한 사람 뿐이었다고 말하고서 그는 부대 소속의 신병으로서 부대장이 사전에 살아남으라 명하면서 피난선을 타고 지역을 탈출하게 한 사람이었음을 밝혔다.
"부대장에 의하면 그 신병은 겁이 많았고, 죽이는 것을 너무나 꺼리는 사람이었다고 하더구나. 그런 처지에도 지역을 지키기 위해 많은 남자들이 군에 자원 입대하자 그 열풍에 가세에 군에 입대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더군. 그런 그의 기질을 부대장은 진작에 알아보고 전투가 시작될 즈음에 미리 그를 탈출하게 했던 게야. 그리하여 그는 그 부대장이 지키던 지역에서 탈출해 살아남을 수 있었지."
"그렇다면, 그 때의 신병은 어떻게 되었나요?"
"잘은 모르겠네. 하지만 모든 인류가 멸망을 피하지 못하는 상황 하에서 살았다고 한들, 결국에는 멸망의 여파와 '괴물' 이란 이름의 기계 병기들이 일으키는 재난을 피하지는 못했을 게야."
그 무렵, 카리나가 나와 노인이 마주보며 앉은 탁자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미냐 그리고 베야도 그를 따라 같이 오고 있었다. 이후, 카리나는 나 그리고 나와 마주보며 앉은 노인의 모습을 보더니, 무엇에 대해 그렇게 심각하게 대화하고 있었느냐고 묻는 목소리를 냈다.
"아르사나, 할아버지하고 무엇에 관해 그렇게 심각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
"그러니까...... 지브로아에서 할아버지께서 겪으신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 괴물 때문에 많이 고생하셨다는데, 어떻게 고생을 하셨는지에 대해 내가 이야기를 들려달라 했고, 할아버지께서 이야기를 해 주시고 계셨지."
그러자 내가 답했다. 사실은 아니었지만, 미냐, 베야 같은 어린 아이들이 같이 있는 자리에서 함부로 할 이야기는 아니었던지라 사실대로 말하기는 여러모로 곤란했다. 이런 나의 대답에 카리나는 솔직한 대답이 아님을 바로 의심했지만, 그렇다고 그것에 대해 뭐라 말하거나 하지는 않으려 하는 듯해 보였다.
"할아버지, 아르사나가 카페 말고 뭘 주문했었어요?"
"새하얀 우유 케이크를 주문하더구나." 그러자 알프레드 노인이 답했다. 그러더니, 아무래도 그 하얀색이 그의 취향에 잘 맞았던 것 같다고 그에게 말하기도. 이에 카리나는 조용히 미소를 띠며, 나에 대해 이렇게 말을 건네려 하였다.
"원래 그 애가 은근 새하얀 것을 좋아하더라고요. 처음에는 아닌 척했는데, 결국 솔직하게 하얀 것도 좋아한다고 밝혔지요. 그 애는 두 번째로 그런 색을 좋아한다고 했었는데......"
내가 실제로 천문대에서 만났던 이들에게 밝힌 바 그대로였다. 하지만 천문대 친구들은 다들 반신반의했던 것으로 안다. 나의 말을 전적으로 믿어준 사람들은 단 둘이었는데, 세나와 소르나였다. 이후, 세니아가 나에 대해 좋아하는 색에 대해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다고 말하면서 나에게 '거짓말을 하면 꼭 티를 낸다' 라고 평을 하기도 했었다. 세니아는 어두운 색과 밝은 색 둘 다 똑같이 좋아하는 것 같다고 나에 대해 언급을 했고, 그래서 천문대 사람들은 나의 색 취향에 대해 다들 그렇게 알고 있다.
"사람은 솔직해야 해. 거짓을 내세우면 언젠가는 들키게 마련이거든."
이에 노인은 껄껄 웃으면서 나에게 그렇게 충고하듯이 말했다. 이후, 카리나는 자신은 아이들을 데리고 해변에 주변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겠다고 말하면서 밖으로 나가려 했고, 그러면서 나에게 잘 있다 오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나에게 어디 있을 것인지에 대해 이렇게 알려 주었다.
"도시의 중앙 분수대 근처에 있을 테니까, 찻집을 나서면 그 쪽으로 와, 알았지?"
"알았어." 그러자 내가 바로 알겠다고 답하고, 그 이후에 카리나는 찻집을 나섰다. 카리나가 그렇게 찻집을 나선 이후, 알프레드 노인은 나를 보면서 기억의 사당에 I-V-X-V-I 라 쓰여진 간판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는지에 대해 물었고, 그 물음에 나는 잘 기억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 우, 익스, 우, 이라 읽혀지는 간판이었지요?"
"그렇다네." 그러자 노인이 답했다. 그리고서 그것이 지브로아, 기억의 사당 부근에서 출몰하는 '괴물', 그리고 그 간판과 어떤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그 학살 사건이 '괴물' 그리고 간판과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되어 있을 것이라 추측하는 이들은 있어왔다는 말도 들었음을 밝히기도 했다.
"그렇군요." 이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노인의 말에 화답했다.
I-V-X-V-I. 이 글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밝혀진 것이 없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이 글자들을 'Ira Vana eX Vana Imagine (공허한 상상에서의 공허한 분노)' 라는 라테나 어로 해석한 것이 글자들의 뜻으로 알려진 바 있기는 했지만, 그것이 정확한 뜻인지는 아직 알 수 없는 상태. 다만, 지금의 지브로아 일대에서 발생한 학살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쩌면 그 '괴물' 그리고 간판은 어떤 식으로든 그 사건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만약에 간판이 학살 사건과 관련이 있다면, 학살 사건 이후, 그 사건을 목도했을 누군가가 그 비극을 표현하기 위해 I, V, X, V, I 라는 글자를 썼을 것이다. 직접 표현할 수 있거나 하지 않은 관계로 5 개의 글자로만 표현하려 했던 것일 수도 있다.
'괴물' 이 학살 사건과 관련이 있다면 그것은 학살 사건 도중에 일어난 일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군 그리고 군과 협력한 괴물-기계 병기-들의 만행에 의해 탄생한 산물일 수도 있다는 것. 알프레드 노인에 의하면 학살 사건 이후, 학살된 사람들의 시신들 그리고 포로들은 군의 모함에 끌려가면서 사라졌다고 한다. 그렇게 사라진 시신과 사람들의 육신과 영혼 그리고 사념이 실체화되어 괴물의 몸을 이루고 있다면......?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의 표정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지금 이후로 정말로 심각한 적과 맞서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음이 그 이유. 그러면서 노인에게 일련의 이야기들이 괴물 그리고 그 간판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떻게든 그 진상을 파악해 보겠음을 밝혔다. 그러자 노인은 잘 알겠다고 화답하고서 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너의 모습은 어렸을 적, 샤르기스에서 본 것이 전부이기는 하지만, 그 때에도 당차고 똘똘한 아이라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 너도 나이를 먹고, 나이를 먹은 만큼, 뛰어난 능력을 가졌을 테니, 잘 해낼 수 있을 게다, 믿어 보겠네."
그러더니, 노인은 나에게 혹시 궁금한 사항이나 나에게 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에 대해 물었고, 그 물음에 바로 카리나에게서 받아둔 그림 한 장을 왼쪽 바지 주머니에서 꺼냈다. 짧은 머리카락을 가진 활동적인 인상의 소년처럼 보이는 소녀와 그 옆의 하얀 옷을 입고 다소곳이 앉은 어린 소녀, 그리고 젊은 여성이 나란히 앉은 모습을 표현한 그림으로 소리와 소르나 그리고 나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라 카리나에게 밝힌 바 있다. 그 그림을 보여주며, 나는 왼쪽의 아이에 대해 알려달라 청했다.
"이렇게 생긴 여자를 본 적 있으세요?"
"어디 보자......" 그 여자를 알 만한 나의 지인으로서 그림을 보여주며, 소리라는 이름을 가진 그 소녀의 행방을 물었던 것.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알프레드 노인은 내가 소리라 칭한 왼쪽의 어린 소녀에 대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낯설지는 않은 인상이라 밝히고서.
"이렇게 생긴 아이를 베라티사에서 본 적이 있다네." 라 말했다. 그 말은 즉, 그의 모습을 본 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나는 바로 노인에게 흥미를 갖고 그에 대해 묻자, 노인이 차분히 나에게 그 소녀의 이름을 아느냐고 물었다.
"소리라고 들었어요." 소리, 그 여자의 이름을 답으로 말하자, 노인은 "그렇구먼." 이라 말하더니, 곧바로 그 이름과 비슷한 이름을 가진 여자를 본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베라티사의 마도학자로 최근에 가마일 산의 천문대에 있다가 베라티사로 돌아온 사람이라 했다. 알프레드 노인이 언급한 사람이 누구인지 말을 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소르나였다. 아무래도 이름이 비슷해서 동일 인물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라 여길 참에 노인이 말했다.
"그 모습을 본 적이 있긴 있다네. 얼굴 모습이 약간 비슷한 느낌이 있더구나."
그러더니, 그림의 한 가운데에 있는 어린 소녀를 보더니, 그 소녀에 대해 물었다. 그 소녀의 머리카락 모양이 지금의 내 머리카락 모양과 상당히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내가 환하게 웃으면서 머리카락 모양은 얼마든지 비슷하게 할 수 있지 않느냐고 되물었고, 그런 나의 말에 알프레드 노인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그러할 수는 있겠지. 어렸을 때, 자네는 머리카락을 짧게 하고 다녔다고 말했었지?"
말을 마치면서 건네는 물음에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그러자 알프레드 노인은 "왼쪽에 보이는 소녀처럼?" 이라고 물었고, 이 물음에도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이에 알프레드 노인은 그저 의미심장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면서 나에게 "잘 알겠구먼." 이라는 한 마디 말만 건네고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서 노인은 내가 그림을 다시 왼쪽 바지 주머니에 넣은 그 때에 찻집을 등지며 나가려 하면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에 대해서는 셀린하고 그 엘베 족 자매들에게 좋은 이야기를 들었었지. 지브로아에서도 잘 해 줄 거라 믿네. 여러가지 의미로 힘들겠지만, 자네는 잘 이겨낼 걸세."
그리고서 찻집 입구에서 나를 향해 잠시 고개를 돌리고서 나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었다 : "그러면 언젠가 또 보세."
노인이 떠나간 이후, 나 역시 모든 자리를 정리하고 찻집을 떠났다. 그리고 카리나가 언급한 그 분수대로 가는데, 분수대에서는 카리나 뿐만이 아니라, 세니아, 나에티아나에 세나, 잔느 공주까지 내가 만났던 일행 전부가 미냐, 베야와 함께 모여 있었다. 세나가 미냐, 베야와 함께 정구의 일종인 경기를 즐기고 있었고, 그 광경을 카리나, 나에티아나, 세니아, 잔느 공주가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전에 일행은 중앙 광장에서 모이기로 하고 흩어졌었는데, 그 일행이 이제 다시 모이게 된 것이었다.
이후, 나는 세니아 그리고 나에티아나에게 다가가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고, 그 물음에 나에티아나가 의외의 대답을 했다. 셀린 그리고 에오르 자매를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정말 놀라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고 했다.
"무슨 이야기였는데?" 하지만 나에티아나는 깊이 들어가면 너무 심각한 이야기라서 그것에 대해서는 하미르 동부로 갈 즈음에 이야기를 해 주겠음을 밝혔다. 이후, 내가 무엇에 관한 이야기였냐고 재차 묻자, 세니아로부터 답이 나왔다 : 기억의 사당 그리고 사당에 있는 괴이한 표지판에 관한 이야기였다고 한다.
'설마, 그 이야기인가.......' 기억의 사당 그리고 표지판에 대한 이야기.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나는 혹시 노인이 나에게 들려준 그 이야기인가? 라는 생각을 했다. 그들 역시 지브로아에 있는 기억의 사당에 관해 의문을 품고 있다가 그것에 대해 알아내기 위한 일련의 과정들을 겪어보았으리라.
"혹시 기억의 사당과 사당에 있다는 그 표지판에 관한 이야기야?"
내가 묻자, 세니아가 그렇다고 답한 이후에 어떻게 알았냐고 되물었고, 그 물음에 나는 내 지인인 노인을 만났음을 밝히고서 그가 하미시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는 셀린, 에오르 자매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니, 분명 그 이야기였을 것이라 생각했었다고 화답했다.
"그 때, 그 할아버지께서는 그 이야기와 지브로아의 괴물이 어떤 관련을 갖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시고 계신 것 같았어. 그 분들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고 계셔?"
이후, 내가 묻자, 세니아가 답하기를, 셀린은 괴물이 이야기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라 믿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서 그는 에오르 자매 역시 셀린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혼령이 괴물에 속박되어 있어서 괴물을 처치해야 그들을 해방시킬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다고 이어 알렸다.
"물론 확실한 정황은 없어서 그 분들의 말씀이 사실인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충분히 가능한 추측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해. 아르사나, 너도 비슷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지?"
이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답했다. 그리고 '괴물' 이 실제로는 그 당시의 살육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들의 원념이 실체화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추측을 한 적이 있었음을 그에게 밝혔고, 그 말을 들으면서 세니아는 셀린의 추측과 나의 추측에 대해 비슷한 일면이 있기는 하지만 서로 다른 의미를 갖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고서 어느 쪽이 사실인지에 따라 그 '괴물' 을 상대하는 방법에도 차이가 있을 것 같다고 괴물에 대해 말했다.
"어떻게 차이가 나는 건데?"
"전자의 경우라면 내가 아까 이야기했던 바처럼 '괴물' 은 우리의 처치 대상이 될 거야. 하지만 후자는 달라.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정반대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네. 후자의 경우대로라면 '괴물' 은 처치가 아닌 구원의 대상이고, 그저 사악한 사념체에 둘러싸여 있을 뿐이니까."
카리나의 물음에 세니아가 제법 심각하게 목소리를 내며 답했다. 그리고 그대로라면 사악한 사념체를 가르고, 그 안에 내재되어 있을 '괴물' 의 실체를 목도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야 할 것이라고 이어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듣고 보니, 비슷한 이야기 같아 보이기도 하네요."
그러자 나에티아나가 말했다. 그러자 세니아가 "아니지." 라고 답하더니, 이어서 전자의 추측은 어떤 사악한 사념에 의해 '괴물' 이 실체화되었고, 영혼들이 그것에 잡혀있다는 의미이고, 후자의 추측은 영혼들이 '괴물' 을 이루었다는 것이기에 차이가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 그 대답에 대한 근거를 밝혔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간에, 그런 '괴물' 을 앞에 두고 우리가 해야할 일은 결국 사악한 사념 속에서 영혼들을 구원한다라는 것은 같잖아요."
듣고보니 그랬다. 우리가 해야할 일의 방향은 '괴물' 의 사악한 사념에서 지브로아 일대에서 발생한 살육에 의해 희생당했을 인류의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 두 가지 추측은 '괴물' 의 생성 원리를 거의 다르게 말하고 있었지만, 적어도 '괴물' 의 몸 속으로 파고들 수 있다면 영혼들을 해방시키는 과정은 비슷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애초에 '괴물' 이 그 때의 영혼들과 관련이 있음이 사실이라는 전제 조건이 수립되어야 우리가 그렇게 대처할 수 있겠지요. '괴물' 이 그 당시의 영혼들과 관련이 있음이 사실임은 아직 명확히 밝혀진 바는 없지요?"
그 때, 그 동안 가만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잔느 공주가 나를 비롯한 일행에게 물었고, 그 물음에 세니아가 "그렇지요." 라고 답했다. 그리고서 잔느 공주에게 지브로아에 있다는 '괴물' 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저도 명확히 알려진 것이 없다고 하니, 잘 모르겠어요. 다만...... 말씀하신대로 '괴물' 이 그 시대 사람들의 영혼과 관련되어 있지 않기를 바랄 뿐이에요."
아마도 잔느 공주는 무고하게 살해당한 영혼들이 괴물의 몸을 이루거나 괴물에 잡혀 있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듯해 보였다. 생전에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당했을 사람들이 그 이후에도 오랜 세월, 1000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괴물' 이라 칭해지게 될 어떤 존재의 몸에 속박되어 있다니, 그에게는 그토록 무섭고 끔찍한 일은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자 내가 조용히 미소를 띠며, 걱정의 심정이 들었을 잔느 공주에게 이렇게 말을 건네려 하였다.
"아직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이라고 단언된 적은 없어요. 그러니, 너무 그것에 대해 심려하지는 말아요."
그리고서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사악한 존재에 의해 무고한 영혼이 잡혀 있었다니, 이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라고 잔느 공주에게 말하기도 했다. 물론 그 시대에 태어난 산물인 만큼, 나는 '괴물' 을 마주할 때, 그러한 추측대로 현상이 나타날 것이라는 전망을 하고 있었고, 따라서 잔느 공주에게 했던 말은 빈 말이기는 했지만 나 역시 천년 넘는 세월 동안 사악한 생각 없이 살았던 이들이 깊은 물 속의 지옥에 갇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한편으로는 안타깝고, 한편으로는 화가 났으며, 그래서 그런 일을 벌인 원흉이 나타난다면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했었다.
"아마 예나 선생님이라면 더 많은 것을 아시고 계시겠지요. 그 분을 만나시면 그것에 대해 더 이야기해 보기로 해요."
이후, 나에티아나가 말했다. 루이즈와 동행하고 있을 예나라면 그것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을 수 있을 것이라 그는 믿고 있었으며, 나 역시 그러한 그의 생각에 동의하고 있었다. 물론 그 역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나보다는 더욱 확고한 답을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세나와 아이들의 경기가 끝나고, 이후, 세나는 줄 하나를 잡고 줄넘기를 하고 있었다. 세나도 워낙 운동 능력이 뛰어나서 다회 연속 넘기를 곧잘 잘하고는 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가 줄넘기하는 모습은 아이들의 구경 거리가 되고 있었다.
그 이후, 미냐, 베야와의 공놀이는 내가 하게 됐다. 아무래도 그 아이들이 나와 오래 있었기에 다음에 공놀이를 할 이로 나를 지목한 것. 이후, 나는 아이들과 함께 정구 놀이를 시작했다. 그 때, 카리나로부터 "아이들 앞이니까 조금은 봐 주면서 해." 라는 당부의 말을 들었고, 그 당부에 나는 "알았어~." 라고 답한 다음에 경기를 시작했다. 아이들도 은근 만만치 않아서 둘이서 나와 맞서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진지하게 하는 것은 예의상 곤란했기에 적당히 봐 주면서 하려고 했다.
이전에 아이들과 함께 경기를 했던 세나와 달리, 나는 아이들에게 다소 높은 벽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저 애가 아이들하고 공놀이 경기를 즐긴 적이 있었던가."
"아이들하고는 세나하고 내티-나에티아나-가 잘 놀아주기는 했는데...... 저 애도 아이들을 좋아하니까, 몇 번 놀아주기도 했던 것 같더라. 그런데, 세나, 내티와는 다르게, 저 애는 아이들이라고 잘 봐주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어. 그래서 아이들 입장에서는 세나, 내티보다 저 애가 공놀이 경기를 더 잘한다고 믿는 애들도 있었던 것 같아."
카리나의 물음에 세니아가 답했다.
"처음에는 아르사나가 애들 앞에서 적당히 놀아주기를 어려워하는 줄 알았잖아, 그렇지?"
"응." 카리나의 이어지는 물음에 세니아가 다시 답했다. 그리고서 몇 번 경기를 치르는 모습을 보면서 깨달았다고 밝혔다, 원래 내가 그런 스타일이었다고. 아이들 앞에서도 봐 주는 모습을 보여주려 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음을 이후에서야 알았다는 것이었다.
세나는 적당히 아이들과 놀아주며, 아이들이 이기도록 해 주었었다. 나도 잘 놀아주려 했지만 아이들이 이기도록 할 생각은 없었다. 몇 점씩 앞서다가 쫓아올 즈음에는 다시 점수 차를 벌리는 식으로 승부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적당히 즐기면서 경기를 하던 지난 때와 달리, 이번에는 나름 치열하게 이기려고 노력하고 있는 모습이 상대해 주는 나에게도 보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세나 님과 저는 자상한 선생님 같은 유형이라면 아르사나는......."
"다소 엄격한 교관 유형이야, 저 애는." 나에티아나의 물음에 세니아가 즉답을 했다. 그리고 자신들을 비롯한 이들이 선생 노릇을 하게 되면 아이들이 나를 가장 힘들어 할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아이들이 가장 편하고 착하게 여길 사람은 (당연하게도) 나에티아나, 세나, 소르나 등이었다.
"그런데, 아르사나 같이 다소 엄격하고 거친 면이 있는 애들도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아? 학교라면."
"그렇다고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것 같아." 이후, 카리나가 건네는 물음에 세니아가 다시 답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치열하게 승부에 나서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저 광경이 그 이유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카리나, 나에티아나 등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 중에 저 배구 경기를 가장 잘 하는 애가 누구야?"
"가장 못하는 애는 소르나일 테고...... 그 애는 원래 운동이나 경기에는 재능이 참 없으니. 잘 하는 애는 세나였을 거야."
아이들은 잘 모르겠지만-아마 이 글을 봤다면 알았을 것이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평가에 의하면 진짜로 구기 종목의 실력자는 세나다. 특히 배구 쪽에서 진가를 드러냈는데, 한 번 공을 제대로 던진 것에 맞으면 상당히 아플 정도였다.
"맞아, 나도 그렇다고 생각했어, 세나가 우리 중에서 가장 잘 했던 것 같아."
"응, 뭐든 못하는 것이 없었는데, 배구가 여러모로 압권이었지. 날리는 공마다 맞으면 엄청나게 아플 정도였으니까."
카리나가 세니아의 추측에 대해 공감을 한다는 말을 건네자마자 세니아가 그것에 이어지는 말을 건네려 했다. 그러면서도 나에 대해서도 나 역시 만만치 않은 것은 사실이라 말하고서 세나에 비해 기술이 다소 서투르기는 해도 힘이 엄청나서 투구가 상당히 위협적이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투구 자체는 나는 아르사나 쪽이 더 무섭다고 생각했는데. 그 애는 한 번 작정하고 날리면 바람 소리 내잖아."
그랬던가. 당시에는 대충 들리는 정도라서 의식을 할 여유가 없었는데, 나중에 그런 이야기가 들렸다는 것을 알고 나서 의외라 여기었던 기억이 있다, 나는 그 동안 공놀이 경기를 하면서 그런 것을 전혀 의식한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카리나, 세니아가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니.
경기에서 처음에는 앞서간 이후에 조금 여유를 갖고 경기를 하면서 아이들이 점수 차를 좁히면 다시 벌리는 경기를 반복하다가 이제 끝낼 때가 되자 아이들이 이길 수 있는 기회를 열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아이들이 이기면서 끝내고 싶은 마음은 나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저 애가 아이들이 지는 경기를 만들지는 않았지?"
"맞아, 무슨 각본 같이 말야." 카리나가 건네는 물음에 세니아가 답했다. 이후, 나에티아나가 반드시 각본처럼 일이 진행된 적은 없지 않았느냐고 묻자, 세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 일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직 아이들과 대결해서 그런 상황을 겪은 적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저 애 같으면 현실이 녹록치 않다는 것을 보여준답시고 지는 광경을 만들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저 애가 그렇게는 못하더라."
"그렇다면 너라면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는 거야?"
"에이, 내가 무슨." 이후, 카리나가 물음을 건네자, 세니아는 자기가 어떻게 그러할 수 있겠느냐고 답하고서 자신이 혹시 그런 모습을 보일까 걱정했다면 그런 걱정은 접어두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잠시 후, 경기가 끝났다. 내가 기대했던 바대로 아이들은 나와의 승부에서 역전을 해냈고, 바로 신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드디어 끝냈네." 세니아가 이후, 자신들의 곁으로 돌아오는 나를 맞이하며 말했다. 그러더니, 나를 보면서 "열심히 했어." 라고 말한 후에 아무리 그래도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인데, 아이들이 질 까봐 걱정 많이 했었다고 말했고, 이에 나는 달리 어떻게 답을 하지 않고 그저 환하게 웃기만 하고 있었다.
"틀림 없이 너희 어머니께서도 너를 강하게 키우려 하셨을 것 같아. 너를 보면서 웬지 그러했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실제 어머니께서는 어떠하셨니?"
"어머니라면 이렇게 가르치지는 않으셨을 것 같아." 내가 답했다.
아닌 것이 아니라 어머니께서는 나에게는 너무나 자애로운 어머니이셨기 때문이었다. 물론 내가 조금 더 성장하고 나면 어떠하셨을지 알 수 없기는 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분이셨다. 내가 아이들 앞에서 다소 엄한 면을 갖게 된 것은 어머니가 아닌 어렸을 적 학교 선생이셨던 리사의 영향이었다. 리사는 어렸을 적, 학교 선생으로서 만났을 때에는 어른스럽고 상냥한 여성일 줄만 알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상급 학교에 진학한 이후에 내가 그에게 직접 교습을 받을 즈음에 보았던 그는 상당히 엄격하고 독한 교관의 모습을 보여주었었다.
현재의 모습으로는 상상할 수 없기는 하지만, 리사는 과거에 군인이었다고 했다. 군인으로서 부대의 지휘자이기도 했고, 교관이기도 했었다는 그는 교관으로서 군인들을 다소 엄격하게 가르친 적이 있었음을 밝히고서 그 때의 영향이 어느 정도 남아있는 것 같다고 밝힌 바 있었다.
리사에게 직접 교습을 받을 즈음에는 그런 리사의 모습이 어머니와 대비가 되었고, 그래서 그를 좋아하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한 때에는 어머니의 동료였고, 어머니를 옆에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어머니에 대한 여러 미담을 비롯해 내가 그간 알지 못했던 어머니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고, 상급 학교에 진학한 이후에 이런저런 도움을 준 적이 있기도 해서 그런 감정이 누그러져, 적어도 싫어하는 사람은 아니게 됐다. 다만, 학교 선생님이었다는 점이 걸리기는 해서 그와는 아주 가까워지지는 않으려 하고 있다. 스승과 제자로서의 선을 나름 지키려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는지.
"그 예전 학교 선생님, 지금은 뭐하시고 계신대?"
"잘 모르겠어. 학교 선생 일도 내가 그 학교 졸업할 즈음에 그만두셨어. 오래 하지도 않았고, 오래 하실 생각도 없으셨나 봐. 그 이후에 나를 개인적으로 가르치면서 다른 일을 하셨다고 하던데, 그것도 몇 년 즈음 후에 그만두시고, 그 이후로 샤하리아를 떠나셨지."
카리나가 묻자, 내가 답했다. 그리고 고문물 발굴에 관한 일을 한다고 들었지만 자세히 아는 바는 없다고 그에 대해 더 언급하기도 했었다.
미냐, 베야는 나와 공놀이 대결을 하면서 많이 지쳤는지 나에티아나의 왼편 옆자리에 앉아 쉬고 있었고, 그러면서 나에티아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보니, 새삼스레 슈라일에서 만났던 에이샤, 카티야 생각이 다시 떠오르며 조용히 미소를 띠었다. 모든 일을 마치고 돌아가면 그 아이들을 제자로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돌아간 이후에 잊지 않을 수 있다면.
공놀이를 마친 후, 나는 잔느 공주를 불러서-줄넘기는 카리나 등에게 맡겼는데, 잠깐 보고 있으니, 카리나, 세니아가 줄을 잡고 미냐, 베야에게 줄넘기를 시키고 있었다- 그와 함께 시장 거리 쪽으로 가지 않겠느냐고 청했고, 이에 잔느 공주는 나를 따라 시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때, 세나가 잔느 공주를 따라 나서려 했고, 그러면서 나에게 잔느 공주와 함께 가도 되겠느냐고 물으니, 이에 나는 좋다고 답했다. 그리고 같이 가자고 청했다.
"세나 씨와 같이 문화의 거리를 거쳐, 해안길을 같이 걸었어요."
시장 거리에서 나의 우측 곁에서 동행하며 잔느 공주가 나에게 말했다. 그리고 해안길을 따라 같이 걷는 동안 세나로부터 많은 이야기들을 들었다고 밝히고서 세나가 이 세상에 있는 마을, 도시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사람들이 무엇을 배우고, 무슨 일을 하며 사는지, 그리고 사람들이 어떤 놀이를 즐기고, 어떤 취미 생활을 가지며 사는지에 대해 많은 것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여기 계신 분들과 함께 이 세상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늘 느끼기는 했지만, 이 세상에서 즐겁게 뛰어노는 아이들과 거리에서 활발하게 돌아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이 새삼스레 부러웠어요. 특히, 세나 씨로부터 그런 아이들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들으면서 더욱 그랬고요."
생활 문명의 수준은 자신이 살고 있던 시대, 인류 문명의 시대 (구 문명 시대) 에 비해서는 높지 않았고, 풍족한 삶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아이들 모두가 자신이 살던 시대의 아이들에 비해 너무도 행복하고 밝아 보였다고 했다. 자신의 시대처럼 아이들이 공부에 늘 매달리는 삶을 살 필요도 없었고, 주변 사람들의 기대에 매달릴 것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아이들은 각자 자신의 일을 찾아 자신의 삶을 찾아갈 수 있고, 찾아가려 하는 모습에 그들이 너무 부러웠다고 했다.
"여기 뿐만이 아니라, 아르데이스를 비롯한 여러 행성계의 학교들 역시 비슷한 분위기이지만, 학교 분위기가 다소 엄격한 곳이 있어서, 베라티사에 위치한 마도 학당들이 그러한 편이라 했어요. 학교의 학생들은 입학하면 교복이 주어진다고 해도, 다른 학교들 중 대다수는 굳이 교복을 입을 필요까지는 없다고 하지만 그 마도 학당에서는 학교에서는 교복을 입을 것이 규칙으로 정해져 있을 정도라고 했었지요. 소르나 씨가 해당 학교 출신이라 그 학교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해서 알았대요."
나도 그것에 대해서는 들은 바 있다. 소르나가 다니던 학교는 학풍이 엄격해서 학생들의 제복 착용 및 올바른 제복 착용법 등이 규칙으로 명시되어 있을 정도였다. 사실, 내가 다녔던 샤하리아의 학교도 제복 착용이 권장되기는 하지만 올바른 제복 착용법 등에 대한 규칙이 딱히 정해진 것은 없다.
이후, 잔느 공주는 세나에게 어떻게 많은 것들을 알게 됐는지에 대해 묻자, 그로부터 이런 답을 들었다고 했다. 세나는 세상 여러 곳들을 전전하면서 배운 것들이 많기는 했지만 그 중요한 기반이 하나 있었다고 했다. 바로 나였다. 먼 옛날, 철이 없었던 자신을 처음으로 일깨웠던 사람으로서 그 은혜를 갚기 위해 나를 찾아갔으며, 그 이후에 나에게 많은 것들을 배웠음을 밝혔다. 내가 카리나, 세니아에게 했던 그 이야기와 거의 똑같은 이야기였다.
"그 때, 세나 씨께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세상에서 '상냥함' 이란 것을 아르사나 씨로부터 배웠다고. 그래서 아르사나 씨를 늘 은사로 여기고 있었다고 했었어요."
"그러셨군요." 이에 나는 알겠다는 뜻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가 곧바로 나의 왼편 뒤쪽에서 나와 동행하던 세나에게 고개를 돌리며, 그에게 조용히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고. 이에 세나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어떻게든 표정에 변화를 주지 않으려 했지만 얼굴색에서 달아오른 느낌이 드는 것은 감추지 못하는 듯했다. 물론 뭇 사람들에게는 잘 드러나지 않았겠지만, 그 느낌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 세나 님이 말했어요. 아르사나 님께서는 정말 좋은 사람이고, 상냥한 사람이라고. 아르사나 님ㄱ 함께 있으면 여러모로 좋은 것들을 많이 배울 수 있을 것이라 하기도 했었어요."
"그래요?" 그러자 내가 놀라면서 물었다. 그리고 다시 세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서 그에게 사실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세나는 바로 그랬다고 답하고서 활짝 웃는 모습을 보이면서 늘 냉혹한, 죽음과 가까운 세상 속에서 일상을 배웠던 자신에게 세상이 가지는 따뜻한 일면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이 가지는 온화한 면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가르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있으면 적어도 사악한 존재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그런 세나의 나에 대한 말은 사실, 세니아의 나에 대한 평가와 거의 일치하기는 했다. 세니아 역시 내가 성질은 못 돼도, 어떤 것이 악인지를 알고, 악으로부터 사람들을 지켜내려 하는 마음가짐 정도는 확고하다고 말했던 것. 그러면서 그 독한 성질머리의 이점이 있다고 말했었는데, 누군가 악의 유혹에 빠져들려 할 때, 그것을 모질게 떨쳐낼 수 있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라고. 그러면서 소르나 같이 단호한 표현을 잘 못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언급이 나온 바 있기도 했다 :
"하긴, 네 말도 일리가 있다. 세니아가 그러더라, 소르나에게는 나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고. 그 애는 단호한 표현이 필요할 때, 그것을 잘 못한다고 하니."
언젠가 누군가 말한 바 있었다. 선하고 상냥한 사람은 강한 사람의 보호가 필요하다고. 그러면서 세니아가 말했다. 소르나, 세나에게는 나 같은 사람이 필요할 것이라고. 그러면서 나 같은 성질을 가진 사람이 천문대에 1 명은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소르나라는 분, 마음씨가 참 좋으신 분 같아요.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네요."
줄곧 언급된 소르나라는 이름에 대해 잔느 공주가 묻자, 내가 답했다, 말한 바대로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다만, 평화로운 삶 속에서 착하게만 살아온 사람이라 여러모로 걱정이 될 때가 있기도 하다고 그에 대해 말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근래 들어 어딘가에서 나를 비롯한 일행의 여행에 도움을 주고 있기는 하지만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어 그 때문에 걱정이 되기도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 실은, 소르나의 행방은 내가 잘 알고 있었지만 아직 다른 일행에게 말하거나 할 수는 없었다. 나야, 얼마든지 솔직하게 밝힐 수 있기는 했지만, 자신의 행방에 대해 소르나가 다른 이들에게 아직은 밝히지 말아달라고 당부한 바 있어서 그것에 대해서는 비밀로 지키려 한 것이었다. 하지만 비밀 유지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는 나 역시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 나는 미냐, 베야와 함께 들렀던 장난감, 잡화들을 주로 취급하는 좌판 앞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좌판에서 가게 주인과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좌판의 모든 것은 내가 처음 들렀을 때와 비슷했지만 한 가지 뭔가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이전에 보았던 그 소르나의 지팡이처럼 생긴 장난감이 없어졌던 것이다. 이에 내가 의아해 하면서 가게 주인에게 지팡이 모양의 장난감, 그 행방에 대해 물어보려 하였다.
"그게...... 원래 주인이 찾아왔어요. 그러면서 그 물건을 달라고 하더군요. 보니까, 이전에 그 장난감을 놓고 갔던 그 사람과 인상 착의가 완벽하게 같은 사람이라 그 사람에게 바로 돌려주었어요. 그 물건이 원래는 주인이 잠시 맡아 놓은 것이라 비매품으로 놓아두고 있었던 것이어서 저 한테도 부담스러웠는데, 그렇게 돌려주고 나니, 오히려 속이 후련하더군요."
처음 방문했을 때, 가게 주인의 귀중품인가 했었는데, 실은 원래 주인이 따로 있었던 물건을 잠시 맡아두었던 물건이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원래 주인이 찾아와서 달라고 하니, 돌려주었던 것. 아무래도 남의 물건을 맡아둔 것이라 심적 부담이 있었던 모양이라,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 역시 차라리 다행이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가게 주인에게 알겠다고 떠나려 할 즈음, 가게 주인이 나를 보더니, 놀라운 이야기를 하나 건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말이에요, 장난감 주인 분이 물건을 돌려 받으시면서 말했어요. 이 마을에 하얀 티셔츠 차림을 하고 보라색 핫 팬츠를 입은 아가씨가 돌아다니고 있을 거라고 했어요."
그러더니, 나를 유심히 바라보면서 그 소녀에게 장난감을 주겠다고 말하면서 사라졌다고 한다. 그러더니, 나에게 조용히 미소를 띠면서 "참 유감스럽군요." 라고 말했다. 이에 내가 조심스럽게 가게 주인에게 뭐가 유감스러운지에 대해 묻자, 가게 주인이 이렇게 답했다.
"그 장난감 주인 분께 유감스러운 일이라는 뜻이에요. 조금만 더 늦게 오셨더라도, 장난감 받으실 분을 만날 수 있었을 텐데....... 뭐, 그거야 본인의 운명이겠지요. 하지만 이런 예감이 들어요. 아무래도 곧 당신께서 그 사람을 만나실 것 같다, 라는 그런 예감이랄지."
"이 머리띠는 알프레드 할아버지께 받은 거야. 사실 할아버지도 원래는 그 사람에게 건네 받으셨고, 그러면서 나에게 전해달라고 부탁을 받으셨다고 해."
시장 광장의 의자에 세나, 잔느 공주와 함께 모여 앉아서 손 위에 내가 알프레드 할아버지에게 받아 머리에 차고 있던 머리끈을 보여주며 말했다. 그 후, 나는 다시 머리띠를 머리에 차고서 세나에게 이렇게 말을 이어가려 했다.
"그 지팡이 모양 장난감을 받은 사람도 같은 사람일 거야. 나에 대해 그렇게 자세히 알 만한 사람은 천문대 사람들을 제외하면 그렇게 많지 않을 거고, 그 사람들이 동시에 이 마을에 찾아왔을 리가 없거든. 같은 사람이 머리끈, 지팡이 모양 장난감을 갖고 다니며 하미르 일대를 돌아다니고 있었겠지."
이후, 나는 예전에, 아주 어렸을 때, 머리에 머리띠를 착용하고는 했었다고 말하고서 슈라일에서 샤하르로 이사하기 전에 머리카락을 짧게 깎고, 머리띠도 소리라는 옛 친구에게 건네준 이후로는 그런 습관을 갖지 않게 됐음을 밝혔다.
"그 머리끈은 어렸을 때의 그 물건은 아니겠죠?"
"그렇지는 않지만......." 당연히 그러할 리가 없었고, 그래서 잔느 공주의 물음에 그러할 리 없다고 답했다. 그러면서도 어렸을 때 자신이 착용했던 물건과 똑같이 생긴 물건이라 말하기도 했다. 어렸을 때의 물건은 보석 부분이 실은 유리였지만 해당 물품은 보석 부분이 마법 결정이라는 차이가 있기도 하다는 점도 밝혔다.
"그렇다면, 그 분은 아르사나 님의 어린 시절부터 아르사나 님을 잘 아시는 분이셨던 것 같아요."
그리고서 소리라는 사람에게 머리끈을 건네주지 않았느냐고 묻고서, 그 사람일지도 모르겠다고 그에 대해 말하고서,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고, 연락도 끊겼기에 나도, 그 사람도 서로 만나기 어려워할 수 있어도, 내가 소리를 만나지 못하더라도 기억하고 있듯이, 소리 역시 나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 이어 말하기도 했다.
"정말일까요......" 잔느 공주의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그간 갖고 있던 소리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 나와 멀어진지 너무 오래된 소리가 나를 이미 잊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어쩌면 잘못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
'베라티사의 학당을 찾아가 볼까. 그를 만날 수 있으려나.'
이번 일이 끝나고 나면 그래서 베라티사에 있는 학당을 찾아가 볼까, 하는 생각을 해 보기도 했다. 소리라면 여전히 학당에서 자신의 학우들과 함께 학업에 전념하고 있겠지만 그럼에도 시간적 여유라면 얼마든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 그만두자. 시간적 여유가 있기야 할까. 당장에는 어려운 일이겠지.'
하지만 곧,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 이래저래 일이 많을 소리가 나 같은 별 것 없는 사람을 만나러 온다니, 어림도 없는 일일 것이다. 시간 여유 내기도 마땅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일정 시기가 오면 몸도 마음도 여유로운 시기가 올 것이고, 그 때가 되면 그를 만나러 갈 수 있을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이후의 일이겠지만 옛 친구를 만나는 일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일단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잔느 공주님께서는 그 소리라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 것 같아요? 아르사나 씨는 아주 먼 곳에 있다고 말하던데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예감이 들어요." 이후, 세나의 물음에 잔느 공주가 답했다. 그리고 하나의 예감이 있다면서 그 예감이 무엇인지를 말했다. 실제로는 나와 아주 가까이에 있는, 혹은 가까이에 있었던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렇고, 루이즈 씨께서는 잘 지내시려나."
"예나 선생님께서 보호해 주시고 계시니까, 잘 지내고 있겠지요."
이에 잔느 공주가 바로 답했다. 그리고 자신이 예나와 함께 있어 보아서 안다고 말했으며, 그리고서 예나에 대해 자신과 함께 있으면서 자신과 딱히 깊은 인연이 있거나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의 큰 언니, 어머니처럼 자신을 잘 보살펴 주고는 했었다고 말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친구였던 루이즈 역시 똑같이 잘 대해줄 것 같다는 믿음이 그래서 나온다고 밝히기도 했다. 다만, 한 가지 신경 쓰이는 바가 있기는 했다고 말하고서 그것에 대해 언급하려고 했다.
"...... 한 번씩 예나 선생님과 함께 잠들 때가 있었어요. 그 때, 제가 그 분으로부터 '선배', '언니' 같은 말을 들을 수 있었어요."
"그 분께 언니 같은 사람이 있었고, 잔느 공주님께서 그 사람과 닮으셔서 그러하셨겠지요."
이에 세나가 말했다. 그리고 루이즈와 함께 있을 때에도 그러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에 대해 추측해 보기도 했다.
그러는 그 때, 시장의 내가 바라보는 그 너머에서 낯설지 않은 인상의 두 사람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왼편에 보이는 이는 이전에도 몇 번 본 적이 있는 예나였다. 그 옆에서 동행하던 이는 루이즈였을 것이다. 외견은 확실히 닮았지만, 옷차림은 이전과 크게 달라져 이전의 그 의상은 거의 찾을 수 없었다.
이 즈음에서 루이즈의 외견에 대해 설명하자면 이러하였다 : 하얀 블라우스와 검푸른색 넥타이, 검푸른색을 띠는 짧은 치마, 그리고 허벅지와 다리를 감싸는 검은 스타킹과 검은 신발로 이루어진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머리 모양에도 약간의 변화를 주어 검은 머리띠를 머리에 매고 있었으며, 머리 모양도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다. 청순하고 단아한 잔느 공주와는 다른 느낌의 세련된 미녀가 예나의 곁에 있었다.
옷은 예나가 맞춰 주었고, 머리 모양도 예나가 직접 손질해 주었다고 했다. 옷을 맞춘 것은 그에게 맞는 옷이 하미시, 하미르에서는 거의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 일행이 엘 호예리아 (El Joyeria) 에서 그의 몸매에 걸맞는 옷을 거의 찾을 수 없었는데, 그라고 딱히 다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그를 위한 옷을 예나가 잘 맞춰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 루이즈를 예나가 자신의 뒤를 따르게 하면서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를 비롯한 이들이 예나에 대해 언급한지 얼마 지나지 않을 때였다.
'마귀들도 제 이야기를 하면 온다더니.' 예나가 루이즈와 함께 다가오는 모습을 보자마자 그런 혼잣말이 나왔다. 예나에 대한 이야기를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로 예나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그 후, 예나는 내가 앉은 자리 바로 앞으로 다가가서 이렇게 말을 걸려 하였다.
"아가씨, 또 뵙게 되네요. 잘 쉬고 계시지요?"
"예, 조금 있으면 하미르 동부로 가야 할 것 같지만요."
그러자 내가 답했다. 이에 예나는 활짝 웃으면서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라고 말하더니, 갈 곳이 하나 있다면서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리하여 나는 세나 그리고 잔느 공주를 이끌고 예나가 소개하는 어떤 곳으로 가게 되었다. 예나는 시장 거리의 남쪽 방향으로 들어갔다가 동부의 출입문을 통해 나가서 도시 중부의 '예술의 거리' 로 갈 예정이었음을 밝히고서 시장 중앙 구역의 동쪽길을 따라 나아가려 했으며, 나는 그런 그를 따라 시장 거리의 동쪽 출입 구역으로 나아갔다.
그러는 동안 잔느 공주는 루이즈와 간만에 다시 만나는 시간을 가졌다. 루이즈는 헤어질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으며, 그래서 예나가 루이즈 역시 잔느 공주와 마찬가지로 잘 대해주고 있었을 것이라 여길 수 있었다. 다만, 신경 쓰인 것은 잔느 공주가 언급했던 예나의 잠꼬대 중에 들려온 '선배', '언니' 라는 말이었다. 그런 예나와 함께 있었다고 하니, 루이즈 역시 그런 잠꼬대를 들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 하지만 잔느 공주가 루이즈와 함께 도시에 관한 이런저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며, 서로 즐겁게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던지라 그 와중에 차마 그것에 대해 말을 걸 수는 없었다.
예나가 향한 곳은 하미르의 중앙 구역에 자리잡은 예술의 거리로 그 중앙 광장에 북쪽 인근에 하미르 시청이, 그리고 남쪽 건너편에 하미르 중앙 미술관 (Hamir an Haonin Artemusea ; HHAM) 이라 칭해진 미술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미술관의 1 층에는 소극장이 있어서 연극 상연을 하기도 했었다고 길 위에서 앞서 나아가던 예나가 말했다. - 그 당시의 일행은 예나가 잔느 공주와 함께 앞서 나아가고, 나와 세나가 하미시에서는 오랫동안 동행하던 루이즈와 동행하며, 그들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예나의 발걸음은 처음에는 시청 그리고 중앙 미술관이 자리잡은 광장 주변의 길을 따라 걷다가 그 이후에 미술관 1 층에 자리잡은 찻집에 이르렀다. 그 곳이 예나가 잠시 머무를 곳이었다.
"여기에 잠시 머무르고 있으면서 그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볼 거예요,"
찻집 바깥에 놓인 네모난 하얀 탁자들 중에서 찻집 건물과 가장 멀리 떨어진 탁자들 중 하나에 자리를 잡으며 예나가 말했다.
"여기 앉아요, 이 찻집에서 가장 전망 좋은 자리들 중 하나예요." 이후, 예나는 나를 비롯한 일행에게 자리를 잡고 앉을 것을 당부했다. 나와 세나가 시청사를 바라보는 방향 기준으로 왼편에, 예나가 세나의 바로 옆에, 그리고 나와 세나의 건너편에 잔느 공주 그리고 루이즈가 앉았다.
"루이즈 씨, 예나 선생님과는 잘 지내셨었지요?" 내가 루이즈의 모습으로 시선을 향하며 묻자, 루이즈가 환하게 웃으며 그렇다고 답했다. 그리고 함께 있는 동안 예나의 조수 (Aßistayn) 역할을 하며 지냈다고 하며, 그로부터 원한다면 자신의 조수로 있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기도 했었다고 한다.
"믿겨지지 않는 일이었던 모양이에요, 대학교 문턱에도 가지 못했던 사람이 수많은 박사 학위를 가진 학자 분을 잘 만나 그 분의 조수까지 되다니."
이후에 루이즈가 웃음을 띠며 말했다. 그러자 잔느 공주가 루이즈에게 정식 조수는 아니지 않느냐고 묻자, 루이즈가 그 물음에 "그렇기는 해." 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내 스스로 일을 할 수 있도록 이런저런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언어부터 시작해서 많은 것들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었어요. 학생 시절보다도 배워야 할 것도 많고, 학교에서 배운 것들보다도 더 어려운 것들과 마주하고 있어서 많이 힘들기는 한데...... 그래도 학교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즐거운 것 같아요."
그러할만 했다. 10 ~ 12 학년 때에 배운 것들과 13 ~ 16 학년 때에 배운 것들에 대한 기억을 되돌아 보면 후자 쪽이 훨씬 힘들었고, 그 이상의 과정에서 배울 것들까지 배우려고 하면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루이즈 역시 그것에 대해서는 각오하기는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에게 다감하게 대해주는 사람이 함께 있었고, 무엇보다도 새로운 세상에서 치열하게 살아보려는 의지가 있었다. 학교에 있을 때보다도 즐겁게, 열심히 학업에 임하고 있었을 것이다.
- 잔느 공주 역시 예나와 함께 있으면서 그로부터 교습을 받았었다고 했다. 예나는 루이즈와 마찬가지로 잔느 공주 역시 열심히 학업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여서 성과에 상관 없이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큰 보람을 느꼈다고.
이후, 루이즈로부터 다소 놀라운 이야기가 들려왔다. 이전 세상에서 학교에 다니는 동안 있어왔던 이런저런 씁쓸하고 괴로웠던 일들에 대한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예나는 루이즈의 심정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을 넘어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풀어가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너무 놀라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인 양 이해하며 할 수 있느냐고 묻자, 예나는 잔느 공주의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들으며 원래 학교의 학생이었다는 마음 속 깊이 그와 루이즈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뭔가 엄청나게 신경 쓰이는 이야기였지만 그렇다고 하니, 어쩔 수 없었다. 예나에게 딱히 수상한 행적이 있거나 하지는 않아서 딱히 문제 삼으려 하지도 않았다.
루이즈에 관한 이야기 이후, 예나는 이전에 자신이 모종의 장소에 옮겨 놓았던 캅쉴라들의 행방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캅쉴라는 베라티사에 있던 자신의 거처 근방에 놓아두고 있었다고 했으며-그러면서 마법을 통해 그 모습을 보여주었었다-, 샤르기스의 모든 관계자들이 포기하라고 했던 희생자들-이미 샤르기스 관계자들은 그렇게 칭하고 있었다-의 소생을 위해 마법 학당에서 여러 자료들을 찾아보려 했었다고 한다, 베라티사에 있는 자신의 거처 부근에 캅쉴라들을 전송해 놓은 것도 그렇게 구해 온 마법들로 바로 희생자들의 소생을 시도하기 위해 그러하였던 것. 하지만 이미 죽은지 오래된 동사한 시신을 소생시키는 것은 어지간해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고 밝혔다.
"그 때, 금단의 비법이라도 활용해 보려고 했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도덕의 윤리적 한계선을 넘으려 해서는 안 된다고 제 제자였던 어떤 사람이 말려서 그렇게 할 수는 없었고, 그 이후로 저도 그렇게 사람을 소생시키는 것은 소생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달으며 포기했었어요."
그리고서 결국 그는 샤르기스 관계자들에게 실패를 인정하고 캅쉴라들을 샤르기스에 돌려놓았다고 했다. 이후, 샤르기스 관계자들에게 희생자들을 소생시키지 못한 것에 대한 사죄를 하고서 희생자들의 장례는 자신이 책임지고 해내겠다고 밝히고서 캅쉴라들을 자하리아 (Zakharia) 라는 곳에 있는 신전에 캅쉴라들을 안치시켰다고 했다.
"시신들이나마 온전하게 보존하고 싶었고, 그래서 캅쉴라마다 하나씩 마법을 걸어 놓았어요. 그 곳은 제가 방문할 수 있도록 할게요. 어떤 이들이 푸투로 계획에 의해 희생되었는지, 희생자들의 모습을 보여드리면서 더욱 깊고 자세한 이야기를 해 드릴게요."
이후, 그는 소정령을 통해 푸르스름한 돌을 쌓아 건설된 듯해 보이는 신전의 유적을 개조해 만들었다는 희생자들의 합동 묘소 그리고 구체 형태의 몸체와 가느다란 팔과 다리를 가진 소형 로봇 하나가 묘소 일대를 돌아다니며, 묘소의 캅쉴라들을 관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각 캅쉴라의 앞에는 하나씩 하얗게 빛을 발하는 꽃들이 안치되어 있었으며, 소형 로봇이 화초들에 물을 주며, 화초들을 가꾸고 있었다.
- 소형 로봇은 정면 부분이 검은색을 띠고 있으며, 그 바탕에 한 번씩 하늘색 빛으로 표정을 나타내는 기호들의 조합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 로봇이 예나가 줄곧 언급했던 조수 '타히온' 으로 그래봬도 수없이 많은 예나의 일거리 보조를 수행한 경험이 있다고 했었다.
솔직히, 그들이 되살아날 것에 대한 기대를 할 수 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다만, 베라티사 최고의 마법사들 중 한 명인 예나가 직접 소생의 비법을 연구해가며 그들을 소생시키겠다고 나섰던 만큼, 일말의 희망을 가지기는 했었다. 하지만 결과는 그 최고급의 마법사조차 어찌 못하는 비참한 희생자들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잔느 공주가 희생자들이 동면에 들어가기 전에 겪었던 일에 대해,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마지막으로 전해 준 편지글을 읽었던 때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것이 떠올랐다. 푸투로 계획에 관한 교육 일정 종료 이후, 동면 캅쉴라로 들어가기 전날, 잔느 공주는 계획에 참가한 여타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편지글을 받았다고 했다.
잔느 공주의 부모들은 딸에게 있어서 좋은 부모가 되지 못한 이들로 여기어졌었다. 어릴 때부터 자신의 역량에 맞는지 알 수도 없을 학업을 강요 받았고, 가족과의 만남은 거의 없다시피했으니, 그래서 학교에 다닐 때에는 공주는 자신의 부모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것도 아닌 푸투로 계획의 참가 이후, 교육 과정의 마지막 날 기관에 제출된 휴대 전화기를 통해 어머니의 편지글을 볼 수 있었고, 그 편지글을 통해 부모의 진심을 알 수 있었다고 했다.
"네가 어디에서 어떻게 깨어나든 그 곳의 아이들은 너처럼 어릴 때부터 치열한 삶을 강요받지는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너 역시 앞으로 네가 키울 아이들을 그렇게 키우지 않았으면 하고."
동면에서 깨어난 이후, 공주가 마주할 세상은 이전의 세상처럼 치열한 삶의 방식이 강요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아버지의 편지글을 보고 나서야 공주는 부모의 진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 이외에도 푸투로 계획에 참가했던 학생들 역시 잔느 공주와 비슷한 방식으로 휴대 전화기 등을 통해 편지글을 받았고, 그렇게 부모의 마지막 진심을 알게 된 이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곳곳에서 서럽게 흐느껴 우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계획 관계자들은 영영 다시 만날 수 없게 되었을 이들에 대한 슬픔의 감정을 주체 못할 학생들에게 이렇게 외치면서 윽박지르기만 하고 있었다고 했다.
"닥치고 과거는 몽땅 잊어버려! 너희들에게 다가올 미래에 집중하란 말이야, 알았어!? 지금 이후로 한 번이라도 우는 것들이 있으면 그대로 캡슐 안에서 동사시켜 버릴 테니까, 그리 알아!"
다가올 미래에 집중? 그 다가올 미래가 온 몸이 얼어붙는 고통 그리고 사후 세계였던 것인가? 그리고 관계자들은 동사시키겠다고 협박하고 으름장을 놓으며 학생들을 캅쉴라 안에 마구 집어 넣었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은 누군가의 (필경 수현 파크였을 것이다) 뜻에 의해 폭주한 동면 장치에 의해 동사당하고 말았다. 그 빌어먹을 관계자들이란 것들은 그들을 영원한 얼음의 감옥에 가두어 얼려 죽일 작정으로 욕설과 협박, 폭력으로 슬픔과 그리움에 젖은 학생들을 몰아붙인 셈이었다.
노예들을 채찍질하고 구타하면서 무덤의 구덩이 안에 산 채로 묻어버리는 옛 역사 속의 광경을 보았다면 이와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폭력의 위협 혹은 공포에 내몰려 가시밭, 용암 등의 사지로 내몰리는 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들에 비유될 수 있을까. 냉혹한 방 안의 '관' 과도 같은 캅쉴라 안으로 내몰리는 학생들의 모습을 떠올렸다가, 이어서 무덤의 구덩이 안에 산 채로 쳐 박히는 불행한 생명들의 모습, 그리고 가시밭으로 내몰려 핏덩이가 되어버리는 가련한 사람들의 모습을 이어 떠올리기도 했다.
이전에도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심하게 짜증이 나 버린 적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 이야기를 떠올리며 새삼스럽게 다시 한 번 분노의 감정이 마음 속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가슴 속에 화가 치밀어 오름을 느꼈다.
순장 : 한 집단의 지배층 계급에 속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사람의 뒤를 따라 강제로 혹은 자진하여 산 사람을 함께 묻던 일. 또는 그런 장례법.
-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세나."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겨우 고개를 들어 세나를 불렀다. 그리고 심각해진 목소리로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세나...... 혹시 '쉰스 (Scünsî)' 혹은 준시 (Junsci) 라는 것에 대해 알고 있어?"
이후, 세나로부터 그렇다는 대답이 들려왔다. 이후, 세나는 나에게 지배자가 죽었을 때, 지배자의 종자들을 강제로 그 무덤 안에 묻어버리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느냐고 되물었다. 그리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렇다는 의미의 답을 하고서 주로 군왕이 죽었을 때, 그들을 따르던 사람들을 군왕의 묘에 가둔 채로 무덤을 만들거나, 성이나 왕궁을 건축할 때, 건축가들을 산 채로 매장하는 일이 고문명 시대에 있었고, 이를 '쉰스' 혹은 '준시' 라 칭한다고 말한 후에 이어서 그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스스로 원해서 무덤 안으로 들어가는 이들이야 얼마든지 있었을 거야. 그 사람의 죽음을 견디지 못할 정도로 열성적인 추종자들이야 어느 시대에도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든 마찬가지로 그렇게 흔치 않았을 거야. 하지만 그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무덤에 산 채로 매장된 이들은 적지 않았겠지. 그렇다면......"
"...... 폭력 등에 의한 강제적인 산 매장이었겠지요?"
세나의 물음에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그리고서 나는 이전에 이야기를 들은 바대로, 당시의 학생들은 부모를 비롯한 가족들로부터 마지막 편지를 받고 난 이후에 관계자들의 협박과 욕설 속에서 강제적으로 캅쉴라 안으로 들어갔고, 그들 중 대다수는 캅쉴라 안에서 그대로 동사했으니, 이를 두고 무덤 안에 사람들을 산 채로 가두어 매장하는 것, 혹은 성이나 왕궁 지하의 구덩이 안에 사람들을 산 채로 매장하는 고문명시대의 만행인 '쉰스' 와 다를 바 없을 것이라 생각했음을 밝히기도 했다.
"수현 파크에 의해 일어난 일이었지요? 모종의 사유로 인간을 증오하면서 이런 일을 벌였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파크 박사가 원했던 세상은 대체 무엇일까요?"
"샤르기스 유적에서 발견된 문구가 하나 있었어. 생명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돌과 미립자들만의 세상에 기계들이 통치하는 그런 세상이었다고 했었지."
세나가 건네는 물음에 내가 바로 답했다.
Inopia vitae. In mundus, sed lapides, avare et corpuscula esse debent.
Et quod regnat machinae.
Ego cerebrum illorum est.
생명은 쓸데 없어. 이 세상에는 오직 돌, 증기와 미립자들만이 있어야 해.
그리고 그들을 기계들이 통치해야 한다.
그 뇌가 바로 나다.
그것이 샤르기스 유적지에서 발견된 '수현 파크' 라는 인물의 진의에 관한 글로 모든 행성들의 상태가 생명이 없는 원시 행성 상태로 되돌리고, 생명의 탄생이 없도록 기계들을 이용해 자신이 감시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듯한 글이었다. 하지만 그 진의가 일관되고 있었는지, 그리고 진의가 바뀌었다면, 그것이 어떻게 바뀌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의사를 끝까지 지켜냈는지 여부는 아직 알 수 없어. 그 실상이 어떠한지 알아내는 것이 우리가 앞으로 해야할 일일지도 몰라."
이후, 나는 세나에게 그렇게 말을 건네었다.
이후, 예나는 자신에게도 들린 이야기가 있었다고 말하고서 그 이야기들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다. 푸투로 계획 관계자들은 계획에 반 강제적으로 참여한 학생들을 캅쉴라 안에 가두고 난 이후에 그들의 가족들에게는 그들이 무사히 동면 과정에 들어섰으며, 그들의 건강 상태가 아주 좋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달라는 전언을 전달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들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다른 행성계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테니, 그들의 행운을 빌어줄 것을 부탁한다는 말을 전했다는 이야기가 그것들이었다.
"사람들을 얼어 죽게 만들어 놓고, 그들의 무사함을 빌어달라니......."
그 이야기를 들은 루이즈로부터 충격 그리고 경악의 심정을 담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실로 뻔뻔하기 이를데 없는 발언으로 푸투로 계획 관계자들의 대다수가 계획의 수장이라 할 만한 수현 파크의 부하들이었음을 감안하면 참으로 그들다운 행동이라 할 수 있어 보이기는 했지만,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새삼스레 어이 없음의 감정이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고문명시대로부터 지금의 기계 병기들까지 사람들을 잘 보살피고 있다는 거짓말을 하는 경우야 많이 들어보기는 했지만,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새삼스레 당혹스럽네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그렇게까지 뻔뻔해질 수 있는 것인지......"
그런 심정을 담아 말을 건네는 동안, 세나는 그저 그 이야기들을 조용히 경청하고 있을 뿐, 다른 행동을 취하거나 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 이후, 예나는 또 다른 놀라운 이야기를 나와 세나 등에게 전해주기 시작했다.
"푸투로 계획을 통해 100 명의 학생들을 지금의 샤르기스 유적 일대에 동면시키고, 동면 장치의 고장을 유발해 그들을 동사시키려 한 수현 파크는 그 이외에도 푸투로 계획의 부속 계획이라는 미명 하에 여러 학교의 학생들을 100 명씩 곳곳에 모집해 그들을 세계 전역에 설치해 둔 기지 내에 모아놓고 샤르기스 유적에 발견된 캅쉴라들과 같은 방식으로 그들을 캅쉴라 안에 동면시키고 동사시키는 행위를 거듭했다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그러니까...... 잔느 공주님, 루이즈 씨와 같은 희생자들이 세계 곳곳에 있었다는 말이지요?"
그리고서 내가 건네는 물음에 예나는 "그렇지요." 라고 답했다.
충격적인 이야기라 할 만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런 이야기에도 크게 놀라거나 당혹스러워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괴물들' 이라 칭해지던 기계 병기들을 이끌고 군과 합작해 무고한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했다는 '존재' 였다. '미래에 대한 희망' 을 미끼로 어린 학생들을 유인해 죽여버리는 미친 짓거리를 하더라도 크게 놀랄 이유가 없다고 여기었던 것이다.
"아르사나 님, 아르사나 님께서는 그런 이야기에도 크게 놀라거나 하지 않으시네요."
"파크 박사가 벌인 일이었지요? 그라면 그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할 것 같다고 생각해서, 그 정도라면 크게 놀랄 것도 없기는 했어요."
이후, 루이즈가 나를 보면서 건네는 물음에 우선 그렇게 답을 한 이후에 잔느 공주 그리고 루이즈에게 내가 예전에 잘 알던 사람으로부터 하나의 이야기를 들었음을 알렸다. 그리고 그들에게 알프레드 노인으로부터 들은 어느 나라의 군 부대가 '괴물들' 이라 칭해진 푸투로 계획에 의해 개발된 자동 병기들을 이끌고 무고한 시민들 그리고 시민들을 지키려 한 군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들려주었다.
"그런 학살극에 대해서는 저도 들은 바 있기는 했지만, 파크 박사와 관련된 것이었을 줄은......."
"푸투로 계획에 의해 만들어진 병기들이었고, 푸투로 계획은 파크 박사에 의해 주도되었어요. 당연히 파크 박사와 관련되어 있을 수밖에 없겠지요."
이후, 루이즈가 건네는 말에 내가 바로 화답을 했다. 그 이후, 나는 루이즈에게 그 이야기에 언급된 '괴물들' 에 의해 무고한 사람들이 학살당한 장소가 지금의 지브로아에 위치한 '기억의 사당', 그 부근 일대임을 이어서 밝히기도 했다.
"아르사나 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그 일대에 학살 사건이 벌어졌대, 기억의 사당 부근, 괴물이 자주 출몰한다는 그 곳이 학살 사건이 일어난 곳이라는 거야."
그러자 루이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랬구나." 라고 화답했다. 이후, 잔느 공주는 그 이야기를 전하고서, 나는 혹시라도 학살 사건의 원흉이 그 곳에 나타난다면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한 바 있음을 이어 밝히기도 했다. 이에 루이즈는 또 다시 "그랬었구나." 라고 답하고, 이후로 더 목소리를 내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 표정에서 뭔가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는 듯해 보였고, 그래서 그런 그의 앞에서 굳이 더 이상 자세히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사건에서 살아남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있었나요?"
이후, 루이즈가 일행에게 물음을 건네자, 세나가 나를 대신해서 답했다. 사람들을 지키려 한 부대원들 중 신병 한 명만 간신히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로 그 신병은 학살의 여파에서 무사히 도망쳐 나올 수 있었지만 그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고 말하고서 그 이후로 그에게 이렇게 더 이야기를 이어가려 했다.
"그 곳 뿐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가 학살의 여파에 휩싸이고 수많은 생명체들이 죽어가고 있었으니, 그 와중에 희생되었을 수도 있지요. 그렇지 않더라도 그 세계는 푸투로 계획이 발표된 시점에서 이미 멸망 직전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그래서 어떻게든 살아남았다고 해도 결국 세계 멸망을 피하지는 못했겠지요."
한 동안 이렇게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난 이후, 예나는 비로소 주문을 받기 위한 준비를 하려 하였다. 우선 나와 세나에게 무엇을 마실 것인지를 물었고, 이어서 루이즈, 잔느 공주에게도 같은 물음을 건네려 했다. 그 때 나와 루이즈는 그냥 우유 커피, 세나는 흑당이 들어간 우유 커피, 잔느 공주는 카라멜라 우유 커피 (Karamela Jeshkafe ; KJK) 를 주문했었고, 그 이후, 예나는 찻집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런데 이렇게 주문을 받지도 않고 한 동안 여기서 이야기만 주고 받았는데, 그래도 괜찮을까요?"
이후, 잔느 공주가 당황하면서 나에게 물었다. 그러자 루이즈가 잔느 공주를 보면서 나를 대신해 "괜찮을 거야." 라고 화답하더니, 이전에 예나가 찻집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다고 말하고서 그 때, 찻집에 한 가지 요청을 했었음을 밝히고서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잠시 토론이 있을 것이고,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그 토론 이후에 주문하러 다시 오겠다고 요청을 하셨다는 거야."
"그래?" 이에 잔느 공주가 루이즈를 보면서 물었고, 루이즈는 그 물음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그리고 당대의 유명한 학자가 직접 찾아와서 하는 말이니, 찻집 사람들도 그 말을 바로 믿어줬을 것이라 이어 말하기도 했다.
이후, 조금 더 시간이 지날 무렵, 예나가 다섯 개의 잔이 놓인 쟁반 하나를 두 손으로 들며 조심스럽게 탁자까지 가져오고 있었다. 찻집의 정문부터 일행이 앉아있는 찻집의 바깥쪽 출입문 근처에 있는 탁상까지는 제법 거리가 되었지만 예나는 그럭저럭 빠르게 도착했다. 이후, 예나는 자신이 직접 잔들을 주문한 사람에게 하나씩 가져다 주었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주문한 카페-일반 카페로 얼음을 넣은 것이었다-가 담긴 잔을 자신의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평소에 카페를 자주 마시는 분들로 어떤 분들이 계신가요?"
잔느 공주의 질문에 내가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잔느 공주, 루이즈를 제외하면 전부일 것이라 답했다. 예나에 대해서는 일전에 들은 바 있어서 잘 알고 있었고, 세나도 그렇고, 나 역시 나 자신이 카페를 자주 먹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이후, 루이즈가 예나에 대해 술을 마실 수도 있어 보였다고 말하고서 그에 대해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기분이 우울해졌을 때, 한 잔씩 마시고는 하셨었어요. 거처에 포도 술이나 꿀 술이 있었지요."
"여러 잔을 마시면 정신적으로 곤란한 일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이에 예나가 그렇게 화답했다. 그리고 예로부터 술을 마시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마시면 나쁜 일이 되어버린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고, 술에 취해 광폭한 행위를 저지른 사람들의 이런저런 이야기가 있어서 늘 경계의 지표로 삼았음을 밝혔다.
"술을 즐기되, 취하면 안 된다. - 이것이 술에 대한 제 나름의 신조이지요. 예전에 어떤 분으로부터 들은 말이지만 그것을 제 신조로 옮기려 했던 것이지요."
"그렇군요." 이후, 루이즈는 나에게 술을 마시거나 한 적이 있었느냐고 묻자, 내가 답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술을 마시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 편이라 답했으며, 세나도 마찬가지라고 이어 말했다. 다만, 세니아, 카리나의 경우에는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보인 적은 없어도, 그것에 대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아르사나 씨의 경우에는 수도원 생활을 잠시나마 하신 영향도 있을 수 있어요."
세나가 말했다. 그 후, 나는 루이즈에게 예나가 술을 마실 때 어떻게 마시느냐고 물었고, 그 물음에 그냥 음료 마시는 듯이 마시는 듯해 보인다고 화답했다. 다만, 자신이 보는 앞에서는 꽤나 조신하게 마시는 모습을 보인 바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술은 자신이 비행선을 끌고 양조장으로 가서 직접 구해 오는 것 같다고 말하고서, 여러 종족이 교류하는 곳으로 가기 전에 근방의 양조장을 들러 술을 미리 구해올 때도 있음을 밝히기도 했다.
"그리고 못 마시게 된 것들은 도시의 마법술사나 마도학자들에게 넘겨서 그들이 약물 제조용 알쿨 (Alkuhl) 을 만드는 데에 활용하도록 하기도 한다고 예나 선생님께서 밝히신 바 있어요."
알쿨에 대해서는 잔느 공주도 예나로부터 들어서 알게 됐다고 한다. 그들은 이를 알코올 (Alcohol, Alkohl, Alko-ol) 이라 칭했던 모양.
- 이러한 알쿨은 증류기를 통해 만들 수 있는데, 주로 소독약이나 치유 마법 성분이 포함된 약을 섞어 상처 치료제를 만드는 데에 쓰인다. 농도가 아주 높아 신체에 악영향을 가할 수 있어 함부로 마셔서는 안 된다고 학생 시절에 줄기차게 들은 바 있다.
"아르사나 님께서는 평소에 카페를 자주 마신다고 하셨는데, 밖에서도 그러하신가요?"
"집에 있을 때예요. 밖에서는 잘 안 마셔요, 아니 못 마신다고 해야 할지."
그리고서 자신 주변의 이들 역시 뭔가에 집중하고 있을 때나 밖에 있을 때에는 쉬고 있을 때에도 뭔가를 잘 먹거나 하지 않는 편이라 말했다. 그리고 세나 역시 밖에서는 카페를 잘 마시지 않는다고 말하고서 집을 비롯한 거처에 있을 때, 아니면 찻집에 있을 때에만 자주 마시는 편임을 밝혔다.
그 이후, 이번에는 루이즈가 줄곧 궁금했던 바가 하나 있었음을 밝히고서 예나에게 이렇게 질문을 하려 했다.
"지금까지 예나 선생님께 질문하고 싶은 바가 하나 있었어요. 아르사나 님을 예나 선생님께서는 '아가씨' 라 칭하시고는 하셨는데, 그러할만한 이유가 있나요?"
예나가 다른 이들도 아닌 나를 계속해서 '아가씨' 라 칭하고 있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었던 모양으로 이제 그것에 대한 답을 들으려 하는 것 같았다. 그런 그의 물음에 예나는 루이즈 그리고 잔느 공주에게 이렇게 답을 해 주었다.
"세상의 거대한 악을 물리친 용사의 따님이시니, 그렇게 칭하는 것이지요."
예나의 대답은 특별한 사유를 말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하다는 것을 일부러 내세우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었을 것이고, 예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다만, 예나의 목소리에서는 그것만이 이유는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만, 잔느 공주 그리고 루이즈는 거기까지는 눈치채거나 하지는 못한 듯해 보였다.
이후, 한 동안 이런저런 일상적인 이야기들이 잠시 동안 이어졌었다. 그 와중에 세나로부터 천문대로 돌아가는 일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오기도 했었지만 애초에 천문대로 돌아갈 의사가 가장 없던 세나로부터 나온 말이라 나 역시 진지하게 듣거나 하지는 않았었다.
일행이 찻잔을 전부 비울 때가 되자 예나는 자리를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쟁반에 비워진 잔을 들고 찻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잠시 후에 다시 일행의 곁으로 돌아오면서 다른 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일행을 찾아가자고 청했고, 이후에 내가 하미르의 중앙 광장을 향하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부근에서 일행이 자신을 비롯한 떠나간 이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여긴 것이었다.
"다른 분들은 뭐하시고 계시던가요."
"저 앞에서 정구 놀이를 하고 있던데...... 지금 즈음이면 지루해져서 다른 것도 하고 있을 거예요."
발걸음을 옮길 무렵에 예나가 나에게 물음을 건네자 바로 답했다. 처음에는 예나가 앞장서 나아갔지만 발걸음 속도 때문에 내가 예나를 앞질러 가게 되었다. 세나는 예나, 잔느 공주, 루이즈 등과 발걸음을 맞춰가고 있었기에 나처럼 앞질러 가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무튼, 길은 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내가 앞장서 간다고 해서 나에 대해 뭐라 말하거나 하는 이들은 없었다.
광장으로 돌아왔을 때, 분수대에서 친구들이 마력 덩어리로 공을 만들어서 배구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도 같이 하고 있었는데, 꽤 재미있게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세나 님, 세나 님께서 좋아하시는 거 아니에요?"
그 광경을 보자마자 루이즈가 바로 옆-우측-에 있던 세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한 번 해 보지 않겠느냐는 것. 이에 세나가 루이즈에게 같이 해 보겠냐고 묻자, 그는 바로 사양했다. 그러할만 했던 것이, 세나가 배구를 하면서 공을 주고 받는 모습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그 공의 위험을 바로 직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세나는 나하고 같이 하자. 잔느 공주님이나 루이즈 씨와 같이 했다가는 자칫하면 두 분께서 다치실 수 있잖아."
그러자 내가 바로 그에게 이렇게 청했고, 이러한 그의 요청에 세나 역시 다른 말 없이 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르사나, 세나, 왔구나. 어라? 예나 씨하고 루이즈 씨께서도 오셨네요."
이후, 세니아가 나와 세나를 맞이하다가 나를 따라 온 예나, 루이즈를 보면서 인사를 했고, 이에 예나가 오랜만이라 인삿말을 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그리고 예나를 보면서 지금까지 배구를 하며 놀고 있었다고 말했고, 이어서 그에게 같이 해 보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하는 의사를 드러냈다.
"예, 저도 세나 씨와 같이 하는 것은 사양하고 싶네요."
그리하여 예나도 배구를 해 보게 되었다. 상대는 나에티아나로 다른 이들은 주변 일대에 2 ~ 3 명씩 약간씩 흩어져 있으면서 그들의 경기를 구경하고 있었으며, 나는 반대편, 성당 쪽을 바라보다가 한 번씩 고개를 돌리면서 그들이 공을 주고 받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예나가 배구 쪽에는 상당히 선전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에 대해 의외라 생각할 이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이에 대해 한 마디 말하자면, 예나는 광검 한 자루를 소지하고 있었으며, 단순한 호신용 무기 정도가 아니었다고 한다. 또, 마법사들, 마녀들 중에서 전투 쪽에 재능을 가진 이들은 필수는 아니더라도 구기 운동을 할 것을 권장받고는 한다. 아닌 것이 아니라 화구 등을 발사할 경우가 생길 텐데, 그것을 멀리, 정확히 던져 보내는 능력의 고양과 관련이 있다. 예나는 전투 마법사에 속하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그런 쪽에도 단련을 많이 했었으니, 배구 쪽에도 나름 선전할 수 있었던 것.
"아르사나 님, 한 가지 질문 드릴 것이 있어요."
"뭐죠?" 루이즈가 내게 다가와서 질문 있다고 말하자 내가 무엇이냐고 되물었고, 이 물음에 루이즈가 자신이 질문하고파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알리려 하였다.
"...... 혹시 누군가의 등을 때려보거나 하신 적, 있으신가요?"
"제가요?" 그 물음에 나는 놀라면서 말했다. 별의별 일들이 있었다고 했지만 적으로 맞선 이들을 제외하고는 누군가의 뒤통수나 등을 때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픈 것은 그렇다쳐도, 일단 기분 나쁘게 하는 짓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는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무슨 이유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시는 거예요?"
루이즈가 질문을 한 이유는 이러하였다. 나와 세나를 비롯한 일행 모두 상당히 키도 크고, 배구를 비롯한 여러 운동도 많이 한 사람들이라면 손 힘도 엄청날 것 같아 보였고, 그래서 그런 이들의 손바닥에 맞으면 다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것과 관련해 내가 혹시 손바닥으로 등을 때리거나 한 적이 있었는지를 물어보려 한 것.
"그랬었군요." 이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의 의도를 알겠다는 의사를 드러내는 답을 하였다. 그리고서 그에게 나는 일단 잘 모르는 일이라 답하고서 적들과 마주했을 때, 한 번 그렇게 손바닥으로 쳐 보기는 해 보겠다고 이어 말했다. 그리고 그의 모습을 보며 이렇게 물었다.
"혹시 등이나 어깨를 손바닥으로 맞아보실 생각은 갖고 계신가요?"
손바닥으로 등을 맞아보겠느냐는 질문에 루이즈는 바로 거절했다. 행동으로는 하지 않았지만, 표정만 봐서는 손사래를 칠 정도였다. 내가 손바닥으로 치면 얼마나 아픈지 궁금하기는 해도 굳이 직접 맞아보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
그러는 사이, 예나와 나에티아나, 두 사람 간의 승부도 마무리됐다. 보이는 바대로 예나가 승세를 제대로 잡았고, 나에티아나는 시무룩해 하면서도 결과에 승복하며 조용히 경기를 마쳤다.
그리하여 일행은 성당 앞의 분수대 광장에서 다시 모이게 되었다. 이후, 나를 비롯한 가마일 산 천문대에서 친구가 된 5 명, 잔느 공주와 루이즈, 예나 그리고 나와 카리나를 따라온 미냐와 베야까지. 그렇게 10 명의 일행이 한데 모이게 된 것.
"이제 어디로 가요?" 세나가 건네는 물음에 나는 딱히 할 일이 생각나지 않으면 바로 하미르 동부 지대로 가자고 말하고서 세나, 카리나 등에게 더 할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 때, 카리나가 나에게 바다에서 조금만 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물었고, 이에 세니아가 나를 대신해서 이렇게 답했다.
"그래, 앞 일이 어찌될지 모르니까, 조금만 바닷가에서 시간을 더 보내자. 그것이 미냐, 베야에게도 좋지 않겠어? 아르사나, 너는 어떻게 생각해?"
사실, 나는 가능한 빨리 하미르 동부 지대로 가려고 했었고, 마땅한 구실이 없으면 내 생각을 밀어붙이려 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앞으로 어찌될지 모르는데, 그 전에 바다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는 편도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 있었는데, 여기에 세니아가 했던 그간 일행을 따라온 미냐, 베야에게도 좋은 추억거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 좋다는 말이 그런 나의 생각을 크게 흔들었다. 그리하여 나는 카리나, 세니아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이렇게 답했다.
"좋아! 1 시간 정도 미냐, 베야와 함께 해변가에 더 머무르고 있다가 가자."
이후, 일행은 미냐, 베야를 데리고 해변가에 더 머무르기로 하고 바로 하미르의 해안가로 나아갔다.
가장 즐겁게 시간을 보낸 이들은 카리나와 세니아 그리고 미냐와 베야가 아니었을까. 카리나와 세니아는 미냐, 베야와 함께 모래성 쌓기 놀이를 같이 해 주었고, 미냐, 베야 역시 카리나, 세니아와 더불어 이리저리 뛰어노는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세나는 예나, 나에티아나 등과 함께 어울렸는데, 비교적 차분한 성격을 가진 세나는 예나, 나에티아나와 함께 조용히 바닷가를 감상하...... 는 것이 아니라 바닷가에서 또 배구를 하며 보냈다.
'그렇게도 광장에서 열심히 했다면 여기서는 조금 편안히 있어도 될 텐데....... 그게 그렇게도 재미있나 보네.'
그 광경을 멀찌감치 지켜보며 내가 혼잣말을 했다. 나중에는 잔느 공주와 루이즈도 가담했는데, 그 때, 내가 세나에게 알려서 그가 직접 나서지 말고 예나, 나에티아나 등이 그들을 상대하도록 해 달라고 부탁을 했고, 그러면서 세나에게 이렇게 일렀다.
"아마추어들이 나서는 데에 프로가 끼어들어서 경기가 제대로 되겠냐?"
잔느 공주, 루이즈가 예나, 나에티아나 등과 함께 해변에서 배구를 비롯한 구기 경기에 전념하는 동안 세나는 이들의 심판 노릇을 했다. 원래는 나에티아나가 맡았는데, 나에티아나가 예나와 함께 본격적으로 경기를 하기 시작하면서 심판 역할을 자처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일행에 속한 이들이 몇몇씩 모여 놀이를 즐기거나 운동을 하는 동안 나는 그들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하미르 동부 일대가 어떻게 생겼는지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해변의 동쪽을 바라보며 해변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고요하게 물결치는 해변 너머로는 몇몇 사람들이 뛰어노는 모습이 보였다. 활발하거나 발랄하지만은 않았지만 해변가에 있는 그들의 표정에서는 여유로움과 즐거움이 가득해 보였다.
'저들 중에는 가족끼리 온 이들도 있겠지.' 그 광경으로 고개를 돌린 채로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그들 중에는 친구들끼리 온 이들도 있겠지만, 가족들이 함께 온 이들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나온 말로, 그 생각을 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광경이 하나 있었다.
푸른 빛을 띠는 하늘이 감빛으로 변하고, 잔잔한 바다가 호수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리고 해변가가 호수가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리고 저 멀리, 가족으로 보이는 어떤 사람들이 나에게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떤 젊은 여인의 모습, 그리고 좌우에 있는 어린 소녀 그리고 소년(처럼 보이는 소녀). 여인의 오른편에 있는 소녀의 모습이었다.
하얀 원피스 차림을 한 긴 머리카락을 가진 젊은 여인의 양 옆에 있는 소녀들, 그 중에서 여인의 오른편에 있는 소녀, 그 때의 (그리고 지금의) 나처럼 긴 머리카락을 가진 어린 소녀는 하얀색의 소매가 없고 어깨 끈이 달린 드레스 차림을 하고 있었으며, 무릎까지 내려가는 긴 머리카락의 끝 부분을 리본으로 묶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왼편에 있는 소녀는 소년처럼 짧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하얀 셔츠에 감색 반바지 차림을 하고 있었다. 신 역시 왼편에 보이는 소녀는 은빛 샌들을 신고 있었고, 오른편의 소녀는 평범하게 생긴 감색 신을 신고 있어서 대비가 되고 있었다.
'저 사람...... 어머니잖아.' 여인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 없었다. 어머니께서 나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실 때의 그 모습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그 어머니께서 이전에 봤던 그림에서와 같은 다소곳한 인상의 어린 소녀와 활발해 보이는 소년처럼 보이는 소녀를 데리고 호수가에서 산책을 나가는 모습이었다. 그 중 한 명은 소리였고, 다른 한 명은 내가 이전에 소르나라고 소개했던 그 소녀였다.
잠시 후, 긴 머리카락의 어린 소녀와 내가 눈이 마주쳤다. 소녀는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있었는지, 나를 호기심 어린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나는 그러하지 않았다, 나는 그 소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두 소녀를 이끌고 나아가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나와 마주했다. 하지만 나는 그를 어머니라 부르지 않았다. 나를 알아보시지 못할 것임이 틀림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께서는 그런 나를 조용히 바라보시더니, 마치 예전부터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나를 가만히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를 지으셨다. 그러면서 어머니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시고 계셨던 것일까. 그 때에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나의 모습을 보는 어머니의 표정에서 내가 누구인지 알겠다는 생각이 드러났다는 것만 알 수 있었을 뿐이었다. 내가 자신에게 있어서 어떤 존재였는지 그 분께서는 그 때에는 알지 못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보면서 나에게서 당신께서 알고 계셨을 무언가를 보신 것 같아 보였다.
한참 나를 바라보던 어머니의 모습은 두 아이들을 이끌고 내 곁을 떠나갔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멍하니 서 있기만 하던 나의 뒤에서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엄마, 저 언니 누구인지 알아요?
....... 예전에 본 적이 있던 것 같기는 한데,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하구나.
아까 전부터 그 언니의 모습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던데, 혹시 그 언니처럼 되고 싶은 것은 아니니?
아니요, 저는 그 언니처럼 되지는 못할 것 같아요.
그래요, 사나 (Sana) 는 얌전하고 착한 아이예요. 저 언니처럼 강하지만 거친 여자로 살지는 않을 거라고요.
그렇구나.
당연하지요, 사나는 강하면서도 상냥한 아이가 될 거라고요. 그렇지, 사나?
"......." 어머니와 어머니께서 데리고 다니시던 두 소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슴 한 곳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동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하는 나의 눈앞으로 바위가에 앉은 어떤 소년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얀 셔츠와 반바지 차림을 한 짧은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 아니 소녀였다.
"소리.......!"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람의 모습. 그는 다름 아닌 예전에 나와 친했던 소리 (Sori), 어린 시절의 소리였다. 이미 내 곁에서 멀리 떠나갔었을 소리가 어린 시절의 모습 그대로 내 눈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오랜만이네, 사나 (Sana)." 나와 마주한 이후, 소리는 그렇게 말을 건네고서 이적지 앉아있던 바위에서 내려와 나에게 다가와 나를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서 이제는 자신보다 한참 커진 나를 그렇게 잠시 올려다 보더니, 두 손을 허리에 올리면서 그런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왜 그래? 뭔가 안 좋은 기억이라도 떠올랐어?"
"...... 아니야, 괜찮아." 그러자 내가 바로 답했다. 이전에 자신이 마주했던 실은 사나 (Sana) 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는 내가 이적지 알고 있던 사나, 나 자신과는 분명 이름만 같은 사람이겠지, 하면서 마음 속에서 올라온 쓰다 못해 아픈 감정을 달랠 수 있었고, 그러면서 그렇게 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별로 괜찮아 보이지는 않은데." 하지만 소리는 그런 나의 속 마음을 눈치챈 듯이 그렇게 말을 건네었다. 그러더니, 자신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쪼그려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나에게 시선을 향하는 채로 나에게 이렇게 물음을 건네고 있었다.
"혹시,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강하면서도 상냥한 사나가 되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자책이 떠오른 거 아니냐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러자 나는 즉시 헛소리 하지 말라는 식으로 반박했다. 하지만 소리는 그런 나의 모습에 조용히 미소를 띠기만 하더니, 이어서 나에게 이렇게 묻고 있었다, 이전에 자신과 더불어 어머니-아르셀 아줌마라 칭했다-와 함께 걸어가던 여자아이의 모습을 보지 않았느냐고, 그리고 그가 누구인지 알겠느냐고 묻고 있었던 것이다.
"사나, 나의 어렸을 적 모습, 나의 과거이겠지." 모른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 앞에서 거짓말은 무의미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솔직하게 답해 주었다. 그러자 소리는 "그렇구나." 라고 환하게 목소리를 내며 말하더니, 이어서 자신은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면서 들어보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이에 내가 당혹스러워하면서 물음을 건네자, 소리는 조용히 미소를 띠며 나에게 이렇게 답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아이의 모습을 너의 과거이자, 너의 미래라고 생각했어.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네가 그 때의 사나로 돌아갈 것이라 믿어 왔거든."
그러더니, 그는 조용히 미소를 띠면서 어떤 여자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
누군가가 어린 시절의 자신을 버렸다고 믿을 수 있지만,
사실, 어린 시절의 자신은 버려진 것이 아닌, 마음 속 깊은 곳에 묻혀진 것일 뿐이며,
언젠가 사람은 그 모습을 되찾을 날이 온다.
"어디서 그 이야기를 들었는데?"
"베라티사의 어떤 여학자 분께서 전해주신 이야기야. 그러면서 자신이 아는 어떤 사람도 그렇게 어린 시절의 자신을 묻어두고 있지만, 언젠가는 그 어린 시절의 자신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씀하셨어."
이후, 내가 어떻게 들은 이야기인지에 대해 묻자, 소리는 바로 환하게 목소리를 내며 답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아느냐고 묻자, 소리는 잘 모르겠지만, 여학자로부터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간략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고 답했다.
"그 분께서도 어렸을 때에는 나와 너처럼 슈라일에 거주하셨대. 그러다가 어렸을 때 베라티사로 유학을 떠나셨다가 학당에서 일을 하신다고 하셨어."
"그래?" 그러자 나는 바로 그렇게 물음을 건네었고, 이에 소리는 자신은 그렇게 들었다고 답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사람을 내가 만날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다소 의아하게 들리는 말을 건네기도 했다. 그리고 내 곁을 떠나려 하다가 "아차!" 라고 목소리를 내며, 다시 내 곁으로 돌아오더니, 나에게 한 가지 전해야 할 중요한 이야기가 하나 있다고 하면서 이것만큼은 내게 확실히 전해 줄 필요가 있을 것 같다고 말하고서는 내게 이렇게 물음을 건네는 것이었다 :
"혹시 사리 공주를 자칭하는 사람이 여기 일대를 돌아다니거나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어?"
"여기는 아니지만 본 적은 있어." 그러자 내가 답했다. 하미시에서 사리 공주를 자처하는 이가 돌아다니는 광경을 본 적이 있었고, 그가 춤을 추는 모습을 보기도 했었음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자 소리는 곧바로 "그래?" 라 물었고, 그 물음에 나는 그렇다고 답하고서 얼핏 보더라도 진짜 공주 같지는 않았다고 그에 대해 말했다.
"사리 공주님께서는 혼자 계실 분이 아니야. 자신과 같은 학교에 다녔던 수많은 이들 그리고 젊은 교사들과 함께 있는 사람이고, 그들을 이끄는 역할까지 맡고 있어. 그런 사람이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놓아두고 혼자 온다니, 뭔가 이상하지 않아?"
"너도 알고 있었구나." 그러자 소리가 바로 말했다. 그리고서 그는 그렇다면 그가 누구인지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그럼에도 명심할 사항이 몇 가지 더 있다고 말하고서 그것에 대해 알려주겠음을 밝혔다.
"그 녀석은 너와 같이 있으면서 너와 네 친구들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할 거야. 지금 네가 홀로 있는 상황이라든가, 너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이용하려 하겠지. 수틀리면 협박도 할 수 있어. 내가 싫냐니 뭐니 이런 말하면서."
"협박해 보라고 해, 그러면 내가 어떻게 나갈지 바로 보여줄 테니까."
소리의 가짜 사리 공주가 협박할 수 있다는 말에 나는 조용히 오른쪽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미소를 띠며 해 볼 테면 해 보라고 답했다. 이에 소리는 막상 접해 보면 생각대로 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고서 마음을 강하게 다 잡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아까 말했던 그 여자가 그러더라, 자신이 알던 그 사람은 분명 그 어떤 것들도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라 말했었어. 너도 분명 그런 사람이겠지?"
그리고서 조용히 미소를 띠며, 그런 사람처럼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서, 내가 나아가던 방향 그대로 뛰어가며 나와 헤어졌다. 그리고 잠시 다른 방향을 돌아보다가 다시 소리가 뛰어가던 방향을 다시 돌아보니, 소리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어머, 저기 계신 분, 이전에 만나셨던 분 아니신가요?"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풍경은 다시 이전의 그 바닷가로 돌아가 있었다. 그와 함께 나의 옆에 어떤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 있었다. 다름 아닌 이전에 만났던 검은 머리카락을 묶어 올리고 은빛 왕관을 쓴 모습을 보이고 검은 드레스 차림을 한 여성으로 이전에 보았던 사리 공주와 닮은 여성이었다. 이번에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어깨 끈이 달린 검은 원피스 드레스 차림을 한 모습을 보이며 어느새 내 곁에 이르고 있었다.
"이전에 저와 함께 춤추려 하신 분이셨지요, 그렇지요?"
"그랬던가요." 이에 나는 이렇게 되묻는 듯이 답했다. 내 기억 상으로는 나는 그 가짜 '사리 공주' 와 함께 춤을 추려 하지 않았고, 제안이 거절된 이후, '사리 공주' 는 홀로 춤을 추는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려 했었다, 나에게 앞으로 함께 어떤 춤을 추게 될 것인지를 보여주겠다면서.
'자신이 어떻게 지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나?' 이에 나는 그렇게 혼잣말을 하면서도 '사리 공주' 의 "그럼요~." 라는 말을 들어주려 하였다. 이후, '사리 공주' 는 방금 전까지 어디로 가고 있었냐고 물었고, 이 물음에 나는 그냥 바닷길을 거닐고 있었다고 답했다.
"정말요? 방금 전까지 하미르 동부 쪽으로 가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동쪽으로 걸어간다고 다 그 쪽으로 가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러자 나는 하미르 동부 쪽으로 가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바로 반박했다. 이후, 나는 '사리 공주' 에게 지금 바로 소개할 사람이 있다고 말하고서 그 사람을 그의 곁으로 보내오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리 공주' 는 그런 나의 행동이 탐탁치 않은 듯해 보였고, 그것을 바로 나에게 드러냈다. 데려오지 않으면 안 되냐고 바로 나에게 물음을 건네려 하였던 것이다.
"왜요? 슈라일 호수에서 저와 함께 공주님을 만난 사람이잖아요."
"그 사람이 언제나 당신 편일 것이라 생각하세요?" 그러자 '사리 공주' 는 바로 나에게 따지는 듯이 물었다. 당시에 내가 데려올 사람은 나와 같이 사리 공주를 만났던 카리나였다. 앞으로 어찌될지는 몰라도 그는 나와 오랫동안 함께 해 왔던 사람이다. 적어도 내게 의심될 만한 그런 행적을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고-세니아와 더불어 마음 속에 시커먼 구석이 별로 없을 이들 중 한 명으로 내가 지목했던 그런 사람이다-, 딱히 그럴 일도 없음을 누구보다 내가 잘 아는데, 그런 사람을 의심해 보라며 그런 내 앞에서 그 사람의 모습이라고는 한 번도 보지도 않았을 이가 무슨 대단한 충고를 하는 듯이 종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저러할 줄 알았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자마자 나는 바로 예상한 대로 가짜임을 바로 표출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자의든 타의든 공주로 지목되어 여러 사람들을 이끄는 역할을 하는 여인이 같이 고통 받는 동료들을 놓아두고 혼자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이는 것부터 근본 없는 짓이라 생각했는데, 여기에 사람을 일단 의심하고, 부정적으로 보고, 나쁘게 보는 행각을 아무렇지 않게 일삼는 듯해 보이니, 이를 두고 '저는 가짜입니다' 라고 대놓고 말하고 있는 느낌이 가득했다.
본성을 감출 수는 있어. 하지만 감춘다고 해서 그것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야.
얼마나 잘 감추고 있는지는 본인의 역량이겠지만
누구든 특정한 하나의 계기를 통해 그 본성을 드러내게 되어 있어.
어렸을 적, 소리가 나에게 했던 말이다. 아마 어릴 적에 아름다운 여성으로 위장했던 괴물을 만났다가 함께 도망치다가 어느 수풀에 숨어있을 동안에 내게 했던 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린 아이가 했던 말이었지만 그 말은 지금도 크게 와닿고 있다. 가짜들은 진짜처럼 행세할 수 있어도 결국에는 드러나게 되어 있다. 겉치레는 따라할 수 있어도, 그 안의 정수, 진면목은 진짜와 관계 없었을 가짜가 쉽게 따라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랫동안 함께 해 왔던 사람이 그렇게 쉽게 저를 져버릴 것 같다고 생각하시나요?"
이렇게 된 이상, 나도 더 이상 참지 않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때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대놓고 따지는 행태는 용납하지 못했고, 그래서 가능한 폭발을 참아가며 그렇게 되물었다. 그러자 '사리 공주' 역시 더 나아가면 위험하겠다 싶었는지, "죄송해요. 제가 몰라봤네요." 라고 물러서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그는 다음에 '건너편 바닷가 어떤 도시' 에서 축제가 열리는데, 거기서 자신이 춤을 추러 갈 테니, 꼭 와 달라고 부탁을 하며 떠나가려 했다.
"그 도시가 어디인데요?" 그러자 내가 내 곁을 떠나가려 하던-그것도 싸구려 로망스 소설에서나 묘사할 법한 종종걸음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그것을 공주다운 걸음걸이라 생각했던 모양- '사리 공주' 를 불러서 물었고, 이에 '사리 공주' 가 돌아섰으면서도 대답을 하지 못하자 내가 그 도시의 이름이 어디인지 알려 주면서 물었다.
"가브릴리스 아니던가요? 그리고 거기에서 축제가 열리는 것 맞기는 한가요?"
"아차! 이제 기억났어요, 가브릴리스! 거기서 뭔가 축제 같은 것을 한대요! 저는 그렇게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거기로 와요!"
그리고서 '사리 공주' 는 다시 나를 등지고 돌아서더니, 종종 걸음으로 뛰다가 바로 뛰어가는 모습을 보이면서 내 곁에서 사라져 갔다.
"방금 전에 누가 왔었어?" 그 때, 내 왼편 곁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리나의 목소리였다. 아무래도 혼자 떠나갔다가 해안에 홀로 멍하니 서 있는 모습을 보면서 이전까지 누가 곁에 있어서 같이 있느라 그렇게 된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응." 이에 나는 거짓 없이 바로 답했다. 그리고서 그가 누구인지 바로 알려 주었다.
"가짜 사리 공주가 나에게 왔었어. 그러면서 너를 데리고 오겠다고 하니까, 그 여자가...... 나한테 너를 의심하라고 말한 거야, 네가 언제까지 내 편일 수 있겠냐면서 말야."
"뭐 그런 경우가 다 있냐." 그러자 카리나가 바로 반응했다. 그리고서 그 말을 믿어주지 않았을 것이라 믿는다고 말하자, 바로 그 믿음대로 했다고 답하고서 원래 가짜일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가짜임을 쉽게 표출할 줄은 몰랐다고 그에 대해 알려 주었다.
"그랬었네." 그러자 카리나는 조용히 한 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이후, 그는 나를 찾아온 이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하는데, 홀로 갑자기 어딘가로 가기에 무슨 이유가 있나 해서 따라 가 봤다고 했다. 그러자 나는 그저 동쪽 해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고 싶어서 가 봤음을 밝혔고, 이에 카리나는 조용히 미소를 띠며 알겠다고 말하고서 이제 곧 해변을 떠나 동쪽으로 갈 테니, 빨리 일행 곁으로 돌아오라고 청하고서 다시 일행이 있는 서쪽으로 뛰어갔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본 이후, 다시 동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할 때, 다시 눈앞에 희끄무레한 형상으로 소리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나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곧, 그들은 아이들을 떠나 보내고, 동쪽으로 갈 준비를 할 거야. 너도 이제 곧 가야지. 동쪽 해안은 지금 이후에 언제라도 구경할 수 있어."
그리고, 카리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일행 곁으로 내가 오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라 말하고서, 어서 가 보라고 나에게 청하기도 했다. 이에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그 동안 보이지 않다가 어찌하여 내 앞에 계속 모습을 드러내고 있느냐고 물었고, 그 물음에 그는 이렇게 화답했다.
"이제부터라도 네가 하는 일에 조금씩 관여하고 싶었다고 해야 할지."
그리고 앞으로 계속 만나볼 수 있을 것이라 말하고서 기대하고 있으라고 말한 이후에 그 모습을 감추었다.
소리가 모습을 감춘 이후, 나는 곧바로 그간 걸어갔던 방향과 반대인 서쪽 방향으로 다급히 뛰어 일행이 있는 쪽으로 뛰어갔다. 다행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일행이 미냐 그리고 베야와 함께 있는 곳은 내가 있던 곳에서 그렇게 멀지 않아 금방 돌아올 수 있었다.
"금방 왔네." 일행의 곁으로 다시 돌아온 나를 먼저 맞이한 이는 카리나였다. 이후, 그는 모두 해변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하고서 마지막으로 내가 오면 바로 떠날 참이었음을 밝혔다. 그리하여 내가 일행에 합류하자마자 카리나, 예나가 앞장서며 일행은 다시 하미르의 중앙 광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동안은 미냐, 베야와 함께 행동했고, 그래서 나도 잠시나마 그들과 함께 여행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런 내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나의 왼편에서 동행하던 세니아가 그런 나에게,
"혹시, 그 아이들하고 같이 여행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
라고 물었고, 이어서 그는 그런 생각도 이해가 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곤란한 일이니, 다른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가족들이 아이들을 걱정하고 있을 것임이 가장 큰 이유임을 밝히면서 결국 아이들을 동행시킬 생각을 포기했다.
"그래, 아이들에게도 집이 있고, 가족이 있을 것 아니겠어? 나도 어렸을 때에 오래 밖에 있으면 어머니께서 걱정하시고 그랬는데...... 그러면 안 되겠지?"
그리하여 중앙 광장에 이르렀을 때, 나 그리고 카리나가 미냐, 베야와 헤어지기로 하고, 그들에게 작별 인사말을 건네었다. 우선 내가 미냐에게 이제 작별하게 되었음을 밝히고서, 이어서 미냐, 베야에게 이제 집에 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이어 말했다.
"너희들도 집이 있고, 가족이 있을 거야. 가족들이 걱정하기 전에 어서 집으로 가려무나."
"자아, 착한 아이들이 되어야지. 어서 너희 가족 분들께 돌아가렴."
나에 이어 카리나 역시 그들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앉아서 그들에게 어서 집에 갈 것을 부탁했다. 그러자 미냐가 나 그리고 카리나의 모습을 보면서 부탁했다. 언젠가 자신을 다시 찾아와 주지 않겠느냐는 그런 바람이었다. 그러자 카리나는 그런 미냐를 보면서 환하게 웃으며 이렇게 화답했다.
"당연하지! 그렇고 말고! 언젠가 때가 되면 너희들을 반드시 찾아올게!"
"약속하는 거죠? 옆의 언니 분도?" 이에 나 역시 그렇다고 화답했고, 그리하여 미냐는 베야를 이끌고 일행이 나아가는 방향과 다른 방향-북쪽이었다-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베야의 뒤를 따르던 미냐가 고개를 잠시 돌리면서 나와 카리나에게 다시 한 번 부탁을 했다.
"언제라도 좋으니까, 이 곳으로 찾아와요! 저도 언니들을 잊지 않을 테니까요!!!"
"그 애들은 누구를 따르려나. 카리나 너겠지?"
"아마도...... 네가 만났던 카티야, 에이샤와 비슷한 경우일 것 같아."
그렇게 아이들과 헤어지고 난 이후, 중앙 광장에서 동쪽 길목을 따라 길을 걷는 도중에 카리나가 물었고, 그 물음에 바로 답했다. 그 무렵, 나는 일행의 한 가운데 즈음에 있었고, 내 우측 옆에 카리나가 있었다. - 내가 위치한 왼쪽 부근에서는 잔느 공주 그리고 루이즈가 나와 동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로 그 애들을 다시 만날 생각이야?"
"응." 이에 카리나가 답했다. 그리고 모든 일을 끝마치고 나면 바로 갈 생각이라고 말하고서, 그 이후에 그 미냐, 베야가 조금 더 성장하고 나면 그들과 함께 여행을 하는 것도 생각해 보겠음을 밝히고서 그 아이들에게 자신이 겪었던 대로, 고향 바깥의 넓은 세상을 구경시키고 싶다고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렇다는 것은, 너도 누군가를 따라 여행과 모험을 이어갔었다는 거지?"
"응." 이후, 내가 건네는 물음에 카리나는 그렇다고 바로 답했다. 그리고서 조용히 미소를 띠며, 꽤 오래 전 사람임을 밝히고서 이름이 무엇인지는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름을 알려고 하지 말아달라고 했던 사람으로 이 행성계 출신이라고 했는데, 자신이 아는 것은 그 정도였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냥 모르는 사람을 따라간 거네?"
"아니, 너무 어린 나이에 간 것은 아니고, 학업을 막 시작하고 난 이후의 첫 방학 무렵, 첫 여행을 했던 시점에서 우연히 만났던 사람이야. 처음에는 굉장히 무서운 사람인 줄 알았어. 손발부터 얼굴까지 온통 천하고 안경으로 감싸고 있어서 말야. 그래서 그 안은 해골이 아닌가, 이런 생각도 했었던 것 같아."
처음에는 나도 무서운 사람인 줄 알고 경계하고 있었어, 게다가 목소리도 마치 괴물의 그것 같았으니. 하지만 그는 나를 보더니, 조용히 인사말을 하더니, 혼자 여행하고 있느냐고 물었고, 그 물음에 나는 그렇다고 답했어. 그러자 그 사람도 자신도 혼자 여행하고 있다고 했고, 마침 잘 됐다면서 같이 여행하자고 말했지.
그 때, 나는 나에게는 미지의 지역들을 가 보겠다면서 가브릴리아라는 곳으로 기차를 타고 가려 했었고, 그 사람도 같은 곳으로 가려 했었다고 말했던 것 같아. 그 사람은 늘 나의 그림자처럼 행동했고,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무조건 따라가 주겠다고 했었어.
"돈이 있거나 하지는 않았어?"
"...... 돈은 없었던 것 같아. 옷 이외에 가진 것은 없는 사람 같아 보였어. 만약에 의심될 만한 무언가를 가진 사람이라면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을 거야. 하지만 그 사람은 겉으로는 무서워 보였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느낌은 없었어."
그는 내가 가고 싶은 곳이라면 언제나 따라다녔고, 내가 들르는 곳 근처에 늘 자리잡고 있었어. 마치, 나의 그림자라도 되는 것처럼. 그 때, 나는 가브릴리스 시내를 비롯해 여러 구역들을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그 사람은 그 곳을 이상하게 낯설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어. 가브릴리아 지역에 사는 사람 같지는 않아 보였는데도. 그는 여행 도중에는 나와 함께 다니려 했지만, 잠자리는 함께 하지 않았어. 내가 어딘가에 머무를 동안에는 나를 지켜주겠다면서 늘 내가 보이지 않는 어딘가로 가고는 했었지. 그리고 아침 때가 되어서야 내 앞에 다시 나타나고는 했었지.
이틀 동안을 그렇게 별 일 없이 함께 다녔어. 나는 5 일 동안 여행하기로 했었는데, 반 정도를 그 사람과 함께 보낸 거야. 그러다가 3 일째 아침에 그 사람에게서 이상 징후가 나오기 시작했어. 그를 아침에 다시 만났을 때, 그의 몸에서 연기 같은 것이 피어오르기 시작한 거야.
그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지. 그리고 그의 몸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고 말하고 나서야 그 사람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아차린 것 같아. 그리고 나를 보더니, 이번 만큼은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같이 가 달라고 청했지.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나는 그의 바람대로 같이 가기로 했어.
그가 가고자 했던 곳은 어느 가브릴리스 북쪽 인근의 어느 해변이었어. 그 곳으로 같이 가면서 거동도 점차 불편해져서 나중에는 내가 부축여줘야 할 지경에 이르렀지. 그래서 해변에 도달했을 때에는 어디 앉아있으라고 내가 부탁해야 했었어. 그리고 그가 앉자, 내가 그 옆에 앉았지.
한 동안 말이 없이 앉아있던 그 사람은 갑자기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 모습을 보자마자 나 역시 그를 따라 일어났어. 연기를 뿜어내는 모습을 보이며, 그 사람은 내게 이렇게 말했던 것 같아. 저 해변 너머에 내가 살았던 곳이 있었다고 말야. 그리고 내게 물었어,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나는 이렇게 답했어, 누군가를 지켜주는 사람이 되는 것. 어린 시절에 나는 늘 이상한 꿈을 꾸고 있었어. 산길을 따라 무언가에 쫓기는 듯이 도망가는 그런 꿈이었어. 무엇에 쫓기고 있었는지는 지금도 잘 몰라, 그냥 도망갈 뿐이었던 것 같아. 그러다가 언젠가 내가 누군가를 지키기를 소망하기 시작했을 때, 그 꿈은 더 이상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 같아. 그래서 그 꿈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지. 누군가를 지키지 못하는 삶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누군가를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늘이 계시를 내린 것이라고.
그 이야기를 했을 때, 그 사람은 그랬구나, 라고 조용히 답을 할 뿐이었지. 그리고 그런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려 한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했어. 그리고 자신의 옛날 이야기라면서 자신이 예전에 만났다는 어떤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어.
자신이 있던 곳에 있던 신병이었다고 했었어. 괴물들의 인류 습격이 시작되면서 청년들이 너도나도 군에 지원하다보니, 엉겁결에 같이 지원했던 것 같다고 했었지. 그리고 그는 말했어, 그는 겁이 많았고, 늘 가족들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소망했었지만, 가엾게도 신병이 전입왔을 때에는 내가 속해있던 곳을 제외한 모든 군 조직이 인류를 배신하고 괴물의 편이 된 상태였고, 그래서 군은 괴물과 합세하여 인간들을 학살하고 있던 그런 상황이었는데, 자신이 속한 부대만이 그런 군과 괴물에 저항하고 있는 처절한 상태였다고.
부대장에 의하면 그 신병은 겁이 많았고, 죽이는 것을 너무나 꺼리는 사람이었다고 하더구나. 그런 처지에도 지역을 지키기 위해 많은 남자들이 군에 자원 입대하자 그 열풍에 가세에 군에 입대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더군. 그런 그의 기질을 부대장은 진작에 알아보고 전투가 시작될 즈음에 미리 그를 탈출하게 했던 게야. 그리하여 그는 그 부대장이 지키던 지역에서 탈출해 살아남을 수 있었지.
'괴물' 이라면 아마 이전에 내가 알프레드 노인으로부터 들은 바 있던 그 '괴물' 과 같은 존재였던 것 같다. 그 역시 어떤 신병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고, 이후에도 나는 세나로부터 그 신병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카리나가 자신이 만났던 어떤 사람으로부터 들은 신병 역시 같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 사람은 신병에 대해 부대로 들어오면서 너무도 많은 후회를 하고 있었다고 말했어. 언제 침공할지 모르는 '괴물' 들과 그로 인한 늘 위협받는 목숨, 그리고 그런 험악한 주변 상황으로 인한 험악한 군기와 틈만 나면 가해지는 가혹한 처벌 등등...... 그 모든 것들이 신병을 힘들게 하고 있었다고 했어.
험악한 부대 내외의 상황에 병사들은 그저 서로를 의지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고 했지. 그 신병 역시 자신을 비롯한 최근의 선임병들에 많이 의지했었다고 했었어.
참 다행스러웠던 것은 신병이 들어오고 난 이래로 한 동안은 평온했다는 것. 그 사람이 말했지. 그 덕분에 부대에서는 그 기간 동안 민간인 지원에 나서고, 민간인들의 공연 행사에 참가하는 등, 여러가지 좋은 일, 즐거운 일들이 많았다고 했었어. 이후, 그 사람은 그 무렵에 위문 공연으로 온 어떤 여가수에 대한 이야기를 한 동안 했었어. 당시에는 꽤 나이 든 가수였지만 어쨌든, 왔다는 것 자체만으로 감사하고 있었다고 해.
하지만 그 평화는 태풍의 눈과도 같은 것이었고, '괴물' 들의 의지에 의해 언젠가는 끝날 예정이었다고 했어. 그리고 결국 평화가 깨지는 날이 오고 말았지. 대대적으로 '괴물' 들이 부대가 위치한 거점인 도시로 침입해 오기 시작했던 거야.
부대 내에서 부대장을 비롯한 간부들의 심각한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고, 그 때에 그는 부대장과 간부들이 신병을 부대에서 탈출시키기로 결정을 내리는 광경을 보았다고 했어. 그 이후, 그는 신병에게 부대를 떠나 탈출선을 타야할 것을 말했고, 그 이후, 다음 날 새벽에 부대의 간부가 찾아와 정식으로 통보를 했다고 해, 피난민들을 태우고 그의 고향을 향할 탈출선이 아침에 도착할 예정임이라고 하면서 그 탈출선을 타고 고향으로 가라고 했지.
"그래서 그 신병은 어떻게 됐어? 탈출선을 탔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그 이후로 그 사람은 신병이 탈출선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간 것 같다는 이야기만 할 뿐, 그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어. 아마 그 역시 부대 내의 인물이었고, 그래서 부대 밖으로 나가게 된 그의 사정에 대해 잘 알지 못했겠지."
'괴물' 들의 침입은 신병이 탈출선을 타고 떠나갔을 그 다음 날부터 시작되었다고 했어. 부대원들이 하나둘씩 허망하게 죽어가는 상황 속에서도 그는 처절하게 싸움을 이어가려 했었지. 그리고 간신히 살아남은 간부를 포함한 몇몇 부대원들과 함께 '괴물' 들의 근거지에 닿았지만 그 부대원들마저 죽고, 자신 역시 '괴물' 들의 압도적인 힘 앞에 목숨을 내놓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했었어.
그 때에 그는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어째서인지 눈을 떴을 때에는 어떤 해변가 위에 있었다고 했었지. 어째서인지 그는 검게 타 버린 군복에 검게 변한 헬멧과 장갑을 끼고 있었고, 얼굴에는 방독면이 씌워져 있었다고 했어. 손에는 착검된 소총이 있었지만 형체만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심허게 훼손되었고, 애초에 탄이 없어 사실상 총포로써 사용할 수 없는 물건이었어. 이후, 그는 샘 하나를 발견해 방독면을 벗고 얼굴을 씻으려 했지만....... 샘에 비춰진 자신의 얼굴을 보고는 다시 방독면을 써야만 했대.
"그것이 그 때, 네가 만났던 그 사람의 모습이었지? 그 때에도 그 소총을 손에 들고 있었어?"
이 물음에 카리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그리고 그 때에도 소총을 들고 있었지만 검은 없었다고 말했다. 검 역시 거의 삭아서 망가진 상태였고, 그래서 오래 전에 부러진 것 같았다고 밝혔다.
그 사람은 이후, 나를 보더니, 나에게 그 신병의 진심에 대해 알 길은 없지만 그가 남긴 수기를 언젠가 본 기억이 있다고 말했어. 수기에는 신병의 이런 글이 젹혀 있었대.
이번에도 선임병들에게 크게 질타를 받았다.
내가 능력이 부족하고, 내가 바보 같아서 그랬다.
처음에는 선임병들이 원망스러웠지만,
이제는 나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원망스럽다.
조금만 열심히 노력하면 선임병들만큼 할 줄 알았는데,
고향과 가족들을 지키고 싶었는데,
이러면 내 목숨 하나 지키지 못할 것 같다.
이제 나 어떡하지.
그리고 이런 문구도 있었다고 했었어.
지난 번에 소식이 들려왔다.
최근 선임병들 중 하나의 고향이 괴물들에 의해 유린당했다는 소식이다.
아마 그 가족들은 물론 모든 사람들이 괴물의 먹이가 되어 사라졌겠지.
너무도 무서운 이야기들이 들려온다.
괴물들이 인간들을 잡아먹고 살을 찢어 내장과 피가 폐허 위를 흘러내린다는 이야기다.
최근에 그 놈들이 내 고향을 노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제발...... 놈들이 고향을 노리지 않았다면.
그리고 어딘가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어. 어떤 병사가 산길 위를 처절히 뛰어가고 있다는 그런 이야기였지. 그 병사를 만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고 했어. 그 병사는 어느 부대의 신병으로 얼마 전에 고향이 괴물들에 의해 폐허가 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다고 했었지. 부대에서는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고향으로 가는 탈출선으로 가라고 했지만, 병사는 탈출선을 타지 않았다고 했어. 아마 고향이 짓밟혔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겠지. 부대원들도, 고향 사람들도, 가족들도 지키지 못한 자책감과 그로 인한 자괴감 속에서 그는 무작정 산야를 미친 듯이 뛰고 있었을 뿐이라 했었어.
이후, 그 사람은 내게 이렇게 말했지. 나의 소망을 들으면서 그 신병이 떠올랐다고. 그리고 그의 뜻을 대신 이룬다거나, 그를 비롯한 희생된 사람들의 복수를 하는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고 말하고서, 소망이 비슷하다고 해도, 비슷할 뿐, 그와 나의 소망은 다른 것이며, 그래서 나는 그가 될 수 없기 때문이라 했지. 그리고 내게 바라는 바가 있다면 그 바람을 온전히 이룰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달라 부탁을 했지. 그리고 해변을 따라 내 곁을 홀로 떠나가면서 그 바람대로 사람을 지키는 누군가의 소중한 사람이 되어달라 말했어. 그것이 그가 마지막으로 내게 남긴 말이야.
"그 이후로 그를 다시 만나거나 한 적은 없었지?"
이후, 이번에는 세니아가 카리나에게 물었고, 이 물음에 카리나는 다른 말 없이 고개만 조용히 끄덕이는 것으로 그렇다는 의사를 전했다. 그리고 계속 짙은 연기가 그에게서 피어오르고 있었음을 밝히고서 그를 보면서 머지 않아 죽을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고 그에 대해 이어 말하기도 했었다.
"그러고 보니, 카리나가 어렸을 때 만났다는 그 사람과 비슷한 부류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것 같은데."
이후, 세니아는 카리나에게 그가 어렸을 때 만났다는 그 사람과 비슷한 부류의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어디서 들었는지에 대해서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것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에게 들어본 것 같다고 말했다.
세니아에 의하면 그 사람들은 한결 같이 어두운 색의 옷을 입고 있으며, 손과 발 그리고 얼굴을 어두운 색의 천 같은 것으로 가린 모습을 보이는 이들로, 감빛의 기운과는 다른 검은색의 음험한 기운을 뿜어내는 어둠의 존재들이라 하였다. 음산하고 낮은 목소리로 알 수 없는 목소리를 중얼거리며, 사악한 눈을 번뜩이는 이들이라 하니, 그 이야기를 들으며, 처음에는 무서웠다고 했다.
"그들에 대해 어른들이 늘 가까이 다가가면 죽음의 저주가 내리는 위험한 이들이라고 경고를 준 것도 그런 의식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준 것 같은데, 카리나는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카리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답했으며, 자신의 고향에서는 그런 것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다고 했다. 이에 세니아는 환하게 미소를 띠며, 그래서 그런 존재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던 것 같다고 나에게 말했고, 이에 카리나 역시 조용히 미소를 띠며, "그러하려나." 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후에 더 들어본 이야기는 없느냐고 세니아에게 묻자, 그로부터 이런 이야기가 들려왔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그 존재들은 구 세계의 인간들로서 원래는 죽었지만 죽으면서 모종의 이유로 저주를 받아 저주에 물든 자신의 사체를 육신 삼아 삶을 이어가게 된 이들이라고 하더라. 몸을 감싸는 어둠의 기운은 그 저주에 의해 생겨난 검은 기운으로 그 기운이 소진되면 그들은 소멸한다고 했어. 검은 기운은 지상에서 살아가는 한 계속 소진되고, 그로 인해 그런 존재들은 결국 소멸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는 거야."
"그렇다면, 카리나 씨께서 어린 시절에 만나셨다는 그 존재는 어쩌면......?"
이에 일행이 있는 부근의 상공에서 비행하던 나에티아나가 물었고, 그 물음에 세니아는 그가 짐작한 대로일 것 같다고 답하고서 카리나 역시 그런 존재였음을 이미 충분히 인지하고 있을 것이라 이어 말했다. 이후, 앞서 나아가던 세나가 세니아 그리고 카리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그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그 남자 역시 저주를 받은 채로 떠돌면서 무언가를 찾아 헤매고 있었을 것 같아요. 그러다가 어린 카리나 씨를 만나면서 그의 소망을 듣자마자 그와 함께 다니고 싶다고 했다는 것은...... 자신이 찾고 싶었던 사람은 그 신병이었고, 어린 카리나 씨께 그 신병의 모습을 보았던 것은 아닐까요."
"그랬을 거야." 이에 카리나도 동의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세나는 카리나에게 그 신병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느냐고 물었지만, 카리나는 "잘 모르겠어." 라고 답하고서 이어서 그 사람도 그 신병이었던 사람의 행방에 대해 말하지 않았음을 밝히고서, 그 역시 그 사람의 행방에 대해 더 이상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으리라고 그가 그 사람의 행방에 대해 말하지 않았던 그 이유를 언급했다.
"어쩌면 그 역시...... 저주를 받아 그 사람과 같은 괴물이 되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랬을 수도 있어. 내가 짐작한 바에 의하면 그 신병이었다는 사람 역시 고향도 잃고 가족도 잃고, 아무것도 지켜내지 못했음에 대한 절망감에 사로잡혔을 것 같았고, 그로 인해 저주를 받아 떠도는 존재가 되었을 것 같으니까. 하지만 그 진실은 신만이 알고 있겠지."
이후, 세나의 물음에 카리나가 이어 답했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들어본 바에 의하면 카리나 씨께서는 이미 가브릴리아에 가 보신 적이 있다는 거네요, 그렇지요?"
"가 봤지." 이후, 세나가 건네는 물음에 카리나가 그렇다고 답했다. 그리고서 그 이후에도 몇 번 가브릴리아에 가 본 적은 있지만 지브로아 일대에는 가 본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세니아가 그런 카리나에게 지브로아 역시 나름 유명한 곳 아니냐고 하면서 왜 가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 물음에 카리나는 가브릴리아의 가브릴리스를 비롯한 여러 도시의 명소들을 둘러보기는 했지만, 이상하게 지브로아까지 잘 관심이 닿거나 하지는 않았었다고 답했다.
"그러면 지브로아는 이번에 처음에 가 보는 거야?" 이에 세니아가 카리나에게 그렇게 말했고, 그 물음에 카리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그 때, 나에티아나가 예나를 보더니 화제를 바꾸기 시작했다. 예나는 앞으로 계속 일행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냐는 물음이었다.
"비행선이 있는 데까지는 동행할 것이고, 그 이후로는 비행선을 타고 여러분을 따라가려고 해요. 비행선은 하미르 서부와 동부 경계의 교외 지대에 정박시켜 놓았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루이즈 씨와 함께 여러 거리를 돌아다니며 여행을 하고 다시 비행선으로 돌아가려 했다가 이렇게 아르사나 아가씨를 비롯한 분들을 만나게 된 거예요."
"교외 지대라 하시면, 다리의 동쪽 건너편에 있는 그 초지대를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그 곳은 여기서 너무 멀지 않나요?"
자신의 비행선을 정박시킨 위치가 그간 머무르고 있던 하미르 시가지와는 다소 거리를 두는 곳이었던지라, 그 위치에 대해 세나가 다소 걱정이 되었는지 그런 예나에게 걱정스러워 하는 심정을 담아 목소리를 내며 물었고, 이러한 세나의 물음에 예나는 환하게 웃으며 "걱정 마세요." 라고 화답하고서 나름의 장치를 해 두어서 비행선 자체에는 큰 문제는 없었을 것이라 이어 말했다. 그 때, 세니아가 그런 세나를 보면서 그에게 예나에 대해 이렇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그 분 정도면 보통 실력자가 아닐 텐데, 그렇다면 이런저런 장치를 해 두셨겠지. 설마 비행선에서 먼 곳으로 가는데, 그런 장치 하나 하지 않으셨을 것 같아?"
당시에 동행하고 있던 7 명-카리나, 세니아, 세나, 나에티아나, 잔느 공주 그리고 예나, 루이즈- 사이에 있으면서 그렇게 서로 흥미로운 대화를 이어가기도 하고, 대화를 듣기도 하다가, 서로 친한 이들끼리 서로 옥신각신하기도 하면서 나의 발걸음은 계속 동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일행의 곁으로 번화한 상점 거리의 모습이 지나가고, 변두리 거리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이어서 하미르 서부와 동부의 경계를 따라 흐르는 강물 그리고 강물을 가로지르는 다리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리에 이르는 동안 지나쳐 간 변두리 거리의 모습이 어떠하였는지를 설명해 보자면 변두리 구역은 슈라일 마을과 대략 비슷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각종 가게들이라든가 식당, 빵집, 찻집 등 있을 것들은 다 있었다. 특히, 교외 지역의 넓은 지대를 차지해 뜰을 갖춘 찻집이 하나 있었는데, 나름 분위기 있어 보이는 곳이라 잠깐 관심을 가져보기도 했었지만 갈 길이 바빴던지라 찻집의 모습과 위치만 기억해 두고 일단 지나치기로 했다.
"아르사나 씨, 세니아 씨, 저기를 봐요!" 일행이 다리 앞에 이르렀을 무렵, 앞서 나아가던 나에티이나가 나와 세니아를 다리 건너편의 한 곳을 가리키며 불렀고, 그 부름에 응해 다리 건너편을 보려 하였다. 그 곳에는 다리 건너편에 정박되어 있었던 예나의 비행선이 있었다. 고문명 시대의 카라반 (Karavan) 을 함선으로 개조한 모습처럼 생긴 그 비행선은 몇 사람을 태우고 다닐 수 있을 정도의 시설을 갖추고 있어 보였다. 그 주변에는 하늘색 빛을 발하는 장막이 펼쳐져 있어서 나름의 보호 장치를 예나가 미리 해 두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그 빛이 워낙 밝았다보니, 나에티아나가 발견하기 전에도 이미 눈에 띄었고, 그래서 그 모습을 눈여겨 보고 있었는데, 그 때, 나에티아나가 나를 불러서 그 너머에 예나의 비행선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린 것이었다.
"이미 봤어." 그의 부름에 내가 바로 응답했다. 그리고 저 너머에 있는 빛에 둘러싸인 배를 말하는 것 아니냐고 물으니, 나에티아나는 바로 머쓱해진 표정을 짓고서 "이미 보셨었네요." 라고 말하고서 자신은 자신을 제외한 일행의 사람들이 아직 발견하지 못한 줄 알고 배의 존재를 알리려 했었다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밝히기도 했었다.
"그건 그렇고, 내티, 프레미와는 연락해 봤어?"
이후, 나는 다리를 건너 배가 위치한 다리 왼편의 풀밭으로 다가가려 하면서 나에티아나에게 물었고, 그 물음에 나에티아나가 그렇다고 답했다. 그리고 자신은 가브릴리스에 있음을 알리고서 요청을 하면 언제든지 오겠음을 알리기도 했었다고 말했다.
"프라에미엘을 지금 불러올까요?"
"지금 당장 부를 필요는 없을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오겠다면 받아줘야지.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는 알고 있어?"
이후, 내가 건네는 물음에 나에티아나는 이미 알고 있는 것 같다고 답하고서 기억의 사당과 그 주변 해역에서 이상한 기운이 지속적으로 감지되어 결국 기억의 사당과 그 주변 일대가 폐쇄 조치되었다는 소식을 그로부터 들었음을 밝혔다.
"그래서 그 일대는 지금 아무도 없는 상태라 해요. 그래서 그 소식이 전해질 즈음에 아르사나 씨를 비롯한 일행 모두가 기억의 사당으로 가려 할 것 같다고 말했었지요."
하지만 도와주러 올 것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자 카리나가 나를 대신해 나에티아나에게 화답했다. 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우선 말하고서 가능한 나를 비롯한 길을 가는 이들이 사건의 해결에 나서보자는 화답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와 세니아 그리고 비행선의 주인인 예나부터 시작해 하나둘씩 일행에 속한 이들이 비행선 그리고 비행선을 감싸는 빛의 장막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후, 예나는 비행선을 감싸는 빛의 장막을 그 앞에 왼손을 내밀어 사라지게 하고서는 다시 그 손을 내리고 비행선을 등지며 섰다.
"이것이 제가 이용하는 우주 항행 겸용 비행선이에요. 카라반 기능도 같이 겸하고 있어서 저와 동행하는 이들이 거주하며 지낼 수 있도록 하고 있지요."
그리고서 비행선 안으로 예나가 들어서려 하는 그 때, 내가 위치한 그 앞에 있던 카리나가 당시에 옆에 있던 루이즈를 바라보며 예나와 함께 있는 동안 그 비행선 내부에서 거주하고 있었던 것이냐고 물었고, 이 물음에 루이즈는 그렇다고 답하고서 예나가 비행선을 운용할 때에는 뒤쪽의 거주 공간에 머무르고 있었음을 밝혔다. 우주선 내부는 생각보다 심하게 흔들리지 않아서 좋았다고 말한 다음에 다만,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보니, 여러모로 외로웠다고 했다.
"잠자는 시간에는 예나 선생님께서 잠자리를 만드신 이후에 잠자리에 머무르시기는 해도 평소에도 일이 많으셔서 피곤해 하시는 탓에 오랜 대화 시간을 갖거나 하지는 못해요. 그래서 평소에도 같이 있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때가 있었지요."
"그랬었군요." 그러자 카리나는 알겠다는 의미의 답을 했다. 이후, 루이즈는 잔느 공주에게 같이 와 달라고 청하고서 예나를 따라 잔느 공주를 이끌고 비행선의 뒤쪽 칸에 있는 거주 공간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 때,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나에게 카리나가 다가와서 물었다.
"아르사나, 너도 들어가 보지 않을래?"
"아니, 나는 여기서 그냥 비행선에서 예나 씨를 비롯한 이들이 어떻게 지내나 지켜보려고."
이후, 예나가 거주 공간에서 하얀 탁자를 꺼내오고, 이어서 잔느 공주와 루이즈가 의자를 하나씩 가져오고 있었다. 이후, 예나는 하얀 탁자를 비행선 앞에 올려놓고, 이어서 의자 몇 개를 이어서 하나씩 가져온 다음에 비행선 부근에 서 있던 이들을 불러오기 시작했다. 자리에 잠시나마 앉아있는 시간을 가져보자는 것으로 예나가 그렇게 요청을 하니, 카리나 등의 일행 모두 그 쪽으로 가게 되었다. 다만, 나에티아나는 날아서 비행선 위로 올라갔고, 나는 내가 말한 바대로 비행선 근처에서 계속 그 모습을 지켜보려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예나는 루이즈, 잔느 공주와 더불어 자신의 곁으로 온 세니아, 카리나, 세나와 함께 마주보며 앉아서 이런저런 대화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는 동안 나는 그들의 모인 곳으로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갔지만 몇 걸음 근처에 있으면서 그들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잠시 주변을 둘러보며 그 일대의 풍경을 보려 하였다. 다리 너머로 어느새 하늘 가득히 드리워진 흰 구름의 색을 이어받은 하늘과 어두운 푸른색을 띠기 시작한 강이 굽이치는 모습이 보이고 있었으며, 근방의 풀밭이 초록색 풀과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을 드러내며 하늘을 뒤덮은 하얀 혹은 밝은 잿빛을 띠는 구름과의 색 대비를 보여주고 있었다.
"친구들하고 줄곧 같이 있더니만, 여기서 또 혼자 뭘 하고 있어?"
그 때, 어딘가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주선 쪽에서 들려온 소리. 그 소리를 듣고 놀라서 다가가 보니, 예나 등이 대화를 하는 반대편, 우주선 뒤쪽에 걸터 앉은 소리 (Sori) 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나는 곧바로 놀라면서 그에게 물었다.
"여기로는 어떻게 찾아왔어?"
대화에 방해가 될 것 같아 조용히 목소리를 내어 물었고, 이에 소리는 조용히 미소를 띠며 나를 내려다 보며 어찌하다보니, 찾아오게 됐음을 알렸다. 그 이후, 그는 그간 궁금했던 것 하나가 있지 않느냐고 나에게 물었고, 자기 앞에서는 숨기지 않는 편이 좋다고 말했다.
"...... 카리나가 어린 시절에 만났다는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 세니아도 관련된 이야기를 들어보기는 했지만, 자세한 이야기까지 들어보지는 못했던 모양이야. 내가 들은 이야기를 해 줄게. 그 이야기를 잘 듣고, 적절한 때에 그 이야기를 들려 줘, 알았지?"
"무슨 이야기인데." 그러자 내가 바로 소리를 보면서 그렇게 물었고, 이 물음에 소리가 조용히 미소를 띠기 시작했다. 꽤 의미 깊어 보이는 미소였다.
"혹시 죽음의 기사 (Jukîkavalia) 라 칭해지는 존재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
"죽음의 기사라고?" 그 이름이라면 그렇게 낯선 명칭은 아니었다. 전설이나 민담 등에서 이래저래 한 번씩은 들어보았던 그런 이름이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어렸을 때에도 슈라일 마을의 아이들 사이에서도 들려왔던 그런 이야기였다.
"어머니께서도 그 죽음의 기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셨던 기억이 나."
어렸을 적, 어머니께서 혹시 검은 옷을 입고 검은 기운을 흩뿌리는 이들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물으신 적이 있었다. 그 때, 어머니께서는 그런 이들을 사람들은 '죽음의 기사' 라 칭하며, 아이들이 그를 만나면 큰 불행에 처할 수 있으므로 함부로 만나서는 안 된다고 하셨었다. 그러면서 죽음의 기사들은 어디에서든 볼 수 있지만 흔히 볼 수 있는 이들은 아니며, 주로 어둡고 음습한 곳에 숨어 지낸다고 말씀하시고서는 숲의 깊은 곳 같은 어두운 곳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만큼, 아이들이 함부로 숲 속 깊은 곳으로 들어서면 안 된다고 알리시기도 하셨다.
하지만 나를 비롯해 슈라일, 샤하르의 아이들 중에서 죽음의 기사를 만났다는 아이들은 없었고, 그래서 어른들이 아이들이 함부로 숲 속이나 동굴 같은 데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고 일부로 꾸민 이야기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그런데, 그런 죽음의 기사 이야기가 카리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야?"
그러다가 그가 왜 난데 없이 죽음의 기사 이야기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하면서 소리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소리가 그 존재를 언급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카리나가 만났던 사람은 검은 옷차림에 얼굴과 손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고, 몸에서 검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 너도 이미 짐작하고 있는 걸. 굳이 그 물음에 대한 답은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네."
그러더니, 소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죽음의 기사' 라 칭해지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언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이들은 많지 않아. 그들은 행성계에 문명이 탄생하기 전부터 존재했었고, 그 이후에도 계속 행성 전역을 마치 망령처럼 떠돌며 지낸다는 것이었지. 그들은 늘 검은 옷, 종류에 관계 없이 검게 물들거나 그을음 진 옷을 입고 있으며, 얼굴과 손을 검은 천이나 방독면, 장갑 등으로 가리고 있다고 해. 그들 중 대다수는 늘 느릿느릿하게 걸어다닐 뿐으로 이는 다리에 힘을 내지 못해 뛰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지.
기사라 칭해지는 이들답게 그들은 한결 같이 무구를 손에 들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무구는 너무도 낡고 바스라져 있어서 제 성능을 내지도 못하고, 그들의 힘은 미약하기 이를데 없어서 전투 능력은 거의 전무한 수준이지. 어린아이와 싸워도 실은 이기지 못할 정도라는 말도 있더라. 애초에 잘 뛰지도 못하는데, 싸움을 제대로 하는 것은 어림도 없겠지, 싸우려면 계속 뛰어야 하는데 말야.
예전에도 너도 들었겠지만, 어른들이 아이들이 검은 옷차림의 검은 기운을 뿜어내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들이 보이면 즉시 피하라고 했었지? 괜히 그런 것은 아니고, 그런 험악한 인상의 존재들이 무기를 들고 있기까지 하니, 호기심 어린 아이들이 괜히 접근했다가 해를 입을 수 있다고 해서 그런 거야. 하지만 내가 아는 바로 그런 죽음의 기사들을 봤다는 아이들 중에 그들이 자신들을 해치려 달려들었다는 이야기를 한 이는 없었어. 실제로는 아이들을 해치거나 저주를 내리는 능력 같은 것은 없었기 때문이겠지.
카리나가 예전에 만났던 '죽음의 기사' 도 카리나를 실제로 해치거나 하지는 않았었지? 그런 존재들 중 대부분은 그런 이들이었을 거야.
"이제부터 잘 들어야 해. 그들이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니까. 나도 특별히 알게 된 계기가 있는 것은 아니고, 어디에선가 들은 이야기일 따름이야."
그리고서 소리는 나에게 '죽음의 기사' 라 칭해진 이들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 때만큼은 다소 장난스러운 소년스러운 목소리를 내던 소리 역시 이전에 비해 확연히 진지해진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죽음의 기사 혹은 사신 기사라 칭해지는 이들. 하지만 그들 모두가 원래 기사였던 것은 아니야. 아니, 오히려 원래부터 기사였던 이들은 거의 없을 거야. 다만, 그들이 검게 물든 옷을 입고, 검게 물든 무기 같은 것을 하나씩 손에 들고 있고, 검게 물든 옷을 입고 무기를 든 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죽음의 기사, 사신 기사라 칭했던 것이 죽음의 기사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었겠지."
그들은 이 행성계의 고문명 시대가 멸망하기 전부터 살아온 이들로 이 행성계의 선주민이라 할 수 있지. 주로 고문명 시대의 말기에 태어나 전란과 전염병 등으로 어지럽혀지고 기후 재난으로 점차 몰락해 가고 있었던 옛 인류 문명 속에서 태어난 이들이었지. 그들 중 대다수는 위태로운 생활 기반 하에서 하루하루 일상을 보내던 이들이었을 거야.
하지만 그 일상도 언젠가는 끝날 운명이었지, 한편으로는 행성에서 기후의 변질을 거듭한 끝에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어가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갑자기 창궐하기 시작한 '괴물' 들과 모종의 이유로 '괴물' 들과 협력한 인류의 군단에 의해 파괴와 살육이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야.
죽음의 기사들 중 대부분은 그 와중에 희생된 사람들이었지. 그들의 영혼이 죽으면서 남겼을 슬픈 사념들과 함께 그들의 윤락하고 변질된 육신의 잔재에 깃들어 조용히 떠돌 따름이지. 그나마도 오랜 세월과 사념의 여파로 검게 물들어 버렸을 것이고.
그들은 기사라 칭해지고 있지만, 그들 중 대부분은 전쟁터에서 죽은 이름 없는 병사들이었어. 낡고 검게 물들어 버린 그들의 군복과 칼날 달린 검게 물든 총포로 인해 죽음의 기사로 알려지게 된 것이지. 병사가 아닌 이들도 검게 물든 낡은 옷과 검게 물든 나무 막대 등을 들고 있어 같은 부류로 알려진 것이고.
죽음의 기사하면 예로부터 이렇게 들었을 거야. 원래 기사였던 존재로 죽은 이후에도 어둠의 사념과 마력을 더해 더욱 강인한 전투력을 가진 존재라고. 하지만 세간에 알려진 그들의 전투력은 환상일 뿐, 그들은 지금 여기 사는 사람들이라면 아이들도 이기지 못하리라는 것이 그 실상이야. 그들의 잔재밖에 남지 않은 육신은 물리력을 낼 수 없고, 너무도 낡아 금방 바스라질 것 같은 무기조차 간신히 들 수 있을 지경이니까.
게다가 세상에 거부당한 존재들이기에 그들은 세상의 빛에 노출되면 잔재밖에 남지 않은 육신마저 사그라지는 특성까지 갖고 있어. 빛의 정령에 의해 새롭게 태어난 세상에 거부당한 존재들이었음이 그 이유야. 이루지 못한 것, 자신이 떠나 보낸 것들에 대한 미망 속에서 늘 외롭게 살아가야 했지만, 그들의 사악해 보이는 외관으로 사람들은 그들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그들 자신도 그런 존재인 줄을 알기에 세상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이겠지. 그들이 늘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 사는 것은 그러한 이유가 있기 때문일 거야.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카리나가 어렸을 때 만났던 그 검은 외관의 사람에게 검은 연기가 계속 피어오르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시간이 지날 수록 검은 연기가 더욱 거세게 피어올랐다는 이야기. 그러면서 그에게 물었다.
"카리나가 예전에 자신이 만났다는 사람에게서 늘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고 했었어. 그리고 시간이 지날 수록 더욱 그것이 거세졌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것은......"
"너도 이미 짐작하고 있을 바대로야." 이에 소리는 그렇게 화답하고서 피어오르는 연기 혹은 재는 방금 전에 자신이 언급했던 그 육신의 잔재가 점차 소멸해 가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눈을 감으면서 조용히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가려 했다.
"그 몸에서 더욱 거세게 연기가 피어오른 것은 아마도...... 소멸의 때가 가까워지면서 소멸 현상이 더욱 격해졌기 때문이겠지."
"카리나가 만난 그 사람도 죽음의 기사였다는 거지?"
이렇게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내가 건네는 물음에 소리는 그렇다고 답했다. 그리고 그 존재 역시 카리나를 보면서 자신이 예전에 떠나 보냈던 어떤 사람을 떠올리며, 친근감을 느끼고, 그와 잠시나마 함께 하고 싶었을 거야. 빛에 오래 노출되면 자신도 결국 그로 인해 소멸되어 갈 것임을 알면서도, 라고,
"자신이 가장 그리워하던 사람을 만났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 라는 것일까."
이에 소리는 그렇다고 답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일화가 있어. 죽음의 기사에게 선택받은 아이들은 무인 혹은 신성한 기사가 될 운명을 타고난다는 거야. 죽음의 기사와 신성한 기사는 서로 상극의 존재일 텐데, 흥미롭지 않아?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생각해. 죽음의 기사라고 해도, 그들 중 대다수의 본질은 결코 사악하지 않아. 오히려 이루지 못한 것들과 소망들로 인한 회한에 사로잡힌 불행한 존재들이지. 그들은 아마 아이들을 볼 때마다 그 아이들은 자신과 같은 미래를 소망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질 거야. 혹은 자신보다 더욱 나은 삶을 바라는 이들도 있겠지. 그런 바람이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
"그렇다면, 카리나가 수호의 마법을 익히게 된 것도 죽음의 기사를 만난 이후로 그런 운명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소리는 그런 물음에 그렇게 속단할 수는 없다고 답했다. 다만, 죽음의 기사가 남긴 유언이 그의 삶에 영향을 주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는 말을 하기는 했다.
"사나, 이제 슬슬 일행 곁으로 돌아가야지? 여기에 너무 오래 머무르고 있다가는 일행이 이상하게 너를 쳐다볼지도 모르잖아. 자아, 어서 가 봐. 나는 언젠가 다시 올 테니까."
이후, 그는 비행선에서 뛰어내려 지면에 착지하더니, 그 너머 풀밭 먼 곳을 향해 뛰어가는 것으로 눈앞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렇게 그가 사라져 가는 광경을 보자마자 나는 곧바로 다시 일행이 있는 우주선의 정문 쪽으로 급히 뛰어갔다.
"아르사나, 그 동안 어디 가 있었어?"
나를 맞이하면서 카리나가 건네는 물음에 나는 일단 주변 일대를 돌아다니고 있었다고 답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카리나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누군가를 만나고 온 것 같았다는 것이다. 그런 그의 물음에 나는 더 숨길 것 없다는 생각에 바로 누구를 만났는지에 대해 나름 자세히 알려주려 했다.
"소리가 나타났어, 내 옛 친구말야. 그가 어렸을 때의 모습으로 내 앞에서 나타났어. 어떻게 그런 모습으로 다시 나타날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자, 카리나는 우선 "그래?" 라고 묻는 듯이 화답하더니, 그가 내 앞에 나타나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이후에 들어보기로 하고, 자리를 마련했으니 앉을 것을 부탁했다. 내가 앉을 자리는 카리나 그리고 세니아가 앉은 자리 사이에 있었으며, 예나가 앉은 자리를 마주보는 의자들 중 하나였다.
"그러니까, 뭔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었지만, 사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는 거야?"
이후, 내가 그를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지에 대해 내가 알리는 말에 카리나가 바로 물었고, 이 물음에 내가 그렇다고 답했다. 이에 카리나는 조용히 웃으면서 내가 만났다는 소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아무리 그래도 서운하겠다. 간만에 만났는데, 서로의 개인사에 대해 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니."
그 때, 세니아가 나를 보더니, 그 소리가 내게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고 물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해 주지를 않아서 그것에 대해 궁금했던 모양. 그러자 나는 알겠다고 화답하고서 그것에 대해서도 바로 이야기를 해 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카리나가 어렸을 때 만난 그 검은 옷의 사람이 원래는 '죽음의 기사' 라 칭해지는 그런 존재였다고 하는 것이지?"
"응." 이후, 세니아가 건네는 물음에 나는 바로 그렇다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