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rtiA - 5-2. Darkness and the Light : 1


  "어라? 아르사나 님 아니세요, 나에티아나 님하고!"
  혹시 소녀가 내가 이전에 보았던 그 셀린일까 싶은 생각을 하면서 그의 곁으로 다가오려 하는 순간, 그가 나와 카리나를 알아보고는 바로 반가움의 감정을 표하면서 나와 나에티아나에게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서 기차에서 본 이후, 간만에 다시 보게 되었음을 말하니, 이를 통해 나는 그가 기차에서 보았던 그 셀린임을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셀린을 알아보자마자 셀린은 다시 한 번, 만나서 반갑다고 말을 건네고서, 그에 이어, 자신이 어떻게 경비대원들과 더불어 같이 고대 도시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해 간단한 이야기를 하려 하였다.
  "하미시 경비대와 케레브 족 전사들 간의 싸움이 이어지면서 상황을 지켜보다가 함락된 거점들을 경비대와 함께 점령해 가는 일을 맡게 되었어요.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이 피라미드 일대까지 케레브 세력이 밀려나는 모습을 보면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지요."

  그렇게 이야기를 이어간 이후, 그는 고대 카리나가 다쳐서 주저 앉아있는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바로 그에게 다가가 그려면서 우선 그의 부상 상태를 관찰하고, 그에게 치유의 마법을 사용했음을 밝혔다. 이후, 그가 왼편으로 물러나면서 나 그리고 나에티아나에게 카리나의 상태를 보여주려 하면서 나는 나에티아나와 더불어 카리나, 세나의 모습을 보며, 카리나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카리나는 바닥에 계속 앉아 있었으며, 다친 흔적은 일단 보이지 않고 있었다.
  "얼마나 다치신 거예요?" 그 이야기를 듣고 나에티아나가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셀린에게 물었고, 그 물음에 그는 살갗이 찢겨지는 정도였다고 답한 이후에 그래서 우선 환부를 소독하기 위한 치유의 술법을 사용했으며, 이어서 다시 살갗이 복원될 수 있도록 치유의 술법도 이어 사용했음을 밝혔다.
  "이 분은 다시 싸움에 나서기를 원하고 있었고, 그래서 상처를 없애는 데에 중점을 두었어요, 다른 부분은 다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어요."
  그렇게 카리나의 상태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고서, 셀린은 대화에 방해가 될 것 같아 잠시 물러나 있겠다고 말한 이후에 일행이 머무른 그 뒤쪽으로 나아가려 하였다. 물러나면서 대화에 방해가 될 것 같다고 말한 것에 대해 나는 셀린이 나 그리고 카리나 등과의 대화에 방해 요인이 될 수 있음이 무척 신경이 쓰인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셀린은 일행의 곁에서 물러나자마자 바로 그와 동행하고 있던 사람들의 곁으로 나아갔다. 마을 사람들 앞에서 모종의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지만, 사적인 대화인 것 같아, 그것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을 쓰려 하지는 않았다.

  "카리나, 괜찮아?"
  "괜찮아, 이제 머리의 상처는 없어졌어, 그것 뿐이니까, 이후의 싸움에도 큰 문제는 없을 거야."
  이후, 나에티아나가 상처를 확인해 봐야 하겠다면서 그의 좌측 곁으로 나아가서는 상처가 났다는 부분을 보려 하였고, 이어서 나에게 다가와 "잠깐 봐요." 라고 말하며, 나에게 그의 상처가 어느 상태인지를 보도록 하였고, 이어서 나 역시 그의 왼편으로 나아가 머리 왼편의 그 상처를 보려 하였다. 귀밑 머리카락에 덮힌 상처 자국은 이제 거의 사라진 상태로, 해당 부분을 머리카락이 덮고 있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아예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셀린이 말한 바에 의하면 무릎의 살갗이 찢겨질 정도의 상처였고, 그 정도면 치유 술법을 사용하면 금방 나을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싸움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제가 말씀 드렸고, 그 분께서도 머리의 상처가 나아지는 상태를 보시면서 그런 저의 말씀에 동의를 해 주셨어요."
  이에 세나가 나에게 그의 상태에 대해 소녀로부터 들었다는 말을 전해 주었다.

  이후, 세나는 카리나가 치유를 받는 동안 소녀가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려 주었으니, 그 말에 의하면 하늘의 구름이 붉게 물드는 현상은 유적지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하미시(Hamisy) 의 여러 구역에서도 목격되었으며, 시가지 구역에서도 보이는 현상으로 인해 도시의 사람들이 불안에 잠기기 시작하자, 하미시 경비대에서 결국 해당 현상에 관한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유적으로 대원들을 보내게 되었다고 한다, 소녀는 하늘에서 발생한 현상의 원인에 관해 고대 도시 유적 일대의 조사를 위해 경비대원과 행동을 같이하게 되었다고.
  그리하여 하미시 경비대는 도시 근방에 자리잡은 고대 도시의 유적들, 5 층 피라미드를 비롯한 고대 도시의 시가지 주요 지점들을 둘러보고, 그러면서 케레브 족이 마련했던 도시 내부의 거점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부서진 병기들의 잔해들, 버려진 병기들이 놓인 광경에 이어, 7 층 피라미드를 일행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일행이 고대 도시 유적 내부에 있으면서 주요 거점들을 함락시켜 나아가다가 마침내 케레브 족이 최후의 거점으로 삼았을 7 층 피라미드 근방에까지 이르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행은 기껏해 봐야 7 명 정도이고, 주요 거점 내에는 상당히 많은 케레브 족 전사들 및 사람들이 기거하고 있었을 것이기에, 거점이 함락된 이후에도 건물이나 골목 등에 숨어 있었을 케레브 족 잔당들이 있을 것이라 여기었고, 그래서 경비대에는 그들을 소탕하는 일까지 주어지게 되었대요."
  그러나, 이후 세나의 이야기에 의하면 소녀를 비롯한 경비대의 대원들은 시가지 곳곳을 수색하며 케레브 족 잔당들을 찾아내려 하였지만, 그들의 모습은 시가지는 물론이고, 5 층 피라미드 내부의 곳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더욱 이상한 현상은 그들의 거점이었던 구역들에서는 마치 케레브 족 사람들이 갑자기 어딘가로 떠나가 버린 것처럼 그들의 흔적을 고스란히 남긴 채로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었다. 이후, 대원들이 7 층 피라미드 근방의 성벽에 도달할 때까지 찾아낸 케레브 족 잔당은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이후, 케레브 잔당은 원인 불명의 사유에 의해 모든 구역에서 사라진 것으로 판단을 내린 대원들이 가동이 가능한 병기들을 회수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그와 더불어 소녀와 대원 일부가 붉은 구름이 발생한 원인을 찾아내려 하였지만, 당시에는 7 층 피라미드 일대에서 사건의 원흉으로 추정되는 케레브 수장과 일행 간의 전투가 있어서 쉽게 접근할 수 없었다고 한다.

  셀린으로부터 들었다는 이야기를 세나로부터 전해 듣고서, 나는 곧바로 피라미드 앞 광장의 중앙 쪽에서 경비대원들과 대화를 이어가고 있던 소녀를 찾아서 그와 대원들로부터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대화를 이어가려 하였다. 우선 대원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아래와 같다 :


  이후, 나는 사건의 조사를 주로 맡으려 하고 있었던 셀린은 다시 만나 그로부터 대원들이 그간 발견했던 사항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려 하였다. 그러자 그는 나를 비롯한 일행이 이미 알아차린 것이 있을 수 있음을 밝히고서, 자신들이 발견한 사항들에 관해 자신이 무엇을 추측했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아마 아시고 계실 거예요, 여기 있는 케레브 족 근거지에 있었던 케레브 족의 수장은 주술사로서 포헤 느와흐가 죽은 이후, 정신적 지주를 잃어버린 케레브 족을 이끄는 역할을 맡았을 거예요. 포헤 느와흐가 죽고, 다스 에레보사라는 비밀 결사도 사라지면서 수많은 능력자들이 사라진 그들의 사회에서 지도자 역할을 맡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바로 '종교' 겠지요, 그는 하나의 종교를 창시하고 해당 종교의 교주가 되는 것으로서, 흩어진 케레브 족을 끌어 모으는 데에 성공하게 돼요."
  그 종교가 무엇인지는 이미 알고는 있었다, 그가 얻은 막대한 힘의 근원인 '영원한 어둠', 그 절대적 힘에 의지하며 사람들이 그 힘을 '신' 으로 규정하도록 하는 종교를 창설, 종교의 힘으로 사람들을 끌어 모았던 것으로 그는 어떻게 케레브 족의 수장이 '교주' 로서 사람들을 끌어 모았는지에 대해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는 주술사로서, 막대한 마력을 가진 사람이지요, 하늘의 전역을 핏빛 구름에 물들이고, 일대에 있는 모든 케레브 족의 영혼들까지 끌어모을 정도면, 확실히 강한 마력의 소유자일 것임은 틀림 없지요. 문제는 그 마력의 근원이 무엇이냐는 것인데....... 그 사람이 동족을 자주 대 피라미드 안으로 들여 보냈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대 피라미드 안의 지하 세계에 자리잡은 '어둠의 존재' 가 마력의 근원이자, 그가 신으로 받들게 하는 존재일 것으로 보여요."
  그리고서 그는 케레브 족 사람을 우연히 만나서 알게된 이야기임을 밝히고서, 그로부터 더 들은 바에 의하면 주기적으로 케레브 족 사람들을 대 피라미드 안으로 들여 보내며, 대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간 이들은 모두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다는 이야기가 케레브 족 사이에 있었음을 알렸다. 그러면서 '교주' 라 칭해진 이는 주기적으로 여러 동족 사람들을 대 피라미드 안 지하 세계로 보내, '어둠의 존재' 의 먹이로 삼도록 하고 있었을 것이라 추측하기도 했다.
- 실제로 해당 추측은 사실이라 칭할만한 사항으로, '교주' 는 '영원한 어둠' 이 깨어나도록 하기 위한 의식을 케레브 족 사람들을 제물로 바쳐가며 행하고 있었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모든 케레브 족 사람들과 영혼들을 제물로 바쳐 '영원한 어둠' 을 즉시 부활시키려 하였다.

  그렇게 이야기를 이어가고 난 이후, 셀린은 대원들과 더불어 상공에서 대 피라미드 부근에서 '교주' 가 일행에 의해 궁지에 몰리는 광경을 목도했음을 밝히고서, 그 이전에도 점차 거점들이 함락되어 가면서 '교주' 는 가능한 빠르게 자신의 숙원을 이룰 필요를 느꼈을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아마도 다급해졌겠지요, 자신을 위협할만한 능력자들이 점차 대 피라미드 쪽으로 다가오며, 운명의 시시각각 조여오고 있음을 직감하면서 속히 이들을 몰아내고, 자신들의 위협이 될 모든 것들을 멸할 수 있을만한 '어둠의 존재' 를 가능한 빨리 깨우려 했을 거예요. 하지만 한 두 사람씩 제물로 바치는 정도로는 그의 부활은 어림도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모든 케레브 족 사람들을 한꺼번에 제물로 바치려 했겠지요, 영혼들까지 포함해서."
  "맞아요, 제가 드리고 싶었던 말이 그것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대원 분들께 이전에 발견한 그 검은 기운은 이미 죽은 케레브 족 전사들의 영혼일 것임이 확실하다고 말씀 드렸어요. 그와 더불어 고대 도시 모든 구역에서 케레브 족 사람들이 갑자기 어딘가로 떠난 듯이 사라진 것도, 그들이 실제로 어딘가로 떠나갔으며, 그 곳은 바로 대 피라미드 안쪽이었으리라는 거예요. 그리고 아시는 바대로, 그리고 제가 말씀 드린 바대로, 대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이미 '어둠의 존재' 에게 먹혔으리라는 것이지요, 그 혼 채로 말이에요."
  이후, 소녀는 구름이 붉게 물든 것은 이러한 주술의 사용, 그 여파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하고서, 그 이후로 통신을 통해 시청 관계자들에게 붉게 물든 구름은 사람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고 전해 달라고 당부를 하기도 했음을 밝혔다.
  "그 구름으로 인해 불안해진 사람들 때문이겠지요?"
  "그렇지요." 이후, 소녀는 바로 그렇다고 답을 하였다.

  이후, 셀린은 그가 대원들과 더불어 소 피라미드가 위치한 일대를 점거하고, 그 중심지인 소 피라미드 내부로 들어갔을 때의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서 하려 하고 있었다.
  "세간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소 피라미드는 궁전 혹은 전망대로 활용되었다고 하지만, 그 내부는 일부 사람들이 한기를 느낄 정도로 적막했고, 지하와 이어진 문이 곳곳에 있었지만, 모두 폐쇄되어 있었지요. 그리고 지하 공간으로 나아가는 문의 폐쇄는 마치 어떤 사람들도 그 내부로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것처럼 이루어지고 있었지요. 그래서 해당 장소 역시 범상치 않은 곳으로 판단을 내리고, 이 일대 역시 조사를 행하기로 했어요."
  셀린은 출입이 완전히 금지되었을 소 피라미드의 지하에 무언가 숨겨져 있다면, 그것은 필경 '어둠의 존재' 일 것이라 말한 이후에 소 피라미드가 있는 곳이 도시의 중심으로 그 존재가 있을만한 곳은 구역의 중심일 것인 만큼, 소 피라미드 아래에 '어둠의 존재' 가 있을 가능성은 충분해 보인다고 말했다.
  "그렇게 되어서, 여기 계신 분들 중에서 소 피라미드 일대를 조사할 사람들이 몇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혹시 여기 계신 분들 중에서 같이 가실 분 계세요?"
  그리고서 셀린은 경비대원들과 같이 가는 정도로도 충분하기는 하지만, 도시의 입구부터 대 피라미드까지 케레브가 점거한 모든 구역을 탈환한 장본인들 중에서 그 일부라도 같이 있으면 일이 더욱 좋게 진행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음을 이어 밝히기도 했다.
  "꼭 누가 같이 가야 한다고 말씀 드리는 것은 아니에요. 그저 같이 가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리고 싶은 거예요."
  그 때, 린 그리고 리아 자매가 같이 가겠다고 말했고, 이어서 나에티아나도 동행하겠음을 밝혔으나, 린이 그 요청을 거절했다, 나에티아나는 나를 비롯한 일행과 행동을 같이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드러내면서. 그리하여 나와 카리나, 세나 그리고 나에티아나는 대 피라미드를, 셀린을 비롯한 경비대원들과 린, 리아 자매가 소 피라미드의 조사를 맡게 되었다. 그러면서 셀린은 대원들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요청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더니, 잠시 후에 두 손 가득히 두루마리 3 개를 한꺼번에 가져와서는 나를 비롯한 대 피라미드로 가려 하는 일행에게 하나씩 가져가 줄 것을 부탁했다.
  "두루마리를 펼치면 바로 글라이더가 소환될 거예요, 지하 공간으로 나아가면 비행이 필요한 순간이 한 번씩은 있을 거에요, 그런 순간에 바로 펼치세요."
  그리하여 나와 세나 그리고 카리나는 셀린으로부터 두루마리를 하나씩 받은 이후-나에티아나는 비행이 가능해서 받지 않았다-, 나에티아나가 나, 그리고 세나에게서 두루마리를 받아 들고서는 자신의 치마 주머니에 하나씩 넣어 두었다, 나와 세나는 치맛단이 무척 짧고 그에 따라 주머니도 작아서 분실 위험이 크다고 판단을 내리고 자신이 받아둔 것이었다. 그렇게 일행이 두루마리를 받게 되자, 셀린은 그런 일행에게 당부의 말을 전했다.
  "그 두루마리가 글라이더를 불러오는 것이니까요,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해 주세요, 부탁 드려요!"
  "염려 말아요, 제가 잘 살피도록 할 테니까요." 그러자 나에티아나가 바로 그렇게 화답하며, 안심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후, 린과 리아 자매는 셀린을 비롯한 경비대원들과 동행하자, 나 역시 남은 일행들에게 가자고 청했고, 그 이후로 내가 앞장서서 대 피라미드의 정문을 향해,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가능한 빨리 올라가려 했고, 앞으로는 계속 내려갈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 때만큼은 전력을 다해서 올라갔고, 뒤따라 나아가던 세나, 카리나도 그런 나를 따라 뛰었다. - 나에티아나는 날개를 통해 날아가서 이러한 뜀박질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제 제 2 막 시작인 것이네, 그렇지?"
  "물론." 내가 정문 앞에 도달할 무렵, 뒤쪽에서 세나가 물음을 건네고, 이어 카리나가 답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후, 이전의 폭발로 열린 상태로 남아 있던 정문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 나에게 카리나가 당부의 말을 전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제 진짜 시작이야, 아르사나, 그리고 이번에는 잘 끝내야 해, 알고 있지?"
  "물론, 그런 존재 따위에게 지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자 내가 바로 그렇게 화답했다. 그 이후, 나는 카리나 등에게 들어가고 싶지 않다면 들어가지 않아도 좋다고 말했다, 카리나 등이 나를 따르려 한다고 해도, 앞으로 있을 일에 그들이 위험에 처하는 것에 대한 걱정을 불식시킬 수는 없었음이 그 이유였다. 그러한 이유로 건넨 말에 카리나는 내가 거절해도 나와 같이 갈 것이라고 말하고서, 세나 역시 같은 생각일 것이라 말했다. 그 대답을 듣는 동안 세나의 모습을 보고, 세나가 짓는 표정을 보면서 역시 분명 그러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 생겨도 나는 모른다." 그들의 의견을 듣고 그들과 동행을 결심하면서도 그렇게 말했지만, 카리나와 세나 그리고 나에티아나 역시 그 말이 농담일 줄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대 피라미드, 7 층 피라미드로 칭해지기도 하는 고대 도시 유적에서 가장 큰 건축물로서, 그 높이가 150 메테르에 이르러, 어지간한 동산 높이만한 대형 건축물이다. 과거에는 '황금의 성전' 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었으며, 그 명칭에 걸맞게 외벽이 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는 속설이 전해진다. 만약에 사실이었다면 세상에서 그만큼 화려한 건축물이 과연 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속설은 속설에 불과할 따름. 7 층 건물이라지만, 정문 입구 너머의 공간은 옥상으로 분류가 되어 층수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7 층이라는 것은 입구 아래의 층들만을 포함하는 것.
  문 너머는 작은 방 하나만 자리잡고 있었으며, 천장부터 벽면, 바닥까지 연한 비취색을 띠는 석판들을 이어붙여 구성한 공간이었다. 그야말로 옥상에 해당되는 구역이라 그러한지, 방에는 아무것도 비치되어 있지 않은 곳이었던 만큼, 일행에게는 큰 의미가 없는 공간이었기에, 방에 이르자마자 바로 입구 건너편 문 너머의 계단을 통해 아래 층인 7 층으로 내려가려 하였다.

  7 층 그리고 6 층은 연한 비취색 벽면과 천장에 바닥은 팔각형을 이루는 암록색 타일들이 사각 배열로 배치된 그 사이로 금색을 띠는 정사각 타일들이 배열된 구조를 보이고 있었다. 출입문의 건너편-남측-에는 창가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창가 너머로 고대 도시의 전경, 신전 부근의 거리부터 소 피라미드, 그리고 강가 너머의 거리 구역까지 포함되는 고대 도시의 전경이 훤히 드러나고 있었다. 거리에 있을 때, 건물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전투를 거듭하던 때에는 미처 느낄 수 없었을 고대 도시의 방대함과 미려함이 피라미드 내부의 창가에 있으면서 확실히 와닿고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면 더욱 잘 보인다, 라고 누군가 말한 바 있다, 그 말의 의미를 새삼 깨달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러한 경치 구경의 즐거움도 잠시, 가만히 여유를 즐기고 있을 때가 아니었고, 우선 방을 둘러보며 의미 있는 물건이 있는지를 살펴 보려 하였다.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었을 7 층에는 특별히 의미 있는 물건이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 입구 좌측의 한 구석에 책장 하나가 놓여 있기는 했지만, 책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벽면을 가만히 둘러보는 도중에 나는 창가 건너편, 그러니까, 한 쌍의 출입문 사이 한 가운데 즈음에 석판 하나가 자리잡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비취를 깎아 만든 것으로 보이는 그 판에는 여러 글자들이 몇 개의 문장을 구성하면서 새겨져 있었으며, 문자들은 내가 읽을 수 있는 글자들인지라 석판의 문구들을 바로 읽어볼 수 있었다. 석판을 발견하자마자 나는 바로 세나, 카리나 그리고 나에티아나에게 "여기 봐봐!" 라고 외치며 그들을 주목시켰고, 이윽고 세 사람 모두 다급히 내가 있는 그 좌우로 다가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석판에 새겨진 글자들이 이루는 문장들은 아래와 같았다 :

SI NON TIMOR SIT, NON TERROR SIT, SI NON TERROR SIT, NON ODIVM SIT,
SI NON ODIVM SIT, NON IRA SIT, SI NON IRA SIT, NON SEDITIO SIT,
SI NON SEDITIO SIT, NON BELLVM SIT, SI NON BELLVM SIT, NON DOLOR SIT,
SI NON DOLOR SIT, NON DESPERATIO SIT, SI NON DESPERATIO EST, NON PERDITIO SIT.

  "두려움이 없으면, 공포가 없고, 공포가 없으면 증오가 없으며, 증오가 없으면 분노가 없고, 분노가 없으면 갈등이 없으며, 갈등이 없으면 전쟁이 없고, 전쟁이 없으면 고통이 없으며, 고통이 없으면 절망이 없고, 절망이 없으면 멸망도 없다. (Es dryoi nas, rov nas, es rov nas, odio nas, es odio nas, ira nas, es ira nas, seditia nas, es seditia nas, ßam nas, es ßam nas, aely nas, es aely nas, dravare nas, es dravare nas, perditia nas)"
  문장을 보자마자 나는 바로 그 문장들의 뜻을 해석해 내었고, 문장을 읽어내는 내 목소리를 들으며, 카리나는 "의미심장한 말이네." 라고 해당 문구에 대한 말을 건네었다. 그 때, 세나가 이전에 소르나로부터 들은 말이 있다고 말하고서, 그것에 대해 이런 말을 건네었다 :
  "그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 과거 인간이 겪은 모든 파멸적인 싸움과 그로 인한 비극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있었다고. 그리고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을 유발하고 부정적인 감정에 휘말리며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비극이 펼쳐지고 있었다고, 그 말이 생각나는 문구야."
  뜻 깊은 말이었지만, 이 문구가 앞으로의 일에 어떤 관련이 있을지는 아직까지는 알 수 없었다. 이외에는 특별히 의미 있는 무언가가 있거나 하지는 않아 보였고, 그래서 우선은 6 층으로 내려가 보기로 했다. 내려가는 계단이 위치한 문은 7 층으로 들어설 때의 출입문, 그 바로 우측에 자리잡고 있었다. 석판이 있는 그 좌측의 문이었다.

  6 층은 7 층과 같은 특성을 가지는 전망대 공간으로서, 공간 전체는 7 층보다 더욱 넓었지만, 중앙에 네모난 공동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 커다란 공동은 허리 높이만한 난간이 둘러싸고 있었다. 역시 좌우로 나란한 문과 문 사이에는 비취로 만들어진 석판 하나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 석판에도 몇 문장들이 새겨져 있었다.

OCVLOS HABENT, SED NON VIDERE POSSVNT,
OS HABENT, SED NON SPIRARE POSSVNT,
MANVS HABENT, SED NON TENTARE POSSVNT,
PEDES HABENT, SED NON PVLSARE POSSVNT,
SENSVS HABENT, SED NON VSVRPARE POSSVNT.
MOLLITIA ET INSCITIA, ID EORVM ESSENTIAM EST.

  "눈이 있지만, 보지 못하고, 입이 있지만, 숨쉬지 못하며, 손이 있지만 만지지 못하고, 발이 있지만 걷지 못하며, 양심이 있지만, 실천을 못하니, 나약함과 어리석음, 그것이 그들의 본질이다."
  "어떤 존재를 콕 집어서 동정하거나 욕하는 내용이잖아." 내가 문구를 읽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좌측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카리나가 말했다. 이후, 나의 바로 위에서 날갯짓을 하며 지켜보던 나에티아나가 누구를 지칭하던 말인지를 알고 싶다고 말하자, 나를 대신해 카리나가 정확히는 알 수 없다고 말하고서, 일설에 의하면 '골렘(Golem)' 이라 일컬어지는 인공 생물을 빗대어 하는 말이라지만, 의외의 무서운 가설도 하나 있음을 밝히고서, 그것에 대해 바로 말했다.
  "구 시대의 인류를 지칭하던 말이라는 가설이야," 전자의 해석은 그야말로 인간처럼 생겼지만, 인간처럼 행동하지 못하는 불행한 인공 생물들에 대한 동정과 연민을 나타내고 있다면, 후자의 해석은 예측 불가능한 자연과 그 속에서 생겨나는 재해 및 질병에 너무도 나약한 인류에 대한 조롱을 나타낸다는 것이었다.
  "...... 후자의 해석도 인류의 일원에 의해 생겨났겠지요? 그런데 어떻게 이런 말을......."
  "인류의 일원이면서도 인간인 자신이 너무도 싫었던 그런 사람들이었겠지, 아마도 이런저런 재해 속에서 절망하며 인간이기를 더 이상 바라지 않게 된 사람들일 거야, 아니면, 자신이 이종족이라 착각한 누군가가 '나약한 인간들' 을 깔보려 하면서 한 발언이었겠지. 아무튼, 인간 세상에서는 위험한 발언이었을 거야, 틀림 없지."
  그 물음에 내가 바로 답을 해 주었다. 그러면서 이런 증오를 가진 사람들은 사람 이외의 존재 역시 증오할 수 있고, 그러한 증오가 파괴 그리고 파탄을 불러올 가능성도 있는 만큼, 그들은 세상에는 더할 나위 없이 위험한 사람들일 것임을 밝히고서 마지막으로 나에티아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경계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바로 그런 것에 있어."
  7 층의 문구들도 그러하였지만, 이런 문구들이 지금 일행이 하는 일과 무슨 연관성이 있거나 하지는 않아 보였고, 해당 사항들에 대해서는 카리나, 세나 모두 지적하고 있는 바였다.

  각 층의 높이는 20 메테르 이상에 이르렀고, 일반적인 건물보다도 높은 층에 걸맞게 층과 층을 잇는 계단의 개수도 엄청나게 많았다. 그나마 내려가기만 할 뿐이라는 점이 다행스럽다고 여기어질 정도. 이런 건물에서는 올라가는 것도 일이라면 일이었다. 승강구가 당연히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건물 내부에 승강구가 있을만한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와 별개로 한 층 내려갈 때마다 일행의 표정에서 조금씩 긴장이 더해지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었다. 건물 내부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이전까지는 수많은 사람들이 세뇌된 채로 들어갔던 곳이었고, 그 이후로도 몇몇 사람들은 남아 있을 것이며, 그들은 적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아래 층으로 나아갈 수록 그런 이들과 대면할 가능성이 점차 높아져 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행의 표정은 무겁지는 않았다, 알고 있을 것이다, 적이 한 둘 정도 등장하는 것 정도는 크게 문제될 것도 아니었다.

  이후, 5 층에 이르렀으며, 그 분위기는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 공기 출입을 위한 작은 창문이 벽면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뚫려 있을 따름으로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곳이었지만, 천장 곳곳에 등이 켜져 있어서 내부는 밝았다. 천장과 벽면 모두 얇은 비취색을 띠고 있다는 점은 옥상의 방과 같았다. 5 층보다 넓은 방의 중앙에는 팔각 모양의 공동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공동은 6 층에서처럼 난간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공둥의 난간 바로 근처에는 각 변 앞마다 하나씩 금색 조각상이 자리잡고 있었다. 각 조각상들은 모두 한결 같이 수도사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었지만, 세세한 묘사가 조금씩은 달랐고, 무엇보다도 로브의 등 뒤쪽에 하나씩 명칭이 새겨져 있어서 구분이 가능했다.
  가장 북쪽-입구와 가까운 방향-에 있는 것부터 조각상의 로브 등 뒤에 'ΡΟΜΑΙΝΟϹ' - 'ΕΦΕϹΟϹ' - 'ϹΜΥΡΝΗ' - 'ΠΕΡΓΑΜΟΝ' - 'ΘΥΑΤΕΙΡΑ' - 'ϹΑΡΔΙϹ' - 'ΦΙΛΑΔΕΛΦΕΙΑ' - 'ΛΑΟΔΙΚΕΙΑ' 가 새겨져 있었으니, 이는 샤르기스의 유적지에서 보았던 그 기둥에 새겨진 것과 같은 명칭이었다. 대단한 의미를 가진 듯해 보였으나, 조각상들의 문구를 이용해 잠긴 문을 열 수 있는 것도 아니고-문은 열려 있었다, 아니 애초에 문짝이 없었다-, 5 층에서 이러한 문구들이 의미가 있을만한 곳은 일단 없었다.
  "그런데, 웬지 이 명칭들은 외워두고 있어야 할 것 같은데."
  하지만 카리나의 생각은 달랐다. 조각상들을 하나씩 둘러보고 있으면서 이 문구들이 어딘가에는 필요해 보인다고 여긴 것이다, 물론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러할지도 모른다고 직감에 의한 추측을 한 것이기는 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문구들이 샤르기스 유적지의 기둥들마냥 큰 의미가 있거나 하지 않다고 마냥 장담할 수만은 없어서 일단 이름들을 기억해 두려 하였다. 사실, 이 이름들은 오래 전부터 기억해 두고 있던 것이라 쉽게 잊혀질 것은 아니기는 했다.
  "대응되는 이름들은 알고 있지?" 이후, 나는 카리나에게 해당 이름들에 대응되는 이름들은 기억해 두고 있는지에 대해 물었고, 이 물음에 카리나는 기억하고 있다고 바로 답했다.

  그렇게 기둥들을 하나씩 둘러보고 있을 그 때, 세나에게서 "아르사나! 이거 봤어!?" 라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울려 퍼진 곳은 입구 건너편 벽으로 그 방향에서 세나가 무언가 발견한 것 같아서 바로 세나가 있는 쪽으로 뛰어갔다. 공간의 한 가운데가 공동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반 시계 방향으로 우측에 보이는 통로를 따라 이동해야 했다.
  세나가 바라보고 있던 것은 벽에 새겨진 낙서로 내가 오자마자 세나는 바로 좌측 방향으로 비켜서 내가 벽에 새겨진 것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다급히 다가가서 본 벽의 문구, 그 문구는 아래와 같았다 :

PISCES FVERVNT,
RANAE FVERVNT,
SAVRAE FVERVNT,
MVRES FVERVNT,
ELEPHANTES FVERVNT,
CLVRAE FVERVNT,
ET HVMANI SVNT,
QVES ERVNT POSTIBI.

  "물고기들이 있었다, 개구리들이 있었다, 도마뱀들이 있었다, 쥐들이 있었다, 코끼리들이 있었다, 원숭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인간들이 있다. 그 다음은 무엇일까?"
  "6, 7 층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주제의 문구잖아, 그렇지? 마치 같은 사람이 새겨 놓은 글귀 같아."
  문구를 다 읽으려 하는 그 때, 카리나로부터 문구에 대한 말이 들려왔다. 확실히 6, 7 층의 석판에 새겨진 문구들과 5 층의 벽에 새겨진 문구들은 같은 주제를 갖고 있었다. 인류, 아마도 옛 세니티아의 인류에 관한 문구였을 것으로, 7 층의 문구는 인류의 파멸을 부른 것, 6 층의 문구는 인류에 대한 동정 혹은 조롱-처음에는 인간이 만든 것에 관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5 층의 문구를 보면서 확실해졌다, 인류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본 5 층의 문구는 인류 다음에 올 것에 관한 것이었을 문구들이었을 것이다.
  5 층의 문구마저 다 읽고난 이후, 아외에는 특별히 살펴볼만한 것은 없다고 여기고, 다음 층으로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을 즈음, 갑자기 천장의 등불이 꺼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카리나가 다급히 빛의 기운을 불러 빛이 어둠을 비추도록 하고, 나 역시 빛의 기운을 불러 그 구체가 주변 일대를 비추도록 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나에티아나의 날개가 빛을 발하고 있어서 주변 일대가 아주 어둡지 않기는 했다. 그럼에도 나는 심상치 않다는 생각에 다급히 서쪽의 문, 4, 5 층을 잇는 계단을 찾아 나아가려 하였고, 그러면서 나에티아나, 카리나 등에게 어서 아래 층으로 가자고 청하였고, 그러면서 먼저 출입문 근처로 나아가려 하였다.
  그 순간, 등불이 꺼졌을 때처럼 등불이 다시 켜졌고, 그와 동시에 공간의 정동 방향에 자리잡고 있었을 등에 ϹΜΙΡΝΗ 라 새겨진 금색 조각상 바로 앞에 감빛 구체 하나가 놓여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내가 케레브 족으로 변장해서 대 피라미드를 향해 나아갈 즈음, 마주했던 것과 같은 구체로 하나의 작은 마력 덩어리처럼 보인 그 구체를 발견하자마자 나는 다급히 구체를 향해 다가가서 그 구체 앞에 앉아서 구체를 주운 이후에 다시 일어섰다.
  "아르사나! 그건 무슨 물건이야?" 이후, 카리나가 구체를 집어든 나에게 다급히 다가가면서 물음을 건네려 하는 그 때, 한 차례 작은 폭발이 손에서 터지면서-그로 인해 손에서 잠깐 아픔이 느껴졌다-, 그 구체가 그 당시에 보았던 것처럼  하얀 빛을 깜박이기 시작했다.

  한 차례 날카로운 잡음 소리가 울려 퍼진 끝에 구체가 위치한 일대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마치 음악판에 녹음된 소리처럼 들려온 목소리, 어떤 남성의 목소리는 마치 조용히 혼잣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현세 혹은 인류세라 칭해지는 지구의 현 시대. 그 오랜 세월 동안 인류는 자연을 극복하고 기술을 발전시키며 지속적으로 문명의 발전을 이루어 갔고, 그 결과로 수없이 오랜 세월 동안 길이 남을 찬란한 문명을 일구어 내는 데에 성공했다.
  모든 것이 인류의 뜻대로 움직이고 인류의 뜻대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게 된 세상, 그 세상 속에서 인류는 그 이후로도 무한한 발전을 이어가고 문명의 이기 속에서 무한한 즐거움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굳은 믿음을 안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어왔던 것일까, 인류는 그저 집에 연금된 채, 돌림병의 공포에 떨고 있기를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인류에게 평안과 즐거움을 안겼던 문명의 이기는 우리들을 지켜내지 못했다.
  무서운 생각들이 오간다, 이 문명은 인류에 의해 창조되고, 인류에 의해 발전했지만, 결국 인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던 것일까, 아니면 인류 문명의 발전을 위해 자신을 정복하고 수많은 생물 종을 잃게 만든 인류를 자연이 바이러스라는 존재를 매개체로 삼아 배제하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하고....... 그렇다면, 인류가 없어진 자연에서 과연 무엇이 대신하게 되겠지, 그 존재는 과연 무엇일까, 물고기와 곤충, 양서류와 파충류, 코끼리들과 원숭이들 그 다음의 인류를 대신할 것은 무엇이 될까.
  인류의 운명은 어찌되는 것일까, 세상의 운명은.......

  그 이후, 한 동안 거친 잡음과도 같은 날카로운 소리가 길게 이어지기 시작했다. 이후, 누군가의 대화가 이어지려 할 즈음에 다시 잡음이 이어지고, 그 소리 역시 한 동안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기 시작하니, 목소리는 모두 젊은 남자들의 목소리로 두 목소리는 미묘하게 서로 다른 느낌을 주고 있었다.

- 그 포스트 휴먼이라든가 트랜스 휴먼에 관해서는 정부 측에서는 받아들일 의향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 그렇지, 공식적으로는...... 하지만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들은 받아들이려 할 거야, 무슨 말인지 알아?
- 무슨 말이야, 그게?
- 트랜스 휴먼이라든가, 포스트 휴먼이 어떤 것인지는 알잖아, 인류의 몸을 기계로 대체해 나아가는 형태의 새로운 인간. 육체를 기계화함으로써 인류는 단백질로 구성된 유기체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오가고 있어, 그간 얼마나 전염병 사건들이 반복되어 온 것을 보면 인류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트랜스 휴먼의 도입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이러한 트랜스 휴머니즘으로의 유혹을 이 나라와 그 정부는 결코 떨처내지 못할 거야.
- 그래서 인류에게 기계화를 불러오는 선택이 그들로 인해 필연이 될 수 있다는 건가.
- 더 나아가, 인류가 기계화되면서 각종 통신 장치가 몸체 내부에 이식될 것임은 두말할 것 없지 않겠어? 그러한 장치들이 정부가 인간들을 더욱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는 거야.
- 장치의 조작으로 자신들의 명령을 바로 이행할 수 있도록 한다는.......?
- 그런 거지. 어쩌면 트랜스 휴머니즘을 통한 인류의 지배를 주장하던 녀석들이 바라던 것이 이러한 세상이었던 것일지도 몰라. 그런 녀석들이 어쩌면 일부러 전염병 바이러스를 유출시키어, 바이러스의 공격에 대한 대안으로 트랜스 휴머니즘의 실현을 강조하고 있을 것이라고!
- 너 미쳤어? 너무 심한 말을 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리고 잠시 후, 다시 한 번 거친 잡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고, 그 이후로 다시 들려온 목소리, 이번에는 여성의 목소리였다.

  포스트 휴먼 혹은 트랜스 휴먼이라고도 칭한다. 사람들은 기계와 인간의 결합을 항상 떠올리고는 한다. 그 모습이 흉측한 기계의 모습만은 아닐 것임은 트랜스 휴먼의 미래를 바라본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도 드러난 바 있다. 이런 포스트 휴먼들이 가지는 여러 이점들이 있겠지만, 근래의 사람들이 주목하는 점이 하나 있다면, 수많은 질병, 특히 전염병을 이겨내며 일상 생활을 이어갈 수 있음에 있으리라. 수많은 전염병들이 가한 고통 속에 그저 나약하기만 했던 인류, 이러한 인류에게 있어서 포스트 휴머니즘의 유혹은 너무나도 매력적이고 치명적이다.
  그러나, 반드시 기계여야 할 필요가 있을까, 정녕 이 시대의 인류가 트랜스 휴머니즘의 시대를 피할 수 없다면, 여기서 한 가지 그 대안을 마련하고 싶다. 금속과 전선으로 이루어진 차가운 기계가 아닌 보다 자연적인 물질에 의한 육체의 구성이 바로 그것이다.
  늘 사람들은 말한다, 과학 문명의 기반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들은 늘 영혼의 존재를 믿고, 빛에 의해 창조된 생물, 천사의 존재를 믿는다. 이러한 빛이 모여 하나의 생명체를 탄생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것이 과학적으로 쉽게 가능한 일이라 믿지 않는다, 그러나 성사될 수만 있다면, 포스트 휴머니즘 혹은 트랜스 휴머니즘의 유혹을 떨쳐내지 못할 이 시대에 기계라는 차가운 몸을 가질 필요를 사람들이 가지려 하지 않아도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유기체의 저주에 속박된 인류에게 있어서 하나의 거대한 해방이 될 것이다, 그것이 '인류의 해방' 혹은 '인체의 대체' 이다.

  이후로는 계속 거친 잡음 소리만 잇달아 울려 퍼지다가 어떠한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으며, 그 이후 다시 감빛으로 물든 구체는 내 손에서 터져 감빛 연기를 흩뿌리며 사라져 갔다.



  "아르사나, 방금 전의 그 목소리들은 네가 주운 물건에서 들려온 거지?"
  목소리가 그치고 주변 일대가 다시 고요해질 무렵, 어느새 내 주변으로 카리나, 세나 그리고 나에티아나까지 모여 있었다, 내가 있던 방향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심상치 않은 대화들을 이어가고 있으면서 주변 일대를 주목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그 중에서 왼편 곁에 있던 카리나는 내가 구체를 줍는 모습을 발견했었고, 그러한 만큼, 구체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임을 바로 알아차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물음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써 그렇다는 답을 대신하였다. 그리고서,
  "내가 피라미드 밖에서 케레브 족 행세를 했을 때에도 발견했던 거야."
  라고 말하며, 내가 피라미드 밖에 있을 때에도 발견했던 것임을 알렸다.

  내가 발견한 것들은 건드리면 몇 가지 목소리를 들려주고 사라지는 구체들로 이들은 한결 같이 먼 옛날의 누군가가 내었던 목소리,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대화했던 목소리들을 들려주고 난 이후에 사라지고 있었다. 이러한 구체들에 대해서는 샤하르에 있을 시절에 한 번 들은 적이 있었으니, 나를 가르쳤던 어떤 학자로부터 마녀들이 세상 곳곳에서 발견되는 '목소리를 내는 구체들' 에 대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구체에 관해 이야기를 들은 경험이 있었고, 이외에도 친구들 사이에 있거나, 인쇄소, 수도원에서 일할 때에도 관련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잘 알지는 못해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일했던 수도원에서는 '기억의 별(Syanabiol, Memorstelo)' 이라는 은유적 칭호로 칭한 바 있지만, 공식적인 칭호는 아니며, 이외에 만난 사람들은 그냥 '구체(Sfera, Sfero)' 라 칭하고 있을 뿐이다. 과거의 기억을 목소리나마 담아서 자신에 닿는 이에게 그 목소리를 들려주는 일종의 일회성 마력 장치 같은 것이지만 이 행성의 사람들이 직접 만든 것이 시초는 아니며, 그 유래가 무엇인지는 아직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한다. 다만, 세니티아를 위시한 세니티아 성계권과 같이 영기가 널리 퍼져간 행성계에서는 수시로 발견되고 있었으며, 마녀들이 만들어 낸 것도 있지만, 자연적으로 생성된 것들을 유사하게 재현한 것으로 공산품으로 치면 '복제품' 에 해당된다고 한다.
  이런 물건들은 대개 발견되는 곳의 과거에 실제로 있었던 일들을 마치 녹음기에서 녹음해서 들려주는 것처럼 목소리를 들려주기에 과거에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를 알리는 훌륭한 지표가 되어준다고 한다. 다만, 해당 장소와 멀리 떨어진 곳의 대화를 들려주는 것은 아니라는 대체적인 의견과 달리, 내가 피라미드 안에서 발견한 것은 피라미드와는 일절 관련이 없는 곳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었기에, 이런 사례가 계속 발견된다면, 그 이후로는 반드시 발견된 장소의 과거가 아닐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물건도 있었구나, 나는 어디에 있든 본 적이 없었는데 말야."
  "나도, 지금까지는 본 적이 없었어, 여기서 처음 본 거야, 이전까지는 그것에 대한 이야기만 들었지."
  세나, 카리나 등의 일행은 이런 물건을 본 적이 없었을 것이고, 애초에 나 역시 대 피라미드 안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이런 물건을 본 적은 없고, 다만, 물건에 대한 이야기만 들어봤을 뿐이었다. 소르나, 레테사(Retesa) 등은 보았을지도 모르지만, 본인들에 그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니, 그것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는 본인들 아니면 하느님만이 알고 계실 일이다. 아무튼, 당장의 일과는 직접 연관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관련된 이야기는 그만 두기로 하고, 바로 다음 층인 4 층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당장에 해야할 일들과는 관련이 없는 것들만 발견해 오고 있었네. 하기사, 케레브 족은 점령자들일 뿐이니까, 이 곳의 문구들은 케레브 족이나 그 '교주' 와는 관련 없는 것들이 다수 존재한다고 볼 수 있을 거야, 그렇겠지?"
  "그러하겠지." 4 층으로 나아가는 계단을 걸어 내려가는 동안 카리나가 건네는 물음에 내가 답을 하였다. 그리고서 이야기했다, 건물 내부는 '교주' 가 의식을 행할 때에만 개방되었고, '교주' 자신도 들어가지 않았을 테니, 케레브 족들 대다수는 그 내부 구조를 잘 몰랐을 것이며, 케레브 족이 점거를 하기는 했지만, 건물 자체는 문명이 탄생할 무렵부터 존재했고, 고문명 시대의 흔적을 감싸고 있기도 한 만큼, 그 내부에도 고문명 시대의 흔적이 계속 품어가고 있을 수많은 비밀들이 있지 않겠느냐고.
  이 계단은 다소 특이한 구조를 띠고 있었으니, 나선형을 이루고 있던 이전 층들의 계단과 달리, 4, 5 층을 잇는 계단은 직선 상을 이루고 있었으며,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 듯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두 개의 문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으며, 계단 구조 상, 이전 층의 출입문과는 출입문 구조가 반대로 될 수밖에 없었던 5, 6, 7 층과 달리 4 층은 출입문과 같은 방향에서 나가도록 되어 있었던 것 같았다.



  이 대 피라미드 혹은 대 지구라트는 여타 피라미드 혹은 지구라트와 다른 구조를 선보이고 있었으니, 상층부와 하층부로 구분되어 있으며, 하층부의 넓이는 상층부에 비해 훨씬 넓었다는 것이었다. 4 층 역시 층의 넓이 자체는 아주 넓어, 5 층의 10 배 이상은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하층부의 시작에 해당되는 4 층의 바닥, 천장 그리고 벽면은 5 층의 그것과 유사했다. 하지만 4 층은 하나의 거대한 통로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 통로는 피라미드의 외곽 부분을 두르는 것 같은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4 층 역시 중앙에 공간이 있었겠지만 4 층의 중앙 부분은 내벽으로 막혀 있어 접근할 수 없어 그 실상을 알 수는 없었다.
  길게 이어진 하나의 통로는 3 개의 모퉁이를 지나고 있었다. 피라미드의 둘레를 지나가고 있었으니, 그 끝은 입구의 바로 건너편에 있었다. 위치를 따져 보자면 출입문 간의 절대 거리가 가깝다는 점은 5, 6, 7 층과 다르지 않았지만, 문과 문 사이는 벽으로 막혀 있고, 우회하는 길을 따라 나아가야 했으므로 일행이 나아가야 할 길에서는 가장 먼 곳에 있다는 점이 위의 층들과는 달랐다.
  3, 4 층을 잇는 출입문까지는 하나의 통로가 길게 이어지고 있기는 했지만 모퉁이마다 통로 안쪽의 한 곳에 하나씩 문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벽과 재질이 같은 굳게 닫힌 문으로서 문의 왼편에는 문고리가 달려 있었으며, 문고리가 달린 부분, 그 옆의 위쪽에는 하나씩 등이 달려 있었다, 마치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린 열매와도 같은 등으로 나뭇가지 부분은 은으로, 그리고 등은 유리로 만들어진 듯해 보였으며, 등 안에는 붉은 불꽃이 타오르고 있으면서 문 부근을 꾸며주는 역할을 행하고 있었다. 조명 역할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천장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등이 달려 있었고, 각 등이 하얗게 환한 빛을 발하고 있었기에, 문 부근의 등이 굳이 조명 역할까지 맡아 할 필요는 없었다.
  각각의 문, 그 건너편의 내벽에는 하나씩 석판이 붙어 있었다. 6, 7 층의 석판들과 마찬가지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읽어볼 수 있도록 문구를 새겨 놓았을 것임이 틀림 없었다.

  첫 번째 모퉁이로 나아가, 그 끝 부근의 내벽 한 곳에 자리잡은 문을 발견하고서, 문의 은색 금속으로 이루어진 문고리를 돌려 보았다. 석판의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그것보다는 문 안쪽에 무엇이 자리잡고 있는지가 더 궁금했던 것.
  문 너머로 보이는 것은 하나의 큰 방으로 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으나, 바닥을 잘 살펴보니, 판자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 판자를 발견하자마자 바로 방 안으로 들어가서 그 판자를 왼손으로 주워 들고, 그 판자의 모습을 보려 하였다.
  판자의 앞면은 하얗게 칠해져 있을 뿐이었지만, 뒤집어 보니, 그 뒷면에는 문장 하나가 검은 글씨로 쓰여 있었으니, 쓰여진 문구는 아래와 같았다 :

Ολα Αρχιζουν απο την Εφεσο.

  "에페소(Efeso) 라......" 에페소(Efeso) 는 5 층의 금빛 조각상들 중 하나에 새겨진 명칭 중 하나로서, '에페소스' 를 의미하고 있을 것이다. 문장의 의미는 해당 언어를 깊이 알아보지는 못해서 대략 알 수는 없었지만, 첫 번째로 보인 명칭이 '에페소스' 라는 점에 주목하려 하였다. 그 때, 나에티아나가 그 문구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은 에페소스에서 시작된다(Moz Efesosesa Cav), 라는 뜻이에요."
  그러자, 나에티아나가 떠 있던 그 바로 아래에 있던 세나 역시 5 층에 에페소스라 새겨진 조각상이 있었음을 말하고서, 그 조각상과 모종의 관련이 있을 것이라 말한 이후에 에페소스는 처음 들른 문에서 보인 것인 만큼, 첫 번째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기었다. 그렇게 하나의 단서를 발견하고 난 이후, 나는 혹시 이 판자가 필요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하에 일행 모두가 다시 방을 나선 것을 확인하고 나서는 판자를 원래 자리였을 방바닥의 한 가운데에 다시 올려놓은 후에 문을 다시 닫고서 통로 쪽으로 나갔다.
  이후, 문이 위치한 그 반대편에 자리잡은 석판으로 시선을 향할 무렵, 석판 앞에는 카리나가 석판으로 시선을 향하고 있었다. 예상한 바대로, 석판에는 하나의 문구가 새겨져 있었으며, 그 문구는 내가 읽을 수 있는 글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글자들을 보자마자 나는 카리나에게 비켜 달라고 청했고, 이에 그가 석판 우측으로 비켜줘 내가 그 앞에 이르도록 하자마자 바로 석판 앞으로 다가가서 석판에 새겨진 글자들을 보려 하였다, 석판에 새겨진 글자들이 구성하고 있는 문구들은 아래와 같았다 :

CALAMITAS VOCAT PAVOREM,
PAVOR VOCAT REGIMEN.
OMNES LIBERTATES TORPESCVNT ABANTE PAVORE.

  "재앙은 공포를 부르고, 공포는 지배를 부른다. 어떤 자유 의지도 공포 앞에서는 무력해진다."
  그 문구를 보자마자 나는 이전에 보았던 구체에서 들려온 목소리들이 문득 떠올랐다. 돌림병의 공포를 이겨내기 위한 인류의 기계화라는 정책이 결국에는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기 쉬운 수단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문구의 존재는 어쩌면 이러한 생각이 사람들 사이에 만연하고 있었음을 알리는 지표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문구를 보면서 생각했다. 문구의 의미를 짐작하고 있었는지, 세나 역시 카리나와 함께 문구를 보고, 그리고 내가 문구 내용을 읽어주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그 표정이 잠시 심각해져 있었다.
  "모르기는 해도, 다음 석판이 있다면 관련된 내용이 분명 있을 거야, 일단은 다음 방을 찾아 보자고."
  이후, 세나는 나 그리고 카리나 등에게 그렇게 요청을 했고, 이에 나를 비롯한 일행 모두 다시 길을 나아가기 시작했다. 길은 남쪽 방향으로 두 번째 모퉁이가 위치한 지점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었으며, 그 도중에 무언가가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 다음 문은 남쪽 길과 동쪽 길 사이에 자리잡은 두 번째 모퉁이를 벗어나는 지점, 그 부근의 안쪽 벽 사이에 있었다. 문과 더불어 석판 역시 그 반대편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첫 번째 석판과 마찬가지로 그 석판에도 몇 개의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Pavor ex plaga ponit volens libertatis,
Populi miseri pareri debent opi auctoritatis.
Homines erecti frigent prae naturae probatione,
Omnes cogitationes humanitates etiam sunt nihil perditiones.
Fides cultus humanes vanitatem est.
In ordine homine, etiam dominatio et acolythi sunt.

재앙의 공포는 자유의 의지를 매장하고,
가련한 민중은 권위의 힘에게 복종해야만 한다.
의지 있는 사람들은 자연의 시련 앞에서 나약하고,
모든 인류의 사상은 그저 폐기물에 불과하다.
문명의 믿음은 거짓이다.
인류의 질서에서는 지배자와 시종들만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재앙의 공포 앞에서 인류는 그저 나약하며, 인류에게 사상이란 다 소용 없다는 내용의 글이지?"
  "그런 거지." 이후, 나의 왼편 곁으로 다가간 카리나가 건네는 물음에 나는 그렇다고 답을 하였다. 그 때, 뒤쪽에서 세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문명 시대에서 인류가 자유 의지를 위한 사상의 발전이 재해 그리고 병마라는 재앙 앞에서는 무력할 뿐임을 말하면서 인류사에서 절대 권력에 의한 민중의 지배는 필연이고, 그것에 반하는 자유 의지는 무의미할 뿐임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피라미드 안에도 이러한 문구가 새겨졌다는 것은 즉, 이러한 말들이 인류 문명 시대에 널리 오갔음을 의미하고 있을 거야, 더 나아가서, 재앙 앞에서 두려워하고 떨며 활동이 위축되어 버리는 심리를 이용해 몇몇 절대자들이 대다수의 인류를 권위의 힘 아래에 두려 했을 것임을 알리는 지표가 될 수도 있겠지."
  이후, 세나는 그렇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으로써 벽에 새겨진 문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을 마쳤다. 잠시 뒤쪽에 서 있던 세나의 모습을 보니, 세나가 두 손을 머리 뒤로 올린 채, 석판과 그 석판을 바라보는 나와 카리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후, 카리나가 세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서 고개를 돌리는 동안 그에게 물음을 건네려 하였다.
  "그 '교주' 라는 자도 비슷한 방식으로 케레브 족 사람들을 이용하려 했겠지?"
  "그랬겠지, 외부에서 다가오는 미지의 공포를 이용하려 했을 거야, 공포를 극복하기 위한 정신 재무장을 명분으로 케레브 족 사람들의 의지를 구속하려 했을 것이고, 또, 공포의 근원을 사멸시킬 수 있는 어둠의 힘을 각성시켜야 할 필요가 있음을 강하게 주장하면서 이를 명분 삼아 동족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었을 것임이 분명해."
  카리나의 물음에 대한 답으로써 세나가 진지하게 목소리를 내면서 답했다. 그리고서 '교주' 에 대해 교활한 사람이었을 것임이 확실하다고 언급하기도.

  반대편의 문은 세나가 좌측 부분에 붙어 있는 문기둥을 돌려서 열었고, 그에 이어, 이전에 보았던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방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방의 바닥 한 가운데에는 이전에 들렀던 방과 마찬가지로 판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판자를 발견하자마자 내가 방 안으로 들어가서 판자를 들었고, 그 이후에 판자를 뒤집어 판자에 쓰인 문구를 보려 하였다. 판자의 뒷면 하얀 바탕에는 검은 글자로 아래와 같은 문구가 쓰여져 있었다 :

Μεσο της Ϲμυρνης και της Θυατιrα.

  여기서 나는 '스미르니스(Smyrnis)', 그리고 '샤티라(Thyatira)' 라는 이름을 발견하고, 첫 번째 방의 '에페소스(Efesos)' 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 여기었다. 첫 번째 명칭은 스미르니스(Smyrnis) 라 되어 있었지만, 원래 명칭은 스미르니(Smyrni) 였을 것이다. 그 이름을 내가 읽어주자마자 나에티아나가 바로 해석을 해 주었다.
  "스미르니와 샤티라를 거쳐서, (Smyrni glo Thyatira jena)"
  이후, 나는 이전에 그러하였던 것처럼 판자를 다시 방바닥 한 가운데에 올려놓고서 조용히 문을 닫은 이후에 세 번째 방을 찾아 나서려 하였다. 세 번째 방은 당연하게도 동쪽 길목과 북쪽 길목 사이의 위치한 길목 부근에 자리잡고 있었다.

  두 번째 방과 세 번째 방 사이로 길게 이어지는 복도를 따라 길을 나아가는 동안, 카리나와 나에티아나는 먼 앞으로 나아가서 2, 3 층을 잇는 출입문의 상태를 보기 위해 먼저 앞으로 나아갔고, 나는 세나와 함께 남은 2 개의 방을 천천히 둘러보기로 했다.
  그렇게 세나와 나란히 길을 걸어가는 동안-내가 오른편, 세나가 왼편에서 걷고 있었다-, 그 기나긴 길목의 좌우를 둘러싸는 벽면 곳곳에 낙서가 쓰여 있는 모습이 눈에 띄였다.  벽면에 새겨진 것도 있고, 펜이나 연필 같은 것으로 쓰여진 것도 있었다. 주로 라테나 문자로 이루어진 낙서들은 마치 바닥에 널부러진 정리되지 않은 물건들처럼 어지러이 벽면에 널려 있었다. 글을 쓴 유형은 크게 연필 등으로 쓴 것과 새긴 것으로 구분이 되거니와, 각각의 문구들마다 필체와 글자 배열 형태, 그리고 글자의 색 등이 서로 달랐다. 심지어는 비슷한 색이더라도 자세히 보면 조금씩 색이 다른 경우도 있었다.
  "서로 다른 사람이 한 문구씩, 몇 문장씩 낙서를 해 놓은 것 같아."
  그 모습을 보며, 안쪽 내벽의 벽면을 왼손의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던 세나에게 말했고, 이에 세나 역시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고 답했다. 그리고 그들 중 대부분은 케레브 족이 쓴 것으로 보인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그러할 만도 한 것이, 피라미드 자체는 옛 시대의 인류의 유산이 아니며, 따라서 인류는 피라미드의 벽면에 접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인류의 흔적이 벽면 곳곳에 새겨져 있고, 빛 덩어리가 인류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기도 했지만, 적어도 벽면의 글자들은 일종의 정자체에 해당되어 재현이 가능했다고 간주할 수 있었지만, 벽면에 아무렇게 쓰여진 낙서들은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진 존재가 있다고 한들, 그 많은 필체들을 재현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브리태나(Britaena) 어로 쓰여진 낙서들, 이 낙서들은 이러한 내용들을 품고 있었다 :


  그 중에서 눈에 띄는 것으로 남쪽 통로 가운데 부분 한 곳에 있던 어느 문구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상당히 길게 쓰고, 글자도 크게 썼기 때문에 눈에 띄었을 뿐이었지만, 아무튼 그 낙서 문구는 아래와 같은 문구들을 이루어내고 있었다 :

먹이를 주는 것만으로 맹수를 길들일 수 있다고 아는 놈이야. 그 놈은 자기가 어떤 놈을 키우고 있는지 전혀 몰라, 그 놈이 깨어나지? 우선 우리 에레브 족부터 먹어치워 버릴 거야!

  '신전' 이라 그들이 일컬은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케레브 족 사람들은 '정신 지배' 를 받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전부는 아니겠지만 일부는 정신 지배가 풀렸던 것 같고, 그래서 삼엄하기 이를 데 없었을 감시를 피해 몰래 낙서를 했을 것 같아 보였다. 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항이 있다면, 당연하겠지만, 케레브 족 사람들 중 대다수, 아니 어쩌면 교주와 그 진정한 추종자 및 측근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영원한 어둠' 에 대한 공포를 확실히 느끼고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아르사나! 세나! 오고 있어?" 그 무렵, 내가 위치하고 있던 통로의 남동쪽 길목 근방을 향해 카리나가 다가오고, 그와 동시에 나에티아나가 상공에서 날갯짓을 하며 카리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 때, 내가 카리나를 향해 다가가서 무슨 일이냐고 묻자, 문을 확인했음을 밝히고서, 혹시라도 내부 경비를 맡고 있던 전사들마저 들어갔을 문 안쪽이 열려 있을지를 확인하려 했음이 그 목적이었음을 밝힌 이후에 바로 자신과 대면하던 나 그리고 세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문은 잠겨 있었어, 아무래도 경비대원들이 들어가면서 바깥에서 잠가 놓은 것 같아."
  예상되었던 사항이었다, 아무리 무능한 이들이라도 중대한 의식이 집행되는 장소로의 접근을 쉽게 허용하는 경우는 착오가 없는 한 거의 없을 것이고, 케레브 족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모종의 수단을 이용해 문의 잠금을 풀어야 그 아래 층으로 내려갈 수 있었을 것임이 분명했고, 이를 위해서는 단서가 필요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본 문구가 단서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 때, 세나가 나를 보면서 이전까지 보았던 문구들, 에페소스(Efesos), 스미르니(Smyrni) 그리고 샤티라(Thyatira) 라는 지명이 들어간 그 문구들이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라 말하고서, 바로 위층의 조각상에 일정한 순서대로 지명들이 새겨져 있었음을 상기해 볼 것을 부탁하였다.
  의미심장해 보였던 5 층의 8 개 조각상들, 각 조각상에는 8 개의 지명-로메노스, 에페소스, 스미르니, 페르가몬, 샤티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그리고 라오디키아-이 하나씩 새겨져 있었으며, 가운데의 구멍을 그 여덟 조각상들이 둘러싸는 형태를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배치에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라 여기었지만 5 층에서는 조각상들에 새겨진 지명과 조각상들의 배치가 무슨 의미가 있거나 하지는 않았는데,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곳이 어쩌면 그 곳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출입문의 잠금은 어떻게 되어 있어?"
  그런 생각을 하고 나서, 나는 바로 카리나에게 출입문의 잠금 구조에 대해 물었다. 만약 자물쇠로 되어 있을 뿐이라면 간단했다, 자물쇠를 부숴 버리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답을 듣기 전에도 잠금 장치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바로 들고 있었다.
  "문의 가운데 부분에 길다란 검은 판자 하나가 달려 있어. 그 문의 판자 부분을 손가락으로 만져 보니까, 손가락이 닿는 궤적마다 하얀 빛이 검은 판자에 그려지고 있었어."
  그리고서 카리나는 판자에 손가락을 대면서 궤적을 그려내는 방식으로 특정한 도형 혹은 무언가를 그려내야 잠금을 풀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하고서, 그간 일행이 발견한 바에 의하면 지명 이름을 조각상에 새겨진 문자대로 쓰는 것이 정답일 것 같다고 잠금을 푸는 방법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그러하겠지, 그간 우리가 발견한 것 중에서 특별하다 여길 수 있는 것은 지명 뿐이었으니까."
  그 이야기를 듣고서 내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여기려 하는 그 때, 나에티아나가 무언가 다른 방법이 있거나 하지 않겠느냐고 이의를 드러내었다. 그리고서 5 층의 조각상 배치와 연관이 있는 무언가일 수도 있다고 말하고서, 아무래도 방향을 의미하는 글자 혹은 기호 등이 답일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 일단 단서들을 찾다 보면 답을 찾을 수 있겠지."
  이에 카리나는 그렇게 계속 단서들을 찾아보자고 나를 비롯한 일행에게 청하다가, 잊고 있던 것을 떠오른 듯이 "아, 맞다!" 라고 말하더니, 바로 겉옷의 오른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내가 이전에 보았던 것과 같은 재질의 판자였다.
  "네 번째 방에서 찾았어, 출입문 바로 근처에 있더라."
  그리고서 바로 나에게 그 판자를 보여주었다, 자기는 읽을 수 없는 문자였다고. 건네 받은 판자의 뒷면을 보니, 과연 이전에 본 것들과 같은 것이었을 그레카(Greka) 혹은 엘리니카(Ellinika) 문자들이 쓰여 있었다. 이 문자들은 아래와 같은 문장을 구성하고 있었다 :

Και ολα θα ειnαι ενα στην Κωνσταντινουπολη.

  이전에는 보지 않은 이름이 있었다, '콘스탄디누폴리(Konstandinupoli)', 여태껏 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고, 그래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이후, 이번에도 나에티아나가 얼핏 본 문구를 통해 해석을 했었음을 밝히고서, 어떻게 해석이 되는지를 말해 주었다.
  "그리고 모든 것들은 콘스탄디누폴리에서 하나가 된다(Glo moz Konstandinupoliye -an' dy)', 라는 뜻이 되어요, 콘스탄디누폴리는 로메노스와 같은 말이에요, 일종의 별칭인 셈이지요."
  "그렇다면, 판자의 지명은 로메노스에 대응해도 괜찮은 것이지요?"
  "그럼요." 이후, 세나가 건네는 물음에 나에티아나는 활짝 웃으면서 그렇다고 답을 하였다. 이후, 나에티아나는 이제 세 번째 문만 남았다고 말하고서, 그 문을 마저 열어보자고 청했고, 이에 내가 앞장서서 남동쪽 모퉁이, 그 내벽의 한 지점 사이에 자리잡은 문을 찾아내었고, 이어서 문의 왼편에 자리잡은 문고리를 돌려서 그 문을 열려 하였다. 문은 무난히 잘 열렸고, 우선 나부터 그 문이 열린 너머를 향해 나아가려 하였다. 문을 열면서 나는 문 너머에 있을 판자와 판자에 새겨진 문구 그리고 문의 잠금이 제시하는 문제를 풀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음에 대한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폴리스로(Constantinopolis, Konstantinopolis) 의 순례길을 완성하려고 쥐새끼 같은 것들이 문을 열었군."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서려 하는 순간, 기계적인 목소리와 함께 가면을 쓴 자와 대면하게 되었다. 목소리를 들으며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으니, 시구르드(Sigurd) 라는 이름을 가진 그 자였다. 이전에는 로브 차림이었을 시구르드는 이번에는 후드가 달린 망토를 둘러쓴 모습을 보이고 있었으며, 그와 더불어 검은 옷과 검은 갑옷을 갖추고 입고, 허리에는 짤막한 검을 차고 있었다. 그 자의 모습, 후드 안에 드러나는 가면을 쓴 모습을 보자마자 나는 뒤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카리나 등에게 일단 들어가지 말 것을 청하고서 그와 대면을 행하기 시작했다.
  "신전으로 나아갔을 때, 마주했던 녀석이 있었지, 예감이 좋지 않았는데, 역시 너였던 거냐."
  피라미드를 향해 나아가는 길목에서 마주했을 때에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다가 이제 와서 어쩐지 예감이 안 좋았다고 말하고 있었는데, 전형적인 이제 와서 알아차려 놓고, 변명하는 행태 같아 보였으니, 예전에 이러한 변명을 했다가 야단 맞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라서 별로 좋아 보이는 모습은 아니었다. 이러한 변명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가 자질적으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네 녀석의 발호도 여기까지다. 이제 곧, 영원한 어둠이 깨어나고 너와 네 끄나풀들, 그리고 너에게 의지하던 모든 것들이 삼켜질 때가 올 테니까!"
  이미 자신이 알려준 바대로임을 밝히고서 가면의 존재는 신전의 바닥, 그 아래에는 진정한 고대 도시가 묻혀 있음을 밝히고서, '교주' 가 '영원한 어둠' 이라 지칭하는 그 존재는 진정한 고대 도시의 중심에 잠들어 있다고 말했다.
  "그 존재는 제물로 바쳐진 에레브인들에 이어, 마지막으로 남았을 '교주' 의 목숨마저 빼앗아 갈 것이고, 더 나아가 행성 전체의 모든 것을 말살해 버릴 것이며, 그 와중에 지금 이후로 살아남은 에레브인들 역시 대부분은 희생되고 말겠지. 하지만 그 희생으로 끝은 아니야. 어둠은 모든 생명들, 선한 자들, 악한 자들 모두를 집어 삼키고 절멸시키고, 마침내 욕망에 이끌리다 못해 스스로의 생명마저 먹어치워가며 파멸할 터. 하지만 그 모든 파멸한 세상과 남겨진 대지에는 어둠의 힘을 견딜 수 있는 우리 에레브 인들은 살아남을 것이고, 그러면 세상의 모든 것은 에레브 인들의 것이 되겠지."
  이후, 그가 쓰고 있던 가면의 안광이 붉게 번뜩이기 시작했다, 그 빛은 확실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에게 섬뜩한 느낌을 전해주고 있었다.
  "우리 에레브 인들은 부흥할 것이다! 우리를 적대하는 모든 이들은 파멸할 것이고, 세상은 에레브 인들의 차지가 될 것이다! 율리아누스(Julianus, Yulianus) 님과 그 분께 충성하는 모두를 사람들은 손가락질하고 어리석다고 여기었다만, 다가올 미래의 공포 앞에서 떨게 될 이들은 그들 자신임을 곧 그들은 알게 되겠지!"
  세상이 파멸하고, 선악을 가리지 않고 모든 생명체를 말살하는 힘이 나타난다는데, 과연 에레브 인, 혹은 케레브 족이 그 와중에 반드시 살아남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는지에 대한 생각을 하든 말든, 자신의 이야기에 심취했는지, 눈앞의 존재는 광소를 터뜨리기 시작하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슬슬 준비할 때가 되었음을 직감하고 두 손에 빛의 기운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 재앙 속에서 케레브 인들이 반드시 살아남으리라고 누가 장담을 하겠어, 오히려 그들이 먼저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나 보지?"
  자신의 종족은 무조건 살아남을 수 있다는 무책임할 정도로 낙관적인 전망에 그저 어이 없었을 비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그러한 전망에 바로 실소를 터뜨려 버리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가 판자를 갖고 있을 것임이 분명했고, 그 판자를 그로부터 회수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고, 그와 더불어 그가 이전에 만났던 다른 존재가 구원하기를 바라는 존재라는 사실도 의식되고 있던 차에 그를 비웃을 여건이 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렇게 그의 도발적인 발언이 이어진 이후, 나는 뒤쪽에 있는 카리나에게 "문 닫아!" 라고 외쳤다. 열린 문을 통해 공격이 날아들어 괜히 카리나 등이 피해를 입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카리나는 문을 닫지 않고, 빛의 방패를 생성하는 것으로 대응했는데, 어쩌면 그것이 더욱 효과적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자아,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다, 베르티! 너의 죽음이 영원한 어둠에 의한 시대 개변의 신호탄이 될 것이야!"
  이후, 시구르드는 허리에 찬 검을 꺼내 드는 대신에 왼손으로 주먹을 쥐면서 왼팔을 뒤로 향했고, 그러는 동안 주먹을 쥐는 왼손의 손가락 사이마다 어둠의 기운이 생성되어 칼날을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받아라!" 라는 목소리와 함께 칼날들이 내가 있는 쪽으로 날아들기 시작하고, 이에 나는 좌측으로 몸을 피하면서 그 칼날들을 피해냈다. 물론 그렇게 움직일 줄은 알았을 것이었고, 그 자는 그런 나를 향해 다시 한 번 칼날을 같은 방식으로 날려 보내려 하였다. 이번에는 앞으로 몸을 굴려서 피하고, 바로 몸을 일으켜 그의 머리 위로 뛰어 오르려 하였다. 뛰어 오르면서 빛의 기운을 모은 오른손으로 그의 머리를 짚으며 그를 뛰어넘고 그의 뒤쪽으로 착지, 그 이후에 일어섰다.
  내가 뛰어오르려 할 때는 그가 막 공격을 준비하고 있을 시점이었다. 그래서 나는 착지를 시도하자마자 바로 그가 나를 향해 칼날을 쏘아 보낼 것으로 예상을 하고서, 발에 힘을 주고 힘차게 바닥에서 뛰어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바닥 쪽에서 칼날이 돌바닥과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와 폭음이 울려 퍼졌으니, 착지를 했던 나를 향한 공격이 시도되었음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렇게 뛰어오르면서 나는 몸을 반대로 돌려 그 존재를 향해 돌아서려 하였고, 그와 동시에 왼손과 오른손에 모인 빛의 기운을 해방해 그 기운들이 4 개의 회전하는 사람의 머리 크기만한 유리 공의 형상을 이루면서 내 주변을 회전하도록 하였다. 공을 가능한 빠르게 회전하도록 함으로써 그가 나를 향해 바로 접근하는 것을 막으려 하였다.
  4 개의 구체를 회전시키면서 건너편 벽을 등지며 서 있는 동안 가면의 존재는 회전하는 구체들, 그리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구체들이 회전하는 그 틈을 노리고 있어 보였지만, 구체들의 빠른 공전 속에서 기회를 찾기는 쉽지 않아 보였고, 그래서 왼손을 나를 향해 들어서 검은 구체를 생성하였다. 그 검은 구체에서 마탄들을 생성해서 나 혹은 나를 둘러싸는 구체들을 타격할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잠시 후, 가면의 존재가 소환한 검은 구체 앞쪽 곳곳에서 검은 마법진들이 생성되어 각 마법진에서부터 칼날과도 같은 검은 탄환들이 잇달아 발사되어 나를 향해 날아가기 시작하였다.
  상당히 많은 수의 유리 조각 같은 검은 탄환들이 날아들고, 이에 나는 왼손을 앞으로 내밀어 빛의 기운을 방출, 곡선을 그리는 빛 줄기를 이루도록 하고서, 그 빛 줄기들이 구체들 중에서 바로 앞으로 다가온 그 하나를 붙잡고-그와 동시에 구체들의 회전이 멈추었다- 붙잡은 구체를 끌어서 검은 탄환들을 향해 나아가도록 하였다. 시계 방향으로 구체를 돌려서 검은 탄환을 치는 방식으로 탄환들을 막아내고, 이어서 왼손에서 오른손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빛의 기운을 일으키고, 그것으로써 두 가닥의 선을 그려낸 후에 왼팔을 뒤로 움직임으로써 뒤쪽의 구체들을 붙잡아 나의 뒤로 모이도록 하고, 그와 더불어 오른손을 움직여 한 쌍의 가닥들이 내 앞과 오른편에 있던 구체들을 끌어 움직이는 것으로써 뒤이어 날아오던 탄환들 역시 막아낼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몇 번의 탄환 발사가 반복되었지만, 그 때마다 구체들의 움직임이 탄환들의 기운을 제거해 나아가면서 나에게 어떤 피해도 가해지지 않자, 시구르드는 결국 술법을 통한 사격으로 나를 공격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무언가를 노리는 듯이 자신이 머무르고 있던 문 근방에서 왼쪽 무릎을 꿇으며 앉았다. 아마도 뛰어올라 공중에서 나를 공격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사격을 포기하고, 다르게 공격을 행할 조짐을 알아차리고 우선 그의 움직임을 지켜보다가 그가 기회를 계속 노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구체들의 제어를 풀고, 다시 스스로 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도록 한 이후에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빛의 기운을 다시 일으켜, 구체들의 공전 궤도를 바꾸어 내 근처에서 보다 거리를 두고 천천히 공전하도록 하였다, 그에게 일부러 틈을 보이도록 하기 위한 일이었다.
  그렇게 공전 궤도의 변화가 눈에 띄게 드러나자, 시구르드는 바로 왼쪽 허리의 칼집에서 검을 오른손으로 빼내어, 그 손으로 검은 기운을 마치 짙은 연기처럼 뿜어내기를 거듭해 가는 검을 쥐고서 나를 향해 뛰쳐 나아갔고, 그 움직임은 이전보다 천천히 움직이게 된 구체들을 뚫고 나에게 접근해 오고 있었다.
  이후, 가면의 존재는 검을 높이 들었다, 마치 일격에 나를 끝장내 버리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려 하고 있는 듯해 보였다. 하지만 그렇게 하다보니, 빈 틈을 크게 보이고 있었다. 그렇게 그가 나를 향해 다가오는 동안 이러한 상황을 기다리고 있었던 나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바로 자세를 낮추고, 이어서 그가 다가오자마자 왼쪽 다리를 낮게 시계 방향으로 돌려 그의 다리를 걸려 하였다.
  시구르드는 나를 향해 뛰어가다가 내가 움직인 왼쪽 다리에 왼발이 걸리자 바로 균형을 잃고 말았으며, 그로 인해 당연하게도 그 기세 역시 꺾였다. 이후, 균형을 잃은 존재의 몸이 어찌하지 못하고 있는 그 사이에 바로 몸을 들고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와 오른 주먹을 그 명치에 찔러 넣었다. 이후, 마지막으로 나는 다시 왼쪽 다리를 들어 괴로워하는 그의 흉부에 높이 돌려차기를 가해 그를 뒤쪽으로 밀쳐내려 하였다. 그리고 돌려차기를 마치고 그 쪽으로 시선을 향하니, 가면의 존재는 구체가 회전하는 뒤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돌려차기에 의해 가격을 당하고 뒤쪽으로 밀려나던 시구르드는 마침 시계 방향으로 회전하고 있던 구체가 그의 오른 옆 머리를 강하게 가격하였다. 이전에 비해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고 하였으나, 바로 옆의 존재를 강타해 날려버릴 수 있기에는 충분히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구체가 머리를 가격하는 것과 동시에 가면의 존재는 그 충격으로 인해 몸이 회전하면서 문의 오른쪽 먼 저편으로 날아갔으며, 그와 동시에 그가 쥐고 있던 검, 그리고 그가 쓰고 있던 가면은 그에게서 떨어져, 검은 그의 왼편, 그리고 가면은 그의 오른편 멀리 날아가, 그에게서 떠났다.
  그리고, 그가 바닥에 부딪치는 것과 동시에 그의 바지 주머니에서 두 가지 물건들이 빠져나왔으니, 원래 방 안에 있었을 작은 판자와 종이 한 장이었다. 판자는 그가 지면에 격돌하자마자 그의 오른 바지 주머니에서 빠져나와 지면의 한 가운데 쪽으로 나왔고, 그와 동시에 종이 역시 잠시 공중에 머무르고 있다가 천천히 판자 근처에 놓였다.

  그렇게 그가 쓰러진 것을 확인하자마자 구체를 더 이상 운용할 이유가 없어진 나는 구체를 다시 사라지게 하고서, 내 근처로 떨어진 검을 오른손으로 들고, 이어서 방 한 가운데 근방에 놓이게 된 판자와 종이를 향해 다가가, 우선 종이를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우고, 이어서 판자를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우는 방식으로 두 물건을 한 손에 하나씩 들었다. 그리고서 그가 다시 깨어날 가능성을 생각해 그가 쓰러진 그 좌측으로 나아가 칼날의 끝이 그 허리를 향하도록 하며 서 있으려 하였다.
  "이제 들어와!" 그렇게 하나의 상황이 종결되자마자 나는 잠시 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려 문을 열고 들어오라고 문 밖에 있던 사람들에게 말했고, 이후, 문이 열리면서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카리나, 나에티아나 그리고 세나가 차례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수고했어, 아르사나, 이 자는 내가 맡고 있을게!"
  이후, 카리나는 나에게 자신이 그 쓰러진 존재를 맡고 있겠다고 말하고서, 왼 허리에 꽂힌 검을 오른손으로 들면서 그를 향해 다가가, 쓰러진 존재의 오른쪽 허리 부근에 다가가며 서고서, 들고 있던 칼날의 끝이 그의 몸을 향하도록 하였다.
  그렇게 카리나가 그를 감시하기 시작할 무렵, 나는 그의 곁을 떠나, 그가 판자를 떨어뜨렸던 방의 한 가운데 쪽으로 나아가서 왼손을 들어 그 왼손의 엄지와 검지 사이에 있던 판자를 들여다 보려 하였다. 판자는 이미 뒤집혀 있었으며, 그래서 판자에 쓰인 검은 글자들을 바로 읽어볼 수 있었다. 판자에 쓰인 문구는 아래와 같았다 :

Ο καθενας φτανει Φιλαδελφια,

  확실한 것은 '필라델피아(Filadelfia)' 라는 지명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첫 번째 방에 '에페소스(Efesos)', 두 번째 방에 '스미르니(Smyrni)' 와 '샤티라(Thyatira)', 세 번째 방에 '필라델피아(Filedelfia)', 마지막 방에 '콘스탄디누폴리(Konstandinupoli)' 혹은 '로메노스(Romenos)' 가 있는 하나의 경로가 완성이 되었다.
  "에페소스, 스미르니, 샤티라, 필라델피아 그리고 로메노스."
  이후, 나는 그간 발견한 지명들을 지명들이 발견된 곳의 순서대로 말했고, 이어서 그 순서대로 경로를 그리면 될 텐데, 5 층의 조각상 배치가 중요한 단서가 될 것 같다고 말하기도. 그리고서 잠시 바닥에 앉아서 엄지 손가락과 검지 손가락 사이에 있던 판자를 다시 바닥에 내려놓은 후에 다시 일어나서 이번에는 종이에 쓰여진 것을 보려 하였다. 이전까지는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 놓고 있었지만, 끼워 놓고 있을 필요가 없었기에 종이를 다시 들었고, 그러면서 종이에 쓰여진 것들에 자연스럽게 시선을 두게 되었다 :

1 2 3
4 5 6
7 8 9

  마치 5 층에 공동을 둘러싸며 서 있던 조각상의 배치를 연상케 하는 숫자 배열, 이러한 의미 없는 숫자 배열을 적어 놓은 것처럼 보이는 종이를 나름 조직의 간부였던 사람이 중요하게 가지며 다니고 있었다면 분명 그 종이는 요긴하게 사용될 곳이 있었을 것이고, 숫자 배치가 5 층의 조각상 배열을 연상케 하는 일면이 있다면, 그것은 4 층의 문을 여는 방법이 될 수 있을만 했다. 그래서 종이는 주머니에 넣어 두고, 판자는 다시 방 한 가운데에 원래대로 돌려 놓았다.
  이후, 나는 카리나 쪽의 동태를 살펴보기 위해 그 쪽으로 돌아서는데, 이미 가면을 다시 쓴 시구르드는 벽을 등지는 방향으로 앉은 채로  다시 일어서려 하고, 그 때를 같이 하여, 그에게 칼날의 끝을 향하고 있던 카리나가 그 움직임을 보자마자 바로 검을 쥐고 있던 오른팔을 앞으로 뻗었다, 움직이는 존재를 위협하기 위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행동에 그는 결국 다시 주저 앉았다.
  "이 자가 이전에 만났던 그 사람이 언급했던 그 사람이려나."
  "확실해." 이후, 카리나가 건네는 물음에 나는 이전에 대 피라미드로 나아가는 도중에 만난 사람임을 밝힌 이후에 케레브의 주술에 의해 세뇌된 것 같아 보였다고 우선 그에 대해 언급하고서, 이어서 그에 대해 그가 언급한 그 사람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답을 하였다. 이후, 나는 그런 이유로 인해 그를 일단 무력화시키는 정도로 끝을 내려 하였음을 밝힌 이후에 그를 해치도록 해서는 안 되고, 당장에 세뇌를 어찌할 수 없더라도 그를 일단 놓아둘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차라리 풀어주더라도 그를 해쳐서는 안 된다는 거지?"
  이후, 카리나가 나에게 건네는 물음에 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하다고 답했다. 그 무렵, 오른팔의 팔찌가 빛을 발하기 시작하고, 이에 나는 여전히 유적 내 거리의 집 안에 머무르고 있을 그 자가 통신을 시작했을 것이라 여긴 이후에 장치 조작을 가해 그 통신에 응하려 하였다.
  "예, 저에요, 아르사나예요, 무슨 일이지요?"
  "....... '신전' 내부에 그 자가 숨어 들었음을 알리려고 연락을 드렸어요."
  무슨 일이냐는 물음 그 이후에 곧바로 응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들려오는 소리는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소리였다, 정황 상 나와 연락한 자였을 것임이 틀림 없었지만 이전과는 전혀 다른 소리였던 것. 이전에 내가 옷과 가면을 모두 가져간 이후-그래서 옷을 갖춰 입은 후, 나의 목소리가 변조되었다-, 더 이상 가면 혹은 옷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되면서 변조되지 않은 본래 목소리가 들려왔을 것이다. - 그 목소리가 어떠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는 말할 수 없다. 다만, 통신을 통해 들려온 목소리를 들으며, 나를 비롯해 일행 모두가 적잖게 놀랐다는 사실만큼은 밝혀 둔다. 어쩌면 이러한 목소리가 들려올 것에 모두 놀라고 당황할 것 같아 그간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예, 발견했어요, '신전' 4 층에 있더라고요."
  잠시 당황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알려야 할 사항이 있기에, 그에게 그 자가 4 층에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려 하였다. 그 이후, 나는 그 자가 일행과 싸움을 행하려 했고, 이후, 싸움에서 패한 후에 제압되었음을 이어 밝히기도 했다.
  "그러셨군요, 하지만 그는 제압됐다고 해도 나름 도주 방안이 있어서 그대로 놓아두면 안 될 거예요."
  "아직까지는 붙잡아 놓기는 힘들어요, 아직 해야할 일도 있는데, 포로를 마련해 둘 수도 없는지라...... 그가 순순히 저희 편이 되지 못한다면 차라리 놓아주는 편이 낫다고 봐요."
  그러자 나는 바로 이렇게 응답했다. 그리고서 어디를 가든, 그는 사람들에게 큰 위협이 되지는 못할 것이라 말했다 :
  "풀려난다고 해서, 그가 얼마나 큰 일을 만들 수 있을지는 알 수 없고, 가능성도 별로 없을 거예요, '신전' 에서 '교주' 는 일행에게 제압되었을 때에는 별 말이 없다가 경비대원들이 글라이더들을 몰고 왔을 때에는 그들의 포격에 공포를 느끼고 그 안으로 도망쳐 들어갔어요. 저희들한테도 이 정도인데, 경비대원들 앞에서는 오죽하겠어요, 그들에게 발각되는 즉시, 바로 위험한 상황에 빠지게 될 거예요."
  "...... 알고 보니, 네가 제압되었다고 말했던 이가 바로 그 자였나 보군."
  그 때, 그 자가 바닥에 앉은 채로 일행을 보며 말을 걸려 하였다. 그리고서 바지 오른 주머니에서 아직 그의 품을 떠나지 않은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작은 자갈 혹은 돌 조각처럼 보이는 무언가로, 그 무언가를 들자마자 무언가는 검은색 기운을 일으키고, 이어서 그가 앉은 일대가 검은 마법진에 감싸이려 하고 있었다.
  "그 자가 말한 대로야, 나에게는 도주 방안도 있지, 바로 이거야. 뭐, 너희들은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려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별 신경을 쓰지도 않겠지만 말야. 하하하!!! 너희들이 나를 하찮은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만, 아직 나에게 숨겨진 많은 것들이 있음을 간과한 모양이군, 지금은 상황이 적절치 못해 꺼내들 수 없겠지만 말야."
  이후, 마법진에서부터 검은 기운이 솟아나려 하는 동안 그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나의 역할은 사실, 여기까지였다, '영원한 어둠' 이 깨어나기 전까지 잠시 시간을 버는 것, 소명을 마친 이상, 내가 계속 이 곳에 머무를 이유는 없겠지. 그 분의 처소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겠다, '영원한 어둠' 이 이 행성계의 모든 생명을 삼키고, 더 나아가 우리 에레브 인들의 세상이 그로 인해 태어날 그 때까지 말야!"
  그리고 그가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검은 기둥이 불꽃처럼 피어 오르며, 마법진과 그를 감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동안 피어오르고 있던 검은 기운이 사라질 무렵, 마법진과 더불어 그의 모습 역시 사라졌다. 그 돌을 이용해 전이 마법을 사용하고, 그 마법을 통해 모종의 거처-아마도 포헤 느와흐가 있는 곳-로 떠나갔을 것이다. 그렇게 그가 떠나간 이후, 더 이상 일행이 방 안에 계속 머무를 이유는 없었고, 그리하여 일행은 각자 꺼내 든 무장을 다시 원래 상태로 되돌리고, 방을 나서기 시작했다. 나 역시 그가 남긴 검을 든 채로 그들을 따라 밖으로 나서려 하였다.
  "그 검은 일종의 전리품인가 봐?"
  그 때, 검을 들고 다시 복도로 나오는 나를 보며 카리나가 물었고, 이 물음에 나는 조용히 미소를 띠며 그렇다고 답했다. 그리고서 영원한 어둠이 본 모습을 드러낼 때, 바로 그 몸에 칼을 꽂아 넣을 것이라 그 검에 대해 말하기도 했다.

  "이 방 건너편에도 석판이 있고, 무언가 새겨져 있더라고요, 보시지 않으실래요?"
  내가 다시 앞장서서 복도로 나아가고, 세나 그리고 카리나가 뒤따라 복도를 따라 나아갈 그 때, 나에티아나가 나의 앞으로 다가와서는 나에게 물었고, 이 물음에 나를 대신해 카리나가 잊고 있었다고 말하고서, 나에게 이렇게 요청을 하였다.
  "그 석판의 글도 한 번 읽어 보도록 하자, 무엇이 쓰여 있을지 궁금하지 않아?"
  세 번째 방에서 갑작스레 누군가와 대결을 벌이면서 건너편 벽에 자리잡고 있었을 석판의 존재를 그만 잊고 있다가 나에티아나가 알려주면서 간신히 그 존재를 기억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석판을 향해 다시 다가가서 석판에 새겨진 문구를 보려 하였다. 석판에는 아래와 같은 문장이 쓰여 있었다 :

Species hominum magnum fuerunt,
Sed ad realisationem eorum, ea nimis homines fuerunt.
Ea quas homines sunt unum animalium fuerunt,
Et terminum eorum non transcenderunt.
Ea rationem mundum sapere potuerunt,
Sed se sapere non potuerunt.
Tum, quando fatum eorum destinatum fuerunt,
Vice olim paradiso ejectus fuerunt, terra hac ejectus sit.

  인간의 이상은 위대했지만, 그것을 실현하기에 그들은 너무 인간적이었다. 그들은 인간이라는 동물의 일종일 뿐이었으며, 그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들은 세상의 이치를 능히 이해했지만, 그들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들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니, 일찍이 그들이 낙원에서 추방된 것처럼, 이 대지에서 추방되는 것이니라.

  어느 이야기에 의하면 인간은 천국의 낙원(=an'paradisa) 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원죄' 라는 것을 지은 인간은 그로 인해 낙원에서 추방되어 생의 한계(Saryey Limita) 를 가지는 육신을 가지며 지상에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낙원에서 추방되었는데, 또 죄를 받아 지상에서도 추방된다는 것은 자연에서 인간에게 더 이상 설 자리는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문명과 지혜를 누릴 자격은 물론, 심지어 삶의 권리를 누릴 자격 조차도 없다는 글 아니에요?"
  "....... 그렇지." 이후, 세나가 건네는 말에 바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답했다. 그리고서 이는 원죄를 얻고 하늘의 백성 자리를 잃었다는 이들이 또 죄를 지어 대지의 백성 자리마저 잃었다는 글은 인간이 '사람(Persona, Sarami)' 으로 칭할 자격마저 상실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말을 건네기도 했다. (*1)
  "그들이 대지에서 쫓겨나야 한다면, 그 쫓겨날 이들은 어떻게 살라는 것일까요?"
  "죽음을 원치 않는다면, 기술력을 끌어들여 '방주(Arka)' 를 만들어서라도 우주를 떠돌며 살라는 것이겠지."
  "먼 옛날, 어느 나라의 사람들이 나라를 잃고 바다를 떠돌았던 것처럼요?"
  이후, 세나가 짐짓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고, 이 물음에 나는 조용히 "그러하겠지." 라는 답을 하였다. 이러한 대화가 이어지고 난 이후, 나의 바로 위쪽 상공에 있던 나에티아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저주의 글 같아요, 옛날 인류에 대한." 이라고 글에 대한 감상을 드러내었고, 나를 비롯해 카리나, 세나 모두 이러한 말에 동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무엇이 이러한 저주를 불러왔을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황이 확실치는 않다. 다만, 그간 지켜봐 온 석판의 문구들을 통해 어느 정도 감이 잡히는 바가 있기는 했다. 인류 역사의 말기에 전염병들의 유행과 자연 재해가 거듭되고 문명의 발전이 거듭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재난을 인류가 그 혜택 속에서도 극복해내지 못하기만 반복하자, 이러한 인류의 한계를 원망하는 이들이 생겨나고, 그와 더불어 인류를 저주하기 시작한 이들이 생겨났을 텐데, 이러한 저주의 의지를 반영한 글인 것처럼 보였다.
  인류가 어리석어 멸망했다는 인식은 세니티아 성계권에는 널리 퍼져 있으며, 틀렸다고 할 수도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인류가 세니티아 성계권에 있는 수많은 종족들의 선조이며, 그들의 문명이 남긴 잔해들이 성계권 문명의 바탕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노릇이다. 또한, 암만 못난 이들이라고 하더라도 뒷담화마저 마땅치 않을 짓거리라 칭할 마당인데, 만인이 볼 수 있는 곳 앞에서 드러내놓고 욕을 하는 것은 무례라 칭하기에도 너무나 비열한 행위, 이러한 문구들은 사료가 될 수 있다고 해도, 만인 앞에 있도록 해서는 안 되었다.
  "이 피라미드의 이러한 문구들을 계속 놓아두어도 되는 거야?"
  "개방해야 한다면, 적어도 이 피라미드에서 전부 떼어 버려야지, 어쨌든 이러한 저주의 글을 사람들이 보게 해서는 안 돼."
  이후, 카리나가 심각해진 목소리로 건네는 물음에 바로 그렇게 답했다. 그리고서 경비대원들에게 사건이 끝나고 나면, 피라미드 혹은 지구라트 내의 모든 석판들을 없애 버리도록 해 달라고 부탁을 해야 하겠다고 말했다. 이 피라미드 혹은 지구라트는 역사의 유산이고, 안의 구조물 역시 역사의 유산이겠지만, 유산도 유산 나름이다, 앞서 내가 말한 바대로, 저주의 문구를 담은 것들은 뭇 사람들에게 함부로 알려져서는 안 될 노릇이었다.
  그래도 일단 석판을 그대로 두기로 하고 다시 떠나간 이후, 북쪽으로 이어진 복도를 따라 출입문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먼 저편에 굳게 닫힌 출입문의 모습이 보였다. 마지막 문은 출입문 바로 근처에 있었으며, 석판 역시 그 건너편에 자리잡고 있었다. 석판에 새겨진 문구는 아래와 같았다 :

Expulsores, nunc piate et se corpora private.
Et nova basis ad se animas accipite.
Tum, salvatum ibitis.
Aut, ullus eorum non salvabitis.

  추방자들이여, 이제 속죄하고 그 몸을 버려라, 그 혼들을 위한 새로운 바탕을 받아들여라, 그렇다면 너희들은 구원 받을 것이다. 아니면, 누구도 너희들을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

  글의 내용은 이러하였다. 세 번째 석판의 글 내용과 연관성이 매우 높았고, 자극성이 높은 문구들이 석판을 채우고 있기도 했지만, 장소가 장소였던 만큼, 출입문 바로 앞의 문제를 푸는 것이 더욱 중요했고, 그래서 문구의 내용에 대해서는 달리 말을 잇거나 하지는 않고, 바로 출입문을 향해 나아갔다. 방을 나서면서 카리나는 주머니에 들어있던 석판을 바닥 한 가운데에 올려 놓았다.

  "혹시 그 자가 들고 있는 종이에 무엇이 쓰여 있었나요?"
  이후, 문 앞에 일행이 당도할 무렵, 다시 이전의 그 목소리가 내 왼팔의 팔찌에서 들려오기 시작했고, 이에 내가 왼쪽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그 종이를 보면서 숫자들의 배열이 종이를 채우고 있음을 밝혔다. 이에 목소리는 바로 "제 생각대로네요." 라고 말하더니, 이어서 그 숫자 배열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5 층에 공동을 둘러싸고 8 개의 황금 조각상들이 서 있는 모습을 보셨을 거예요, 종이의 숫자는 그 조각상의 북쪽 기준 위치를 나타내고 있어요. 2 가 북방, 4 가 서방, 6 이 동방, 그리고 8 이 남방이지요. 5 는 바로 공동의 위치예요. 문제의 답은 그간 여러분들께서 보셨을 명칭이 새겨진 조각상들의 위치와 관련이 있는 5 자리 숫자이지요."
  이후, 목소리는 나를 비롯한 일행은 이제 충분히 답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 말하고서, 이후의 일은 일행에게 온전히 맡기도록 하겠음을 밝혔다.
  "영원한 어둠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저도 감을 잡을 수 없어요, '교주' 도 아마 잘 모르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여러분들께서는 어둠을 극복하실 수 있을 거예요, 분명 그렇게 되겠지요."



  3, 4 층을 잇는 출입문의 한 가운데 쪽에는 카리나가 말한 바대로, 검은 판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검은 판 위에 손가락을 대고 움직이는 대로, 검은 판에 하얀 빛으로 그 궤적이 그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궤적은 시간이 지나니 점차 사라져 가고 있었으며, 5 초 즈음 지나니,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정답은 에페소스, 스미르니, 샤티라, 필라델피아, 로메노스였지?"
  "맞아." 이후, 나의 바로 뒤에 있던 카리나가-당시 문 앞에는 나만 있었고, 그 뒤에 세나, 카리나가 서 있었으며, 나에티아나가 그들 뒤에 떠 있었다- 물었고, 이 물음에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그리고 잠시 종이에 시선을 두고서 해당 위치에 대응되는 다섯 자리 숫자를 판 위에 손가락으로 쓰면 문이 열릴 것이라 말했다.
  "에페소스가 동북쪽이었으니까, 3 이었지....... 그 다음이 정동쪽인 스미르니, 6......."
  "샤티라는 어디였지?" 이후, 카리나가 건네는 물음에 나는 정남쪽이었다고 답하고서, 8 번이라고 말했다. 그리고서 동북에서 시작해, 정동, 정남, 정서, 정북으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에페소스가 동북, 스미르니가 정동, 샤티라가 정남, 필라델피아가 정서, 마지막으로 로메노스가 정북, 동북쪽 방향에서 시작해서 동, 남, 서, 북 순으로 방향의 순서가 이어지게 되는 거야. 동북의 3 을 시작으로 6 과 8, 그리고 그 다음에는 4 와 2 가 오는 것이지. 그러니까, 정답은......."
  "3, 6, 8, 4, 2 (Thï, siz', -adr', nye, tu)." 이에 세나가 내 말을 잇는 대신으로 정답을 말하고, 그러는 동안 나는 왼손으로 검을 들고, 오른손으로 검은 판에 손가락으로 '38642' 라는 숫자를 쓰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2 라는 숫자를 쓰고난 직후, 그간 썼던 숫자들이 잠시 밝게 빛을 발하더니, 사라지면서 잠금이 열리는 쇳소리가 들려왔다. 이후, 나는 출입문을 밀어내려 하였고, 그와 동시에 그 좌측 부분이 밀리면서 출입문 너머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됐어, 문이 열렸어!" 이후, 나는 문이 열렸음을 알리고, 그와 동시에 문이 열린 그 너머로 나아가기 시작하니, 그 뒤를 따라 세나와 카리나 그리고 나에티아나가 따라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행은 출입문을 지나, 나선형 계단을 통해 3 층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1) 세니티아 어에서 인간(=uman) 과 사람(Sarami) 은 미묘하게 뜻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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