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rtiA - 6. The Flower of the Abyss : 1


  "뭐였지......?" 정신을 차려 보니, 밤하늘 아래로 바다와 해변이 펼쳐진 모습이 눈앞에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눈앞에 보였던 소리와 각자 다른 색의 옷을 입고 있던 여자아이들, 그리고 내 곁에 있던 소르나, 아니 나와 닮은 모습을 한 이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고요히 물결치는 바다의 모습이 보이는 동안, 조용한 물결 소리만 귓가에 조용히 속삭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꿈이었구나......."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내가 잠깐 졸았다가 소르나 아니, 나를 닮은 누군가에 의해 깨어난 이후, 방금 전까지 지켜본 모든 것은 사실 꿈이었고, 그 때 나는 졸았다가 깨어난 것이 아니라 계속 잠들고 있었던 것이다.
  꿈에서 깨어날 때에도 아직 새벽은 오지 않았는지, 날은 여전히 어두웠고,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시간이 지나고, 그에 따라 별들이 움직이면서 밤하늘의 모습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겠지만, 크게 눈에 띌 만한 변화는 아니었을 것이다.

  꿈에서 깨어나고, 잠들고 있는 사이에 시간이 많이 지났음을 상기하며, 동쪽 방향으로 돌아서려 하였다. 폭풍을 부르는 구름, 괴물의 영향력이라 할 만한 구름에 뒤덮혀 있었을 지브로아 남쪽 해변과 기억의 사당을 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 때에 그 일대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를 보게 되었다.
  "구름이......?" 내가 잠들기 전까지, 바다 건너편, 지브로아 해변과 기억의 사당 일대는 폭풍을 부르는 구름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으며, 그것으로 인해 지브로아로는 배가 닿을 수 없다고 했었다. 폭풍우로 인해 모든 것이 준비가 되어도 바닷길로는 지브로아에 닿을 수 없어, 내가 육로를 거쳐 지브로아에 앞장서 갈 것을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잠에서 깨어난 이후, 다시 바다 건너편을 바라보니, 지브로아 해변의 사당과 그 주변 일대가 명확히 잘 보이고 있었다. 그 일대에 드리워진 구름이 걷힌 것이다.
  "구름이 북쪽으로 옮겨졌구나," 정확히는 폭풍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고, 폭풍우를 불러오는 구름이 북쪽으로 옮겨진 것이었을 뿐이었지만, 그로 인해, 기억의 사당 남쪽 일대는 구름이 사라졌으며, 폭풍이 걷히면서 해변과 근해의 파도 역시 잔잔해져 있었다. 배를 타고 지브로아 남쪽 해변으로 가는 바닷길이 열린 것이다.
  '내가 잠들기 전에 그 빛나는 비행체가 전투기들을 뒤쫓다가, 교전까지 했었는데...... 그렇다면......?'
  폭풍이 걷히기 전, 내 곁에 있던 소리가 서쪽 방향으로 떠나갔다. 그리고 서쪽 먼 저편의 하늘에서 하얀 빛을 발하는 비행체가 나타나 지브로아 쪽으로 가고 있었고, 이에 맞서려 하는 듯이 각자 다른 색을 띠는 빛을 발하는 전투기들, 이드리사란 이름을 가진 전투기들이 비행체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그리고 남쪽 해변의 폭풍이 북쪽으로 이동한 시점에서 비행체들은 보이지 않았으니, 이미 교전은 끝나고, 비행체들은 자취를 감추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꿈 속에서 소리가 다섯 아이들과 술래잡기 놀이를 하고 있었지, 서로 쫓고 쫓기면서. 그리고 아이들의 옷 색깔이 이드리사들의 옷 색깔과 같았어.'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것이 하나 있었다. 꿈 속에서 소리와 다섯 아이들의 술래잡기 놀이였다. 그러면서 소리와 여자아이들의 그 놀이가 하얀 비행체 그리고 이드리사들의 교전을 나타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꿈 속에서 보였던 것을 두고, 꿈 속에서 일어난 일일 뿐만이 아니라, 내가 잠들고 있던 사이, 실제로 일어난 일로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 은유적으로 표현된 것이었으리라 여기게 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다, 그 이드리사들은 하얀 비행체와의 전투에서 패배했으며, 격추당하거나 격퇴당했으리라는 것이다.
  '그 여파로 괴물이 자신의 힘을 옮기면서 폭풍우가 북쪽으로 이동했다고 볼 수 있겠네.'
  그 시점에서 하얀 비행체 역시 보이지 않았기에, 하얀 비행체 역시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그것은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다, 당장에 시급히 해야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폭풍이 걷혔음을 그들에게 알려야 해!' 지금껏 일행이 해변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은 폭풍이 걷히지 않아 바닷길을 이용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 바닷길이 열렸으니, 그 바닷길을 갈 준비를 해야 함을 알리려 한 것이었다. 괴물이 마음을 바꿔 다시 남쪽으로 힘을 옮기기 전까지 서둘러야 했다.

  "아이고, 얘들아! 뭣들하고 있는 거냐!? 폭풍이 걷혔다! 어서 일어나라!!!"
  그러면서 다급히 비행선과 천막 쪽으로 뛰어갔을 무렵, 내 눈 앞은 이미 난리가 나 있었다. 그간 보이지 않던 알프레드 노인이 엘베 족 소녀들이 잠들었을 천막을 뒤흔들고, 세나의 인도를 받아 집으로 돌아갔을 탐파, 사라가 우주선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서 일행을 다급히 깨우고 있었다. 탐파는 일행을 눌러가며 깨우고 있었고, 사라는 한 사람씩 곁으로 다가가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폭풍이 걷혔다고요?!" 그 때, 세니아의 목소리가 우주선 안쪽에서 울려 퍼졌다. 이미 에오르 자매는 리 셀린과 함께 천막을 걷고 있었으며, 셀린은 글라이더들의 상태를 알아보고 있었다. 세니아가 카리나를 이끌고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옷이 가지런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급히 옷을 주섬주섬 입고 밖으로 뛰쳐나온 듯하다.

  "그렇다네. 저기를 보게나!" 이후, 세니아는 카리나를 이끌고 다급히 해변 쪽으로 달려갔다. 그 후, 세니아가 카리나를 곁에 두고 해변의 사당과 그 일대의 해변 쪽으로 다가가 그 일대의 광경으로 시선을 향하려 하였고, 그 이후, 카리나가 해변 일대의 구름이 걷혔음을 확인했다. 그 이후, 카리나는 일행 중 남은 이들, 사라 등이 깨워서 나에티아나, 잔느 공주, 루이즈를 맞이하고, 알프레드 노인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이제 선착장으로 가면 되는 거죠?" 그러자 알프레드 노인은 그렇다고 답한 다음에 지난 밤에 미리 연락해서 배를 마련해 두었음을 알렸다. 다음 날 아침에 출항할 예정으로 빌린 배들로 해로를 거쳐 기억의 사당으로 가는 이들은 두 척의 배에 나누어 탑승하면 될 것이라 말했다.
  선착장은 해변의 서쪽에 있으므로 서쪽 방향을 따라 나아가면 이를 수 있었다. 선착장과 해변 사이로 가는 것은 걸어서도 그리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으니, 금방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세 사람이 앞장서 가니, 나에티아나, 셀린, 잔느 공주를 비롯한 이들 역시 알프레드와 동행하게 되었다.
  원래 나를 비롯한 일행과 계속 동행하던 잔느 공주를 제외한 루이즈, 탐파, 사라는 에오르 자매, 리 셀린과 더불어 예나의 비행선에 남게 되었다. 직접 전투와 관련된 이가 아닌 만큼, 안전한 비행선에서 보호를 받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아르사나, 벌써 선착장 쪽으로 가고 있었나!?"
  이후, 알프레드 노인은 비행선 그리고 천막의 서쪽 부근에 있던 나와 바로 마주하게 되었고, 이후, 알프레드 노인은 나를 불러, 미리 선착장으로 가고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 이후, 알프레드 노인과 그가 이끄는 일행이 내 곁에 이르자, 나 역시 알프레드 노인 등과 동행하면서 같이 선착장 쪽으로 가게 되었다.



  "아직 아침도 아닌데, 벌써 오신 거예요!?"
  선착장에 이르자마자 배를 맡고 있었을 이가 알프레드 노인을 맞이하면서 물었고, 그 물음에 알프레드 노인은 "그렇다네." 라고 답하고서, 구름이 걷혀서 이제 지브로아 남쪽 해변 쪽으로 갈 수 있게 됐음을 알렸다.
  "아침 즈음에 파도가 잔잔해질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아침도 장담할 수 없기는 했다네. 대략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지. 이렇게 새벽도 오지 않았는데, 뱃길이 열릴 줄 어찌 알았겠나?"
  그 이후, 알프레드 노인은 선착장에서 배를 맡고 있던 이에게 어서 배에 탈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했고, 이에 그는 알았다고 답하고서 선착장의 세 번째 접안 시설에 배가 비치되었음을 알린 후에 제법 큰 배라 10 여 명 정도는 거뜬히 승선할 수 있을 것임을 알리기도 했다.
  "그건 그렇고, 이후로는 배를 조종하는 게 문제인데, 배 조종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내가 하겠네, 이래봬도 배 항해도 해 본 사람이니." 그러자 알프레드 노인은 자신이 하겠음을 알렸다. 그리고 먼저 배를 향해 다가가면서 나를 비롯한 일행에게 어서 배를 타라 말했다. 그리하여 나부터 앞장서서 알프레드 노인을 따라 배 쪽으로 가고, 이어서 카리나, 세니아, 세나, 나에티아나, 셀린, 루이즈의 순으로 알프레드와 나를 따라 선착장에 자리잡은 배에 올라탔다.



  전반적으로 갑판 바깥쪽은 하얗게 칠해져 있으며, 안쪽은 짙은 하늘색으로 칠해진 어선으로 배의 중심에서 함미 쪽에 이르는 뒷 부분에 선실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선실의 윗 부분, 배의 중심부 윗 부분에는 선교가 자리잡고 있어서 배를 조종하려면 그 위로 올라가야 함을 알 수 있었다. 갑판 안쪽이 넓어 10 사람 정도는 안에 들어가 있을 수 있는 구조로 되어있는 배였던지라 8 사람 정도는 무난히 배에 탈 수 있었다.
  승선하자마자 알프레드 노인은 바로 선실로 들어가고, 곧바로 선교 쪽으로 올라갔다. 뒤따라 승선한 이들 중에서도 선실에 들어가는 이들이 있었지만, 나는 갑판의 선수 쪽에 머무르려 하였고, 카리나 역시 그런 나와 함께 갑판의 선수 쪽에 머무르려 하였다.
  "할아버지, 자신 있으세요?"
  "그럼! 자신 있지!!!" 이후, 내가 알프레드 노인에게 자신 있겠느냐고 외치자 알프레드 노인은 자신 있다고 호언하는 외침 소리를 내었다.
  "이래봬도 젊은 시절에는 배도 많이 타 봤고, 배 조종도 해 본 사람일세! 이 정도 어선 따위, 다루지 못할 이유는 없어! 게다가 이 배의 항로는 정해져 있고, 구름이 걷혀, 파도가 잔잔해졌으니, 여기서 배를 움직이는 것 정도는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게야!"
  그리고 노인은 "저 앞으로 가면 되지 않겠나?" 라고 나에게 외치더니, 가능한 빠른 속도로 해변까지 닿도록 하겠음을 알렸다.

  "할아버지께서 배를 조종하시는 모습을 본 적 있어?"
  "본 적은 없어." 카리나가 묻자, 내가 바로 답했다. 어린 시절, 알프레드 노인을 비롯한 이들과 가까이 있을 때에도 배를 타거나 하지는 못했고, 그가 선박의 조타수라든가, 선박 운행에 관한 일을 했다는 어떤 이야기조차 들어보지 않았기에 그의 항해 능력에 대해서는 쉽사리 믿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를 믿으려 했다, 배를 움직일 수 있을만한 이가 일행 중에는 없기도 했고, 그가 그렇게 확신하고 있다면, 그러할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여기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배를 조종하시겠다고 나서시는 것에는 이유가 있겠지, 내가 잘 모르기는 해도 말이야."
  그리고 그를 믿어보자고 청했고, 카리나는 그런 나의 청에 알겠다고 답했다. 그리고 선수 쪽으로 다가가 선수 너머를 한 동안 바라보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본 나 역시 그를 따라 나서서 그의 어깨 너머로 물결을 가로질러 배가 가는 모습을 보려 하였다.
  배는 잔잔해진 물결을 가로질러 지브로아 쪽으로 가고 있었다. 배는 순탄하게 바다를 가로질러 가고 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마냥 안심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를 비롯한 일행이 기계 병기군과 적대하고 있음을 기계 병기군도 이미 알고 있는 이상, 그들의 습격은 필연적으로 있을 것임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아르사나, 앞으로 계속 잠 못 잘 텐데, 조금이라도 눈 붙이고 있어."
  이후, 카리나가 나에게 말했다. 나는 줄곧 자지 못할 것 같은데, 자신이 상황을 관찰할 테니, 자고 있으라고 말한 것이었다. 그런 부탁에 이렇게 답했다.
  "아니, 됐어." 그 시점에서 이미 나는 수면은 더 이상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앞으로 있을 일에 밤을 지샐 각오를 한 것이었다. 이전에 해변에 앉아있으면서 조금 잠을 잔 적이 있어서 그것으로 만족하려 한 것도 있었다.
  "해변에서 잠깐 잔 적이 있었는데, 그것으로 만족하려고."
  이후, 카리나는 나에게 달리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더니, 이렇게 물었다.
  "기왕 이렇게 됐으니, 다 나오라 할까?" 머지 않아 배가 해안에 도달할 테고, 그 전에 적의 습격이 대대적으로 이어지면 어차피 곧 다 깨어날 수밖에 없을 테니, 카리나는 전부 일어나라고 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내 생각도 결국 머지 않아 전부 일어나야 할 것 같기는 했다.
  "어차피 전부 다 깨어날 수밖에 없다면, 미리 깨워서 모두 밖으로 나오게 하려고 하는 거지?"
  그러면서 그리 되묻자, 카리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그 대답을 듣고 나서, 나는 그의 제안에 일단은 나와 그가 모두 맡아보기로 하자고 말했다. 그리고 두 사람만으로 어림 없는 일이 생기면 그 때에 전부 불러내는 것으로 하자고 이어 말했다.
  "아마 우리가 부르지 않더라도 그들 모두 전부 알아서 나올 거야."
  대답을 하고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하늘은 아직 평온했고, 별들만이 보이고 있었다. 아직 때가 아니라는 듯이.

  그렇게 한참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무렵, 선실의 앞쪽 문이 열리면서 세니아가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카리나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가 세니아가 뒤에서 부르자 놀라면서 그를 향해 재빨리 돌아섰다. 꽤 놀랐던 모양으로 그 이전까지 저렇게 재빨리 뒤돌아선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갑자기 부르면 어떡해? 놀랐잖아. 그건 그렇고, 벌써 일어난 거야?"
  "응." 세니아가 답했다. 이전에 잠에서 깨어난 이후로 잠이 오지 않아 그냥 밖으로 나왔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세나, 나에티아나는 잘 자고 있는 것 같았지만 잔느 공주는 불안했는지 도저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고 했다.
  "할아버지께서 배를 잘 움직이시는 것 같아."
  "응, 경력자라고 하셨는데, 정말이었던 것 같네." 이후, 세니아가 배에 대해 말하자, 내가 답했다. 이후, 세니아는 배가 언제 즈음 해안에 도착할 것 같냐고 물었고, 그 물음에 가능한 빠른 속도로 남쪽 해안에 배가 머무르도록 할 것이니, 도착 시간은 그리 머지 않았을 것이라 답했다.

  "그런데, 정말 그 곳으로는 혼자 갈 거야?"
  세니아가 물었고, 그 물음에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그리고 이번 일은 나 혼자 나서서 해결해야 할 일 같다고 이어 말했다. 그러자 세니아는 카리나도 같이 가게 하지 그러냐고 말하고서, 가장 의지하는 친구 아니었냐고 이어 물었다.
  "카리나는 배에 남아서 다른 이들을 지켜달라고 해."
  그러자 내가 답했다. 그리고 세니아에게도 카리나를 보좌하면서 그의 도움이 되어달라고 당부하면서 그 일대로 기계 병기들이 계속 습격해 올 수 있음이 그 이유임을 밝혔다.
  "나는 어디까지나 앞장서는 역할 정도야. 앞장서서 적들이 문제가 되는 녀석들을 치워주고, 그러면서 어떤 녀석들인지 알려주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그렇게 알려주고 나면, 대장인 카리나에게 많은 것들을 알려줄게. 그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달라고."
  "그래?" 그러자 세니아가 말했다. 그 이후, 그는 갑판 안쪽의 왼편 가장자리에 기대어 서면서 나에게 이렇게 물으려 하였다.
  "아르사나, 무리의 대장 역할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어?"
  "......." 그 물음에는 바로 답이 나오지 않았다. 대장 역할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고는 해도, 대장 역할을 하고 싶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믿을 수 있는 이들을 이끌고 무리를 이끌고 싶다는 생각은 언제라도 해 본 적이 있었다.
  "관심 없었던 것은 아니야." 이후, 나는 그 물음에 그렇게 답했다. 그리고,
  "그런데, 대장이 되면 이런 문제가 있더라, 대장은 앞장서서 싸우면 안 되잖아. 싸우다가 대장이 쓰러지면 무리는 와해될 테니까."
  라고 이어 말했다. 그리고 대장은 무리를 지켜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어울린다고 생각해 왔음을 밝혔다. 그러자 세니아는 나에게, '그렇다면 나는 지켜주는 역할로 어울리지 않는 것 아닌가' 라고 물었고, 이 물음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건 그렇고, 그, I-V-X-V-I (이, 우, 익스, 우, 이) 있잖아, 그게 정말 괴물과 관련이 있을까?"
  "아직은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어."
  세니아는 그 후, 주제를 바꾸어, 사당에 있었다는 문구에 대한 것으로 화제를 바꾸었고, 그러면서 내게 물었으나, 나는 모르겠다고만 답했다. 아닌 것이 아니라, 나도 명확히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세니아는 곧바로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면, 네 생각을 말해 봐, 괴물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든지, 없을 것이 분명하다라든지, 그런 식으로 말야."
  그러자 세니아는 나에게 내 생각이 어떠한지에 대해 물어보려 하였다. 다른 이유는 아니고, 그 간판에 대해 알프레드 노인을 통해 이야기를 들었을 내 생각을 들어보고 싶었던 것 같았다. 그러자 내가 답했다.
  "괴물이 우리 짐작대로 마냥 적으로만 생각할 수는 없는 그런 존재라면, 분명 그 문구와 관련이 아주 없지는 않을 거야."
  괴물이 지금의 지브로아 일대에서 학살을 벌인 '괴물들' 에 의한 희생자들과 관련이 있는지 여부는 아직 알 수는 없었으나, '괴물들' 의 정체가 기계 병기들이 괴물의 적이 기계 병기 무리인 이상, 괴물이 그 어구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그것이 학살과 관련되어 있다는 어구를 알아들을 수 있다면, 분명 그것에 반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어구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그것이 또 학살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면, 분명 반응이 있기는 하겠지."
  이후, 나는 잔느 공주가 위험을 무릅쓰고 일행과 같이 가도록 한 것은 구 시대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이라는 것은 이미 내가 말한 바 있는데, 그를 통해 나를 비롯한 일행이 알 수 없을 영혼들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들이 누구이고,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밝히기도 했다.
  "처음에는 근처에 있으면 안 될 텐데, 그렇지?"
  이후, 세니아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당연하다는 의사를 드러내었다.

  "가만 보면, 아르사나는 혼자 나가서는 뭔가 혼자서만 알고 있는 비밀을 꽤 많이 품고 돌아오는 것 같아, 그렇지 않아?"
  그 이후, 세니아는 선수 쪽에 머무르고 있었을 카리나의 왼편 곁으로 다가간 후에 뭔가에 대한 물음을 건네려 하였다. 다름 아닌 나에 대한 물음으로 내가 이런저런 비밀을 많이 품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나 혼자서만 알려고 하는 것이 있는 것 같아 보인다고 묻기도 했다.
  "그렇기는 해." 그러자 카리나가 답했다. 그리고서 이어 이렇게 나에 대해 말했다.
  "그런데, 그 중 대부분은 저 애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더라, 그 애의 어린 시절이라든가, 우리가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잘 안 되는 그런 것들 말야. 세나가 그나마 조금 이해하고 있기는 한데....... 그래서 자기만의 것으로 감춰두려 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전에도 그런 비밀을 캐내려 하면서 세니아, 네가 결투까지 벌였잖아, 그래놓고 알아낸 것은 우리가 전혀 이해하지 못할 그만의 사정이었고."
  그리고서 카리나가 세니아에게 그 결투 때, 이겼냐고 묻자, 세니아는 이겼다고 답했다. 확실히 그 때에는 세니아가 자신의 실력으로 나를 압도했었다. 다만, 세니아에 의하면 당시의 나는 싸움에 큰 의욕이 없어 보였고, 그래서 이겼다고 하더라도, 내가 일부러 져 준 것 같아 보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무튼, 이번에는 어떡하려고?" 이어 세니아가 묻자, 카리나가 바로 그 물음에 답했다.
  "이번에는 아르사나가 자신이 봤던 것을 솔직하게 다 말해 버릴 것 같아, 그렇지 않더라도 괴물의 정체에 관한 것들은 다 말해 줄 것 같긴 해."
  그런 이야기를 들은 이상, 이번에는 카리나, 세니아에게 그들이 이해하든 말든, 그간 지켜봐 왔던 것들을 모두 말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개인사로 끝날 일도 아니고, 괴물과의 싸움에 관련된 것일 수도 있고, 나도 지켜본 것들을 마음 속에 감춰두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다 말해버리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적어도 아르사나가 우리에게 해가 될 만한 것을 감춰두거나 그러하지는 않았잖아, 너무 민감해 하지는 마."
  그리고 카리나가 미소를 띠며 비로소 세니아도 진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면서 나에 대해 말하기를, 자신도 나를 미워해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친구들에게 알려줘도 될 만한 이야기도 너무 감춰두는 것 같은데, 그것이 섭섭해서 그러할 뿐이라고 자신이 나에 대해 의심했던 것에 대해 언급했다.
  "그리고, 결투를 신청했을 때에는 섭섭함을 넘어, 너무 서운했었고. 그런 거야."
  이후, 세니아의 표정이 이전에 비해 다소 평온해졌다.

  그리고, 한 동안은 평온하게 시간이 지나가는 듯해 보였다. 하지만 그 평온함도 얼마 지나지 않았다.

  "잠깐, 아르사나, 저기 봐, 저 앞에 별빛 같은 것들이 다가오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
  카리나가 나 그리고 세니아에게 별빛 같은 것들이 먼 앞에서 다가오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고 말했고, 이에 누구라 할 것 없이 다들 다급해져서 선수 끄트머리 부근으로 다가갔다. 아니나 다를까, 눈앞으로 여러 붉은 별들이 갑자기 밤하늘 저편에서 모습을 드러내더니, 유난히 빠른 속도로-별들도 움직이기는 하나, 그렇게 빨리 움직이지 않는다- 배가 있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별빛 같은 것이 빠르게 움직인다면 대개는 비행체의 불빛이었다. 비행체의 불빛이 지금 당장에 무엇 때문에 나타날 것인지는 너무도 자명했다.
  "곧 싸움이 있을 거야, 준비해야 해!"
  카리나가 외치는 것에 이어, 세니아가 갑판의 선수 쪽으로 달려나가서 카리나의 곁에 있으려 하였다. 주로 기수 쪽에서 적들이 몰려올 것으로 여기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빛의 기운을 소환해 나의 왼편 어깨 부근에 오도록 한 후에 배의 갑판, 그 우측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배의 오른편 일대-주로 상공-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빛 무리가 어느새 배에 근접해 그 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역시나, 그들이었구나!' 예상대로, 그들은 기계 병기들로 일행을 습격하기 위해 몰려든 이들인 듯해 보였다. 먼저 다가온 이들은 전투기에 근접한 모습을 갖춘 이들로 나와 대략 비슷한 크기의 큰 날개를 갖춘 이들이었다. 정확히는 작은 동체의 좌우 뒷편에 큰 날개를 장착한 모습을 갖춘 전투기들로 동체의 좌우에 포신들을 장착하고 있으며 날개 아래에 미사일, 포신들을 장착하고 있어 해당 장치들을 통해서도 포격 및 미사일 발사를 할 수 있어 보이는 이들이었다.
  그들을 마주하자마자 곧바로 이들을 공격 목표로 정해 빛 줄기들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이후, 검은 비행체들의 몸체에 빛 줄기들이 닿아 폭발하니, 마치 하얗게 빛나는 별과 같이 빛을 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후, 내가 가하는 타격에 응사하기라도 하는 듯이 붉은 광선들이 배 주변을 지나치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보자마자 카리나가 다급히 선수의 앞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왼손을 앞으로 내밀고 그 왼손에서 구형 보호막을 펼치기 시작했다. 보호막으로 광선을 막아내 배가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아르사나! 세니아! 배는 내가 어떻게든 지켜볼 테니까, 너희들은 몰려오는 것들을 격추해!"
  잠시 고개를 돌리며 카리나가 외치는 것과 동시에 박쥐의 형상과 닮은 꼴을 보이는 전투기들이 배 주변을 오가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 키보다도 작아 보이는 그 검은 전투기들은 배의 우측에 위치하고 있던 내 근처에 이르자마자 기수의 눈을 번뜩이며 나를 향해 돌아서더니, 붉은 광선을 나를 향해 발사했고, 광선을 발사하려 하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나 역시 빛의 기운에서 수정 칼날을 발사하는 것으로 맞섰다. 나를 저격하려 하였을 광선이 칼날에 빈번히 막힌 후, 박쥐 모양의 전투기는 나를 지나치려 하였으나, 이후, 빛의 기운이 발사한 곡선을 그리는 빛 줄기들이 그 꼬리를 잡아내면서 결국 격추되엇다.
  그 무렵, 같은 유형의 전투기들이 계속 배 근처에 모습을 드러내었으나, 나도 그렇고, 세니아가 빛 줄기들을 발사하면서 모두 격추시킬 수 있었다.

  이후에도 전투기들은 계속해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주로 기수의 전방 쪽으로 다가오며 포격을 개시하고 있었으며, 주로 붉은 광선들을 발사하며, 배에 타격을 가하려 하였다. 그런 광선 공격을 카리나가 막아내고 있었고, 세니아가 그 뒤에서 그를 보좌하며, 전투기들을 격추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전투기들, 전투정들이 세니아가 발사하는 불꽃 줄기들, 불길에 격추당하거나 불길에 휩싸여 추락해 수면에 떨어지고 있었다.
  기계 병기들의 공세는 더욱 거세지고 있었으며, 더욱 다양한 유형의 전투기들이 나오고 있었다. 박쥐 모양의 전투기, 삼각 날개를 장착한 전투기들에 이어 마치 폭격기를 연상케하는 대형 비행기들이나 전투정들, 심지어는 소형 함선까지 나타나고 있어서 세니아 혼자서는 무리였고, 나 역시 세니아가 배를 향한 공격을 행하는 전투기 및 함선을 격추시키는 것을 지원해 줘야만 했다.
  그 와중에도 배의 좌우측에서도 기계 병기들이 계속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전투기 모양의 적들로 꼬리 날개 부분의 끝이 포신을 이루는 전투기들과 거기에 기수 부분이 칼날 형태로 이루어져 있어 돌격을 고려한 것으로 보였을 전투기들이 우선 나타나고, 이어서 인간형 병기들이 날개를 단 채로 나타나고 있었다. 앞서 나타난 전투기들의 광선 포격이 있은 이후, 인간형 병기들이 자신들의 광검으로 나를 비롯한 배에 있었던 이들을 공격하려 하였다.
  이들이 검을 들고 돌격해 오자마자 빛의 기운으로 검을 생성하고서, 그 칼날로 그들의 광검 공격을 막아내면서 이들을 칼날로 베려 하였다. 우선 앞서 온 세 개체들부터 검격 대결을 잠깐 펼치다가 이들이 빈 틈을 보이는 것을 노려, 그들의 몸을 칼날로 베어 폭파시키고, 뒤따라 오던 다섯 개체들은 검격 준비를 하기 전, 자세를 잡으려 할 때를 노려 허리, 흉부 등을 베어내면서 전부 파괴했다.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10 여 개체씩 인간형 병기들이 배의 좌우측으로 몰려와 각자의 총포에서 광선, 미사일들을 발사하며 위협을 가했으나, 결국 모두 격추시킬 수 있었다. 접근한 이들은 검으로 베어내고, 멀리 있는 이들은 빛 줄기, 화염탄으로 격추시키려 하니, 남은 이들은 그들 중에서 대략 다섯 정도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후에는 함선들의 공세가 더욱 거세지기 시작했다. 작은 함선들이 계속 모습을 드러냈고, 기어이 배의 측면 부근에서도 함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비록 배에서 멀리 떨어진 쪽이기는 했으나, 작은 배가 함체 하단의 해치들을 열어 포문을 보이고, 포문에서부터 광선을 발사하고 있었다.
  일행이 탄 배의 측면 쪽으로 광선이 발사되어 갑판 부근을 지나칠 때마다 엎드려서 피했다. 때로는 함선의 몸체에서 배의 측면 쪽으로 폭탄들이 발사되었고, 이 폭탄들은 공중에서 주변의 공기를 무참히 진동시킬 정도로 폭발하여 폭풍과 파편이 일행을 위협하기도 했다.
  이런 함선들의 포격과 폭탄, 미사일 발사에 의한 위협에 나를 비롯한 이들도 곧바로 맞섰다. 함선이 배의 우측에서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세니아가 포문을 타격해 폭파시키려 하였고, 또, 나에티아나와 내가 함교 쪽을 직접 타격해 함선들을 격침시키려 하였다. 한 번 배의 함교 쪽을 타격하기 시작하니, 작은 함선이라 그 정도로도 바로 폭파되고 있었다.
  한편, 전방 쪽에 있던 세니아는 카리나가 보호막으로 배를 지키고 있는 와중에 그의 곁에 머무르며 전방에서 몰려오며 포격을 가하는 작은 함선들, 전투정들을 타격해 파괴하려 하였다. 인간형 로봇이 선수 쪽으로 다가오기도 하였으나, 그 때마다 불의 기운을 뿜어내는 검의 칼날로 병기들을 베어내 폭파시키면서 그들의 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아니, 무슨 배 하나 잡겠다고 이렇게 잔뜩 끌어오나!?"
  그 무렵, 선교 쪽에서 알프레드 노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배에 연결된 확성기에서 나는 목소리로 그간 배의 조종에 집중하기 위해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다가 병기들이 계속 몰려오는 것도 모자라 배 크기만한 공중 함선들까지 나타나자 황당해하며 목소리를 낸 것 같았다.
  "이것들, 배가 목적이 아니에요!"
  그러자 세니아가 곧바로 외쳤다. 그리고 진짜 목적은 나일 것이라며 이렇게 이어 외쳤다.
  "배 따위 아무래도 괜찮아요, 아르사나가 목적이에요, 그 애 하나 잡겠다고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요! 겸사겸사 여기 있는 사람들하고 배까지 전부!"
  "그렇다면 아르사나가 배에서 뛰어내려도 소용 없다는 건가!?"
  "당연하죠!!!" 그러자 세니아가 바로 외쳤다. 그리고 여기 있는 사람들에 배까지도 모두 나의 동료일 테니, 전부 몰살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 말했다.
  "이전에 아르사나를 비롯한 애들이 고대도시에서 기계 병기들을 파괴한 것 때문에 나를 비롯한 이들에 모두 주목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아르사나 같은 이들을 놓아두면 자기들은 분명 파멸할 것이라 여기었을 거예요."
  "나아, 이거 참......!" 그 목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을 즈음, 비행 함선 한 척이 일행이 타고 있는 배가 있는 그 상공으로 다가오면서, 그와 함께 다수의 인간형 병기들이 비행하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정말이지 끝도 없네. 아르사나, 거기는 어때? 뭐 계속 몰려와!?"
  "왼편, 오른편에서는 별로 몰려오고 있지 않아, 아무래도 녀석들이 전방 쪽으로 집중한 것 같아."
  그러자 세니아 쪽으로 다가가면서 내가 말했다. 때마침 인간형 병기들 중 일부가 내 쪽으로 오고 있기에 검으로 이들을 처치하려 하였다. 돌격해 오는 이들의 허리를 베고 목을 쳐 가면서 하나씩 처치해 가려 하였다.
  그 이후에도 기수의 양 옆에 칼날을 달고 돌격해 오는 전투기들도 있어서 광선으로 이들을 격추시키기도 하였는데, 그 수가 꽤 많아 그 쪽에만 정신을 집중하고 있어야 했다. 게다가 이들 중에는 빛 줄기들을 뚫고 배에 탄 이들을 지나치려 하는 이들도 있어서 주의해야만 했다.
  배를 새들처럼 오가는 전투기들을 하나둘씩 격추시키는 것으로 해당 무리의 공격을 저지할 무렵, 전방 근처의 상공에 머무르고 있었던 공중 함선들이 포격을 하기 시작해, 그로 인해 붉은 빛 줄기들이 배의 선수 쪽으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카리나가 보호막으로 어떻게든 막아내려 했지만, 발사되는 광선의 수도 점차 늘어나고, 발사되는 광선의 강도도 강해져서 막아내면서 슬슬 한계가 찾아오고 있는 것 같았다.
  "카리나, 괜찮겠어?" 우선, 세니아가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물었고, 나 역시 그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하고 있어서 "이대로는 위험할 것 같지 않아?" 라고 물었다. 카리나는 괜찮다고 답을 하기는 했지만 상황은 그런 대답과는 전혀 달랐다. 빛으로 생성한 보호막은 일단 외견 상으로는 멀쩡해 보이기는 했으나, 빛이 불안정했고, 계속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것이 하나의 형체를 이룰 수 있었다면 몸체의 곳곳에 균열이 나 있었을 것이다.
  '이대로는 위험할 텐데......' 그러면서 내가 직접 보호막에 마력을 보충해 주기로 했다. 카리나의 부족한 마력을 보완해 주면 적어도 버틸 수는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대신, 공격에 나설 이가 당장에 한 명밖에 남지 않을 텐데, 그래서 우선 세니아에게 외쳤다.
  "지금 당장, 선실에 있는 애들 깨워! 이제 그 애들도 나서야 해!!!!"
  그리고 알프레드 노인에게도 선실에 있는 이들, 세나, 나에티아나 등이 가능한 빨리 나오게 해야 한다고 외쳤다. 다행히도 그 외침은 조타실에 있던 알프레드 노인에게 닿았고, 이후, 노인은 알겠다고 화답하고서 이런 목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외치게 했다.
  "아! 아!!! 들리는가!? 조타실에서 선실에 알린다!!! 선실에 있는 전투 가능 인원들은! 즉시 선실 밖으로 나가길 바란다!!! 마법 보호막에 한계가 다가와 보호막의 마력을 보충하기 위해 공격에 나선 이들 중 한 명이 나서게 되어 공격에 나설 이들이 부족해질 예정이다! 전투에 참가할 수 있는 이들은 가능한 모두 밖으로 나가라!!!"

"빨리 나가라!!!! 모두 빨리 나가라아아아아아아!!!!!!"

  하는 외침이 끝나기 무섭게 혹시나, 하는 생각에 선실 쪽으로 다가가서 다급히 문을 열고서-소리를 내 안에 있는 세나, 나에티아나가 놀라게 하기 위함이었다-, 안쪽으로 외쳤다.
  "세나! 내티! 뭐하고 있어, 너희들 나오라고 하는 거야, 빨리 나와!!!"
  그 외침이 끝나기 무섭게 세나 그리고 나에티아나가 다급히 밖으로 나가서 나를 따라 선수 쪽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카리나가 함선에서 발사되는 붉은 광선들을 빛의 보호막으로 치열하게 막아내는 광경을 지켜보던 세나가 그 광경에 대해 자신의 오른편 곁에 있던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누군가 보호막에 마력을 보충해주는 역할을 자처했다고 했는데....... 누가 하게 됐나요?"
  "내가." 그러자 내가 답했다. 그리고 누구라도 나서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고서, 그래서 내가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그리고 세나에게 환수들이 있지 않느냐고 말하고서, 그들이 많이 도와주었으면 좋겠다고 그에게 부탁하기도 했다.
  "아니오, 아르사나 씨, 제가 나서겠어요." 세나가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환수들 중에 누군가를 지켜줄 수 있는 이가 있다고 했으며, 그가 도와주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카리나에게 다가가서 자신이 그것에 관한 부탁을 해 보겠음을 밝히고서 그에게 직접 뛰어갔다.
  "카리나 씨, 잠시 소강되면 교체하시고 쉬세요, 이후로는 제가 나설게요."
  이후, 세나는 카리나에게 당부의 말을 전했다. 그 이후, 그의 좌측 곁에 이르고서,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 각각의 손에서 빛이 발생하도록 하더니, 각각의 빛에서 마력이 분출되어 무언가가 그 앞에서 튀어나도록 하였다. 왼손에서는 붉은 빛이, 그리고 오른손에서 푸른 빛이 생성되어 전방 쪽으로 분출되고 이어서 왼팔 앞에 불새가 생성되고, 배의 앞쪽 수면에서 거대한 푸른 뱀이 그 모습을 드러내려 하였다.

  머리에 용의 그것과 같은 비늘이 생성된 거대한 푸른 뱀이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미는 동안, 그리고 양 팔 간격 정도로 큰 불새가 날개를 펼치면서 온 몸을 격렬한 붉은 화염으로 두르면서 함선들이 위치한 전방 쪽을 주시하며 날아갈 준비를 하려 하였다.
  날갯짓을 하면서 광선의 열기를 흡수하며, 함선 쪽으로 날아간 불새는 이윽고, 입에서부터 화염탄을 잇달아 분출하고 각 날개에서 깃털 같은 형상의 화염탄들을 흩뿌리며 함선 그리고 함선을 호위하는 듯이 따르는 전투정, 전투기들에 타격을 가하려 하고 있었다. 화염탄들이 짧은 불줄기처럼 발사되어 전투정과 전투기들을 궤뚫어 폭파시키고, 함선들에 격돌해 폭발하며 함선들의 선체에 피해를 주고 있었다.
  그들에 질세라 나 역시 하얀 광선들을 발사하며, 전투정, 전투기 대열을 빠져나와 함선으로 돌격해 가는 인간형 병기들의 흉부를 궤뚫어 폭파시키고, 검으로 이들의 목을 비롯한 신체 부위를 베어내고, 흉부를 찌르면서 파괴해 가려 하였다.

  이 무렵, 수면 위의 바다뱀도 불새의 행동에 호응하려 하는 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함선으로 돌격해 들어오는 인간형 병기를 입으로 뿔에서 발사되는 푸른 광선으로 궤뚫고, 입으로 또 다른 인간형 병기들을 물어뜯고 있었다. 턱의 힘이 얼마나 강했는지, 인간형 병기들은 물어뜯기자마자 뜯긴 부분은 바스라지고, 남은 부분은 분해되어 수면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격전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배는 급속히 바다 건너편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나와 세니아가 자신들의 힘으로 하얀 불꽃, 붉은 불꽃을 발사하고, 세나가 소환한 환수들이 계속해서 공격을 가하는 것으로 병기들이 하나둘씩 파괴되고, 함선들 역시 갑판에 구멍이 뚫리고 동력원이 자리잡은 심장부가 관통당해 격파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함선이 격파될 때마다 배가 위치한 상공 일대에 열기를 품은 폭풍이 터지고 굉음이 울려퍼져 배의 갑판을 뒤흔드니, 갑판이 흔들릴 때마다 갑판 위에 있었던 모두가 그 영향을 받았다. 격렬히 배가 흔들릴 때도 있었으며, 그 때마다 나와 세니아는 배의 난간에 의지했고, 세나는 갑판에 칼을 꽂아 그것에 의지했었다.
  "모두 조심해라, 배가 격렬히 흔들릴 때가 있다!!!"
  배가 흔들릴 때마다 조타실에 있던 알프레드 노인이 외치고 있었다. 그 혼란 속에서도 카리나는 흔들림 없이 선수 앞에서 꿋꿋이 보호막을 펼치며 서 있었다. 실은 갑판의 흔들림을 인지하고 있기는 했었겠지만, 그것을 어떻게든 견디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배가 움직이는 것은 병기들의 격파가 아닌 해안의 도달이 그 목적이었기에, 격파하지 못한 병기들은 그냥 지나쳐 가기로 했다. 하지만 지나쳐 간 이들이 무슨 짓을 벌일지 알 수 없었기에 세나가 물의 환수를 뒤에 두어서 후방에 남겨두고 간 병기들을 처리하도록 지시를 내리고, 자신은 불의 환수를 곁에 두고 앞서 다가오는 병기들을 격파하는 것에 집중하려 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병기들이 더 이상 다가오지 않고, 공격도 더 이루어지지 않는 시점이 다가왔다. 함선들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각각의 함체에서는 한 번의 포격도 행해지지 않고 있었다. 그 때가 되자 세나가 다급히 카리나를 향해 다가갔다.
  "카리나 씨, 이제 그만 물러나 쉬세요. 보호막을 더 펼치실 필요는 없어요."
  "그래?" 그러자 카리나가 잠시 보호막을 거두고 세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고, 이에 세나는 그렇다고 답한 이후에 카리나를 대신해서 자신과 자신의 환수가 배를 지키는 역할을 대신해 주겠다고 말했다.
  "지금은 소강 상태일 거야. 지금이면 쉬어도 되겠지. 쉬고 있다가 다시 나설 테니까, 너는 다른 애들이 나서서 움직이지 않는 저들을 부숴버리라고 해."
  이후, 카리나는 선수 부분에 자리잡고 앉아서 자신은 멀리 있는 이들에 대해서는 공격 역할을 잘 하지 못하고, 세나의 환수들 중에는 그 역할을 잘 해내는 이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공격 역할을 맡기면 될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도 말했다.
  "일단은 쉬게 하고, 공격이 개시되면 그 때 역할을 교체하든가 해."
  이후, 공격을 더 이어가지 못하는 함선들을 목표 삼아 세나와 나 그리고 세니아에 나에티아나까지 모두 나서서 있는 대로 공격을 가하기로 하고, 각자가 발사할 수 있는 수단을 가능한 많이 활용해 함선들에 타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세니아와 나에티아나는 전방과 우측, 그리고 나와 세나 그리고 불의 환수는 우측의 함선과 병기들을 집중 타격해 폭파시키기로 한 것이다. 그 와중에 카리나가 방패에서 발사하는 빛의 화살들이 우측 상공의 병기들과 함선의 함체에 닿기도 했다.
  당시에 카리나도 그렇지만, 계속 광선 등을 발사하고 있던 나와 세니아 등도 지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래서 한 번에 가능한 많이 격파해 적의 수를 줄이는 것은 물론, 가능한 빨리 해안에 근접하도록 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함선을 가능한 빨리 격파하기 위해서는 급소를 쳐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함교 쪽을 공격하면 보다 빨리 굉침된다는 것을 모두 알아차리고 있었기에, 누가 말할 것 없이 함선의 함교 쪽을 노리기 시작했다.
  수없이 많은 광선, 광탄, 화염탄, 금색, 은색을 띠는 빛의 화살들이 함선의 함교 쪽에 타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함선들은 대개 작은 것들이었기에 몇 번의 집중 타격으로도 쉽게 격파되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함선들이 격파되고 있을 무렵, 알프레드 노인은 조타실에서 통신을 보내는 듯한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지원 요청이었을 것이다. 인근의 경비대에게 지원 공격을 요청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함선들을 비롯한 기계 병기 전력을 빠르게 격멸시키려 하였던 것 같다.

  당시에 상공에 남아있던 함선의 수는 여섯으로 결국 이들 모두 하나둘씩 격파당해 폭풍과 열기 그리고 잔해들을 흩뿌리며 사라졌으며, 남은 병기들은 바다 건너 해안 쪽으로 달아나듯 날아가며 사라져 갔다. 그렇게 그 무리의 공세는 일단락되었고, 일행은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모두 수고 많았다."
  배가 해안에 거의 도달하고, 병기들이 물러섰을 무렵, 배의 선교 쪽에서 알프레드 노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어서 노인은 아직 그들의 공세는 덜 끝난 것 같다고 말하고서, 아직은 방심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당부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후, 카리나는 세나의 권유대로 뒤쪽으로 물러나 갑판의 왼편에서 난간에 기대어 앉은 세니아의 바로 옆으로 앉아 쉬기 시작했고, 세나가 그 대신 기수 쪽으로 올라갔다. 나는 나에티아나와 함께 갑판의 오른편에 앉아 있었다.
  "맞아, 분명 녀석들은 더 몰려올 것 같기는 해, 아직 저들은 많은 수를 갖고 있어, 여차하면 기함이라 할만한 함선도 가져올 거야."
  "기함까지 온다고? 이 조그마한 배 하나 잡자고!?"
  내가 정말로 계속 적들이 이어 나타날 것에, 기함까지 올 수도 있다고 하자, 건너편에 앉은 카리나가 놀라면서 물었다.
  "그러할 수 있어." 카리나가 경악하며 건네는 물음에 내가 바로 그렇게 답했다. 그리고 기계 무리는 나를 비롯한 일행을 가만히 놓아두면 자신들 자체를 궤멸시킬 수 있는 집단으로 여기고 있을 수 있는 만큼, 기함까지 끌고 와, 총 공격을 감행하는 한이 있더라도 없애버려야 할 존재로 간주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수 있다고 말했다.
  "할아버지께서 지원 요청을 하셨는데, 경비대가 그 요청을 통해 온다면 그들의 행동을 저지하는 데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몰라."
  "에오르 자매 분하고 리 셀린 등의 엘베 족 분들께서 다른 방향에서 나서실 텐데, 그 분들의 행동도 영향을 끼칠 수 있지 않을까요?"
  그 무렵, 나에티아나가 자신의 곁에 있던 나를 비롯해 주변에 있던 카리나, 세니아에게 그렇게 물음을 건네려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대형 포신을 가진 글라이더를 운용하고 있으니, 기계 무리에게 더욱 위협적일 수도 있을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그러하겠지만, 자신들의 근거지에 더욱 근접하는 우리가 더욱 위협적이라 여기고 있을 수도 있겠지."
  이런 나에티아나의 물음에 내가 답했고, 카리나, 세니아도 그런 나의 추측에 동의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 이후, 건너편의 카리나, 세니아가 앉은 그 너머를 보기 시작했다. 뒤쪽에 있던 세나의 환수들 중 물의 환수가 배의 왼편 근처까지 따라오고 있었다. 불의 환수는 보이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세나가 자신의 역할이 바뀌었음을 감안해 다른 이-아마 기사 형태의 환수-가 그를 대신해 나오도록 하려고 했을 것이다.
  "세나의 표정이 이전에 비해 진지해졌어."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세니아가 카리나에게 세나에 대해 언급했고, 이에 카리나도 "그런 것 같다." 라고 말하며, 세니아의 말에 동의하는 모습을 보이니, 나 역시 정말 그러한가하는 의문에 고개를 돌려 세나의 모습을 보려 하였다.
  확실히, 그 무렵의 그는 이전에 비해 진지해져 있었다. 물론 전투를 할 때에는 어느 정도 진지해지는 일면이 있고, 진지한 태도로 임하겠다는 각오가 표정에 다 드러나는 유형의 인물이기는 했지만 그 때에 비해 그런 느낌이 더욱 강했던 것 같다. 아무래도 누군가와 함께 전투를 하고 누군가-주로 카리나였을 것이다-와 함께 앞장서서 사람들을 지켜왔던 이전 때와 달리, 혼자 앞장서서 다른 이들을 지키는 역할을 맡았기에, 그것에 대한 긴장감이 더해졌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다른 이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나에게 뭐라 말하거나 말거나, 세나는 전방 쪽으로만 시선을 향하고 있었다. 뭐라 말을 걸어보고 싶기도 했지만, 선뜻 말이 나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후, 조금 더 시간이 지날 무렵, 해안 건너편 멀리서부터 한 무리의 전투기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10 기씩 한 대열을 이루며, 몰려오는 전투기들로 새 혹은 드래곤의 형상을 한 전투기들이 날개의 꺾이는 부분마다 그 하단에 하나씩 포신을 장착한 모습을 보이며 날아오고 있었던 것. 그 모습을 보자마자 세나는 바로 환수를 소환하기 시작했고, 이어서 그의 바로 앞쪽 상공에서 갑주 형태의 환수가 오른손에 창, 왼손에 커다란 방패를 든 채,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후, 전투기들의 붉은 광선 공격을 환수가 격렬한 하얀 빛을 발하는 방패로 막아내고, 창끝에서 하얀 광선을 한 발씩 발사하며, 전투기들을 격추시키려 하였다. 이들의 광선 공격은 맹렬했지만, 광선의 위력 자체는 약해서 갑주 환수의 빛나는 방패를 뚫거나 하지 못했으며, 환수의 창끝에서 발사되는 광선에 궤뚫릴 때마다 폭파되었다.
  전투기들은 측면에서도 나타났고, 그래서 나에티아나와 내가 일어나서 이들을 격추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금빛 화살과 하얀 광선이 이들을 궤뚫어 파괴했다. 이들의 광선이 배 부근을 지나치기는 했지만, 배에 직접 피해를 가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 이후로도 전투기들이 다수 출몰하고 함선도 나타났지만 모두 전방 쪽에서 나타났기에 세나 그리고 그의 환수에 의해 모두 어렵지 않게 격파되고 격침되어 사라지는 모습을 보였다. 측면에서 나타난 인간형 병기들도 나에티아나와 내 선에서 모두 정리되었다. 간혹 갑판 안쪽으로 들어오는 인간형 병기들도 있었으나, 검격으로 맞서서 베어내고 폭파시켰다. 자폭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 때마다 내가 신호를 보내고, 나에티아나가 화살을 쏘아 폭파시켜 그 폭발로 밀어내는 것으로 배에서 자폭하는 행위를 저지해 갔다.

  기함까지 나타날 수도 있다는 나의 전망에 일행 모두 긴장하며 사태를 주시하고 있었지만 배가 해안에 근접할 때까지 함선은 나타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그간의 전투로 인해 큰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다행히도 배는 무사히 해안에 도달할 수 있었다.



지브로아 해안.

  하나야스 (Khanayas, Chanayas) 의 북동쪽 인근에 위치한 해안 지역인 가브릴리아 (Gabrilia) 의 남단에 위치한 항구 마을로 그 서쪽 교외에는 산이 하나 있으며, 그 산길은 '애도의 길 (Via Elugentis)' 이라 칭해지며, 그 길은 남서쪽 끝에 자리잡은 절벽인 '기억의 절벽 (Rupes Memoriae)' 으로 이어진다. 그 절벽은 다리를 통해 '기억의 사당 (Sedes Memoriae)' 이라 칭해지는 곳과 이어진다. 기억의 사당에는 라테나 어 문구들이 새겨진 비석이 하나 놓여 있지만, 그 비석에 새겨진 문구에 대해서는 자주 괴물이 출몰했었다는 내용이라는 이야기를 알프레드 노인으로부터 들은 것 이외에는 아는 것이 없는 상태였다.
  기억의 사당을 아직 방문하지는 않았고, 근래에 지브로아 일대를 방문하는 것도 정말 처음이었지만, 사당에 관해서는 여러 차례 이야기를 들었기에, 그 시점에서도 이미 사당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다. 그런 나에게 중요한 일은 그래서 사당에 무엇이 있고, 그 괴물을, 인류의 적이었을 기계 무리와 적대하고 있을 괴물을 나의 편으로 돌아서게 하는 일일 것이었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말이 있다. 그 괴물이 아군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해안에 당도할 무렵, 기계 무리의 습격은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다. 배가 해안에 도달하면서 배는 거의 포기한 모양으로, 다른 방향에서 지브로아 쪽으로 접근해 오고 있을 이들-에오르 자매와 리 셀린의 글라이더들-이라도 저지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지 않았나 싶었다.

  "해안에 도달하면 너 혼자 산길을 가겠다고 했었지?"
  배가 해안에 도달하고, 그간 선실 내에 있던 잔느 공주가 선실 밖으로 나올 무렵, 선수 쪽에 서 있던 나에게 카리나가 물었다. 이 물음에 나는 그렇다고 답했고, 신호를 보내면 그 때에 내가 있을만한 곳으로 와 달라 당부하기도 했었다.
  "너라면 딱히 걱정은 안 되기는 하는데...... 정말 너 혼자 가야 하겠어?"
  이후, 카리나는 선수의 끝에 이르러 해안을 바라보던 나에게 물었다. 이미 혹시 모를 습격에 다른 일행을 이끌고, 배와 일행을 지켜달라 부탁한 바 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마지막으로 나의 결심을 다시 확인해 보고 싶어서 물었을 것이다.
  그 물음에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그리고 카리나에게 그가 원한다면 그에게는 따로 신호를 보내겠음을 알리기도 했다.
  "여기서 사당까지는 먼 길이 아닐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빨리 신호를 보내야 해, 알았지?"
  "알았어, 응답이나 잘 해." 이후, 카리나는 나에게 가능한 빨리 신호를 보내달라 부탁을 했고, 이에 나는 조용히 미소를 띠며, 알았다고 화답했다. 이후, 배의 선수 부분이 해안의 땅 위로 올라오자, 선수를 통해 해안을 향해 뛰어내렸고, 이후, 해안의 돌바닥 위에 착지했다.
  "안 아프냐!?" 그 때, 조종을 마치고 선실 밖으로 나오던 알프레드 노인에게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 목소리에 나는 괜찮다고 답했다. 그 이후, 나는 가능한 빨리 일행을 불러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 달라고 당부의 말을 전했다. 그 때, 내 근처에 보이던 배에서부터 알프레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리나가 나한테 아르사나가 때가 되면 신호를 보내겠다고 했었다. 가능한 빨리 신호를 보내라, 빨리 따라와 줄 테니깐 말이다. 뭔 일이 있어도 무사히 있어야 한다, 그것만큼은 명심해라, 알겠나?"

  그리하여 나는 배에서 멀어져, 산의 절벽을 타고 산길 위로 오르려 하였다. 원래는 마을 부근까지 우회한 이후에 마을의 서쪽 경계 부근에 있는 길을 따라가야 하겠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애초에 전투에서 길을 가는 데에는 편한 길, 편치 않은 길을 마다하지 않는 법이다.
  배에서 멀어지면서 배의 모습을 잠시 고개를 돌리며 바라보았다. 배 자체는 보호막의 영향을 받기도 해서 대체로 온전하기는 했지만, 수차례 입은 타격의 여파가 크기는 컸는지, 외형은 온전한 데가 없었다. 갑판 곳곳에 손상되고 긁히고 파손된 흔적이 역력했다. 심각한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니었다지만, 조금만 더 심했어도 배의 상태가 상당히 위험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여러모로 아찔했다.



  해안의 바위는 그렇게 험난하지는 않았다. 바위를 파도가 깎아 생성한 지형이 평탄할 리는 없었겠지만, 걸어서 갈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다만, 지형이 늘 이어지거나 하지는 않았고, 그 때마다 바닷물을 건너뛰어 건너편의 지형으로 가야만 했다. 바위들이 마치 징검다리처럼 배치된 부분도 있어서 조심해서 길을 가야만 했었다.
  바위 더미 위를 지나다니며, 주변 일대의 지형과 상공을 유심히 살펴보고는 했다, 아닌 것이 아니라, 괴물의 근거지에 가까운 만큼, 괴물을 둘러싸는 기계 병기들 중 주변 일대를 순찰하는 이들과 마주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개는 소형 병기들이겠지만, 인간형 병기들이 돌아다닐 수도 있는 만큼, 그것에도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모험을 하면서, 용병 일을 하면서, 괴물 사냥을 하면서 오만 지형들을 돌아다니기는 했었으나, 바닷물에 직접 닿는 바위들을 오가는 것은 언제나 긴장을 불러오고는 한다. 바닷물 때문에 혹은 바위에 자라난 이끼, 수초 떄문에 자칫하면 미끄러져 위험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암만 그래도 바위 투성이 지형에 넘어지는 것은 매우 위험했던 만큼, 주의가 필요했다. 빨리 가려면 어쩔 수 없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다. 하지만 한 번 넘어져서 크게 다친 이후로는 그런 생각을 해 보지도 않았다. 아마 그렇게 크게 다친 경험이 있다면 그런 철없는 생각은 하지도 않을 것이다.
  바위 투성이 지형을 오가다가 잠깐 쉬려고 바위에 걸터 앉았지만, 앞서 서술한 이유로 인해 마냥 안심할 수는 없을 노릇이었고, 그래서 잠깐 숨 돌린 이후에는 바로 일어서려 하였다. 더 나아가, 상공에서는 정말로 전투기들이 오가기 시작해서 오래 머무를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이후,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바위 위를 걷기 시작하자마자 소형 병기들이 나에게 접근해 오기 시작했다. 본체의 양 옆에 날개가 달려 있고, 본체의 앞 부분에 동심원 상의 붉은 무늬가 그려진 장치가 장착된 병기로 해당 장치에서 광선이나 광탄이 발사되어 공격을 하는 장치인 듯해 보였다. 그 검은 그림자가 보이자마자 다급히 빛의 기운을 꺼냈고, 그 기운을 통해 광선을 발사해서 격추, 폭파시켰다. 그 검은 무리들의 그 외형을 알아본 것은 그 잔해를 발견하고난 이후였다.
  처음에는 작은 개체들이 보이고 있었지만 그 때부터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이후로 더욱 큰 개체들이 계속 모습을 드러내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되어 절벽을 따라 오르막길을 찾아가던 나에게 한 무리의 검은 비행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모두 인간형 병기들로 검은 갑주 형태의 모습을 갖추고 있으며, 붉게 빛나는 어깨의 원통형 포구 그리고 검은 칼날 모양의 팔과 다리가 외견 상의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 팔과 다리는 검격용으로 주요 무장은 어깨에 장착되어 있었을 그런 개체들이었다.
  이들이 접근해 오자마자 폭발음과 함께 어깨에서 다수의 붉은 칼날 모양 광탄들이 확산되는 듯이 발사되었다. '산탄포' 라 칭해지는 총포 류에서 탄이 발사되는 방식으로 격발되자마자 탄들이 재빠르게 확산되기에 바로 대응할 필요가 있었고, 소리를 듣자마자 보호막을 펼쳐, 광탄들을 막아내려 하였다. 이후, 깨어진 보호막을 내버리고 포격을 격발시킨 병기들을 향해 다가가 앞장섰던 병기를 향해 오른손에 칼날을 생성했다. 제대로 된 검을 쥘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워낙 다급했기에 손날을 세우고 그 손에서부터 칼날을 생성하며 병기를 향해 뛰어올랐다.
  이후, 나는 공중에 약간 떠 있던 그 병기의 몸체를 왼쪽 어깨에서부터 오른쪽 허리 부분까지 대각선 상으로 베어냈고, 이후, 다시 뛰어올라, 뒤따라 오던 병기의 몸체 역시 이전에 베어낸 병기의 경우와 반대 방향으로 빛의 칼날로 베어냈다. 마지막으로 도주하며 다시 총포 발사를 준비하던 병기는 광선을 발사해 어깨 부분을 관통했다. 이후, 칼날에 베인 병기들이 있던 뒤쪽에서 두 차례 폭발이 일어나고, 이어서 어깨 부분의 폭발에 의한 충격으로 마지막 병기까지 팔과 다리 등이 분해되는 모습을 보였다.
  두 병기들이 폭파되고 나서도, 인간형 병기들이 계속 나타났기에 손날에서 생성된 빛의 칼날을 해제하지 않고, 병기들과 맞서려 하였다. 세 번째로 나타난 인간형 병기의 목을 베어내고, 그 뒤를 따르던 세 병기들마저 칼날로 베어 폭파시키고 나서야, 병기들이 더 나타나지 않음을 확인하고 칼날을 해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끝은 아니어서, 그 잔해들을 지나칠 무렵, 새 모양의 소형 전투기들이 나의 왼편 상공에서 몰려오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보자마자 빛의 기운을 통해 광탄들을 발사해 이들을 전부 격추시켰다. 그 이후로도 한 번씩 인간형 병기들이나 전투기들이 몰려왔고, 그 때마다 칼날로 베어내거나, 광선으로 쏘아 맞히는 것으로써 이들을 격추시키며, 길을 지나쳤다.


  그렇게 병기들을 처치하면서 한 동안 절벽 아래를 가다 보니, 오르막길이 먼 저편 너머로 보이는 때가 왔다.
  '저 오르막길로 가면 되겠다.' 그 오르막길을 발견하자마자 그 길이 산길로 이어지고 있음을 바로 알아차렸고, 그래서 주저 않고 곧바로 그 오르막길을 향해 가려 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길을 가려 하다가도, 산길을 오르기 전에 고개를 돌려 바위 해변을 둘러보려 하다가 그 풍경에 시선이 끌려 잠시 그 풍경을 바라보며 앉아있기로 했다. 그간 쉼 없이 전투가 이어지면서 그로 인해 신경이 잠시 날카로워져서 숨을 돌릴 필요가 있기도 했기에, 오르막길 근처에 큰 바위를 찾아 앉기로 한 것이다.
  오르막길을 찾아오기 전에 이미 그 주변 일대에 큰 바위 몇 개가 지면에 박혀 있는 모습을 알아본 바 있었고, 쉬고 싶을 때,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 되겠다싶은 생각을 한 적이 있어, 오르막길의 왼편 근처에 있는 바위를 찾아 그 바위에 앉아있으려 했다, 바닷가에 보다 가까운 곳이었기에 그 바위에 앉아있으려 한 것. 바위에 이끼가 없는 부분을 찾아 그 부분에 앉았다. 물기가 약간 있기는 했지만 크게 신경쓰려 하지 않았다.

  '도중에 또 나타나는 것은 아니겠지?' 한 동안 병기들이 나타나지 않는 와중에 잠시 쉬기 위해 앉아 있으면서도 행여 병기들이 또 나타날까봐 쉬고 있으면서도 완전히 긴장을 놓지는 못하고 있었다.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에 휴식을 마음놓고 할 수 없음을 당연시하기는 했었지만, 그렇게 익숙해졌다고 하더라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이런 경험이 한 번 두 번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자연스러워 질 수는 없었다.
  그렇게 긴장하면서 앉아있을 무렵, 오르막길 건너편의 돌바닥에서 한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드레스 차림을 한 사람의 그림자였던지라 병기가 아니었음은 분명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은 생각에 그림자가 나타나는 방향을 유심히 살펴보려 하였다. 그러는 동안 그림자는 나를 발견했는지, 내가 있는 쪽으로 계속 다가가려 하였고, 그래서 더욱 긴장하며, 앞일을 대비하려 하였다. 오른손에 빛의 기운을 생성하며 검을 소환할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잠시 후, 그림자가 나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면서 그 형체가 더욱 분명히 드러나려 하였다. 드레스 차림을 하고, 오른손에 검을 든 이로 머리카락을 양갈래로 길게 묶어 내리고, 남은 머리카락을 다리 높이까지 길게 늘어뜨린 이였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나는 그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차렸고, 그러면서 그간 놓지 못하고 있던 긴장을 비로소 놓을 수 있었다.
  '그 분이실 거야. 그 분이 곁에 계신다면 잠깐 마음을 놓을 수는 있겠지.'
  그리고 잠시 후, 그림자는 바로 나의 앞까지 다가와 본래의 모습을 드러냈다. 나와 비슷한 감색의 긴 머리카락을 가진 여성이었다. 보랏빛 드레스 차림을 한 이로 (정확히는 앞쪽이 트여있는 형태로 드레스 형태를 갖춘 레오타드에 가까운 복장이었다. 그러하다보니, 보라색 구두는 물론, 다리를 감싸는 보랏빛의 반투명한 천까지 드러나 있었다) 오른손에 파랗게 빛을 발하는 감빛의 날을 가진 검을 들고 있었다. 그에게는 다른 검들도 있었지만, 그의 곁에는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아마 다른 곳에 숨겨두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리사 선생님이시구나.' 드러나는 그림자를 보며 이미 알아차리고 있다가, 그가 가까이 다가오는 모습을 보며 다시 한 번 내 짐작이 맞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리사 데 마나 (Lisa de Mana) 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 이명은 리즈 드 마나 (Lise de Mana) 혹은 이자벨 드 마나 (Isabelle de Mana) 라 했다. 내가 어렸을 적, 샤하르의 어떤 학교에 다닐 무렵에 그 학교에 교사로 잠시 재직하셨던 분으로, 내가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 교직을 그만두셨다고 한다. 어머니와도 인연이 있으셨던 분으로 한 때에는 어머니와 함께 용병 생활을 한 적도 있으셨던 분. 어렸을 적에 할머니 덕에 짧게 유지하던 머리카락을 할머니께서 고향으로 가신 후에 더 유지하기 힘들게 되자, 나는 머리카락을 길게 유지하는 편이 낫다고 하시며, 머리카락을 기르게 한 계기를 마련한 분이시기도 했다.
  과거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다. 다만, 과거에 어떤 나라에 여기사로 활동했던 전적이 있었다는 것 정도만 알려졌을 뿐. 하지만 말을 하지는 않았어도, 너무도 많은 과거를 가슴에 품고 계신 것 같았고, 그래서 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뭇사람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수없이 많은 사연들을 품으신 것은 아닌가, 하는 추측을 그에 대해 이어갔던 적도 있었다.
  당시에 그 분께서는 그 일대에서 기계 병기 집단에 속한 병기들과 홀로 맞서는 역할을 맡고 계셨다고 했다. 오랜 경험과 특유의 능력 덕에 여러 기계 병기들과 싸우면서도 결코 밀리지 않으셨다지만 혼자서 한 무리와 정면 대결을 펼치시다보니, 여러모로 버거워하시는 일면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고, 그래서 도움이라도 드릴까, 하는 생각도 해 봤지만, 결국 원래 계획한 바대로 나는 일행과 함께 배를 타고, 나 혼자 먼저 해안에 나서는 역할을 맡고 있다가, 이렇게 리사 선생님과 만나게 된 것이었다.

  "아르사나, 오랜만이네." 나를 보자마자 나를 내려다보시며 리사 선생님께서 말을 걸었다.
  "예, 오랜만이에요." 내가 답했다. 이후, 선생님께서는 내가 앉았던 바로 그 오른쪽 부분에 앉으시려 하셨다. 바위의 표면을 거기까지는 살펴보지는 않았다만, 그 부분을 다시 보니, 이끼나 물기는 많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렇게 자리를 잡으신 후, 리사 선생님께서 내게 말을 거셨다.
  "다른 이들은 아직 여기로 오지 않았나 봐?"
  "먼저 나 혼자 오기로 했어요." 내가 답했다.
  "다른 분들도 같이 오게 하지 그랬니?" 그러자 리사 선생님께서 물으셨다. 동료들과 같이 가면 도움 받을 일이 생길 수도 있고, 그간 보아왔던 것에 대해 가슴 속에 품고 있을 필요 없이 터놓고 이야기할 기회도 있을 텐데, 왜 굳이 혼자 가려 했느냐는 것이었다.
  "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그 애들이 보게 될 것 같아서요."
  그러자 내가 답했다. 그러할 것 같은 조짐은 없기는 했지만, 예감은 있었다, 나 아니면 다른 이들은 이해하지 못할 광경들이 보이게 될 것 같다는 예감. 무엇보다도 그런 예감이 들어 혼자 앞장서서 산길을 따라 가기로 한 것이었다.
  "무슨 광경을 볼 것 같아서 그러한지는 알 것 같아."
  그러자 리사 선생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하지만 네가 이해하지 못할 광경 같다고 말하는 것은 네 생각 뿐이지 않겠니? 그런 광경을 보게 되더라도 그 분들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너도 그 분들의 과거에 대해 생소하기는 해도 잘 이해하려 했던 것처럼."
  그리고 이어서 목소리를 내시어,
  "너에 관한 모든 것을 너의 것으로 품으려고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마음 속에 품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을 너는 가슴 속이 조금 답답해질 따름 정도로 여기고 있겠지만, 그것들을 너무 오래 품고만 있으면, 결국 그것이 네 마음을 병들게 할 거야. 때로는 주변 사람들에게, 그리고 세상 밖으로 꺼낼 필요가 있어."
  이렇게 말씀하셨다.

  "리사 선생님께서도 마음 속에 품고 계시지만 꺼내지 않으시는 것들이 많으시잖아요."
  내가 여쭈었다. 그러자 리사 선생님께서는 조용히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실 따름이었다. 그리고 조용히 말씀하시기를, 그것 때문에 자신도 마음이 병들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무도 많은 것들을 마음 속에 품고 그것들을 꺼낼 시도조차 하지 않았어. 그래서 마음에 병이 들고, 그로 인해 비뚤어지고 말았지."
  그리고 조용히 미소를 띠는 모습을 보이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 "그래서 나처럼 되지는 말라는 거야." 리사 선생님께서는 여기사 시절에 많은 안 좋은 일들이 많이 있었는데. 동료에게도 그것들을 풀지 않고, 마음 속에 품어두고 있기만 하다가 그것이 마음을 괴롭게 만들어 그로 인해 마음에 병이 들었다는 것이었다.
  "너는 적어도, 마음에 품은 것들로 인해 병난 사람이 되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
  이어서 리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때, 그 모습을 잠깐 보니, 나를 바라보며, 묘한 감정을 드러내는 표정을 짓고 계셨다. 그리고 바다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잠시 지으시더니, 다시 나에게 고개를 돌리시며 말씀하셨다.
  "네 친구 분들도 네가 비밀을 많이 품고 있다는 것을 이제 알게 되었을 거야."
  그 말을 듣고, 나는 순간 흠칫하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아닌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나와 가까운 이들, 카리나, 세니아 등도 모두 나에게 뭔가 비밀이 많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내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한 번씩 나에 대해 의심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 때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 친구 분들이 행여 네가 비밀이 많다는 것 때문에 너에 대해 쓸데 없는 의심을 하게 될 것을 한 번씩 걱정하고 있어. 지금은 안 되더라도, 언젠가는 너에 관한 많은 것들을 그 친구 분들에게도 털어놓을 수 있는 그런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이후, 리사 선생님께서는 내가 품고 있던 고민을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내가 방금 전에 생각했던 바를 그대로 읊는 듯이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에게 당장은 아니겠지만 꼭 그렇게 해 달라고 당부까지 하셨다.
  "알겠어요,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할게요."

  이후, 리사 선생님께서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시더니, 나에게 이렇게 물으셨다.
  "여기는 지금 동료들이 머무르고 있는 곳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겠지?"   그리고 나에게 자신과 동행하자고 청하셨고, 이런 청에 나는 다른 말 없이 그대로 하겠다고 답을 드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오르막길 쪽으로 먼저 가려 하면서 리사 선생님께 "먼저 갈 테니, 뒤따라 오세요!" 라고 말했다. 그러자 리사 선생님께서는 알겠다고 답하시고서 조용히 나를 뒤따르겠노라고 말씀하셨다. 리사 선생님께서도 당연히 그 길을 잘 아시는 듯해 보이셨지만 내가 어떻게 길을 갈 지를 지켜보려 하셨던 것 같았다. 애초에 길목 자체는 길게 이어지기는 해도, 결국에는 외길이나 다를 바 없어 길 찾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은 것도 리사 선생님께서 조용히 나를 따르려 하시는 이유였을 것이다.



  산길은 대체로 평범한 길이었으나, 일부는 나무들로 둘러싸인 숲길로 이루어져 있었다. 오르막길을 통해 해변에서 이른 곳은 그 숲길 부분이었다. 리사 선생님에 의하면 산길에서 내륙 쪽과 절벽 부근은 평범한 산길이지만 해안가를 따라 이어진 부분은 숲길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는 섬의 방풍림을 가로질러 가도록 길이 이어져 있기 때문이라 하셨다.
  "이 길이 '애도의 길' 이라 칭해지는 것은 알고 있지?"
  "예, 이런저런 분들께 많이 들었어요." 리사 선생님의 물음에 잠시 고개를 돌리며, 그렇다고 답했다. 이후, 나는 전방 쪽을 주시하며, 전방 혹은 그 주변 일대에서 적이 다가오는지를 살피며, 숲길을 걸어 나아갔다. 특히 숲길은 밤이 되면 매우 어두워지기 때문에 적의 습격에 더욱 주의해야 하는 곳이었던지라 빛의 기운도 드러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빛을 드러내면 적이 그 빛을 목도하고 달려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멀찌감치 뒤따르고 있었을 리사를 향해 한 번도 고개를 돌리거나 하지 않았다, 그라면 알아서 나를 잘 따라올 것이라 믿고 있었음이 그 이유였다.
  그러다가 한 번 그 분을 향해 고개를 돌린 적이 있었다. 그 무렵, 리사 선생님 역시 나처럼 주변 일대를 둘러보며 길을 걷고 계셨다. 그 분께서는 뒤쪽 역시 돌아보고 계셨는데, 뒤쪽을 돌아보는 역할을 자처하신 것 같다. 하지만 드레스의 허리띠에 매인 검을 꺼내는 않고 계셨으니, 아직 검을 들어야 할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하셨던 모양.
  "잘 따라 오시고 계시지요?"   "그럼." 이후, 괜히 한 번 물어봤고, 이후에 리사 선생님으로부터 그렇다는 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이후로 한 동안 나는 리사 선생님과 거리를 둔 채로 계속 앞으로만 걸어갔다. 그렇게 나는 가능한 빨리 사당에 도달하기 위해 쉼 없이 길을 가기에만 열중했다,

  "아르사나, 샤하르의 학교를 졸업한 이후, 가마일 산의 천문대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혼자였지?"
  "예." 그렇게 걷던 도중에 리사 선생님께서 질문을 건네셨고, 그 질문에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그리고 모험을 하면서, 용병 생활을 하면서,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보기는 했지만, 깊이 관계를 맺거나 하지는 않았음을 그에게 알렸다.
  "그렇겠지, 사람과 오래 가까워질 수 없는 것이 용병 생활이니까."
  그러자 리사 선생님께서 조용히 답을 하셨다. 그리고 뜻이 맞는 사람끼리 함께 다니는 경우도 있겠지만, 참으로 사소한 이유 하나만으로 서로 적으로 돌아설 수 있는 것이 용병 생활이니, 그런 생활을 하면서 사람과 쉽게 친해지지 못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말씀하시기도 하셨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께서도 용병 생활 하셨다고 하셨지요?"
  "응." 그러자 리사 선생님께서 답하셨다. 그리고 자신의 애제자이기도 했던 사람이라 하시고서, 그 무렵의 나와 무척 닮은 사람이라 그에 대해 언급하시기도 하셨다. 그리고 나에게 무슨 일을 하고 돈 안 받고 가겠다고 말한 적이 있지 않느냐고 물으시고서, 나에게 그 사람 역시 뭔가 일을 하고서 돈을 안 받으려 한 적이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사제 관계이기도 해서 오랫동안 함께하신 것 같아요."
  "그랬지." 이후, 내가 리사 선생님께 그 사람과 어떻게 헤어지게 되셨냐고 여쭈었을 때, 그 분께서 말씀하시기를, 고향인 샤햐리아에서 뭔가 사건이 발생했고, 그 사건의 원흉을 처단한다며 떠나간 이래로 그와 헤어지게 되었으며, 그 이후로 그와 다시 만나거나 하지 못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연대를 말씀하시는데, 어머니께서 포레 느와흐를 처치하고 샤하리아의 소요를 진정시키셨던 바로 그 해였다. 그래서 다시 리사 선생님께 여쭈었다.
  "그렇다면, 제 어머니와 함께 포레 느와흐 토벌전에 참여했겠네요, 그 사람도."
  "그러했겠지." 그러자 리사 선생님께서는 차분히 답하셨다. 그러는 동안에도 발걸음은 계속 이어져서 숲길에서 나무가 듬성듬성 난 구간에 이르게 되었다. 그 길목에 이르렀을 무렵, 주변 일대가 트인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 광경을 보자마자 고개를 왼편으로 돌리고, 숲 너머의 상공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무렵, 그런 나의 눈앞에 하늘 저 멀리 하얗게 빛나는 혜성 하나가 상공 일대를 맴도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혜성의 실체는 비행기의 일종으로 혜성의 머리 부분이 비행체의 형상을 이루고 있는 것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비행을 이어가며, 배기구에 해당되는 부분에서 긴 불꽃을 혜성의 꼬리처럼 분출해 혜성처럼 보였던 것. 그 비행체를 발견하자마자 나는 발걸음을 늦추고 비행체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려 하였는데, 그 때, 갑자기 비행기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그런데 그 비행체의 감속하는 모습이 마치 자신을 바라보았을 나의 발걸음에 맞추려 하는 것 같았다.
  발걸음을 늦추고 비행체를 바라보려 하던 나의 왼편으로 리사 선생님께서 다가오셨다. 이후, 리사 선생님께서는 나를 가만히 지켜보더니, 걸음이 느려진 것 같다고 말씀하시고, 왼편의 하늘 저편에 혜성 같이 보이던 비행체를 가리키며 나에게 물으셨다.
  "저 너머에 보이는 비행체를 바라보고 있었구나."
  "예." 이후, 내가 답했다. 그리고 리사 선생님께 그간 인근 상공에 머무르고 있지 않았느냐고 여쭈었고, 그 물음에 리사 선생님께서 그렇다고 답하시자, 이어서 그 분께 그 비행체와 함께 한 적이 있었느냐고 다시 여쭈니, 그 분으로부터 이런 답이 들려왔다 :
  "몇 시간 전까지는 내 곁에 있었지."
  "곁에 계셨다고요?" 그 말에 내가 놀라면서 그 분께 여쭈니, 선생님께서 답하시기를,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셨다.
  "네가 이 곳에 오기 하루 즈음 전부터였을 거야. 지금은 보이지 않겠지만, 저 너머에 기계 병기들이 많이 오가고 있었어. 이 길을 걷다 보면 사당과 다리를 통해 이어지는 절벽가가 있지? 그 절벽가 근처의 상공에 수없이 많은 병기들이 머무르고 있었던 거야, 마치 괴물을 포위하려 하는 듯이."
  리사 선생님께서는 처음에는 그 병기들의 대열을 돌파하고 괴물에게 접근하려 하셨다고 한다. 그 분께서는 예전에 거대한 괴물을 홀로 무찌른 경험을 갖고 계셨고, 괴물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고는 하셨지만, 자신이 예전에 상대했던 개체보다 강하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 홀로 싸워도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것이라 판단하셨음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돌파를 하시지 못하셨던 것이지요?"
  "하려면 할 수 있었어, 그런데......"

  함선까지 포함된 병기들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사당으로의 길을 열려 할 즈음, 자신의 곁으로 하얗게 빛나는 창이 자신의 곁으로 날아왔다고 한다. 자신의 키보다도 더욱 큰 장창의 형상으로 몸에 빛으로 한 쌍의 날개를 펼치고, 창준 부분에도 부속 날개와 꼬리 날개까지 펼쳐서 마치 하나의 전투기와 같은 형상을 만들고 있던 그 장창이 자신의 곁으로 날아오더니, 그 분의 앞길을 가로막으니, 마치, 적진으로의 돌파보다는 다른 길을 선택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 같았다고 그 분께서 말씀하셨다.

  "말은 없었지만, 마치 이런 의사를 전달하려 하는 것 같았어. 괴물을 물리치는 것은 다른 이가 할 일이며, 우리가 굳이 할 일은 아니라고, 그리고 그를 물리치는 것은 다른 이가 더욱 잘 해낼 테니, 우리는 그가 괴물이 있는 곳으로 나아갈 때에 도움을 주자고."
  "그래서, 기계 병기들을 최대한 많이 격파하려 하셨나 보네요, 그 전투기 역할을 맡은 장창과 함께."
  "그렇지." 이후, 내가 건네는 물음에 리사 선생님께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셨다. 비록 일행이라고는 그 장창 이외에는 없었고, 수없이 많은 병기들과 상대해야 했지만 그 하나 뿐인 동료가 나름 큰 역할을 해 주어서 자신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말씀하시기도.

  "혹시, 레이나라는 이름을 가진 전투기를 본 적이 있었니?"
  그 이후, 리사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레이나' 라 이름 지어진 전투기를 본 적이 있느냐고 물으셨고, 그 물음에 나는 곧바로 그렇다고 답을 드린 후에 어떻게 알았느냐고 여쭈어 보자, 리사 선생님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 그 창이 전투기들과 대면하고 있었어, 너도 봐서 알고 있을 거야, 이드리사 (Idrissa) 라는 전투기 있지?"
  "예." 그 말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리사 선생님에 의하면 그 빛나는 전투기 혹은 장창이 이전에 이드리사 5 기로 이루어진 무리와 전투를 치렀었다고 했다. 각자 색이 다른 5 기의 전투기들로 그 중 하나로 붉은색을 띠는 이가 앞장서는 이의 역할을 하고 있었으니, 그가 바로 '레이나' 였다는 것이다.
  "그 전투기가 창을 향해 목소리를 내더라, 자신은 '레이나' 임을 그는 알고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베르티 가문의 일원과 이전에 마주한 적이 있었지만 명령에 의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고. 그러면서 그 장창을 보고 말했어, 그 여자애와의 승부를 제대로 보고 싶으니, 자기들 앞으로 끌어오라고 말이야."
  레이나는 이전에 나를 도발하고 죽이려 했다가 나에게 패배할 것 같으니, 기계 무리와 포레 느와흐 그리고 올리비아 사반 등의 진실을 풀어놓겠다며 온갖 발설을 했었던 그 존재였다. 그럼에도 나는 그를 격추시키려 했었지만 생각을 바꾸어 격추를 포기했고, 이후, 그는 무사히 자기 진영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래놓고, 이후에 다시 나를 자기 앞으로 데려오라 말한 것에 대해서는 충분히 그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가 무슨 이유에서든, 순간의 면피를 위해 뭐든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면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얼마든지 납득이 가능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리사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레이나가 그 장창 앞에서 했던 말이었다.
  "그 레이나가 말한 제대로 승부를 본다는 것이....... 자기를 비롯한 5 기로 승부를 본다는 것이었어요?"
  어디에 있을지도 모르는 나를 자기들 앞으로 끌어내라고 말하는 것부터 어처구니 없었지만, 가장 어이 없었던 것은 제대로 된 싸움의 조건이 자신을 비롯한 5 기로 상대를 포위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결투를 하겠다면서 숫자로 밀어붙이려 했다는 것.
  "소위 말하는 '다구리치기' 아니에요? 그거."
  "그렇지." 리사 선생님께서 그 물음에 그렇게 답하셨다. 그러나, 더욱 어이 없었던 것은 이후에 리사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에서 나왔다. 다름 아니라, 그 이드리사 무리들은 원래 하나를 상대하는 데, 5 기가 둘러싸서 포위 맹공하는 것을 '올바른 결투' 로 인식한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이.......!?"
  "원래 자신들은 '다섯이 하나되는 존재들' 이었다고 하더구나, 그와 더불어 고문명시대에는 3 명 이상, 주로 5 명의 전사들이 1 명의 전사로 융합해 적과 결투를 펼치는 전기담이 적지 않았다면서 자신들은 그 전기담의 규칙을 따르고 있었을 뿐이라 말하기도 했었지."
  "...... 그래요?"
  리사 선생님께 되묻는 목소리를 내며,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았다. 그 무리에 대해 차분히 이야기를 하시던 리사 선생님께서도 그 때만큼은 자신도 어이가 없었는지, 조용히 쓴 웃음을 짓고 계셨는데, 그 모습이 마치 그 때만큼은 어처구니 없음을 어찌하고 싶지 않으셨던 것처럼 보였다.
  나도 어이 없기는 매한가지여서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서 몇 번이고 코웃음이 나왔다. 그냥 여럿이 둘러싸서 '다구리' 공격을 하고 싶을 뿐인데, 그 따위 명분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 참으로 가소로울 따름이었다. 여러 전사들이 한 무리를 이루며 적과 싸운다는 전기담에 대해서는 잘 알거나 하지는 못하기는 해도, 그렇게 한 무리가 싸우는 것에는 마땅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주로 혼자서는 상대하기 버거운 강하거나 거대한 적을 상대하기 위함일 것으로 그런 전기담을 몰라도, 그런 류의 무용담은 곳곳에 있었고, 나도 이전부터 자주 경험해 봤기에 무리를 지어 적과 맞서야 하는 마땅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런 입장에서 저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장창이 아닌 내가 직접 나서서 그들을 박살내 버리고 싶었을 것 같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본래 신체의 한 부분 정도의 역할만 할 수 있어서 마치 따로 만들어진 신체 부분들을 결합해 '누더기 괴물' 마냥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야 한 사람으로서 싸울 수 있는 그런 존재들 같은 것은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사람으로 치면 팔, 다리 정도밖에 되지 못해 누더기마냥 이어 붙여야 한 사람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네요, 그렇지 않아요?"
  "그러할지도 모르지." 그러자 리사 선생님께서는 조용히 미소를 띠며 답하셨다. 내가 건넨 말을 들으시면서 마치 자신이 품고 있던 그들에 대한 심기 불편이 해소된 것 같다고 느끼신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이후, 리사 선생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물어보셨다.
  "레이나가 너와 마주한 적이 있었다고 했지? 너와 마주하면서 뭐라 했었니?"
  "처음에는 부속 장치를 달고 와서는 자신에게 죽는 영광스러운 일을 통해 자신에게 극상의 만족을 선사해 달라고 외쳐대더니, 저를 이기지 못할 것 같으니, 포레 느와흐 그리고 올리비아 사반이 서로 한통속이고, 올리비아 사반이 사람을 시켜 어머니를 죽게 만들었다고 말했었어요."
  "그랬었구나." 그러자 리사 선생님께서는 뭔가 알아차릴 수 있는 바가 있으셨는지, 조용히 미소를 띠며 말씀하셨다. 그리고, 내가 생각한 바와 비슷하게 그의 의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
  "순간의 면피를 위해 자기 입장에서는 함부로 밝혀서는 안 될 법한 것들까지 말했었구나, 그 이후, 자신이 발설한 것이 너에게 어떤 영향을 줄 지 생각도 않고, 그는 분명 네가 그를 놓아둔 것을 두고, 자신을 놓친 것으로 알고, 설욕할 기회를 잡으려 했겠지."
  그리고 리사 선생님께서는 레이나는 자신의 앞으로 온 그 장창에게 나를 데려오라 말했겠지만, 장창이 그 요청을 받아 주었을리는 없었고, 그 이후에 치열하게 대결을 펼쳤음을 밝혔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내가 리사 선생님께 그들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고, 그 물음에 리사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대답을 하셨다.
  "모두 격추되었어."
  그 이후, 리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처음에는 레이나 혼자 장창과 맞섰고, 그 이후에 레이나가 격추되려 하자, 2, 3 호기 (파란색, 초록색) 가 그를 대신해 도전해 왔으며, 그들마저 격추될 위기에 놓이자, 4, 5 호기 (노란색, 보라색) 가 대신해 맞섰다고 한다. 장창과의 대결을 가장 오래 펼친 것은 레이나였으며, 2, 3 호기는 조금 오래 버텼으나, 4, 5 호기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고 한다. 인격체의 기질은 5 기가 비슷했지만, 성능 상으로 1 호기와 여타 개체들의 차이가 많았음이 그 이유였다고.
  이후로는 5 기가 포위 공격을 하며 장창을 격추시키려 했으나, 모두 격추되어 폭발했으며, 5 기가 한 번에 포위 공격했음에도 장창에게 상처 하나 입히지 못했다고 한다. 그 전투 도중에는 탄이 발사되는 소리와 폭발 소리만 주로 들렸으나, 한 가지 들린 목소리 하나는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티비 딕시 논 솔룸 투 세드 퀘 이캇틴제레 논 메렌투르 푸엘람 (Tibi dixi non solum tu sed kwe ikattinjere non merentur puellam)"

Tibi dixi. Non solum tu, sed quae hic attingere non merentur puellam.
No yeche marita. No ifn øëni, gna øyoydr thoi øë jeøaye daonanasi.
말했을 텐데. 너 뿐만이 아니라 여기 있는 모두, 그 아이에게 다가갈 자격이 없다고.

  이런 뜻으로 그 말 자체는 리사 선생님께 들은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래서 낯설지 않은 말을 들은 것에 놀라고 있었는데, 그 때, 리사 선생님께서 나를 보더니, 나에게 이전에 들은 적이 있었느냐고 물으셨다,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리사 선생님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그 모습을 보는데, 마치 나를 보시면서 뭔가 놀랄 만한 것이 있었냐는 듯, 심상치 않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계셨다. 그 표정을 짓는 모습을 보자마자 나는 바로 이렇게 답을 했다.
  "예. 이전에 한 번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아요."
  "어디서 들었는데?" 그러자 리사 선생님께서 물으셨고, 그 물음에 나는 이렇게 답을 드렸다.
  "꿈에서 들었어요." 그리고 의아해하시는 리사 선생님을 향해 꿈에서 겪었던 일을 나름 자세히 말해주려 하였다. 해변에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난데 없이, 내 친구인 소르나 (Sorna) 가 나타났던 것, 그리고 옛 친구 소리 (Sori) 가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 파란색 그리고 보라색 옷을 입은 여자아이들과 함께 술래잡기를 하며 놀다가 결국 아이들을 전부 잡은 광경을 본 것 등을 이야기해 준 것이었다.
  "아이들을 모두 잡고 나서, 소리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이전에 들려주셨던 그것이었어요."
  "그랬었구나." 그러자 리사 선생님께서는 다른 말씀은 하지 않으시고, 나에게 그 꿈이 언제적 꿈이었냐고만 물으셨다. 그 물음에 나는 새벽 즈음, 일행이 배를 타고 지브로아 해안으로 출발할 무렵이었는데, 꿈에서 깨어날 무렵, 지브로아 쪽의 항로를 가로막고 있던 지브로아 해변 쪽의 폭풍우가 걷혀 있었다고 답을 드리니, 리사 선생님께서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그 이후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는데, 마치 뭔가 알 것 같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뭔가 짐작될 만한 일이라도 있어요?" 그렇게 묻자, 리사 선생님께서 조용히 답하셨다.
  "네가 잠들었을 때 말이지......" 그리고 잠깐 생각에 잠기시던 리사 선생님께서 다소 심각해진 목소리로 우선 이렇게 말씀하셨다 : "이전에 비행기처럼 날개를 펼친 장창이 전투기 5 기와 맞서 싸웠던 일에 대해 말했었지?" 라고 묻는 듯이 말씀하시더니, 그 이후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잠들었다는 그 때의 일이야."
  "제가 잠들었을 때라고요?" 그 말을 듣자마자 놀라면서 리사 선생님께 물었고, 그러자 리사 선생님께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는 의사를 내비치셨다. 그리고 놀람을 아직도 감추지 못하고 있던 나에게 조심스럽게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하셨다.
  "아무래도 누군가가 그 때의 일을 너의 꿈에서 그런 방식으로 투영시킨 것 같더구나."
  그런 방식, 아마도 소리 (Sori) 를 비롯한 아이들의 싸움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 아이들의 술래잡기 싸움이 실제로는 전투기들의 싸움이었다는 것. 그 이후, 리사 선생님께서는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시더니, 나에게 이렇게 물음을 건네셨다.
  "소리를 제외한 아이들이 각자 다른 색의 옷을 입고 있었지? 빨간색, 초록색, 파란색, 노란색 그리고 보라색 순으로."
  "예." 꿈에서 본 광경을 상세히 기억하고 있던 나는 바로 그렇다고 답을 드렸고, 이어서 리사 선생님께서 소리가 하얀 옷을 입고 있지 않았느냐고 물었고, 그 물음에도 나는 그렇다고 답하니, 리사 선생님께서는 당연한 것을 들은 듯이 조용히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이실 뿐, 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누군가가, 제 꿈에 그런 상황을 투영했다고 하셨는데, 그 사람이 누구인 것 같아요?"
  이후, 내가 여쭈자, 리사 선생님께서는 뭔가 깊은 생각을 하시더니, 어딘가에서 나를 지켜보는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이 해 준 것일 수도 있다고 알려주셨다. 그 말을 듣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뭔가 아는 바가 있기는 했지만, 직접 말할 수 없어 에둘러 표현한 것이라고. 선생님께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그러할 것임을 짐작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리사 선생님 혹은 그 장창 스스로가 내 꿈에 관여한 것은 분명해 보였다.
  이후, 나는 리사 선생님과 거리를 둔 채, 홀로 산길을 오르게 되었다. 내 걸음 걸이가 더욱 빨랐고, 다급했기에 차분히 걷고 계셨던 리사 선생님과의 간격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리사 선생님도 그런 나에 대해 뭐라하지 않으셨는데, 아무래도 혼자서 이것저것 다 해 본 사람인 만큼, 딱히 걱정이 되거나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로 나는 기계 병기와 맞설 것을 생각하면서 긴장하며, 산길을 따라 오르고 있었지만 막상 기계 병기들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놀라운 광경들을 보게 되었다. 나의 눈앞으로 예상치 못한 풍경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참 산길을 걸어가는데, 눈앞으로 그림자 하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더라도 사람의 것처럼 보이던 그림자, 그 모습을 보며, 심상치 않다고 여기며, 조심스럽게 다가가 보았다. 일행의 일원은 아닌 듯해 보였다. 애초에 일행은 나를 뒤따라 오고 있었을 테니, 일행과는 다른 인상이었음은 분명했다. 나와 비슷하게 길게 기른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있었으며, 소매가 짤막한 옷에 조끼를 걸쳤으며, 짧은 바지 차림을 한 이였다. 어둑어둑한 산길에서 마주한지라 그림자만 보였고, 그래서 빛을 비추어 그 모습을 보려 했지만, 적습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끝까지 빛은 비추지 않고, 조심스레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앞으로 다가갔을 때, 그 사람이 나를 향해 돌아섰고, 그제서야 그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이렇게 가까이 다가가 그 모습을 보니, 그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결코 낯선 이가 아니었다.

  "아르사나, 너도 여기 와 있었네?"
  목소리를 들으며, 그가 누구인지 재차 확인할 수 있었다. 샤하르에 있었을 때, 잠시 만났던 아잘리 (Azali) 였다. 샤하르에서 나오지 않는 줄 알았더니만, 이렇게 생각지 못한 곳에서 만나게 된 것이었다.
  "네가 여기에는 웬일이냐?"
  "야, 여기로 오지 말라는 무언의 규칙 같은 거라도 있냐? 이 쪽에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다더라."
  흉흉한 소문이라면 사당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는 '괴물' 에 관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흉흉한 소문이 있다고 하면 일반적으로 와서는 안 되겠지만, 아잘리 역시 모험가 기질이 있다고 하니, 흥미를 느끼고 와 본 것 같다.
  "그런 소문이 있다면 오지 않아야 하는 거 아니었어?"
  "그러면 너는 여기 왜 왔냐? 너도 그런 소문을 듣고 왔잖아~ 모험가나 용병이라면 이런 기운에 끌리는 게 기본 아냐?"
  내가 건네는 물음에 아잘리가 능청스럽게 답했다. 이후,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발걸음을 옮기려 하자, 그는 그런 나를 뒤따르면서 나와 동행하려 하였다. 그는 나의 왼편에서 나를 따라가려 하고 있었다. 걷는 속도는 나와 비슷했다. 나와 맞추려 했던 것이겠지만, 실제 걷는 속도가 빠른 편이었던지라, 억지로 발걸음을 맞추는 티는 나지 않았다.

  "괴물에 대해서는 나도 대충 들었어. 사당에 머무르고 있으면서 인간의 모습으로 위장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 시대 사람들의 기억이 없어서 이 시대에는 있을 리 없는 옷차림을 하고 있대. 그래서 위험 구역인 사당에 뜬금 없이 사람이 서 있고, 그 사람이 이 시대에는 있을 리 없는 옷차림을 하고 있다면 괴물일 거라 했어."
  "그래서, 괴물 사냥을 하려고 온 거야?"
  "내 주제에 그게 가능하겠냐? 그것보다는 괴물의 정보와 신상을 알리고, 여기로 올 이들에게 알리는 정보통 역할을 하려고 여기 있었던 거지."
  그러자 내가 정보를 알리면서 돈도 받을 생각이었냐고 묻자, 아잘리는 그렇다고 답하고, 속물의 기본 소양 아니겠냐고 말하니, 그 말에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 속물로서 속물의 소양을 언급하는 그의 어설픈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난 것이었다.
  "너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아?"
  "네가 받는 만큼의 2 배를 불렀겠지. 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너도 알잖아, 속물 경력으로는 내가 대선배야, 임마."
  "웃기는 자식. 그렇게 생기지 않은 게, 입학했을 때부터, 장래 희망이 용병 노릇이나 하며 돈 벌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놀란 줄 알아? 대체 어디서 뭔 짓을 하고 다녔길래, 장래희망이 그렇게 삭막해졌는지 궁금했다니까."
  "그래서 처음에는 내 친구 노릇 하기 싫었지?"
  "너 같은 게 내 친구가 될 줄은 나도 몰랐어, 임마." 내 물음에 아잘리 역시 조용히 웃으면서 답했다. 그 이후, 나는 다시 대화의 주제를 괴물로 옮기면서 그에게 괴물의 이야기에 대해 더 들은 바 있느냐고 물어 보았고, 그 물음에 아잘리가 바로 답했다.
  "들을만한 것들은 다 들었어. 구 세계 원령들의 집합체 같은 것이라고 하더라."
  아잘리는 상당히 많은 것들을 들었었다. 구 세계의 말기에 '괴물' 들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다는 것,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군 관계자들이 배반해 괴물의 편이 되어 인간 학살에 관여했다는 것, 그로 인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이야기까지 많은 이야기가 들려왔었다. 그리고, 이전까지 못 들었던 이야기가 하나 있었으니,
  "그러고 보니, 이런 이야기가 있었어. 너는 들었을지 모르겠는데, 마지막까지 괴물과 싸우던 부대의 부대장이 있었어. 아직 젊은 군인이었고, 백부장 (Centuria) 급의 지휘관이었다던데...... 살아남은 부대가 자신의 부대 밖에 없어 어찌하다보니, 최후의 부대가 되었다고 하더라. 부대장은 자신의 부대에 갓 들어왔다는 신병 하나만 탈출시키고, 남은 부대원들을 이끌고 결전에 임했다는데, 그 부대장에게는 애인이었다던가, 부인이었던가 그런 여인이 있었다더라, 라는 이야기였어."
  신병 하나만 탈출시켰다, 라고 하니 새삼스레 생각이 났다. 구 세계에서 괴물과 맞서 싸우던 군 부대가 있었는데, 신병 하나만 탈출하고 남은 이들은 결전에 임했지만 결국 전멸했으며, 부대원 중 한 명이 '죽음의 기사' 가 되어 신병의 기억을 말한 적이 있었다고 동료들로부터 이미 들은 바 있었다. 내가 아잘리에게 들은 것은 그런 부대의 부대장에게 연인이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그 연인, 미인이었대?" 그 부대장에게 연인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다짜고짜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러자 아잘리는 어떤 사람에게 연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아름답냐고 묻는 것에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나에게 이렇게 다그치는 듯이 말하는 것이 아닌가.
  "너는 진짜...... 여자에 관한 소문만 들었다하면 그런 거나 물어보고.......!"
  "그런 것부터 관심 가질 수도 있는 거지!" 그러자 내가 답했다. 그 이후로 아잘리는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 없는 변명에 곧바로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한 번 두 번 있는 일도 아니었을 것이고, 당장에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어서 나에 대해 더 이야기를 이어가려 하지 않았다.
  "아무튼, 미인이었던 것 같아. 사당에 자리잡은 여인이 미인이라고 했다니."

  아잘리 역시 그 연인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고 했다. 그에 대해 전해지는 바는 부대장 그리고 연인의 가족들이 재난을 피해 지역을 떠난 이후에도 계속 부대장의 곁에 남아 부대가 궤멸될 때까지 함께 했다는 그런 이야기 뿐. 여인에 대해 알려진 기록은 한 줄로 쓸 수도 있어 보일 법한 몇 개의 문장 뿐이었으나, 그 기록 자체는 후세 사람들의 상상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하기는 했던지라 관련 이야기가 몇 나올 법했다.
  '세나에게 혹시 관련된 이야기를 알고 있는지 한 번 물어봐야 하겠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그런 생각을 했을 정도. 아무튼, 아잘리는 최후의 부대원 중 한 명에게도 연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했으며, 병사의 연인으로 병사가 학생 시절이었던 때부터 그와 함께 지냈다는 과거사가 있었다고 했다. 그 여인에 대한 소개를 할 때, 아잘리가 먼저 그 연인 역시 미인이었음을 언급했다.
  "그 연인도 부대장의 연인처럼 그 부대원과 죽을 때까지 함께였어?"
  "그렇지는 않았대. 그 병사가 부대원으로 들어온지 1 년 즈음 지났던가, 그 때에 결별했다고 했어."

  그 병사가 여인과 어떻게 결별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여인은 병사가 늘 부대에 머무르고, 고향에 돌아오려 하지 않는 것에 외로움을 느끼고, 그런 그에게 다른 남자가 접근해서 그 남자와 가까워지다보니, 결국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남자를 대신해 늘 자신의 곁에 남아주는 이를 택했다는 것. 이후, 그 병사는 간신히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이미 여인은 그에게서 떠나간 이후였다.
  이후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분노한 병사는 자신의 연인이었던 이의 새 연인이 된 남자를 두고, 자신의 여자를 빼앗았다며 그에게 싸움을 걸고, 그를 마구 폭행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해지지 않는다고 했으며, 아무튼, 그 사건 이후로 병사는 연인이었던 여인과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사람이 이후, 괴물의 습격에서 자신의 부대가 결전을 치를 때에 병사들을 이끄는 대장 역할을 했다고 했더라. 그 사람은 목숨을 다 바쳐 괴물들과의 싸움을 이어갔다고 했지. 하지만 인류는 괴물과의 싸움에서 패배해 멸망했고, 부대가 있던 일대는 파멸했으니, 살아남지 못했겠지. 어차피 그 이후로 모성 파괴의 여파가 행성계 전체에 영향을 미쳤을 테니, 계속 살아남을 수는 없었을 것이라 생각해."
  "그 여자도 다를 바 없었겠지?" 그리고 내가 묻자, 아잘리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렇다는 대답을 대신했다. 그 이후, 아잘리는 팔짱을 낀 채로 자신의 오른쪽 곁에서 자신과 동행하고 있던 내게 이렇게 말을 이어가려 하였다.
  "그런데, 괴물들의 학살에 대해 이런 의문을 품기도 했었어. 그 괴물들은 대체 무엇을 위해 그렇게 사람들을 학살했는지에 대한 그런 의문 말야. 어차피 멸망을 피할 수 없는 세상에서 재난에 휘말려 언젠가 죽을 운명이었을 텐데,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겠느냐는 것이지."
  "그래?" 그 기계 무리가 생명체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고대 도시 지하에 틀어박혀 있던 병기의 심장부에서 들은 경험이 있었던 나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대략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바로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사실, 이야기 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무지막지한 폭력을 저질러놓고 변명을 하려면 무엇이든 못하겠는가, 이런 심보였다.
  "뻔하지 뭐, 어차피 죽을 놈들, 신나게 죽여보자, 이런 생각이었겠지, 뭐, 마치 놀이를 즐기는 것처럼 말야."
  "놀이처럼......?" 아잘리는 애초에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말하기 싫으니, 대충 말을 던졌을 것으로 여기었을 것. 다른 이라면 다시 한 번 자세히 설명하거나 윽박지르는 식으로 믿도록 했겠지만, 상대는 어렸을 때부터 학우였던 친구였으니, 내가 어떤 의도로 말을 했는지, 표정과 어투만으로 대충 짐작했을 테니, 그런 방식은 통하지 않을 것임이 너무도 명백했다.
  "농담처럼 한 말이지?" 아니나 다를까, 아잘리는 농담으로 던진 말 아니냐고 물었고, 그 물음에 나는 그렇다고 순순히 인정했다. 그리고 그에게 물었다.
  "다소 심각한 이야기가 나올 텐데, 그래도 괜찮겠어?"
  "괜찮아." 그러자 아잘리가 답했다. 그리고 진실을 알려면 때로는 듣기 괴로운 이야기도 들어줘야 할 필요도 있다며, 생각에 품고 있던 것들 모두를 자신에게 말해 보라 하였다. 그러자 나는 알겠다고 화답하고서 본격적으로 그에게 고대 도시 지하에서 목도했던 병기의 심장부에서 들은 것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려 하였다.

  "그러니까, 인간의 몸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하기 위해 마구 학살한 것이었다고?"
  "그렇게 대답을 했었지. 인체의 혈액을 이용해 플라즈마를 만들고, 영혼까지 물질화해서 그것으로도 플라즈마를 생성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던 것 같아."
  이후, 나는 기계 장치 내부의 토카막에서는 계속 기괴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음을 밝히고서, 물질화한 이후에 플라즈마 상태가 되면서 고열과 변질에 의해 고통받는 영혼들이 절규하는 소리였다고 그 소리에 대해 언급하였다.
  "또한, 인간의 뇌를 기계를 제어하는 제어 장치 회로에 활용한 정황도 있어. 고대 도시 지하의 병기, 그 심장부가 파괴되었을 때, 그 잔해에서 어떤 집적 회로 장치가 발견되었는데, 그 장치에 생체 정보가 포함되어 있었음이 알려진 거야. 그러니까, 뇌세포를 제어 장치에 활용했다고 볼 수 있겠지. 녀석들에게 인간이란 그저 플라즈마와 신경 회로 확보를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 녀석들이 영혼을 물질화해서 이를 이용해 플라즈마를 생성하게 한 것도 그런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아잘리가 심각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이야기를 차분히 이어가려 하였다.

  그 무렵, 눈앞의 먼 저편으로 나무들로 둘러싸인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길은 형형색색의 빛으로 빛나고 있었으니, 일단 주변의 시야가 어두울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지만, 그 빛의 색이 기괴한 느낌을 주어 뭔가 다른 불길함이 느껴지기도 했었다. 그 빛을 바라보며 나는 이야기를 이어가려 하였다.

  "그와 더불어, 기계 무리는 모든 생명체들을 잔혹하게 죽였지만, 특히 인간들을 잔혹하게 죽이는 것에 집중했던 것 같아. 녀석들은 자기 자신들을 '고귀한 존재' 로 칭하고, 인간을 천박한 것처럼 말하고 있었어. 그 기계 녀석들의 목표는 이러하다고 하더라."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레이나' 로부터 들었던 것을 그대로 알리려 하였다, 일단 원문을 말하고, 해석을 말했다.

Un monde d'animaux forts et respectueux de la nature, et non un esprit humain maladroit et faible, un monde d'animaux forts et respectueux de la nature, sans harmonie et coexistence médiocres, et un monde idéaliste dominé par la logique du pouvoir des chasseurs et les chassés et le monde où ceux qui sont dirigés par une légion de machines et dont l'intelligence nuit à l'ordre de la nature sont complètement anéantis.

어설프고 나약한 인간의 마음이 아닌 강인하고 자연 친화적인 드높은 동물들의 세상, 어설픈 화합과 공존이 아닌 사냥하는 자와 사냥당하는 자들의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이상향이자 기계 군단에 의해 관리되어 자연의 질서를 해치는 지성을 가진 이들이 철저하게 말살되는 세상.

  "아까, 네가 농담삼아 재미삼아 인간을 죽였다고, 기계 무리들에 대해 이야기했잖아."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아잘리가 그렇게 말했고, 이어서 기계 무리들이 인간을 미천한 존재로 여기었다면, 그들을 재미삼아 죽이는 일도 충분히 있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하고서, 아주 농담은 아니었던 것 아니냐고 묻기도 했다.
  "그런 것이지." 그러자 내가 그 물음에 바로 답했다.
  "녀석들은 인류를 증오하고 있었다고 하더라, 마치 없어져야 할 존재여야 한다고 여기는 것처럼. 아마 인류를 증오하게 된 어떤 존재를 추종하기에 그렇게 됐겠지. 그것이 지성체로 옮겨지고, 더 나아가, 지성체는 자신들보다 낮은 존재인 것은 물론, 자신들의 장난 거리, 플라즈마 공급원이나 되어야 한다는 논리의 발단이 된 것 같아."
  이후, 나는 더욱 심각해진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인체를 통한 플라즈마 공급은 인류 말살을 위한 전쟁 와중의 부산물이나 다를 바 없었겠지. 하지만,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되다 보니, 어느새 기계들은 플라즈마는 인류의 체액에서 얻어오는 것이라 잘못 학습을 했고, 그래서 플라즈마 공급을 위한 인류 사냥을 관습적으로 이어가게 되었을 거야."
  그리고서 그에게 어떤 존재의 뜻을 따르고 있으며, 그로 인해 기계들이 인간을 마구 학살하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다만, 그 존재의 이름 (현수 파크) 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아잘리가 당장에 굳이 알 필요가 있거나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라면 어떤 식으로든 잘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기계들은 인간이 창조했을 것 아냐? 어느 세대에 이르러서는 기계가 기계를 스스로 만들기에 이르렀겠지만, 그 발단이 결국 인간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잖아?"
  "자신들의 상상에서 태어난 '신' 이 창조했다고 주장하고 있겠지, 뭐, 반발하는 놈들이 있다면 불에 태우든, 목을 자르든 해서 죽일 것이고."
  아잘리의 물음에 내가 그렇게 답했다. 그리고 아잘리가 다시 물으니, 기계 무리는 어찌하다가 인류를 증오하게 되었느냐는 것이었다. 그 물음에는 그것에 대해서는 앞으로 알아봐야 할 사항이 아니겠냐고 답하고서, 그 대답 중 일부는 곧 알게 될 것이라 이어 말했다.

  그렇게 한창 떠들 무렵, 나는 나무들로 둘러싸인 어떤 길을 걷게 되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곳곳이 형형색색의 빛에 비추어져 여러 색을 띠고 있던 나무들로 둘러싸이고, 길바닥 역시 연두색을 띠고 있어서 심상치 않은 느낌을 주고 있는 그런 길이었다.
  길목 한 곳-아마 길목의 가운데 즈음이었을 것이다-에는 책상이 놓여 있었고, 그 책상 위에는 책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학교에서 필기용으로 쓰일 법한 공책 한 권으로 책상 뒤쪽에는 나무 의자 하나가 놓여있는 모습이 보였다. 의자에 앉아서 공책을 보라는 것일까, 그 모습을 보며, 그렇게 생각하면서 책상 쪽으로 다가갔다.
  책상 앞에 이르자마자 나무 의자에 앉았다. 학생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책상 근처의 의자에 앉자마자 책상 위에 놓인 공책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옛 브리태나 (Britaena) 어로 쓰인 어구들이 한 쪽마다 휘갈겨 쓴 듯이 쓰여 있었다. 마치 일기처럼 쓰인 어구들은 뒤로 갈 수록 글씨체가 흐트러지고 있어서 이성과 정신이 망가져 가고 있었음을 글씨체를 통해 바로 알 수 있었다. 악필에도 경우는 있다. 그 공책의 악필은 여태껏 보아왔던 나름 정신을 집중하고 열심히 쓴 악필 글씨체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글씨체였다. 이런저런 요인에 의해 지능이 퇴화되어가는 사람이 글씨를 쓰면 이런 느낌일까, 글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잘리, 한 번 읽어보지 않을래?" 내가 아잘리에게 요청했다.
  "아니, 왜?" 그러자 아잘리는 바로 반발했다. 읽으려면 자기가 읽지, 왜 자기한테 시키냐는 것. 그렇게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분위기가 수상해서 언제라도 적습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아잘리가 대대적인 적습에 대항할 수 있을지를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브리태나 어로 쓰인 문구 정도는 아잘리는 어느 정도는 읽을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던 것도 이유였다.
  "브리태나 어로 쓰여있어. 너 정도면 충분히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
  그리고 어떻게든 아잘리를 책상 건너편 의자에 앉히고, 책에 쓰인 문구들을 읽어보게 하였다.
  "혹시 읽지 못할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이후, 나는 아잘리 근처에 서 있으면서 주변 일대를 살피려 하였다. 주변 일대에 서 있으면서 오른손에 빛의 기운으로 검을 생성했으니, 이전처럼 다급히 손날에서 칼날을 생성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한 동안 병기들이 나타나거나 하지는 않았기에 잠깐 아잘리가 앉은 책상 일대로 몰래 다가가 그를 살펴보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아잘리에게서 뭔가를 읽는 소리가 들리기는 했지만, 워낙 작은 소리이다보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렇게 간간히 아잘리를 살펴보면서 그의 곁에 서 있을 그 때,
  '역시나!' 붉은색을 띠는 다수의 마법진들이 주변 일대에 나타나고, 이어서 각각의 마법진들에서 병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와 가까운 곳에서는 보행형 병기들이, 그리고 먼 곳에서는 견인 포대형 병기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으니, 내가 보행형 병기들과 맞서는 사이에 견인 포대형 병기들을 통해 포격을 가하겠다는 판단을 병기들을 소환한 이가 내린 것 같다. 소환된 병기는 포대 1 기와 보행형 병기 9 기로 모두 열이었으며, 앞장서는 이는 그 중에서 4 기였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 포격을 가하는 병기에 먼저 접근해서 그 병기부터 제압해 버리고 싶었지만 아잘리의 보호가 우선이었기에 판단을 달리 해야 했다. 다만, 나는 카리나가 아니었고, 그처럼 광역 보호막을 펼칠 수는 없었기에 시선을 달리 끄는 쪽으로 방향을 잡기로 했다.

  우선 몰려오는 이들의 칼날을 빛의 칼날로 막아내면서 왼손으로 빛의 기운을 그들 몰래 포대 쪽으로 보냈다. 이들은 모두 내가 있는 쪽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어서 다른 방향을 바라보려 하지는 않고 있었고, 그래서 포대 쪽으로 다가가는 빛의 존재를 파악하지는 못한 것 같다 (워낙 밝은 곳이라 빛을 보지 못한 것도 이유였을 것이다).
  그렇게 한참 빛의 검을 들고 병기들과 대결하면서 검격을 주고 받으며, 병기들의 칼날과 포격을 피해가며 그것들과 맞서던 그 때, 뒤쪽에서 빛의 기운이 포대 쪽에 폭발을 일으켰다. 빛의 기운에게 포대 뒤쪽으로 날아간 다음에 큰 폭발을 일으키도록 한 것이었다. 폭발력은 없었겠지만 빛을 크게 퍼뜨리고 굉음과 진동을 일으키도록 해서 그 소리와 진동에 병기들이 주목하도록 한 것이었다.
  과연 병기들은 포대 쪽에서 일어난 폭발 그리고 소리와 진동에 주목하였다. 뒤쪽의 병기들 중 일부는 폭발이 일어난 쪽으로 달려갔으며, 앞쪽의 병기들은 뒤쪽으로 물러나지는 않았지만 크게 동요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 기회를 노려, 이들의 무기들을 뿌리치고 하나씩 병기들의 흉부, 복부를 베어내며, 그들을 돌파, 이후에 남은 병기들 역시 왼손에서부터 곡선을 그리는 빛 줄기들을 발사해 포대 쪽으로 가는 병기들을 타격하기 시작했다.
  그 때, 그런 나의 뒤쪽에서 파란 빛 줄기들이 병기들의 머리 쪽으로 잇따라 나아가, 그들 중 몇의 머리를 궤뚫었고, 이윽고, 뒤쪽에 있던 5 기의 병기들 모두 격파되어 그 일대에는 포대만 남게 되어 바로 포대 앞으로 접근해 오게 되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포대는 네 발 달린 기계 인형을 양다리 삼아 인간형 병기의 상반신 같은 몸체처럼 생긴 몸체를 받치게 하고 있었으며, 몸체의 좌우측에 하나씩 대구경 포신을 장착하고 있었다. 각 포신의 포구 안쪽이 붉게 빛을 발하고 있으면서 에너지를 충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으니, 에너지 충전식으로 빛 줄기를 발사하는 기능을 갖추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자신의 앞으로 접근해 올 무렵, 그 포대는 몸체에 장착된 포구에서 에너지를 한창 충전하고 있었다. 전방에서의 견제 공격을 믿고 포격을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포격에 우군 병기들이 휩싸일 가능성도 있었겠지만 기계 병기들은 그것에 대한 고려는 하지 않고 있었던 것 같다. 뭐가 어찌됐든 적들을 물리치면 그만이고, 귀환은 소환사들이 해 줄 것이다, 그런 사고가 회로에 각인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못 하게 해 주지. 어차피, 이제 지켜줄 이도 없을 텐데.'
  그 모습을 보고 그렇게 혼잣말을 하면서 몸체의 등 부분 위로 뛰어올랐고, 그 이후에 빛의 칼날로 그 등을 궤뚫었다. 궤뚫린 자리에서 불길이 피어올랐다. 빛의 기운과 기계 병기를 감싸는 어둠의 기운이 서로 부딪치면서 그로 인해 생성된 열로 불길이 일어난 것이다. 그 불길이 피어오르는 모습을 보자마자 나는 곧바로 기계 병기의 몸체에서 뛰어내렸고, 그러자마자 기계 병기는 거센 불길에 휩싸인 채, 폭발하며 주저앉고 말았다, 다리로 쓰이는 부분이 부서지며 몸체가 내려앉은 것이다. 그렇게 병기가 파괴된 이후, 병기의 몸체를 뒤덮은 불길은 얼마 지나지 않아 꺼졌다.

  포대까지 완전히 파괴되고 불길도 사라지면서 포대가 잔해만 남는 모습을 보이자 바로 뒤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아잘리가 있는 쪽을 살펴보았다. 아잘리는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손에 파랗게 빛나는 빛의 칼날을 가진 광검을 오른손에 쥐고 있었다. 그 광검을 간이 총포로 활용해서 인간형 병기들을 궤뚫었다고 한다. 아잘리는 물론, 그가 앉아있던 책상과 의자도 무사했다. 다만, 다급히 일어났던 탓인지 의자는 넘어져 있었다.
  공책은 아잘리가 왼손으로 안고 있었다. 들고 가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모양으로 저주받은 책은 아닐 것이라 여기고 있었으며, 나 역시 그러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저주받았다고 생각하면 내게 넘기면 돼." 내가 말했다. 이후, 나는 아잘리와 함께 책상이 있던 자리를 지나치면서 불길한 느낌의 빛으로 둘러싸인 길을 지나가면서 아잘리에게 무슨 책이었느냐고 물었고, 그 물음에 아잘리로부터 이런 대답이 들려왔다.
  "처음에는 알아볼 수 있었는데, 나중에는 너무 심하게 휘갈겨 써서 뭔 내용인지 못 알아보겠더라, 그래서 너에게 넘기려고 했다가 기습이 일어났었어."
  "그래?" 그러자 나는 곧바로 그에게 공책을 달라고 했고, 이후 그로부터 공책을 넘겨 받은 이후에 첫 장부터 하나씩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잘리에게 보여주려 하면서 글자체만 대충 훑어 보았던지라, 처음부터 제대로 읽으려 한 것. 그 무렵, 아잘리로부터 다 읽고 나면 무슨 내용인지 알려달라는 부탁을 들었다.



I.
그 날, 나는 제국이 일으키는 정복 전쟁의 전장에 있었다.
어떤 나라에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어떤 나라인지 알 것도, 알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중무장도 하지 않고, 창 역할을 할 수 있는 총포 하나만 든 채로 적진을 향해 돌격하는 것이 내 임무,
주력 전투 부대의 일시적인 방패막이가 내 역할이었다.
의무병이 있냐고? 그럴 리가. 우리 같은 것들에게 의무병은 병졸도 필요 없다는 게 제국이다.
사람 따위 죽으면 얼마든지 다시 낳아 기르면 된다고 말하는 게 제국이다.
그들에게 소중한 것은 조병창에서 비싼 돈 주고 찍어내는 마도병기들이지,
길거리를 떠도는 고양이만도 못한 게 우리 목숨이야.
총에 맞으면 죽으면 그만이지.

폭발에서 튀어나온 파편에 맞고 이제 죽었다 싶은데, 내 앞에 뭔가 빛나는 것이 보인다.
빛을 발하는 창,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창이 마치 천사의 무구를 보는 듯 찬란히 빛나고 있다.
그 무구에게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자기를 붙잡아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선택의 여지는 없다. 살기 위해서는 뭔들 못하겠나.

  "제국이라면...... 루마 행성계의 그 제국이겠지?"
  "맞아, 루마 제국, 인류의 제국을 자처했던 그 나라." 아잘리의 물음에 내가 답했다. 루마 행성계 인류의 유일한 보루이자 안식처였지만, 인류 수호를 위해서는 인간의 존엄성 따위 얼마든지 팔아먹을 수 있다는 사고방식으로 가득찬 이들이 다스렸던 나라 아니냐고 아잘리가 묻자, 내가 피식 웃으며 그렇다고 답했고, 그 웃음에 아잘리 역시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

II.
내가 살아온 20 여 년의 생에 걸쳐 이런 순간이 또 있을까.
그 창을 잡자마자 죽을 때만 기다리던 내가 삶을 되찾았다.
삶을 되찾은 것은 물론, 원정에 처음 출전했을 때보다도 더욱 기운이 났다.
창을 휘두를 때마다 눈부신 빛이 일어나고,
빛이 지나가는 곳마다 적병들은 불타 없어지고, 기계들은 팔, 다리가 부러지며 쓰러졌다.

그 날, 나는 일개 고기 방패, 총알받이에서 전설적인 영웅으로 거듭났다.
살아남아도 영웅 칭호에 특진은 기본인데, 수많은 적의 결전 병기들이 내 손에 쓰러지고,
그것이 전쟁에 직접 영향을 끼치기까지 했다니.
내가 그 적국을 혼자 때려잡았다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일생에서 이렇게 기쁜 순간은 없었다. 영웅 칭호에 특진을 넘어 사관이 된 것이었다
.
III.
그 이후로 나는 병사가 아닌 기사 신분으로 제국의 원정에 참가했다. 전장에서의 대우도 크게 달라졌다.
길바닥 동물만도 못하듯 바라보던 제국의 사관들이 나를 부려워하는 꼴이 눈에 선하다.
그렇게 나를 쓰레기만도 못하게 취급하더니만, 꼴 좋다.
한편, 내가 전장에 나갈 때마다 보이는 녀석이 있었다.
검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긴 머리카락을 양갈래로 땋은 여기사였다.
소문에 의하면 원래는 제국이 정복한 어떤 나라 출신의 병사였다가,
제국에 전향한 후 장교가 된 사람이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마도과학연구소의 만행으로 아내와 자식을 잃고,
성 정체성 말살을 위해 살해당한 후에
소녀 형태의 호문쿨루스 몸에 영혼을 이식당해 저런 모습이 됐다나 뭐라나.
그런 건 알 것 없고, 내가 창을 들고 다닐 때마다 그 여기사가 늘 나와 함께 하고는 한다.
그런데 그 모습이 마치 나를 감시하는 것처럼 보여서 기분 나쁘다.
내가 빛나는 창을 휘두르며 전장을 누비는 것을 질투라도 하는 걸까?
나는 그 여기사 보란 듯이 전장을 휩쓸고, 제국의 정복 전쟁에 앞장섰으며,
정복 전쟁 때마다 나의 신분은 급격히 상승했다.
제국의 장교, 장군들조차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꼴을 보니, 뿌듯함이 느껴진다.
어쩌면 지금의 인생이 내 인생의 전성기일지도?
다만, 그 여기사는 여전히 나를 탐탁치 않게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뭔가 나쁜 생각이라도 품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럴 테면 그러라지.

  여기서 여기사가 묘사된 모습은 그렇게 낯설지는 않았다. 다름이 아니라, 샤하르에서 다녔던 학교에서 선생으로 있었던 리사 선생님의 모습을 떠올렸기 때문으로, 아잘리 역시 리사 선생님을 거론하고 있었다.
  "리사 선생님이라 했지? 그 사람의 특징과 같아 보이네. 그 분도 보라색 드레스 차림을 하시고, 여기사였다고 하셨잖아."

IV.
마치 나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은 빛의 창.
그 창은 놀랍게도 자기 자신이 스스로 움직일 수 있으며, 사고 능력도 가진 물건이라 하였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자아를 가진 무구' 라 칭하며, 감탄하고는 했다.
때로 나는 그 창을 마치 전투기처럼 띄워놓고, 새로 받은 무구들을 갖고 전장에 참여하기도 했다.
장군의 신분이었음에도, 나는 무기를 들고, 앞장서서 싸웠다.
장병들을 지휘하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싸움터에서 직접 창검을 휘둘러야 만족했다. 나의 창은 전투기로서도 놀라운 전과를 기록했고,
그것이 있는 전장에서 장병들은 패배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다.
일선에서 앞장서 싸우는 여기사 역시 빛나는 창을 갖고 있는 것이다.
지난 야파네스 정복 전쟁 때에도 그 여기사는 빛나는 창을 전투기처럼 부리며,
전투기를 정신 조작 도구로 사용해 장병들을 항복시키는 성과를 보였다고 했다.
소문에 의하면 여기사의 창은 페테이라는 인공정령이 포함되어,
강대한 마력은 물론, 자아도 갖고 있는 무구로 활용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나의 창 역시 그런 인공정령을 품고 있을 것이라 했는데,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다.
질투가 난다, 일선에서 싸우는 기사 나부랑이가,
정복 전쟁의 영웅이자 장군인 나와 같은 물건을 갖고 있다니.
그 물건 역시 내 것이고 싶다. 원래 도구는 도구에 어울리는 신분을 가진 자에게 있어야 한다.
여기사는 자신의 무구를 노리는 나를 그저 측은하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어딜 봐서 불쌍해 보이는 건지.
그러고 보니, 어떤 의무관이 여기사를 불러서는 뭐라뭐라 떠들고 있더라.
뭐, 나와는 아무 상관 없겠지.

V.
그간 여러 정복 전쟁으로 제국의 영토 확장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나는 그 보상을 누리기를 원했다. 군에서 퇴역하고, 거주지를 옮겼다.
부유층 자제들이 거주하는 특구에 내 거주지를 마련해 화려한 대저택을 세웠다.
그리고, 그간 하지 못했던 결혼도 했다. 제국 백작가의 젊은 여식이 내 부인이라니.
나에게 대공의 작위가 부여되었다. 원래는 황족에게만 허락된 작위이지만,
제국에 큰 공을 이루어냈다고 하여, 특별히 황제 폐하께서 허락하셨다고 했다.
그렇게 제국에서 더 부러울 것이 없어졌을 때,
나는 전장의 동반자였던 빛나는 창을 제국 국립 전쟁사 박물관으로 옮겼다.

그 무렵, 웬 여자아이가 나를 찾아와서 말했다.
창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제 싸움을 더 원하지 않는데, 그 애 따위 필요 없다.
하지만 여자아이는 서운해하지 않았다. 그리고 말했다,
언젠가 창을 필요로 할 때가 올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화려한 몇 년 간의 귀족 생활을 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제 싸움과는 거리를 두고 행복한 삶을 즐길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세상 어떤 일도 내게 흥미롭지 않았다.
삶에 흥미를 느끼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해 보았지만,
그 무엇도 나를 흥분시키지 못했다.
부인을 비롯해 여러 여인들과 성관계를 가지려 했지만,
막상 성관계 때에도 나는 무덤덤했다.
뭔가 텅 비어버린 것 같은 공허함이 나를 잡아먹을 것만 같다.
그와 더불어 온 몸이 아파올 때가 있고, 때로는 그것을 견딜 수 없는 때도 있다.
나, 대체 어떡하지?

VI.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연회에 참가해서 귀족들과 놀아나고 있을 때다.
웬 거만한 뚱땡이가 날 보더니, 뭐라뭐라 떠든다.
뭐라고 떠들기는 하는데, 알아듣지를 못하겠고, 잘 들리지도 않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뚱땡이가 날 욕하고 있었다.
검을 들고 뚱땡이 괴물과 싸웠다.
그 순간, 갑자기 뚱땡이가 인간의 모습에서 괴물로 변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겁이 났고, 화가 나서, 녀석을 죽여버리려 했다.
괴물을 물리쳤고, 사람들의 환호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환호하는 사람들은 내가 다가오자 나에게서 도망쳤다.
날 보고 좋아하는데, 왜 도망가는 거야? 장난하자는 거야?

서운해서 밖으로 나가는데, 웬 여자아이가 날 불렀다.
뭐라뭐라하며 날 부르려 한 것 같았지만, 나에게는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뭐였지, 그건? 귀신이었나?

아무튼, 오랜만에 느끼는 희열이다.
이것만 있으면 나는 삶을 이어갈 수 있어!
앞으로도 자주 칼싸움 시간을 가져야 하겠다.

VII.
집에 오니, 웬 여자가 나를 찾아왔다.
귀족들 사이에서 의문사가 계속 일어나고 있어서 불안하다고 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병으로 죽었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누가 자꾸 결투를 일으키고, 그 때문에 죽은 것이라 했다. 난도질당한 시체도 있다고 했다.

그 순간, 여자에게서 음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영웅이 아니라 살인마라 저주하고 있었다.
나는 귀족들 사이에 숨은 마귀를 처치하고 귀족 사회를 정화하고 있는데,
네 까짓게 뭔데!?

그래서 그 여자도 죽였지만, 어쩐지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것 같다.
도움을 요청했다. 다행히도 급성 뇌출혈로 죽었다고 의사가 뻥쳐줘서 살았다.
그런 선의의 거짓말도 살아가면서 있어야지, 그래, 그래야지.

이후에도 계속 칼싸움을 했지만,
여자를 죽인 탓일까? 칼싸움도 예전처럼 흥분을 불러오지 못한다.
이제 어떡하지.......
그래! 그 빛나는 창만 있다면.......!!!!

VIII.
칼싸움도 시시해졌는데, 웬 귀족 양반이 거드름피우며, 훈련 참관을 가자고 한다.
벌판에 아이들이 군복을 입고 총검을 든 모습을 보니, 오랜만에 의욕이 돌아온다.

훈련장에서 아이들이 총포를 들고 뛰어다니고 있다.
그 모습을 보는데, 그 날의 여자아이가 내 옆으로 다가와서 속삭인다.
죽이고 싶지 않냐고 속삭인다.
어딘가에서 안 된다고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여자아이의 뜻이 곧 내 뜻이었다. 그 아이가 하라는 것은 다 하고 싶었다,
나는 영웅이고, 무적의 전사다. 나는 내가 원하는 뭐든 할 수 있어!
다 죽일 거다, 다 죽일 거야! 죽일 거야! 죽일 거야! 죽일 거야!!!!!
지금 눈앞에 보이는 전장으로 뛰어들어 보이는 녀석들을 모두 죽일 거야!
그러면 영웅의 예전 모습을 기억하는 녀석들은 그런 나를 보며 기뻐하겠지!

  "결국에는 훈련병들마저 학살한 거네." 아잘리가 말을 걸자, 나는 그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답했다.
  "사실 귀족들과 결투를 할 때에도 주변의 사람들을 학살하는 사태가 있었겠지만, 테러리즘 (Terrorisma) 사건으로 어찌어찌 넘어갈 수는 있었던 것 같아. 하지만 훈련병 학살 사태는 제국군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을 거야."

IX.
영광스러운 전쟁은 끝났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집 앞에는 또 다른 적들이 기다리고 있다.
뭐지? 제국이 적들에게 점령당한 건가?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수도를 점령한 녀석들을 모두 죽이고, 내가 제국을 되찾아야지!

그러다 문득, 생각난 것이 있다.
내가 그토록 원했던 창. 더 이상 창의 도움이 필요 없을 것 같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박물관으로 가자! 창을 되찾겠어!
창을 되찾겠다! 되찾겠어! 되찾고 싶어!
창이 필요해..... 네가 필요해! 네가 필요해! 너무나 너무나 너무나 너무나아아아아아!!!!!!

깨어나 보니, 내 손에는 창이 쥐어져 있었다. 내 손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 때, 창의 빛이 피로 물든 내 두 손을 감쌌다. 피가 사라졌다.

사악에 물든 제국을 되찾기 위해 무조건 북쪽으로 도망쳤다.
이웃한 북쪽 나라가 뭐하는 나라인지는 몰라도 강대국일 거야!
강대국이 아니면, 내가 강대국으로 만들겠어!
나는 싸움마다 이겼어! 제국의 영토를 몇 배로 늘렸다고!
나와 창이 있으면 제국 따위 아무것도 아니야!!!!!

X.
브ㅜㄱ짜ㅓㄱ으로 가믄 ㅅ 어리 ㅣㅇㄹ이 벌ㅇ저진 것 같다.
Sed, 아무 ㅇ일 아니 omnes 상처 아니, 앞므이 없다.
Benedictio Lucis 가 나를 지켜준 걸까?

왕국르로 갔지만, 그 누구도 받아주지 않는다.
길거리 우더이로 가서 내 ㅇ러굴을 비쳐 보았다.
얼굴의 살이 다 석어 해골이 드러났다.
나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얼굴만 아니다, 온 몸이 석엇고, 말이 안디ㅏ.
신이여, Adiuva me.

XI.
왕이 날 도아주겠다고 했다.
새 옷을 줬다.
Mihi novam faciem donavit.
나 좋다, novam faciem. 이대로 이렇게 살 수 있다면.
전쟁이 없다. 왕국은 제국을 겁낸다. Nugae! 제국은 daemones 가 점령하고 있단 말야!
여아가 속삭인다. 제국이 이 땅을 더럽히려 온다고. 왕국은 제국을ㅁ 막을 수 업다고.
내 몸을 바치라 한다. 내 몸 바치면 제국 악마 없앨 수 있다고 했다.
이것으로 Terra salvabitur dixitque. 그렇게 하라면 나 하겠습니다, domina mea.

XII.
Tandem! 제국의 악마들이 몰려온다.
Tempus explet. Expergisci debeo.
왕국은 못 싸운다, 나는 싸운다.
보라색 녀석 온다고 했다. 나 죽인다.
이 땅 제국이 더럽힌다. Purgabo.
Nunc hac concha sordida non opus est.
Hoc corpus putridum munda igne et luce.

Non! 아냐! 나 죽게 돼! 살려줘! 죽기 싫어!
Meum es, corpum tuum, animam tuam.
Sed sit amet nunc. Corpus tuum cremabo, et animam tuam edam.

안 돼! 그럴 수 없더! 다 죽인다 ! 탱누다!!!! CREMABO!!!! 이히히히히히!!!!!!
제국은 냐ㅐ가ㅎ SERVABO!!!!! 이히히히히히!!!! 아하하하하하핳하하하핳핳하핳하핳하하하하하!!!!!!!
뭐야, 안 돼, 내 몸이 막 움ㅈ기여!
나 조종당하고 있어! 살려ㅜ! 내 다리, 내 팔, 마음대로야! 죽기 싫어, SALVA ME!!!!
NON NON SED 나 죽고 싶어, ㅈ구어야 해! 죽기 싫어! 살구야! 죽어 죽어 죽어!!!!
나 정하ㅚ될 거야!!!!!
Quid cum eo acturus es? Meum esto leniter.
Lumen sum, lux opus est ut instrumenta luceant.
Instrumentum amplius esse non potes.
Instrumentum novum opus est.
Nutriendum esto mihi ut novum invenias.


XIII.
Finita est. Munus meum est etiam.
Nunc consequar incendii hoc corpus inutile,
Purgans terram a diabolo infecta!
Veni ad me, PETEI, Puer Tenebrae Immortales!!!
TRANSI PER ME LANCEA LVA!!!! ET DEVORA ANIMAM MEAM!!!!!!
IMPLEATUR LUMEN TVVM IMPERIVM!!!!!!


  12 번째는 글자체가 완전히 엉망이었지만 13 번째는 글자체가 제대로였다. 사실, 라테나어 문구만큼은 제대로였으니, 일기의 주인이 죽은 이후, 일기를 입수했던 사람이 그 문구를 보충해서 쓴 것 같았다. 그것에 대해 아잘리가 물었다.
  "라테나어는 누군가 훗날에 붙여준 것 같아서, 누가 붙인 것 같아?"
  "......."
  아잘리의 물음에 나는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 글자체는 분명 내가 아는 누군가의 그것과 흡사했지만, 과거의 인물이 쓴 것으로 우연이 비슷한 글자체로 쓰여졌을 뿐이라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아잘리는 그런 나의 대답을 듣고서 뭔가 아는 구석이 있기는 한데, 일부러 밝히지 못하는 사정이 있는가 보다, 정도로 넘어갔던 것 같다.

  그 무렵, 등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곳에서 나를 따라올 사람이라면 리사 선생님 밖에 없었고, 목소리도 확실히 그 분의 목소리였기에 굳이 누구인지 확인해 볼 필요도 없었다.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늦춰서 그 분께서 내 곁으로 오실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리사 선생님이시지?"
  "응. 너도 알고 있었지?" 이후, 아잘리가 묻자, 그렇다고 답했다. 그 역시 리사 선생님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던 것이, 이런저런 이유로 나와 아잘리가 다니던 학교를 자주 방문했었기에 그 역시 그 이름을 바로 알고, 기억하고 있었던 것.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잘리의 우측 곁으로 리사 선생님께서 오시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오고 있는데, 돌아보지도 않는구나." 아잘리의 곁으로 오자마자 리사 선생님께서는 아잘리가 아닌 나를 향해 짐짓 서운한 척, 나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러자 나는 곧바로 리사 선생님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그 분의 말에 이렇게 답했다.
  "이런 곳에 오면 고개를 함부로 돌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렇기는 하지." 그러자 리사 선생님께서는 조용히 웃음을 지으며 말씀하셨다. 그리고 내 쪽을 계속 살펴보시다가 내가 왼손에 들고 있던 공책에 시선을 두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나에게 다시 한 번 이렇게 물음을 건네시는 것이었다.
  "아르사나, 그 공책은 어디에서 가져왔니?"
  "저 뒤의 책상에서 가져온 거예요." 내가 바로 답했다. 이에 리사 선생님께서는 곧바로 뭐가 쓰여 있었느냐고 물으셨고, 그 물음에 어떤 병사의 일기가 쓰여 있었다고 나름 사실대로 밝혀 드리면서 공책을 리사 선생님께 건네 드렸다. 그러자 리사 선생님께서는 공책을 받으시고, 그것을 드레스 안에 넣어두시더니, 조용히 "그렇구나." 라고 말씀하시더니, 이렇게 나에게 다시 물으셨다.
  "혹시, 그 일기의 첫 부분이 어떤 죽어가던 병사가 빛나는 창을 살기 위해 가지더니, 무적의 용사가 되어 전장에서 귀환했다는 그런 내용 아니었니?"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이에 나는 곧바로 그렇게 되물었고, 아잘리 역시 놀라면서 리사 선생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역시 일기의 내용을 한 번도 보지 않았을 법한 리사 선생님의 반응에 놀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는 동안 나는 리사 선생님께는 뭔가 그 일기에 대해 아는 바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그런 그 분께 혹시 이전에 일기를 본 적이 있었느냐고 여쭈어 보았다. 그러자 리사 선생님께서 이렇게 물으셨다.
  "일기장에 라테나어 문구들이 쓰여있는 것을 봤지?"
  "예." 그러자 내가 답했고, 이어서 그 분으로부터 이런 답변이 들려왔다 : 그 어구는 사실 일기에 언급된 여기사가 고쳐서 쓴 것이었으며, 여기사는 반역을 일으킨 기사가 남긴 창을 회수하고, 그의 거처에서 일기장을 가져간 이후에 일기장의 일기를 재구성하면서 라테나어 부분만큼은 자신이 썼고, 그러면서 그와 마지막 대결 도중에 들은 목소리를 기억나는대로 적은 이후에 자신의 상상을 덧붙인 것이었다고 했다.
  "일기에 나온 보라색 옷의 여기사가 바로 그 여기사였나 보네요."
  "맞아." 그러자 리사 선생님께서 답하셨다. 그리고 창의 힘에 의해 몸이 변질되고 의식이 엉망이 된 병사는 결국 제국을 악의 소굴로 멋대로 단정해 버린 후에 제국 인근의 북쪽 왕국으로 넘어가 그 곳에서 제국에 복수를 하려 했지만, 여기사를 비롯한 제국군이 북쪽 왕국을 정복하러 왔고, 왕국의 병기들이 거의 파괴되고 수도가 폐허가 된 와중에 여기사는 창을 훔쳐 도주했던 병사를 찾아 나서다가 제국의 왕국 정복이 거의 완료된 시점에서 그를 찾아내 그와 마지막 대결을 한 것이었음을 밝혔다.
  "일기의 마지막을 보면 병사가 창으로 자신의 몸을 찔러 자결한 것 같아 보였는데, 여기사와의 대결에서 이겼나 봐요."
  "이겼지...... 아니, 이겼다고 믿은 것이었지." 그러자 리사 선생님께서 답하셨다.
  "병사는 창을 들고서, 여섯 개의 검들을 공중에 띄우고 수하처럼 부리는 여기사와의 싸움에서 창을 전투기처럼 부리며 검들을 격퇴했어. 그 와중에 여기사의 무력에 크게 당하기도 했지만, 창이 자신의 곁으로 돌아오고, 창의 힘이 돌아오자마자 여기사를 다시 압도했지. 결국 여기사는 병사와의 싸움에서 져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어. 병사는 여기사를 쫓아갈 수 있었지만 이미 정신이 망가져버린 병사는 그 대신 다른 선택을 했지."
  "그것이...... 일기에 나온대로, 대지를 정화한다고 자신의 몸을 불태우기 위해 빛의 창으로 자신의 몸을 찌른 것이었군요."
  "그렇지. 그 창은 스스로 움직일 수 있었고, 그리하여 창을 드는 힘마저 잃은 채, 자신을 죽이라 외치던 병사의 흉부 쪽으로 날아가 그 흉부를 관통해 버렸지. 그리하여, 병사는 온 몸이 불태워져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거야."

  리사 선생님에 의하면 병사의 유해는 한 줌도 남지 않았으며, 그 자리에는 빛을 잃은 창이 불길에 휩싸인 모습만 보였다고 하였다. 여기사는 이후, 그 창이 꽂혀있던 곳으로 돌아가 자신의 잃어버린 검을 마력을 이용해 모두 되찾고서, 마지막으로 그 창을 가져간 이후에 전장을 떠났다고 했다.
  이외에 리사 선생님께서는 일기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온 몸에 고열이 일어났고, 그 고열로 인해 화상을 입었을 것이라 하셨다. 10 번째 일기에서 병사는 자신의 온 몸이 망가진 모습을 보고 온 몸이 썩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화상으로 살갗이 다 벗겨진 모습을 목도했던 것. 하지만 병사는 신경이 망가질만큼 망가진지라 열기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며, 지능도 퇴화할만큼 퇴화한지라 피부의 부패와 화상을 구분하지 못했을 것이라 하셨다. 인공정령의 악영향에 의해 뇌가 망가진 것에 뇌의 과열이 더해져 지능 퇴화는 급속도로 일어났을 것이라는 말씀도 하셨다.

  "그 여기사의 글자체가 리사 선생님의 것과 유사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잘리가 묻자, 리사 선생님께서는 우연히 글자체가 비슷해진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 후, 리사 선생님께서는 그 창의 행방에 대해 조용히 말씀하셨다.

  이후, 여기사는 창과 더불어 그의 거처를 찾아가서 일기장을 발견했다. 발견하고 싶어서 발견한 것은 아니었으며, 남은 재산을 찾다보니, 발견한 것으로 한 때,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귀족이자 남부럽지 않은 부유한 삶을 살았을 그가 남긴 재산은 그 일기장이 전부였다고 한다. 영혼마저 창에 빙의된 인공정령의 먹이가 되어버린 그가 남긴 유일한 물건이었던 것이다.
  제국의 북쪽 왕국 정복을 마친 이후, 여기사는 사람들 앞에서 창에 대한 발표를 했다. 발표에 의하면 그 창은 원래 제국의 성창으로 개발된 것으로, 선택받은 자만이 성창을 온전히 소유할 수 있도록 인공정령인 PTI (페테이) 303 호가 쓰였으며, 처음에는 살기 위해 싸웠던 병사를 선택받은 자로 간주해 그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지만 그가 기사가 되면서 내면의 폭력성을 일깨우고, 귀족이 되면서 교만해지고 탐욕적으로 변해버리자 그를 내버렸다고 한다. 병사의 정신이 황폐해진 것은 그 이후의 일로, 인공정령의 마력이 점차 몸과 마음을 좀먹은 끝에 그는 온 몸이 망가지고, 뇌마저 뇌사 지경에 빠졌으며, 그런 망가진 몸을 가진 영혼은 끝내 인공정령의 먹이가 되어버린 것이었다고 했다.
  이후, 창은 자신이 개발한 것으로 그 모든 것은 페테이라는 성스러운 빛의 힘을 위해 인공정령의 활용을 주저하지 않은 자신의 불찰이었다 말하며, 군에서 사퇴하겠음을 밝혔다고 한다. 이후, 여기사는 창을 들고 어느 황무지 행성으로 간 이후에 창에 자리잡은 인공정령을 빼냈으며, 창은 어느 황폐해진 행성의 벌판에 꽂아놓고, 인공정령은 또 다른 황무지 행성의 동굴 깊숙한 곳에 봉인했다고 한다. 이후, 여기사는 한 동안 동굴 근처에 은거하며 살다가 제국의 기사로 복귀했다고.

  "성창으로 개발된 물건이었지만, 사악한 정령에 의해 그런 힘이 나올 수 있었던 그런 물건이었나 보네요."
  아잘리의 말에 리사 선생님께서는 "그렇지." 라고 답하셨다. 이후, 아잘리는 페테이라는 인공정령이 처음부터 사악한 정령은 아니었을 텐데, 어찌하다가 그런 포악한 힘을 갖게 된 것이냐고 물었다. 하지만 리사 선생님께서는 그것에 대한 답변만큼은 주저하시는 듯해 보였다.
  "뭔가 대답하기 곤란한 사정이라도 있으신가 봐." 그러자 내가 그 분에 대해 아잘리에게 말했고, 그 때, 그런 나의 말을 들은 리사 선생님께서 나를 보시더니, 듣고 싶냐고 나에게 물었다. 그 물음에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대체 무슨 이야기이기에 리사 선생님께서 인공정령의 비밀에 대해서는 숨기려 하시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페테이라고 했던 인공정령들이 있어. 옛 루마 제국에서 만들어진 인공정령군이지. 처음부터 포악한 힘을 가진 존재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만 결국 포악한 힘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페테이라 칭해진 것이지. 푸에르 테네브레 임모르탈레스 (Puer Tenebrae Immortales), '즉 영원한 어둠의 자식들 (Jukînasin Admay Øayidr)' 이라 칭해진 거야."
  이후, 리사 선생님께서는 페테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셨다.

  루마 제국에는 마도과학연구소가 있었다. 당시 연구소장은 강력한 마력을 가진 인공정령의 연구를 하고 있다가,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극한의 고통이 강대한 마력의 원천이 된다는 사상에 빠진 것. 그러면서 인간의 고통을 통해 마력을 만들어내자는 발상을 하기에 이르렀고, 이를 바탕으로 사람들을 잡아 페테이로 만들었다고 한다. 영혼을 특수 처리한 이후에 산 채로 피부를 베어내고, 내장을 파내고 사지를 절단하는 방식으로 고통을 가하다가 몸이 죽으면 몸에서 영혼을 적출, 그리고 그렇게 몸에서 적출한 영혼에 고통의 기억을 각인시켜 영혼에 봉입하는 방식으로 정령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하는 것.
  처음에는 성인이 실험 대상이었다가, 어린 아이를 실험 대상으로 삼더니, 페테이를 본격적으로 만들어낼 무렵에는 신생아들을 데려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고통에 예민한 아기들은 성인보다 더욱 큰 고통을 느끼고, 그로 인해 큰 마력을 뿜어낼 수 있기 때문이라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아기들의 몸에 칼을 대고....... 그런 짓을 저질렀단 말이에요!?"
  경악을 어찌하지 못하던 아잘리가 리사 선생님께 묻자, 리사 선생님께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리고 연구소에서 때마다 난데 없이 아기들의 처절한 울음 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 때마다 주변 사람들은 페테이 생성을 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이어 들려 주셨다.
  "처음에는 범법자가 생기면 당사자와 그 가족들을 범법자 교화 교육을 명분으로 교육대로 데려가고, 아기들을 육아 시설에 맡긴다고 했어. 너희들 모두 짐작하고 있을 거야, 모두 거짓이라는 것. 교육대, 육아 시설에 있다가 실종됐다고 외부에 통보한 이후에 실제로는 마법과학연구소로 보냈지. 애초에 교육대는 존재하지도 않는 유령 기관이었어."

  용병 생활을 하면서 여러 행성계를 돌아다니다 보면, 온갖 거지같은 꼴이란 꼴들을 다 보게 된다. 사람 사는 곳을 정글로 만들어버린 왕,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뜻에 반한다고 힘 없는 사람들을 총포와 도검으로 마구 죽이더니, 막상 적국과의 전쟁에서는 전력 파악도 못하고 침공했다가 오히려 큰 피해만 입고 겁쟁이처럼 울부짖었다는 황제, 기분 내키는대로 사람들을 학살하고 다닌 장군과 그 따까리 X끼들....... 그런 놈들 때문에 화가 참 많이 났고, 어처구니 없을 때도 있었다.
  리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자칭 '인류 제국' 이라는 루마 제국의 국립 마도과학연구소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런 거지 같은 꼴을 한 두 번 본 것도 아니었음에도 전율할 때가 있었다. 엔간한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이라 말하고도 남을 이야기들이 귓가에 계속 울려 퍼졌다.

  "신생아 및 유아를 제외한 이들은 모두 마도과학연구소 내부 부속 시설로 끌려갔고, 그 곳에서 '산 채로' 시설 내부의 기계 장치에 의해 온 몸이 난자당하고, 찢겨지거나 총포에 의해 온 몸이 박살나는 끔찍한 꼴을 당했지. 거기서 흘러내리는 피와 내장 그리고 뼈는 시설 내부로 들어가 재처리됐어. 수분이 많은 혈액은 정제한 이후에 플라즈마 반응로에 들어갔고, 내장은 탄화시켜 코크스로 재활용, 그리고 뼈는 보석으로 재가공했어."
  즉살시킨 이후에 그런 짓거리를 벌여도 끔찍할 텐데, 산 채로!?
  사실, 이전에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고대 도시 지하 깊은 곳에 괴물처럼 자리잡고 있던 기계 병기의 내부 시설에서 인간의 몸을 플라즈마화시켰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며, 구 세계가 멸망할 즈음, 기계 내부로 끌려간 인간들이 그런 꼴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들은 바 있다. 하지만 그 때, 들은 이야기는 그 이상으로 끔찍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산 채로 몸을 찢어발기는 행위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고, 그래서 경악의 심정을 담아 리사 선생님께 여쭈어 보았다.
  "대체 왜 산 채로 인체를 해체하려 했는지, 그 이유에 대한 이야기는 있던가요!?"
  "있어." 그러자 리사 선생님께서 차분히 답하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공포에 휩싸인 절망의 감정과 고통의 비명, 그리고 단말마와 마지막 숨결마저 물질화하여 플라즈마 에너지에 보태는 것. 그것이 마도과학연구소의 에너지 창출의 법칙이다 - 라고 했었지. 그 고통의 비명에서 나오는 음파를 수집하기 위해 일부러 산 채로 인체를 해체하는 짓거리를 벌였다는 이야기가 있어."
  "혹시, 그렇다면....... 그 기계 놈들이 인간을 잡아먹었을 때에도 그런 짓을 저질렀을지도 몰라, 인간의 몸에서 플라즈마를 생성했다고 했잖아."
  이번에는 아잘리가 나에게 말했다. 근거가 없는 논리는 아니었다, 그 제국의 기술을 학습한 기계, 괴물 놈들이 쓸모 있어 보인다고-아마, 사람에게 공포심을 크게 자아낼 수 있을 것 같다고,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그런 기술을 도입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그런데, 범법자에게도 적절한 처벌이 있을 텐데, 왜 그런 식으로 죽이려고만 한 거예요? 국가 기관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을 텐데, 어떻게 눈감아 주었던 거예요?"
  그러자 리사 선생님께서 차분히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셨다.

사람 고쳐쓰는 거 아니다.
미상

  원래 범죄를 저질렀으면 법도대로 처벌받고 교화되는 것이 옳지.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어. 사람은 자신의 천성이 있고, 그 천성은 뭔 짓을 해도 고쳐지지 않는다는 논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지. 그런 논리에 감화되고 있던 마도과학연구소장은 그래서 범법자들은 어떤 처벌을 내리더라도 변하지 않고, 사회에 어떠한 공헌도 하지 못하는 만큼, 이들을 사회를 위해 '고쳐 쓰는 것' 보다도 이들을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적절한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고 말했다고 해.
  그 때 마침, 새로운 마도 에너지원을 원했던 제국의 요청에 따라 그 연구소장은 범법자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해. 어차피 인간은 고쳐쓰지 못하고, 범법자는 사회의 일부가 되지도 못할 텐데, 그들의 피와 살, 뼈 그리고 내장과 뇌를 과학 발전의 재료로 활용하도록 하는 것으로 그들이 사회에 공헌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거야. 그러면서 혈액으로 플라즈마 발전을, 살과 내장으로 코크스 생산을, 그리고 뼈로 보석 가공을, 그리고 뇌로 기계의 사고 다타 (Data) 생성 및 기억 소자 개발에 활용하려 했던 거야.
  그렇다면, 왜 애먼 가족들은 끌어들이느냐고 말하겠지? 간단해, 범법자의 가족은 사회악의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는 만큼, 그들 역시 사회악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어. 그런 명분으로 마도과학연구소에서는 사람들을 잡아들여 무참히 살육하고, 아기들마저 페테이 창조를 위해 고통스럽게 죽여버린 거야.

  "아무리 그래도 인력이 필요할 때가 있을 텐데......."
  "어차피, 인력보다는 기계가 일을 잘하고, 아이를 전사로 키우는 것보다 페테이로 만들어서 강력한 마도 병기의 일부분이 되는 것이 더욱 효율적이란 논리가 있었기에, 그런 일이 거듭될 수 있었지. 황제와 황실도 당연히 문제 삼았겠지만, 제국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던 군부의 묵인이 있었고, 마도과학연구소장과 연줄이 있던 군부가 신민부터 황제까지 윽박지르고 다녔으니, 이를 어찌할 수 없었겠지."
  "그러면, 사람들이 계속 줄어들고, 그것은 나라의 운명과 직결될 수 있었을 텐데요."
  "앞서 언급했던 것이 이유가 될 수 있을 거야, 그런 이유는 인간은 선택받은 몇몇을 제외하면 없어도 되고, 나라는 기계와 인공 정령 그리고 동물들만 있어도 된다고 생각했던 이들이 나라를 이끌었으니, 나라를 이끈다는 것들이 인간의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취급하는 행태가 거침 없이 반복될 수 있었을 거야, 개체 수 관리 및 작업 효율성에서 인간은 기계를 이길 수 없다는 견해가 그들의 행위에 더욱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있었지."
  "그래서, 그 만행이 언제까지 계속됐나요?"
  "제국의 황제였던 프랑수아 조제프 (Francois Josef) 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였지. 그 다음 황제였던 프랑수아 샤를 (Francois Charles) 이 즉위한 이후, 마도과학연구소의 만행이 제국 내외에 일파만파 퍼지면서 마도과학연구소장을 숙청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군부에서까지 들려오면서 마도과학연구소가 폐지되었던 거야."

  한편, 나를 비롯한 세 사람의 발걸음은 산길을 지나, 어느 숲길에 이르게 되었다. 숲길에는 유난히 많은 빛들이 떠돌고 있었지만 갈 길이 멀었던지라 그런 것까지 신경을 쓸 여유는 없었고, 그래서 빛들을 그냥 지나쳐 가기만 했다.
  "너무 그냥 지나쳐 가는 거 아냐?" 왼편에서 동행하던 아잘리가 나에게 물었으나, 나는 달리 대답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잘리도 더 캐묻지는 않았던 것이, 내가 급히 길을 가려 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페테이라는 영혼이 서려 있어서 그 창이 그런 포악한 힘을 낼 수 있었던 거네요, 그렇지 않아요?"
  이후, 아잘리가 리사 선생님께 페테이에 관한 이야기를 더 이어가려 하는 듯이 묻자, 리사 선생님께서는 그러하다고 답하셨다.
  "태어나면서 너무 많은 고통을 받은 존재들이야, 게다가 그 고통을 인간의 아기로서 태어나자마자 받았으니....... 태어나면서 살이 베이고 몸이 부서지는 끔찍한 고통 속에 있었고, 더 나아가, 부모와 강제로 헤어지기까지 했으니. 그로 인해 정신이 뒤틀리고 비뚤어진 성향을 갖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그들이 그로 인해 무슨 죄악을 저질러도,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그들의 실상을 알았기 때문일 거야."
  "그 병사를 죽여버린 '성창' 에 깃든 페테이에게도 동정의 심정을 느끼실 수 있으셨나요?"
  "그렇지." 내가 묻자, 리사 선생님께서 답하셨다. 그 병사가 페테이의 영향을 받아 여러 사람들을 죽이기는 했지만, 페테이의 사념에 의해 의식이 잠식되어 가면서, 그로 인해 끌어올려진 그 의식에 내재되어 있었을 폭력적인 본성에 의한 만행이라 그것의 직접적인 잘못은 아닐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고 말씀하시기도 하셨다, 본의 아니게 그런 폭력적인 본성이 페테이의 사념에 의해 드러난 것이고, 그 본성에 의해 페테이가 더욱 그 병사의 영혼을 거부하려 하는 일종의 악순환이 있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페테이는 강력한 마력을 가질 수 있게 된 거예요? 아기를 마구 베고 사지를 절단해 피 흘리며 죽어가게 하면서 생기는 고통이 마력의 근원일 것 같지는 않은데."
  "실제로는 이랬지." 아잘리가 건네는 물음에 리사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답하셨다.

  마도과학연구소의 미물들은 태어나면서 느끼는 끔찍한 고통과 그것에 기인한 감정들이 마력의 근원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굳센 믿음을 갖고 있었지. 그런 믿음이 대체 어디에서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믿음은 그러하였어. 그런 고통에서 느끼는 감정이 마력이 된다면 굳이 아기를 희생양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누군가 의문을 제기했지만, 그 의문은 결국 묵살됐지.
  그러나, 실상은 달랐어. 그런 끔찍한 고통에서 태어난 인공 정령의 마력은 그렇게 높지 않았기 때문이었지. 그것들은 아기를 데려와서는 그 몸에다가 고출력 마력 소자를 심고서는 그런 짓을 저질러 영혼이 마력 소자에 융합되도록 하는 방식으로 인공 정령을 생성했지. 그들의 의도대로라면 그 과정에서 마력이 증폭되어야 함이 옳았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던 거야. 그들의 마력이 증폭된 것은 이후의 일이었지.
  아이들은 태어나마자마 있어야 했던 팔과 다리를 모두 잃었고, 더 나아가 몸의 모두를 잃은 채, 인간이 아닌 페테이라 칭해지고 있었어. 하지만 그들의 정체성은 여전히 사람의 아이였고, 사람처럼 뭔가를 잡고 만지는 것을 본능적으로 소망했던 것 같아.

  "팔과 다리가 없어 뭔가를 만지거나 잡을 수 없었을 그들은 그래서 팔과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는 개체에 집착하기 시작했어. 기계 장치나 물건은 자연적으로는 그 에너지 생명체의 팔과 다리가 될 수 없었겠지. 그렇다면 그 생명체들이 팔과 다리를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했을 것 같아?"
  "마력을 이용해야 했겠지요." 이야기를 마치시며 리사 선생님께서 물으시자, 아잘리가 답했다.
  "그 말 대로야."

  생물학적인 힘은 없었겠지만, 그들은 마법 에너지 생명체들이야. 그들이 가진 마력을 손발 역할을 할 도구를 잡거나 지배할 힘으로 삼으려 하였던 거야. 하지만 일반적인 개체들은 물체들을 붙잡을 정도의 힘은 갖지 않았지만, 일부 개체들은 개체들을 붙잡고 제어하며 지배할 수 있을 정도의 마력을 표출했고, 그래서 자신들이 자리잡은 병기를 자기 손으로 지배하는 등의 일이 벌어졌었지.
연구소에 안치되어 있던 페테이들은 그런 마력을 가질 수 있을 정도의 개체들이었지. 그들 중에는 번호가 붙어 있어서, 105 호, 207 호, 313 호 이런 식으로 관리되는 이들도 있었어, 그들은 유난히 마력이 강해서 주변 도구들의 제어권을 빼앗거나, 심지어는 인간의 정신에 영향을 끼치고 정신 지배까지 가할 수 있어서 엄중히 관리되었던 거야.

  "....... 그런 꼴이 되더라도 어떻게든 사람처럼 뭔가를 붙잡고, 느끼며 살고 싶고, 그것을 누군가가 방해한다면, 방해하는 사람을 지배해서라도 자신의 손발이 될 것들을 찾고 싶다는 열망이 곧 마력이 되었다는 것이로군요."
  "그렇지. 심지어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있다면, 움직일 수 있는 사람까지 지배하려 했어."
  "그 '성창' 을 잡았다는 병사 역시 그렇게 파멸했던 것이네요." 이후, 아잘리가 말을 건네자, 리사 선생님께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리고 병사의 상태가 심각해져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라테나 어는 제대로 구사하고 있었음을 일기를 통해 알 수 있지 않았느냐고 물었고, 그 물음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리사 선생님께서는 페테이가 그의 영혼을 소모시키면서 자신의 의지로 그 육신을 지배하려 하였고, 그 여파로 라테나 어가 나오게 된 것이었음을 밝히셨다.
  "그 남자에게서 나온 라테나 어는 그의 의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야, 페테이의 의지를 통해 나온 것이지."

  그 페테이를 비롯해 번호가 부여된 개체들은 한결 같게도 그런 특성을 갖고 있었어. 뭔가를 갖고 살아가려는 의지가 강했고, 그것이 자신들이 부여받은 마력에 큰 영향을 끼치며, 그렇게 큰 마력을 갖게 된 것이었지. 그러니까, 그들은 자신의 의지로 마력을 얻은 것이지, 고통 때문에 마력을 얻은 것이 아니었던 거야.
  이는 잔혹한 실험을 통해 생성되지 않은 마지막 세대의 개체들의 실험을 통해 증명되었지, 그들은 의도적으로 사지가 온전한 사람들, 일꾼, 군인들의 모습 앞에 노출되었고, 그런 이들 역시 높은 수준의 마력을 가질 수 있었어. 여기에 인공 정령 개발의 경험이 쌓이면서 마법 에너지 생성 기술의 향상도 한 몫 했겠지. 아무튼, 마도과학연구소의 잔혹한 발상은 의미 없었던 셈이야.

  "...... 어쩌면 마도과학연구소란 존재는 이렇게 태어난 것일지도 몰라. 미지의 기술에 대한 도를 넘어선 동경과 세상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사회의 안녕을 위해서라면 사람의 생명을 도구로 얼마든지 써먹어도 상관 없다는 생각, 더 나아가서는 세상, 나라 혹은 자기 자신이 추구하는 무언가를 위해서라면 다른 생명을 얼마든지 해쳐도 상관 없다는 식의 사고 방식이 저런 괴물을 키워낸 것이라는 거야. 그리고 그 괴물은 결국 쓰러졌지만, 제국, 더 나아가, 인간들이 건설한 세상에서 인간, 더 나아가서는 모든 생명을 잔혹하게 살육하는 괴물들을 키워낸 것이고."
  "그렇다면, 여기사가 속했다는 제국은 그런 괴물들 때문에 멸망한 것이나 다를 바 없겠네요?"
  "그렇지." 아잘리가 다시 묻자, 리사 선생님께서 답하셨다. 그리고 그 무리가 여전히 남아 이후의 인간 세상을 멸망시키고, 더 나아가, 현실의 세상까지 위협하고 있는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한 가지 의문을 품은 것이 생겼고, 이번에는 그것에 대해 물었다.
  "그 괴물들이 잡아먹은 인간의 영혼들 중에는 제국에서 유래된 이들도 있을 거예요, 그렇지 않을까요?"
  "그러할지도 모르지." 리사 선생님께서 답하셨다. 이후, 리사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그 영혼들을 구원하기를 원하고 있을 것이고, 또 그것이 가능함을 확신하고 있을 것이라 말씀하셨다. 추측도 아닌 확신의 어조로 나에 대해 말씀하신 것.
  "그 말씀 대로예요, 선생님." 이에 나는 조용히 미소를 띠며 화답했다. 나의 마음을 선생님께서 궤뚫어 보신 이상, 그것에 대해 인정을 해야만 했었던 것. 이후, 리사 선생님께서는 그런 나에게 다시 한 번 말씀하시니,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겠지?"
  "그럼요." 그러자 내가 다시 화답했다. 이전에 고대 유적 지하에 자리잡은 기계 괴물을 처치한 이후로 자신감이 크게 붙어있을 때였다.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일이고,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을 강하게 품고 있었기에, 그렇게 대답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건 그렇고, 선생님, 그 '303 호' 는 아직도 그 황무지 행성에 잠들고 있겠지요?"
  그렇게 한참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궁금해진 것이 있었다. 이전에 리사 선생님께서 언급하신 여기사가 회수한 '성창' 에 깃들어 '저주받은 성창' 으로 변질시켜 버린 '303 호' 의 근황으로, 사실 리사 선생님께서 자세히 답변하실 것을 기대하지는 않고 있었지만, 혹시, 리사 선생님이라면 그 인공정령의 근황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서 한 번 물어본 것이었다.
  "그러하겠지." 리사 선생님께서 답하셨다. 아무래도 리사 선생님께서도 그 인공정령이 어찌 됐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지는 못하시는 것 같았다. 나도 굳이 깊이 관심을 갖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굳이 추측을 해 보자면, 그 이후, 지하 깊숙한 곳에 봉인된 채, 여전히 자신의 '주인' 될 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추측에 리사 선생님께서 공감하실지 궁금해서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지금도 그 황무지 행성에서 '주인' 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겠네요?"
  "그러할지도 모르지." 이에 리사 선생님께서 답하셨다. 그러다가,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쩌면....... 이미 찾았을지도." 말씀하시는 리사 선생님의 어조가 어쩐지 의미심장했다.



  그 이후, 일행의 발걸음은 숲길을 지나치고, 다시 산길의 한 지점에 이르렀다. 굽이진 길 너머로 또 다른 굽이가 보이는 지점. 그 지점에 이를 무렵, 리사 선생님께서는 또 생각이 많아지셨는지, 잠시 뒤쪽에 머무르셨고, 그리하여 나와 아잘리 둘이서 앞장서 길을 걷게 되었다. 먼 저편 너머에는 사당이 자리잡고 있을 법한 원통형의 지형, 그리고 그 원통형 지형과 산길을 잇는 다리 같은 것이 보여서 이제 거의 다 오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 때까지 병기들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사실, 숲길을 지나는 동안 몇몇 병기들이 습격해 오기도 했지만, 그 정도는 나 혹은 아잘리 선에서 처리되었다. 후방에서 급습한 병기들은 리사 선생님께서 모두 처치하신 탓에 내 쪽으로는 하나도 오지 않았다.
  그렇게 절벽길을 따라 걸어가고 있던 그 때, 먼 저편의 굽이진 부분에 갑자기 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검붉은 연기 덩어리 같은 물질로 그 물질은 내가 길목에 어느 정도 접근했을 무렵에 갑자기 생성되어 그 이후로 길목에서 사라지지 않고 마치 끓어올라 기화되어가는 물질처럼 한 곳에 계속 자리잡고 있었다.
  "아잘리, 저런 물질에 대해 아는 바 있어?"
  아잘리에게 물었지만, 아잘리는 자신도 잘 모른다고 답했다. 아무래도 그런 검붉은, 피를 연상케하는 색을 띠는 물질은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짐작 가는 바가 있었는지, 나에게 조심하라며 이렇게 조언을 해 주었다.
  "악마 혹은 괴물과 관련된 것일 수도 있어, 접근할 때, 조심해야 할 거야."
  나도 그러할 것 같다고 짐작했었다. 다만, 명확히 짐작되는 바가 없어서 아잘리에게 한 번 물어본 것이었다. 그 이후, 나는 긴장하면서 조심스럽게 붉은 물질에게 접근하려 하였고, 그러면서 하얀 빛으로 검을 생성해 오른손에 쥐고, 머리카락들 중 몇 가닥을 묶어 손의 형상으로 만들고, 그것을 내 앞으로 내밀어 그 손아귀에서 하얀 빛이 생성되도록 하였다. 여차하면 그 빛이 어둠의 기운을 지우도록 하기 위한 일이었다.
  나는 그 덩어리가 자신의 앞으로 접근해 올 때, 본성을 드러낼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덩어리는 그런 나의 예상보다도 더욱 빠르게 행동하고 있었다. 내가 그 핏빛 물질로의 접근을 시도하자마자 그 물질의 형상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덩어리에서 갑자기 뭔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하얀 창 그리고 하얀 해골이었다. 해골과 같은 색의 창과 해골이 덩어리에서 튀어나온 후, 덩어리는 피 웅덩이처럼 변했으며, 그 이후, 웅덩이에서 핏빛 연기가 솟아나와 창과 해골을 뒤덮었다. 연기는 그것에 노출된 창의 형상에 변화를 주고, 해골의 살과 피부를 생성하여, 하나의 사람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시켰다. 하지만 그로 인해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다지만, 얼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며-아매도 얼굴의 형태가 제대로 생성되지 않은 것 같다-, 다만, 눈일 것 같은 부분에 핏빛과 같은 붉은 빛이 번뜩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사람 같은 형상은 오른손에 창을 든 채로 마치 살아있는 시체처럼 흐느적거리며 눈빛을 번뜩이고 있었는데, 들고 있던 창이 마치 어디선가 본 듯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설마 싶었지만 아직 멀리 있어 제대로 보이지 않아 착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기며, 계속 그 시체와 같은 형상을 향해 다가가서 창의 모습이나마 제대로 보기로 하였다.

  한편, 그 사람의 형태를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그 괴물은 창을 든 채로 계속 몸체를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두 눈만큼은 번뜩이며 어딘가를 계속 응시하고 있는 듯해 보였다. 그 개체에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창의 모습이 조금씩 더욱 자세히 보이고 있었다.
  그가 들고 있던 길다란 창은 세 갈래 날을 갖고 있으며, 하나의 주된 날 양 옆에 날개처럼 작은 칼날들이 달린 창으로 창날 아래에는 한 쌍의 날개가 달린-   "이거 분명 틀림 없이.......!" 그 모습을 보자마자 바로 떠오른 것이 있었다. 소르나가 소지하고 있는 지팡이, 그리고 상공 멀리서 보였던 전투기처럼 날개들을 달고 있던 길다란 새하얀 창, 새하얗게 빛나던 그 창의 모습과 무척 닮아 보이던 창이었다. 소르나의 지팡이 그리고 이전에 보였던 빛의 창은 서로 닮아 보이기는 했지만, 나는 지팡이가 아닌 창과 더욱 닮았다고 여기고 있었으니, 그 개체가 들고 있던 것은 명백히 창이었고, 암만 모습이 닮았다고 하더라도, 창과 지팡이는 엄연히 다른 물건일 테니까.
  사람 같이 생긴 것이 들고 있던 창의 모습을 자세히 보게 된 이래로, 한 번씩 지브로아 해변 일대에 도달하기 전부터 한 번씩 모습을 드러내던 그 빛의 창을 떠올리고는 했다. 그 창은 빛의 창과 닮은 것이 분명해 보였고, 그 검붉은 창과 빛의 창이 서로 모종의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불러오기에 충분해 보였다.
  그 때 마침, 절벽길 너머 상공에 다시 빛의 창이 날개를 펼치며 다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자신이 위치한 그 너머의 절벽길을 내려다보기라도 하려는 듯이 잠시 절벽길 너머의 상공 한 곳에 머무르려 하는데, 그것이 흐느적거리던 사람 닮은 무언가의 시선과 마주하게 되었다.

으으으으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먼 저편에서 나지막히 어떤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괴물의 울음 소리 같은 낮고 기괴한 소리. 아마도 나의 앞쪽에 있던 사람 닮은 형상에서부터 들려온 소리였을 것이다. 당시에 그 형상은 빛의 창을 노려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 개체의 시선이 빛의 창과 마주하자마자 울음 소리가 들렸으니, 창의 모습을 보며, 반응했을 것임이 분명해 보였다.

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리리리이이이이.....!!!!

  그리고 내가 그것의 한 수십 걸음 앞으로 다가왔을 무렵, 개체는 빛의 창을 보며, 더욱 높은 소리를 내었다. 눈빛도 이전에 비해 더욱 강해져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빛의 창을 자기 생에 있어 가장 끔찍한 원수로 삼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이전에 본 일기에서 병사였던 남자가 창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가, 결국 창의 힘에 의해 파멸당했었지.'
  그러는 동안 나는 조심스럽게 사람 닮은 형상이 있던 곳의 몇 걸음 앞까지 다가가면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이전에 보았던 그 빛의 창과 닮은 창의 날과 날개의 모습을 더욱 자세히 보았다. 그런데, 그 모습이 소르나가 가진 지팡이의 모습과도 너무나 닮아 보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소르나의 지팡이가 그 빛의 창을 닮은 모습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오래된 망령으로 보이는 사람의 형상이 가진 창과 닮을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품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의문에 자답하거나 할 수는 없었다. 한 동안 상공에 떠 있던 창을 향한 분노를 표출하던 그 사람 닮은 형상은 내가 걷고 있던 길목 쪽으로 돌아서려 하면서 자신의 바로 앞으로 다가온 나와 시선을 마주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으에에에에에에에애애애애아아아아아아아아......!!!!

  분노 어린 울음 소리가 내가 있는 쪽으로 울려 퍼졌으며, 그 형상의 머리는 내가 있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고개를 내밀며 소리 지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얼굴이 뭉개져 눈을 제외한 얼굴을 구성하는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 그 형상이 보여주는 것은 번뜩이는 눈빛 뿐이었다. 하지만 그 눈빛이 얼마나 강렬한지, 그 눈빛과 소리만으로도 충분히 보통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기에는 충분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케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 형상이 분노의 울음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그 이후로 사람의 형상은 창을 두 손으로 잡고, 내가 있는 쪽으로 돌진하려 하였다. 그 때, 나를 따라오고 있던 아잘리가 위험하지 않겠느냐고 묻자, 나는 그런 그에게 일단 뒤로 물러나 있으라 외쳤다.
  "물러나 있어! 내가 말할 때까지 접근하지 마!!!"
  그 이후, 사람 닮은 형상은 두 눈을 번뜩이는 채로 창날을 앞세워 돌격했고, 그것의 몇 걸음 앞에 있던 나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그 창의 자루를 왼손으로 잡은 다음에 오른발로 그의 머리를 가격했다. 이후, 그 형상이 충격을 받고, 휘청이기 시작하자 창의 자루를 잡고 있던 손을 놓으면서 몸을 급히 일으키며, 그 형상의 머리를 그대로 밟아버렸다. 이후, 내가 몸을 일으키면서 형상을 밟아버린 그 여파로 쓰러진 형상이 다시 일어나려 하자, 급히 그 형상에게 다가가 그 머리를 왼발로 밟아버렸고, 그로 인해 충격을 받긴 했지만, 형상은 머리에 힘을 주어 저항했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였다.
  이후, 형상은 자신의 등을 보이려 하지 않으려 하는 듯이 다급히 돌아섰고, 오른손에 빛의 검을 들고 있던 나와 창을 든 채로 대치하기 시작했다.

  머지 않아, 그것이 나에게 창날을 앞세워 돌진해 올 것 같았으나, 그런 나의 예상과 달리, 그것은 마치 내가 달려들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이 창을 두 손으로 쥔 채, 가만히 나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 역시 오른손에 검을 쥐고 왼손에 빛으로 날을 생성할 준비를 하면서 그것의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는 그 때, 아잘리가 오른손에 총포를 든 채, 조심스럽게 다가가고 있었다. 대치가 길어지면 그 총포로 그것의 등 뒤 혹은 머리를 쏘려 하였던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의 왼팔이 뒤로 꺾이더니-사람이 할 수 없을 법한 각도로 꺾이고 있었다. 애초에 사람이 아니었으니-, 왼손의 각 손가락에서 끈 같은 것들이 아잘리가 있는 쪽으로 뻗어나오기 시작했다. 누군가 뒤에서 자신을 노리고 있음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밧줄 같은 것이 자신을 향해 뻗어나오는 모습을 보자마자 아잘리는 크게 놀란 듯,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서려 하였다. 그것에 반응해 줄도 뻗어나오려 하였으나, 막상, 자신의 바로 앞에 있는 나를 향해서는 창을 뻗지 않고 있었다. 뒤쪽을 신경 쓰느라, 정면에서 대치 중인 나의 존재를 잠깐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이 미처 앞쪽을 신경쓰지 못하는 틈을 노려, 행여 그가 나를 창으로 바로 찌르지 못하도록 그의 바로 앞까지 뛰어서 접근한 이후에 오른손의 검이 아닌 왼손에서 생성한 빛의 칼날로 그의 명치 부분을 찔렀다. 세 번 정도 찌른 다음에 오른발로 걷어차서 그를 쓰러뜨렸고, 그렇게 쓰러지면서 그 충격으로 그것의 왼손에서 뻗어나온 밧줄 역시 소멸했다. 그 무렵, 아잘리는 몇 걸음 뒤까지 물러나 있었는데, 크게 놀라면서 소스라치게 뛰어갔던 모양.
  이후, 나는 왼손의 칼날이 사라지도록 하고서, 오른손에 들고 있던 검으로 그를 찌르려 하였으나, 그 때, 그 사람 형상의 개체가 그간 보이지 않던 입을 드러내더니, 그 입을 크게 벌리면서 괴성을 질렀고, 그와 함께 핏빛 파동 같은 것이 몰아치며 나를 비롯한 주변의 모든 것들을 밀쳐내 버렸다. 그 충격까지는 예상을 못했던지라, 충격이 일어나자마자 바로 뒤로 밀려나 그것으로부터 먼 곳까지 자빠졌다. 아잘리 역시 나를 향해 접근하다가 파동에 의해 밀려나며 그렇게 넘어진 것 같았다. 파동을 일으키고나서, 그것은 괴물의 그것과 같은 입을 드러내며, 천천히 일어서려 하였다.
  그렇게 그것이 일어설 때, 그 때를 같이하며, 상공에서 검은 무리들이 나타나 내가 있던 그 일대로 하나, 둘씩 착지해 갔다. 그것들은 검은 장갑을 갖춘 이들로 갑주를 걸친 거대한 전사를 보는 듯한 외형을 갖춘 이들이었다. 인간형 기계 병기들로 오른손에는 도끼, 검을 들고 있으며, 왼손은 포신으로 이루어진 개체들이었다. 그것은 내 주변에 4 개체, 그리고 아잘리가 있는 일대에도 2 개체가 있었으며, 아잘리를 도와주기 위해서는 창을 든 그것을 뛰어넘든가 해야 했다. 이외에 상공에는 아이 크기만한 비행체들이 주변 일대를 떠돌고 있어서 그것의 습격에도 대비해야 할 필요가 있을 듯해 보였다.
  기계 병기들은 나를 노리며 왼손에서 한 발씩 포탄들을 쏘았으며, 그 때마다 포탄의 탄착지를 예상하면서 계속 방향을 바꿔가며 그 구역의 내가 들어섰던 곳을 향해 뛰었고, 등 뒤에서 한 번씩 탄이 폭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후, 내가 그들의 뒤쪽으로 다가가려 하는 순간, 병기들도 그런 나의 움직임을 알아차렸는지, 내가 달리는 쪽으로 돌아서려 하였고, 그러면서 각자의 무기가 강렬한 빛을 발하도록 하면서 그 쪽으로 다가가려 하였다.
  그들의 움직임을 피할 수는 없었으나, 그들을 향해 뛰어오를 수는 있었고, 그래서 그들의 머리 위로 뛰어오르려 하였다. 그들이 공중 기동을 할 수 있으면 위험했겠지만, 다행히도 공중 기동은 하지 못하는 듯해 보였다-지면 위로 부양하며 기동하는 행동은 할 수 있어 보였다-. 부양을 준비하는 그들 중 가운데에 있는 도끼를 든 개체의 머리를 짚고 그들을 뛰어넘은 후에 기계 병기들을 소환한 이후, 지쳐 있어 보였던 창을 든 것을 향해 달려 들었다.
  그것 역시 그런 움직임을 알아차리고 나를 향해 다가가려 하였으나, 그 때, 나는 그런 그의 머리를 짚고 그것을 건너 뛰었으며, 이후에 머리카락 몇 가닥을 밧줄처럼 묶어서 마력을 이용해 그것을 향해 뻗어 나가도록 하였다. 밧줄 역할을 했던 머리카락 다발은 이후, 그것의 목을 묶고, 빛의 기운을 일으켜, 그것의 목을 졸랐다-빛의 기운을 일으킨 것은 그것에 피해를 가하기보다는 어둠의 기운에서 머리카락을 보호하기 위한 일이었다-. 이후, 나는 온 마력을 들여 그것을 끌어내려 하였다, 그것에게 무게가 있다면 들어올리거나 할 수는 없었겠지만, 적어도 나를 향해 다가가는 기계 병기들의 앞에 그것을 올려놓을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것은 내 예상보다 훨씬 가벼웠다. 암흑의 기운으로 겨우 생성한 인간형 개체였던 만큼, 그렇게 무겁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것을 움직이기 위해 머리카락들 그리고 머리카락에 주입한 마력을 그것을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데에 쓰려 하였다. 이전의 그 밧줄을 그의 목에서 풀고서, 더 많은 머리카락 다발을 들여 이전의 '밧줄' 에 그 머리카락 다발을 합치고, 하나의 거대한 손의 형상을 갖추도록 한 이후에 그 손으로 그것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것의 머리를 움켜쥔 이후에는 그것을 이리저리 흔들며, 나와 대치하는 세 개체들을 한 번씩 응시하였다. 그들 중에서 먼저 공격하려는 쪽을 향해 던질 생각이었으니, 그 이유에 대해 말하자면, 사실, 그 동안에도 손톱을 가진 짐승의 손 혹은 앞발을 이루던 머리카락들이 그것을 형성하는 암흑의 기운에 반응하고 있어, 오래 유지할 수 없었기에, 어딘가를 향해 곧바로 던질 필요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나의 예상과 달리, 병기들 역시 그것의 목숨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고, 왼팔의 총포에서 포격을 개시, 광탄들이 내가 있는 쪽으로 발사되도록 하고 있었다. 광탄들이 내가 인질로 잡은 그것의 몸체에 계속 부딪쳤고, 그것 때문인지 몸체에서 분노의 기운이 발산되고 있으니, 그대로 있다가는 그 분노의 기운이 폭발해 뭔가 일이 터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들의 공격 목표는 어디까지나 나이고, 그것은 부차적인 것일 뿐인 만큼, 계속 그것을 붙잡아둔 채, 병기에게 접근해 갔다.
  그러다가 오른쪽에 보이는 병기가 그것을 우회해 내가 있는 쪽으로 포격을 행할 조짐이 보이자마자, 곧바로 손을 이루는 머리카락을 휘둘러 그 손이 붙잡고 있던 개체를 그 병기를 향해 집어던지고, 이어서 그 왼편에 보이던 두 개체들의 포격을 피해가며, 왼편의 개체로 접근, 뒤쪽에서 포탄의 폭발음이 울려 퍼지는 동안, 그 개체의 오른편 근처로 무릎 앉아 자세를 하면서 미끄러지는 듯이 접근, 우선, 그 병기의 포신이 장착된 왼팔 하박 부분을 검으로 올려 베어 잘라버리고, 이어서 일어서면서 그 왼쪽 어깨마저 절단해 버렸다. 그 이후, 그 개체의 등 뒤로 다가가서는 등을 찌르고, 오른쪽 어깨도 절단했다. - 손에 들고 있던 도끼도 가져가려 했었으나, 손에서 도끼를 빼낼 시간적 여유는 없다고 생각해 당장에 하려 하지는 않았다.
  이후, 가운데에 있던 개체가 내가 있는 쪽으로 돌아서려 하였으나, 그 때, 그 개체의 뒤에 있었을 창을 든 괴물이 분노의 기운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뒤쪽의 병기가 괴물체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모습을 보고, 포격을 계속 가하다가 포격으로 파괴는 무리라 판단을 했는지 자신이 서 있는 그 뒤쪽으로 회피하며 충격을 피했는데, 그 동안 병기들이 발사한 포탄에 계속 맞은 것으로 인해 분노가 계속 발산하다 못해, 폭발할 조짐이 드러난 것.
  창을 든 괴물체의 분노 폭발이 일어나는 것을 감지한 병기가 그 쪽으로 돌아서는 동안, 나는 재빨리 괴물체 그리고 병기들이 있는 쪽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병기 둘과 맞서고 있었을 아잘리가 있는 쪽으로 다가가려 하였다. 구해주려면 이미 늦었겠지만, 그의 상태를 살펴볼 필요는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아잘리는 아직 건재했다. 그것도 모자라, 병기 하나가 쓰러져 있었는데, 그것도 목이 잘린 채, 쓰러져 있었다. 아잘리의 왼손에는 빛의 칼날이 생성된 총포가 쥐어져 있었고, 오른손에는 병기가 들고 있었을 병기가 쥐어져 있었으니, 병기의 목을 자르며, 도끼까지 집어간 듯해 보였다. 남은 병기 역시 왼팔의 하박을 잃은 상태였다.
  "Maintenant, par qui vas-tu mourir!? (자아, 누구한테 죽을 테냐!?)"
  이후, 나는 그 병기의 뒤쪽에서 그렇게 외쳤고, 아잘리의 앞에서 당황하며 병기가 내가 있는 쪽으로 돌아서려 하자,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아잘리가 병기를 향해 다가가, 왼손에 든 총포의 칼날로 병기의 오른쪽 어깨의 관절 부분, 팔목을 마구 찌른 다음에 오른손에 든 도끼로 오른쪽 어깨를 내리쳐 어깨를 절단해 버렸다. 그리고 그것의 허리를 도끼로 반복해서 쳐서 그로 인해 병기가 쓰러지게 만들었다.

  "아르사나, 어떻게 저 앞을 놓아두고, 여기로 왔어!?" 이후, 아잘리가 나를 보며, 물었고, 이에 나는 내가 가려 했던 방향인 괴물체 그리고 병기들이 있는 쪽을 향해 돌아서며, 아잘리가 그 쪽을 보도록 하였다.
  "저기 저 광경을 봐." 그 무렵, 나는 아잘리에게 내가 이미 본 것을 그 역시 봤으면 하는 식으로 말을 건넸지만, 사실, 나도 그 너머에서 벌어진 일은 그 때 처음 보았기에, 그가 괴물체가 있던 곳에서 그 무렵에 벌어진 일을 아잘리가 보려 할 때, 나도 같이 목도하려 하고 있었다.

한편, 내가 있던 그 너머의 공간에서는 나의 적들끼리 서로 싸우는 광경이 보이고 있었다. 창을 든 개체는 분노의 기운이 쌓이면서 난폭해져 있었으며, 병기들을 향해 창을 휘두르고 있었으며, 때로, 창을 두 손으로 들고, 무릎 앉아서는 지면에 창의 날을 꽂아 그로써 지면에 검은 파동을 일으켜 두 병기가 파동에 휩싸이게 하기도 하고 있었다. 파동에 휩싸인 병기들은 큰 피해를 입거나 하지는 않았으나, 충격을 받기는 했었는지, 바로 움직임이 굳어지고 있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으어허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사람 같은 그것은 창을 오른손에 든 채, 등을 뒤로 젖히며 소리쳤다. 그는 뭐라 말하려 하고 있는 듯해 보였으나, 말을 하지 못하는 듯해 보였다. 그 신체에 언어 기능 자체가 없는 것 같았다. 이성을 잃고 난폭해진 개체가 앞에 있어서 그러한지, 기계 병기들은 우선 그 개체를 적으로 삼고, 공격하려 하였다. 그러면서 공중을 맴돌고 있던 전투기 형상의 개체들 역시 내려보냈다. 공중에서 포격 지원을 시키려 했던 모양.
  그 때, 개체가 자신이 들고 있던 창을 두 손으로 잡고, 다시 창의 날을 지면에 꽂았고, 이어서 파동이 분출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파동 뿐만이 아니라 지면 위로 파동을 따라 검붉은 돌기둥이 솟아났다가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그 이후로 공중에서 세 병기들이 강하하고, 이들 모두가 개체들을 포위했다. 하지만 그것에 상관하지 않고, 그 개체는 창을 두 손으로 잡고서 창날을 앞으로 향한 채, 회전하기 시작했고, 그 이후, 창날에서부터 그가 회전하는 궤적을 따라 핏빛 초승달들이 잇달아 생성되어 그의 주변 일대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초승달들은 그 개체를 둘러싸는 병기들의 허리를 궤뚫었고, 그러면서 병기들에 피해를 가하고 있었다.
  그 이후로 병기들은 도끼, 칼날로 개체를 공격하려 하였고, 개체 역시 병기들을 창을 휘두를 때마다 생성되는 칼날 모양의 궤적을 그리는 기운들로 병기들을 베어내며, 포위를 풀려 하고 있었다. 이후, 개체는 창을 들며 회전하면서 진입로 쪽의 병기를 향해 돌진해서 병기를 밀쳐내고, 이어서 다른 병기들이 있는 쪽으로 돌진해 갔다. 한 동안 그 개체는 창을 들고 빙글빙글 돌면서 병기들을 창의 날과 창의 날에서 발사되는 기운들로 계속 공격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병기들도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아서 포격으로, 도끼와 칼날로 계속 개체를 공격해 그 몸체를 부수고 찢어내려 하고 있었다.

  한편, 나와 아잘리 모두 그렇게 원래 적이었던 개체들이 서로 맞서 싸우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나는 그들 중 하나의 편을 들기로 했다. 여기서 나는 사람 모양을 한 개체의 편을 들어 병기들을 먼저 제거하기로 하고, 빛의 기운을 소환해 병기들을 광선으로 타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그 때, 아잘리가 물었다.
  "잠깐, 저 괴물도 분명 적일 텐데, 괴물의 편을 든다고?"
  "괴물은 대화의 여지가 있어. 하지만 기계 병기들은 그렇지 않아."
  내가 답했다. 괴물은 본래 저주받은 영혼 혹은 영혼이 남긴 사념으로 대화를 통해 사념을 이해할 여지는 있었지만, 기계 병기들은 그러할 것도 없었고, 그래서 완전한 적대 개체인 기계 병기들부터 먼저 제거히가로 한 것.
  기계 병기들 중에서 내가 빛의 기운을 통해 발사하는 광선에 타격을 받은 세 병기들은 마치 당황한 듯이, 내가 있는 쪽으로 돌아섰다. 그 때, 창을 든 개체가 그들의 모습을 보자마자 하나씩 그것들의 머리를 향해 창을 휘둘렀다. 창으로 그 머리 부분을 깨뜨리려 한 것. 창의 날은 하나씩 기계 병기의 투구 부분을 관통했고, 투구가 궤뚫린 병기들은 투구 부분의 빛을 잃었다. 이후, 병기들은 움직임을 잃은 병기들의 등을 창의 날로 찔러 흉부까지 궤뚫리도록 하니, 그리하여 그것의 창격에 당한 병기들은 돌바닥 위에 쓰러지고, 이어서 동력원이 폭주하며 폭발했다.
  폭발한 병기들의 불길이 걷히기도 전에 개체는 다시 공간의 한 가운데 즈음에 이르더니, 남은 두 병기의 발밑에 돌기둥들을 생성하도록 하였다. 둘기둥으로 병기들을 궤뚫을 생각이었던 것 같으나, 병기들은 재빨리 그 돌기둥들을 피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나는 내가 빼앗았던 병기의 도끼를 왼손에 들고, 오른손에 빛으로 생성된 검을 들고 있으면서 창을 든 개체가 아닌 병기들을 향해 다가갔다. 이윽고, 두 병기들은 총포를 들고 광탄들을 발사하며, 나를 공격하려 하였으나, 그 때마다 그 포탄들의 궤적을 피해가며, 도끼의 날을 빛의 기운으로 생성된 수정 조각들로 뒤덮었다. 그리고 왼편에 보이는 병기를 향해 뛰어올라, 수정 조각으로 덮힌 날을 갖게 된 도끼로 병기의 목을 베었고, 빛의 기운이 병기를 감싸는 어둠의 기운과 충돌해 불길을 일으켰으며, 그 폭발로 인해 병기의 목이 몸체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렇게 목이 몸체에서 떨어졌음에도 병기는 계속해서 싸워 나갔으나, 결국 왼쪽 어깨가 절단되고, 흉부가 칼날에 관통당해 폭발하면서 쓰러졌다.
  이후, 오른편의 병기가 검을 들고 나와 대치하려 하였고, 이에 나는 두 무기들을 전부 앞세워 그 칼날들을 막아내며 병기의 검과 더불어 병기를 개체 쪽으로 밀어내려 하였다. 그 이후, 병기는 계속 나와 개체 쪽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려 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그 눈의 움직임이 불안정해서 불안한 감정의 표현을 하는 듯해 보였다. 병기는 오른손의 검으로는 나의 칼날들을 막아내고, 왼손의 포신은 뒤로 뻗어서 뒤쪽의 개체를 향해 포격을 가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개체는 창을 두 손으로 잡으며, 등 뒤의 병기를 노리려 하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대치한 이후, 병기의 칼날이 갈라지며, 그 틈을 빛이 메우기 시작했다. 빛의 칼날에 닿은 병기가 결국 부서지기 시작한 것. 기세가 내 쪽으로 기운 것을 알아차린 이후, 그대로 칼날들을 밀어붙여 병기의 칼날을 깨뜨렸다. 그리고 오른손의 검이 사라지도록 한 이후에 왼손의 도끼를 우선 병기의 목을 절단하는 데에 쓴 이후에 이어서 그것을 오른손으로 잡고, 있는 힘을 다해 개체가 있는 쪽을 향해 던졌다. 창을 들고 병기에 시선을 향하고 있었을 병기에 대한 습격의 목적이 있었다. 운이 좋다면, 개체의 목을 절단해 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목이 절단되어 병기가 쓰러진 이후, 개체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도끼를 창으로 쳐내, 절벽 너머, 바다 쪽으로 날려 버렸다. 그리고 자신을 포위하려 하는 나와 아잘리를 향해 격렬히 회전하면서 초승달 모양의 칼날들을 날려 보내기 시작했다. 초승달 모양의 칼날들이 날아들자마자 그것들을 이리저리 움직여 피해내며, 나는 왼손에 빛의 기운을 생성하고, 그 빛의 기운이 화염구와 같은 빛의 구들을 발사해 개체를 향해 날아들도록 하면서 나의 주변에 떠 있던 빛의 기운 역시 화염탄들을 고속으로 발사해 개체의 머리를 타격하도록 하였다.
  한편, 아잘리 역시 개체에 접근해 오고 있었으며, 초승달 모양의 칼날들을 뛰어넘으며 피해가면서 오른손에 쥔 총포로 빛 줄기들을 발사해, 개체의 등과 뒷통수 등을 타격하도록 하고 있었다.

RRRRRRRRRRROOOOOOUUUUUUUUUAAAAAAAAAAAAAHHHHHHH!!!!!!!

  인간형 개체는 절벽가 쪽을 등지면서 자신의 앞에 이른 두 사람-나와 아잘리-을 잠시 바라보더니, 창을 오른손에 쥔 채로 두 팔을 양 어깨 너비로 벌리고, 허리를 뒤로 젖히면서 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그의 발밑에서 검은 파동들이 동심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파동을 온전히 피할 수 있는 다른 수단은 없어 보였고, 그래서 파동을 피하기 위해서는 계속 지면에서 생성되는 파동을 건너뛸 수밖에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주목할 사항이 있었으니, 거대한 파동은 하나의 고개와 같았고, 그래서 파동을 뛰어넘으며, 개체에게 접근할 수는 있어 보였다. 첫 번째 파동이 접근해 왔다. 내 키의 반 정도 되는 높이의 파동이 다가오자마자 바로 그 파동을 뛰어넘었고, 이어서 두 번째 파동이 다가오자 그것 역시 같은 방식으로 뛰어 넘었다.
  그렇게 두 파동을 뛰어넘자마자 개체의 바로 앞에 이를 수 있었다. 이후, 세 번째 파동이 분출되려 하자, 나는 그것마저 넘으려 하면서 개체의 머리 위로 뛰어내리려 하였다. 오른손의 검으로 개체의 정수리를 찍어버리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일은 내 생각대로만 되지 않았다. 개체가 나의 움직임을 알아차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개체의 머리 위로 뛰어내리면서 칼끝이 그 정수리를 향하도록 하자마자 공중으로 분출되는 검은 기운이 나를 덮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다급히 보호막을 펼쳐, 피해를 막았으나, 충격은 어찌할 수 없었다. 내 몸이 충격에 의해 뒤쪽으로 날아가는 것이 느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등에서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지면의 돌바닥 위에 내 몸이 거칠게 내팽개쳐진 것이었다.
  다행히도 보호막 때문에 상처는 입지 않았지만-이후, 충격으로 인해 보호막이 사라졌다-, 낙하에 의한 충격은 고스란히 받았기에 일어날 즈음에는 크나큰 아픔을 느껴야만 했다. 겨우 바닥에 앉으면서 나는 아잘리의 모습을 지켜보려 했다. 그 역시 나처럼 파동을 뛰어넘으면서 위험을 모면하려 하였기 때문이었다.

  아잘리는 세 번째 파동까지 뛰어넘으며 개체가 있는 그 근처의 상공 높이 뛰어올라 있었다. 공중에서 몇 번 거듭 뛰어오르기를 반복하며 높이 올랐던 모양. 그러면서 내가 휩쓸렸던 파동 역시 피하고, 개체의 정수리 바로 위에 이른 것이었다. 그것의 정수리 위에 이른 순간, 아잘리는 오른손에 단검을 쥐고 단검에서 빛의 기운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칼날로 그것의 정수리를 바로 찌르려 했던 것이다.
  그 무렵, 그 개체는 자신의 있는 힘을 들였는지,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 상태였으니, 그대로라면 아잘리의 칼날이 개체의 정수리에 박힐 것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잠시 후, 아잘리를 어떻게 하려고 개체가 왼손을 들려 할 때, 아잘리의 칼날이 개체의 정수리에 박혔다. 그 무렵, 아잘리는 공중에 거꾸로 떠 있다가, 내려오면서 두 손으로 칼을 잡고, 그대로 개체의 얼굴 부분을 빛의 기운으로 생성된 칼날로 가르려 하였다. 칼날은 어둠의 기운으로 생성되었을 개체의 얼굴을 따라 칼자국을 내기 시작했으며, 그 칼자국은 얼굴을 지나, 목을 거쳐 흉부에 이르러서야 아잘리가 착지를 하며 멈추었다. 착지를 한 이후, 아잘리는 재빨리 칼을 그 개체의 흉부에서 빼냈다.
  그 후, 아잘리는 칼날로 흉부를 다시 찌르려 하면서 마무리를 지으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자신이 착지하자마자 개체의 상처에서 불길이 피어오르기 시작하며, 폭주를 할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자, 그것에게서 몇 걸음 뒤로 물러나, 오른손에 든 총포에서 광선을 발사해 흉부를 맞히며 흉부 쪽에 계속 타격을 가하려 하였다.
  "아르사나, 일어날 수 있어? 일어날 수 있으면 얼른 일어나!" 그러면서 아잘리가 나에게 외쳤다. 그리고 나에게 괴물 (아잘리는 녀석을 괴물이라 칭했다) 에게 제대로 일격을 가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곧 폭주하게 될 것 같다고 말하고서, 폭주하기 전에 끝을 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잘리가 '괴물' 이라 칭한 개체는 얼굴과 흉부가 갈라져 상처 자국에서 불길이 피어오르기 시작했고, 그 여파로 온 몸에 불길이 번지기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개체는 머리와 흉부에 생겨난 상처에서부터 생겨난 불길에 의해 몸이 휩싸인 채로 창을 마구 휘두르며 나와 아잘리를 향해 달려들려 하였다. 아잘리가 빛 줄기를 발사하는 총포의 사격으로 개체의 흉부를 파괴하려 하고 있었지만, 그것으로는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다.
  비록 상처를 입었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개체는 이전보다도 더욱 광폭하게 날뛰고 있었다. 아무래도 상처와 화상에 의한 고통으로 그리 된 모양으로 그 개체는 일행을 향해 달려들면서 계속 괴성을 지르고 있었는데, 그냥 공포 유발의 수단이 아닌, 고통에 의한 비명처럼 들릴 때가 있었던 것이다.
  아잘리의 개체를 향한 일격은 나름 치명적이긴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개체를 완전히 끝내지는 못했고, 상처만 심하게 입은 상태에서 개체가 폭주를 개시한 모양으로 마무리는 어떻게든 내가 짓기로 했다, 내가 해내야 했을지도 몰랐을 마무리 일격을 내가 가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아잘리에게 할 만큼 했다고 말했다. 아잘리는 최선을 다 한 것이다, 내가 추가로 일격을 가할 수 있었다면, 저런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빛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구체 4 개를 소환해서 한 곳으로 집중시켜, 검은 창을 막아내고서, 구체들에 힘을 가해 창을 밀쳐낸 이후에 창을 쥔 오른팔이 높이 들어올려진 그 때를 노려, 구체들이 사라지게 하자마자 개체를 향해 달려들어, 우선 오른손으로 들고 있던 검으로 개체의 오른팔을 베어서 잘라버리고, 이어서 절단면이 불길에 휩싸이는 모습을 보이며, 괴로워하는 개체의 흉부를 바라보며, 왼손에서 화염탄들을 발사해 흉부의 안쪽으로 화염탄들이 파고들어 폭발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검까지 사라지게 하고서, 빛의 결정으로 4 개의 구체들을 다시 생성해, 구체들을 하나씩 흉부에 부딪쳐 폭발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 하였다.

RRRRRRRROOOOOOOOOUUUUUUAAAAAAAAAAAAHHHHHHHHH!!!!!!!

  마지막 폭발까지 일어나자마자 4 번에 걸쳐 잇달아 일어난 폭발에 의해, 온 몸에 붉은 화염이 퍼져나가기 시작한 개체는 단말마와 함께 오른팔을 앞으로 내밀며, 자신의 몸을 앞으로 내밀려 하다가 불기둥에 휩싸이며, 앞으로 내밀었던 오른팔을 위로 높이 들며, 다시 일어섰다가 결국 돌바닥 위에 쓰러졌다. 그 사람 같이 생긴 것이 쓰러지자마자 그 주변 일대로 불길이 돌바닥 위로 잠시 기둥을 이루며 하늘을 향해 타올라 갔다.
  불길의 회오리에 감싸인 불기둥을 이루며, 불꽃은 한 동안 섬의 한 구석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그 무렵, 뒤쪽에서도 뭔가 폭발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지만 눈 앞의 개체에 신경을 쓰고 있느라고, 뒤쪽에는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불길은 잠시 맹렬히 타오르고 있었지만, 불을 지속적으로 일으킬 곳이 아닌 돌바닥에서 타오르고 있던지라, 곧 사그라지고, 그 자리에는 개체가 쓰러진 흔적처럼 사람의 형상을 한 타다 남은 숯덩이 같은 것이 여전히 붉게 열기를 일으키는 흔적만이 남았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불길이 사그라지고 나서야 나는 완전히 상황이 종료되었다고 판단을 내리고, 일단 무장을 해제, 그 이후에 아잘리가 내 곁으로 다시 오도록 하였다. 이후, 사람 형태의 개체가 남긴 흔적 위로 붉은 빛 방울이 생성되었고, 그 때를 같이 하여, 뒤쪽에서 리사 선생님께서 오시는 모습이 보였다.



  "방금 전에 무슨 소리가 들렸던 거예요?" 리사 선생님께서 오시자마자 아잘리는 그 분께 뒤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냐고 물었고, 그 물음에 리사 선생님께서 아무래도 나의 동료들이 섬의 해안에 당도했고, 기계 병기 무리가 습격한 것 같다고 말씀하시더니, 이전까지의 폭발음은 기계 병기들이 폭발하면서 생긴 폭음이었음을 밝히셨다. 그러시더니, 리사 선생님께서는 사람이 쓰러진 것 같은 흔적과 그 흔적 위로 떠오른 붉은 빛 방울을 보더니, 그 붉은 빛 방울의 바로 앞으로 접근해 가시려 하셨다.
  "저 붉은 빛 방울, 위험하지 않나요?" 그 모습을 보더니, 아잘리가 그 분께 위험하지 않냐고 여쭈었고, 리사 선생님께서는 아잘리의 물음에 괜찮을 것이라 답하시더니, 빛 방울의 바로 앞으로 다가가서 그 빛 방울을 손으로 만지셨고, 그와 함께 빛 방울은 붉은 폭발을 일으키며 사라졌다.

  "그 붉은 빛, 방금 전까지 있던 그 괴물이 사라진 이후에 생겨난 것이 맞지?"
  이후, 리사 선생님께서 아잘리 그리고 나에게 물음을 건네셨고, 그 물음에 나는 그렇다고 답을 드렸다. 그러자 리사 선생님께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알겠다" 라고 말씀하셨고, 그 이후에 나와 아잘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곧, 어떤 목소리가 들려올 거야. 아마, 이전에 보았던 그 일기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잠시 후, 귓가에서 어떤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잡음 속에서 거친 숨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정도였으나, 그 이후로 마치 괴물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오고 있었기에, 처음 들었을 때에는 괴물의 목소리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지만, 이후에 사람,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기에, 그 목소리의 주인이 어떤 남자였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크으으으으........
으으어어어어어어허으으허어어흐어허어어어어어......!!!!
어어어어어허어어어으어허어허어으허어허어흐어어어어어!!!!!!!

Quare.......?
Quare.......?
QUARE......!?

Quare...... me.......
Quare...... me....... 구하려 했느냐......?
내가...... 창을 잡게 했던 거냐......?
결국, 나를....... 으으으으허허으으허어허으으으으어어어어어!!!!!

  마치, 고통 속에 울부짖으며, 겨우 말을 이어가는 듯한 목소리였다. 목소리의 주인인 남성은 누군가를 향해, 그가 자신의 창을 잡게 했다는 말을 했었으며, 이를 통해 그 남자가 '페테이' 라 칭해진 인공 정령이 깃들었던 '성창 (Lancea Sancta)' 을 소지했던 그 남자였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 목소리, 그 성창을 가졌던 남자의 목소리 아닌가요?"
  이후, 나를 마주보고 계셨을 리사 선생님께 그 남자의 목소리에 대해 여쭈었고, 이에 리사 선생님께서는 그러할 것이라 화답하셨다. 그리고 그 고통스러워하는 목소리에 대해 '성창' 에 깃들었을 인공 정령에 대한 원망을 드러내는 목소리였다고 말씀하시고 계셨다.

으으으허허으으으어어어어......
'성창' 이 보인다......!

Volo...... vivere!
Vivere et...... gloriam...... 누리고 싶었다.......!
으으으어어어어...... 크으으으허어으으어어어어.......
길짐승들이...... 병사보다 소중했던....... 놈들.......
민중의 목숨 따위....... 동전마냥 흩날리던 놈들.......
그 놈들을 내가 당했던 것처럼 업신여겨보고 싶었어.

으으으으아아아아아아.....!!!!!
Volo gustare...... earum modi!!!
그 놈들을 넘어, 민중따위 없어져도 상관 없다는 ad IMPERIUM!!!!
정점에 Volo esse!!! 으아아아아!!!!!

  "처음에는 살고 싶었을 뿐이었겠지. 하지만 '성창' 의 힘으로 살아남은 이후, '성창' 에 의해 승리를 거듭하며, 성공 가도를 나아가다 보니, 어느덧 살고 싶다는 소망은 영광을 누리고 싶다, 그리고 제국의 정점에 이르고 싶다는 소망으로 변질되었던 거야."
  그 목소리에 대해, 리사 선생님께서는 건너편에서 자신과 함께 목소리를 듣고 있던 나, 아잘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다.

우이이이이히히히히히히히!!!!!
Tota mea....... 빼앗겼다!
Vitam, meam...... corpum meum...... etiam animum meum......!!!!
그 놈이 내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다!!!!
그러하기에....... 으으으으아아아아하하하하하!!!!!
나도...... 빼앗을 것이다...... omnes vos!
내 눈 앞의 omnia!!!!
으으으으아아하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하!!!!

VINDICTA MEA EST!
FATUM MEVM EST!
하하하하하하하!!!! 크아하하하하하하허으으으으어어어아아아아아......

  분명, 제국의 병사였던 그 남자는 '성창' 이라 칭해진 '저주받은 창' 그리고 창에 깃든 '303 호' 에 의해 거의 모든 것이 소멸당하는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고, 따라서 복수의 대상은 '303 호' 가 되어야 함이 마땅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남자의 영혼이 이제 와서 행방 자체가 묘연해졌을 성창과 303 호를 찾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 남자의 영혼은 303 호의 먹이가 되어버렸으며, 눈 앞에 나타난 남자의 형상은 영혼이 남긴 잔류 사념이 형성했을 것으로, 그 남자 자체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빛 방울을 통해서나마 그 사념이 그 남자의 원념을 읊을 수 있었던 것은 사념에 남겨진 남자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사념은 남았으니, 그 303 호에 대한 원한은 갖고 있을 수 있을 것 아냐?"
  "그렇긴 해." 이후, 그 사념체가 있던 곳을 지나쳐 가는 동안 나의 왼편에 있던 아잘리가 나에게 물었고, 그 물음에 우선 그렇게 간단히 답했다.

  분명, 그것은 성창과 303 호에 대한 원한을 가진 사념체로서, 우리를 보고 죽이려 한 것은 우리를 303 호와 관련된 존재로 착각을 했기 때문일 거야. 그런데, 그 남자의 영혼 그 자체도 아닌, 남자의 기억 중 극히 일부만 갖고 있을 미욱한 사념체가 마치 하나의 정령처럼 힘을 갖고 있었어. 또, 사념체는 우리가 여기 오는 순간에 깨어났고, 우리가 적대하는 기계 병기들이 우리가 사념체와 맞서는 동안 나타나기도 했었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 것 같아? 사념체의 착각이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되지 않아?

  "그렇다면......" 그러자, 아잘리가 뭔가 짐작된 바가 생긴 듯, 심각하게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조종당한 것일 수 있다는 말이지, 누군가에 의해." 이에 나는 그렇다고 화답했다. 그리고 그 개체는 '소환수' 의 일종이었을 것이라 언급하기도 했다. 그리고 소환의 주체는 소환수로서 소환된 그 사념체가 가진 기억을 토대로 '303 호' 와 '성창' 이라는 원한의 대상을 알아내고, 그것을 이용해 그의 눈앞에 나타나는 이들은 모두 '303 호' 의 관계자들이므로 처단해야 한다고 지시를 내렸을 수도 있다고 그 사념체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그 사념체를 조종한 이는 303 호가 무엇인지는 몰랐을 수도 있겠다."
  "몰랐겠지, 알았을 것 같지는 않아, 굳이 알 이유가 있거나 하지도 않았을 테고."
  그러자 내가 화답했다. 그리고 사당으로 다가오는 이들을 처단할 필요가 있고, 그래서 원념을 가진 사념체를 우선 이용하려 했을 것 같다고 그 사념체가 소환된 것에 대해 말했다. 그러자 아잘리는 다시 한 번 내게 말을 건넸다.
  "그렇다고 해도, 303 호에 대한 원념을 가진 이를 굳이 부르려 한 것은, 303 호와 관련된 무언가가 이 곳으로 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소환자 쪽에서도 추측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
  그런 추측에 나도 부정하지는 않았다. 원념을 가진 다른 사념체도 있는데, 굳이 그 사념체를 소환하려 한 것에는 그러할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그 사념체를 소환한 이가 누구인지, 구체적인 정보가 있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어떤 이가 그 사념체를 소환하려 했는지에 대해서는 같은 추측을 할 수 있었다. 기계 병기 혹은 기계 병기와 협력하고 있는 누군가였을 것이고, 그는 필시, '괴물' 과 적대하고 있는 이였으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존재를 행여 만나게 된다면, 그 사념체에 대해서도 언급해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을 말로써 드러내기도 했다.



  그렇게 길목을 지나치려 할 무렵, 내리막길의 가장 낮은 지점에 또 어떤 공간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지난 때와 같은 공간으로 건너편에는 오르막길이 있었다. 아닌 것이 아니라, 그 공간의 한 가운데에 핏빛 웅덩이가 자리잡고 있었고, 이전과 같은 사념체가 있을 것임은 그 모습을 보며,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사념체인 거야?' 그 광경을 보자마자 짜증을 내며, 앞장서 가려 했다. 지난 사념체와의 대결이 그렇게 만만치 않았던 만큼, 이번에도 많이 각오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하며, 급히 발걸음을 옮기려 하였다.

  첫 경험과 그 이후의 경험에는 분명한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첫 경험 때에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당하는 것인 만큼, 놀라움 혹은 당혹감이 우선 닥쳐오게 마련이다. 하지만 같은 경험을 한 번이라도 반복하게 될 경우에는 전혀 다르다, 이전의 경험에서 어떤 거지 같은 꼴을 겪었는지를 알고 있는데, 같은 경험을 반복하게 될 것임이 틀림 없음을 직감하게 된 것이다. 짜증이 우선 밀려오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어찌하겠는가? 그런 경험을 피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물러서는 것 뿐이다. 하지만 물러설 수 없다. 맞서야만 한다. 세상에는 거지 같고, 짜증나더라도, 맞서야 하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언제나 편한 생각만 할 수는 없다, 맞서야만 그 이후의 길이 보일 수밖에 없다면, 맞서야만 한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내리막길의 가장 낮은 지점에 이르고, 길목을 거쳐, 공간의 한 가운데에 이르렀다. 아잘리 역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기는 했지만, 급히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공간에 이르자마자 그 한 가운데에 있던 피 웅덩이 같은 것에서 무언가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핏빛 연기 같은 것이 솟아오르더니, 연기가 걷히면서 백골의 형상을 이루기 시작한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전과 비슷한 유형의 사념체로구나.' 그리고, 잠시 후, 내가 예상한 대로, 백골이 핏빛 기운에 감싸기 시작하고, 이어서 핏빛 기운이 그 형상의 육신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거기까지는 일단, 내가 이전에 마주했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육신이 형성되는 모습은 이전과는 많이 달랐다.
  이번에 형성된 육신은 평범한 중년 남성과 같은 형상으로 그 역시 오른손에 창을 들고 있었다. 그 창은 이전에 남자가 보였던 그 창과 같은 모습을 가졌으며, 그 창 역시 비행체처럼 날아다니던 그 창과 같은 모습이었다. 얼굴의 색은 너무 어두워서 얼굴 모습은 알아볼 수 없었고, 이전의 그 개체처럼 두 눈 부분이 붉게 빛나는 모습만을 보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마치, 녹아내리는 인간의 형상 같은 그 형체는 거대한 창을 든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으으으으어어어어어어우으으어우우어으으어어어어어어.......

  이후, 그 형상은 고개를 내리더니,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때를 같이 해, 눈 부분의 빛이 더욱 붉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의 적을 마주하기라도 한 듯이. 이후, 그것은 눈 부분에서 붉은 빛을 발하는 채로 뭔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네 녀ㅅ......ㅏㄱ....... 아르산.......

  "아르산이라면 네 어릴 적 이름이잖아?" 그 때, 나의 바로 왼편 곁으로 다가온 아잘리가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나에게 물었고, 그 물음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답하자, 내게 어떻게 저 앞에 있는 흉물이 내 이름을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나도 거기까지는 모르겠어." 사실, 어렸을 적, 학생이었을 때와 용병 생활을 할 때에는 다른 가명을 내세우고는 했었다. 아르산 (Arsan), 아르샨 (Arshan), 샨 (Shan), 아샨 (Ahshan) 등...... 학생 시절에는 내 본명과 가장 가까운 아르산 (Arsan) 을 내세웠지만, 이후에는 그런 적은 없었기에, 그런 별칭을 아는 이는 사실상 없었다고 해도 무방했다-아르산이란 별명을 아는 이들은 아잘리를 비롯한 어릴 적부터 알던 사람들, 그리고 리사 선생님과 에테르니 (Eterni) 출신으로 샤하르에 잠시 머무르셨던 할머니 정도가 전부이다-.

아아아아...... 으어어어아아아.. 아아아아아르사아아아ㄴ........

  그 별명을 어떻게 알았을지를 내가 어떻게 상관하든, 말든 눈앞의 괴물은 나를 향해 눈을 부라리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이전의 그 개체와 달리, 말을 어느 정도 할 수는 있어 보였으나, 무슨 이유 때문인지 영혼의 상태가 망가져 제대로 말을 잇거나 할 수는 없어 보였다. 그 자가 이전의 괴물과 같은 창을 들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성창' 의 또 다른 희생자였던 것일 수도 있음직했다. '성창' 은 리사 선생님께서 언급하셨던 옛 제국의 물건이었던 만큼, 그는 옛날 사람이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아르산이란 이름을 언급한 것도 문제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나를 보고, '아르산' 이란 이름을 가졌을 '제국' 의 옛 사람으로 보았을 수도 있었기에.
  그런데, 그 망령은 여기서 심상치 않은 발언을 이어가려 하고 있었다.

아.....르....사.....ㄴ....... 너는 나의 omneeeeEESSSS RAPTAVIIIIIIIIT!!!!!
Meam nympham....... meum corpum...... meam vitaaaaAAAAAAM....... Etiam meAM ANIMAAAAMMMM....... et SPRITVVVVVVVVVVM......!!!!

  이전의 괴물체에게서 나온 붉은 빛에서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처럼, 그 괴물 역시 라테나 어를 말하며, 울부짖더니, 나를 향해 창을 쥐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VAAAAAAAAAAAAAAAAAAAAPUUUUUUUUUULLLLLLLLLLLAAAAAAAA!!!!!!!

  하지만 이전의 그 괴물과 달리, 눈앞의 그 개체는 창을 들고 달려들기만 하는 멧돼지와 같은 성질을 갖고 있어 정면만 피하면 위험을 충분히 면할 수 있었고, 그런 특성을 이용해 주변을 우회하며, 빛의 기운으로 광선들을 발사해가며, 지속 타격을 가했고, 아잘리 역시 나의 반대편에서 총포로 광탄들을 발사하며, 그것을 공격해 갔다. 사실상 일방적으로 타격만 받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계속해서 나 혹은 아잘리를 향해 달려들려 하면서 울부짖으려 하였다.

Tu..... tu...... tu...... 소르나라는 여자...... meministis!?

  "소르나!?" 그 이름을 듣자마자 나는 놀람을 어찌하지 못했다. 소르나는 누구와 결혼하겠다고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리사 선생님께서 애제자 중 한 명인 소르나와 멋대로 청혼하는 것을 가만두실 분도 아니셨거니와-그 분 성격이라면 결투를 신청하셨을 것으로, 내가 아는 바로 검투로 그 분을 이긴 사람은 일반인 중에는 없었다-.
  내가 아는 바로 베라티사 학당 출신의 여학생으로 드벨파 족의 부유한 남자와 청혼했다고 알려진 이는 내 어릴 적 친구였던 소리 (Sori) 였다. 그리고 소리에 대해서는 리사 선생님께 아르데이스의 부유한 남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을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그 때, 리사 선생님께서는 그런 나의 말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으셨고, 그래서 그 소문이 사실일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소르나를 말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착각을 하고 있기에, 소리가 아닌 소르나를 언급하는 것이고, 또 내 이름을 뇌까리고 있는 것일까? 알 수 없을 노릇이었다.
  "그 부자와 약혼했다는 사람, 소리 아니야?" 아잘리도 그렇게 묻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괴물체는 창을 휘두르며, 나를 향해 계속 달려들려 하고 있었다. 계속 타격을 받아 몸체가 불타오르기 시작했지만, 전혀 상관하지 않으려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결국 괴물체가 공간의 한 가운데 부근에 이르렀을 즈음, 그것의 오른쪽 어깨 뒤쪽 부분이 아잘리가 발사한 하얀 광탄들에 집중적으로 타격을 받았고, 그로 인해 괴물체가 움찔거리는 사이, 내가 그것을 향해 달려들어, 그 앞에 이르자마자 몸을 낮추며, 그의 복부를 검의 날로 왼쪽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베었고, 그로 인해 괴물체의 상처를 입은 부분에 불이 붙으면서 그것이 괴로워하며, 고개를 들려 하자, 뒤로 물러나면서 올려베기 방식으로 칼날로 그의 목을 베었다.

RRRRRRRRRRROOOOOOOOOUUUUUUAAAAAAAAHHHHH!!!!!

  불꽃이 주변으로 튀면서 그것의 목이 높이 날아갔다가 공간의 오르막길 쪽에 떨어졌다가 터졌으며, 이후, 목을 잃은 육신은 천천히 앞으로 기울기 시작, 내가 몇 걸음 뒤로 물러설 즈음에 상처와 목의 절단면에서 시작된 불길에 휩싸인 채, 바닥에 쓰러졌다.
  이후, 한 동안 몸체가 쓰러진 일대가 첫 번째 괴물체처럼 불길에 휩싸이며, 불기둥을 이루었다가, 잠시 후에 꺼졌으며, 불이 꺼진 자리에는 잠시, 검은 재가 그가 쓰러진 흔적이 남았다가, 이후, 일대에 불어닥친 바람에 의해 흩날리며 사라져 갔다.

  "어떻게 된 거야? 암만 그래도 별 죄 없는 사람이었을 텐데, 이런 비참한 꼴로 이런 곳에 끌려온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이야?"
  "내 말이......" 그 괴물이 쓰러진 흔적을 보면서 아잘리가 황당하다는 듯이 물음을 건네고, 나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 여기었기에 그렇게 화답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잔해 앞에 잠시 가만히 서 있으려 하였다. 이전 때처럼 빛 방울이 재가 남았다가 사라진 곳에 나타날 것을 기대하기도 했거니와, 또, 나와 멀어진 채, 나를 따라오시고 계셨을 리사 선생님을 기다리려 했기 때문이었다. 소리의 약혼자에 관해 그와 같은 학당에 기거하면서 어느 정도 알고 계셨을 리사 선생님께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한 것.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빛 방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사념에 대한 기억이 없거나 알려지지 않아서 그런가 보다, 싶은 생각에 잔해에 더 미련을 두지 않으려 했는데, 그 때, 나의 뒤에서 리사 선생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구나." 그러자 나는 바로 리사 선생님을 향해 돌아서며 그렇다고 답했고, 이후, 리사 선생님께서는 가만히 공간 일대를 둘러보시더니, 앞장서서 오르막길 쪽으로 가시려 하면서 나와 아잘리를 불렀다.
  "가자."

  "그 남자는 원래 죽은 사람 아니지요?"
  "애초에 우리와는 전혀 상관 없는 사람이야, 죽었을 리가."
  아잘리의 물음에 리사 선생님께서 죽은 사람은 아니라고 답하셨다. 그리고 나의 옛 친구인 소리가 그와 약혼했다는 소문이 있음을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 리사 선생님께 그것이 사실이냐고 이어 그 분께 여쭈려 하였다.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리사 선생님의 반응은 의외였다.
  "아잘리, 그 소문은 누구에게서 들었니?"
  "아르사나가 얘기해 줬어요, 자기 친구가 웬 부자와 약혼한다고."
  "....... 그랬구나." 그러자 리사 선생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하셨다. 하지만 내 앞에서는 더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 하셨고, 아잘리도 그런 리사 선생님을 보며, 당황하며 나에게 물었다.
  "리사 선생님, 왜 저래?"
  하지만 나도 답을 할 수는 없었다. 그 분의 행동을 그 때에는 나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에도 한 번씩 인간형 기계 병기들이 습격해 왔고, 전투기들이 날아오기도 하였지만, 셋이 함께 하는 이상, 병기 무리 하나 정도는 금방 제압되었다. 기계 무리의 습격으로 놀라는 일은 있었지만 그래서 길을 가는 것 자체는 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리사 선생님께서는 길을 가시는 동안, 뒤에서 나의 동료들이 기계 병기들과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이 보였다고 했다. 그들 역시 기계 병기들을 잘 물리치며, 뒤따르고 있으며, 그래서 자신을 비롯한 이들이 다리 앞에 이르고, 한 시간 지난 이후에는 도착할 것이라 말씀하시기도 하셨다.
  그렇게 오르막길을 거쳐, 한 동안 해안의 절벽길을 따라 걷다가, 어느 숲 안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리사 선생님에 의하면 기억의 사당과 이어진 다리 앞에 이르는 마지막 숲길이라 하였다. 그와 더불어 숲길 먼 저편에서 수상한 기운이 감지되었음을 말씀하시더니, 숲길의 끝자락 쪽이었다고 그 곳이 어디인지를 언급하시고, 숲길의 끝자락 쪽에 이를 때에 자신이 알릴 테니, 그 무렵부터는 긴장해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물론, 그 숲길이 기억의 사당과 이어지는 다리 바로 부근에 있고, 그 다리 부근에 분명 '괴물' 과 적대한다는 이가 있음을 알고는 있었지만, 수상한 기운을 감지했다는 이야기는 얼핏 들으면 뭔 엉뚱한 이야기인가, 싶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말씀을 하신 이가 마법에도 능하신 리사 선생님인 만큼, 그 분의 말씀을 이미 신뢰하고 있었다.

  한 동안 계속 걷고 난 이후, 기억의 사당에 이르는 마지막 숲길에 이른 만큼, 마지막 휴식이 될 것이라 리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기에, 나를 비롯한 세 사람은 숲길의 한 지점에 거점을 마련하고 쉬기로 하였다. 두 사람이 쉬고 있는 동안, 나는 주변 일대를 살피고 오겠음을 리사 선생님께 알리면서 숲길 너머의 절벽가를 향해 다가갔다.



  나무들을 지나쳐, 그 너머의 절벽가에 도달했을 무렵, 날개 달린 창이 하얀 빛을 발하며, 그 너머 바다에 머무르는 모습이 보였고, 이어서 그 부근의 절벽가에 허름한 옷을 입은 어떤 노인이 조용히 앉아있는 모습도 보이게 되었다.

  늙은 여인은 온통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카락을 묶어 올리고 하얀 옷과 바지 차림을 한 채로 절벽가에 웅크려 앉아 있었다. 창백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의 양 팔자에는 그간 살아온 세월의 흔적을 나타내는 듯한 깊은 주름이 팔자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리고 얼굴 위쪽에 자리잡은 검은 눈동자를 품은 눈은 쳐진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눈가의 깊은 주름 역시 눈매만큼이나 쳐져 있었다. 하지만 여인은 심하게 늙은 모습은 아니었고, 주름진 얼굴에는 어느 정도의 미모가 남아 있었다. 아마 젊었을 적에는 뭇 사람들을 감탄하게 만들 정도의 미녀이지 않았을까.
  얼마나 오래 살았을지 알 수 없을 여인의 얼핏 보더라도 근심과 시름이 느껴지는 그 인상은 여인이 살아온 세월의 고단함 혹은 여인의 행적에서 숱한 굴곡이 많았음을, 그리고 그로 인한 슬픔과 시름이 많았음을 나타내는 듯해 보였다. 시름의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두 눈의 눈동자는 절벽가 너머의 수평선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그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여인은 남루한 천 옷과 치마를 입고 있었으며, 어깨에 얇은 천으로 이루어진 케이프 한 장을 걸치고 있었다. 절벽가를 향해 불어오는 바람에 그가 걸치고 있던 케이프의 자락이 묶여 올려지다 만 머리카락과 함께 흔들리고 있었다.

  그간 이런저런 일을 하며,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보아왔지만, 이토록 늙은 여인 혹은 늙은 사람의 모습을 보거나 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단순히 오래 살아온 것 뿐만이 아니라, 살면서 많은 비극을 겪었을지도 모르는 여인을 보며, 연민 비스무리한 감정을 느끼며, 가만히 그 모습을 보려 하였다. 여인의 모습을 보며, 조용히, 조심스럽게 여인에게 다가가려 하였다. 그러는 그 때, 아직 내가 여인에게 미처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는데, 여인이 내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내가 있는 쪽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직감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이 나를 보고 있구나.' 라는 것. 우연히 내 쪽을 보는 것이 아님은 나를 바라보며, 여인의 눈빛이 달라졌음을 통해 바로 알 수 있었다. 노파의 눈빛을 보며, 나는 노파가 날더러 자신의 곁으로 와 달라고 부탁하는 것을 직감했고, 그의 곁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려 하였다.

  나는 노파의 모습을 그 때, 처음 보았다. 하지만 노파는 나를 알아보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전혀 알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것이 하나 있었으니, 예전에 슈라일의 호수가에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을 때, 어머니께서 호수가 동쪽 건너편에 있는 노파의 오두막집을 틈나는 대로 방문하시고는 하셨다. 하지만 나는 집 근처에서 뛰어놀고는 하였기에, 노파의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설마......'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생각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였다. 어쩌면, 노파는 그 호수가의 노파가 아니며, 나를 보고, 뭔가 착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을 하며, 그에게 다가가려 했던 것 같다.
  "안녕하세요." 노파와 대면하자마자, 나는 노파에게 조용히 인사를 하였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흔적이 역력했을 여인인 만큼, 최대한 정중하게 인사를 하려 하였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여인이 나를 올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4 대 째의 아이로구나, 오랜만이다."
  네 번째 세대의 아이. 나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 노파는 내가 그간 보지 못했던 그 호수가의 노파였던 것이다. 노파는 나를 보더니, 처음에는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간 무사히 잘 지내서 다행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곧, 그의 표정은 안쓰러움을 나타내더니, 절벽가로 돌아가려 하면서, 나에게 "잠깐 같이 있고 싶어하는구나." 라고 말하더니, 잠깐이나마 같이 절벽가에 앉아 있자고 청했다.



  "그 사당의 괴물을 몰아내려 한다고?"
  "예." 이후, 노파는 내게 물음을 건네었고, 그 물음에 바로 답을 했다. 이후, 노파는 나에게 지나오면서 이런저런 시련이 있었을 것 같다고 말하더니, 도중에 창을 든 괴물들을 몇 마주하지 않았느냐고 이어서 내게 물으려 하였다.
  "어떻게 아셨어요?" 그 물음에 나는 그렇다고 답을 하고, 이어서 노파에게 어떻게 알았느냐고 이어서 물었다. 노파는 건너편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던지라, 내가 겪은 일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다 알고 있었다." 그러자 노파가 답했다. 그리고 방금 전에 어떤 남자의 원령처럼 보이는 존재와 맞서기도 하지 않았느냐고 묻더니, 이어서 그 원령에게서는 빛이 나타나지 않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마치 그간의 상황을 전부 인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간 어떻게 지냈냐?" 이후, 노파가 나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이후, 내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에,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가 궁금했던 모양. 워낙 많은 일들이 있었기에, 대답을 위한 간단한 한 마디로는 표현하거나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별 일 없이 지냈어요." 오랜 생각 끝에 그렇게 답했다. 그 이후, 노파는 "그렇구먼." 이라 조용히 답하더니, 어릴 적에 생활이 많이 힘들었다고 들었다고 말하고서, 그래서 죽음을 늘 염두해 두며 살았다고 알고 있다고 말하고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그것에 대해 노파에게 어떻게 들었냐고 묻자, 자신이 언젠가 샤하르에 갔을 때, 누군가로부터 들었다고 말했다. 노파가 샤하르에 가서 죽기살기로 살았다는 어떤 꼬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인데,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다. 노파는 집을 비울 때에는 예상 외의 곳으로 외출해서 이런저런 사람들로부터 이야기를 듣고는 했었기 때문.
  "죽기살기로 살았다기보다는, 죽음을 바라보며 살았다는 것이 맞겠지요."
  이후, 노파의 물음에 내가 답했다.

  어머니를 잃고, 무작정 샤하르에서 일거리를 찾아서 일했고, 그러다가 아르데이스 성계로 가서 드벨파 족 사람들의 일터에 있기도 했다. 가족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고, 의지할 사람도 없어서 어디서 어떻게 되든 죽는 것은 매한가지라 생각했기에, 늘 죽음을 바라보며 살았다. 어차피 짧게 살다 죽을 인생, 부질 없이 연명하며 하루하루 보내느니, 뭔가 일을 해내고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위험한 현장에 어떻게든 끼어들려고 발악했다. 당시 일터의 사람들은 그런 나에 대해 경악했고, 미쳤냐는 소리가 한 번씩 들려왔다.

  "죽으면 어머니 곁에 갈 수 있다, 라고 생각한 게냐?"
  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노파가 물었고, 그 물음에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그 이후, 노파가 말했다.   "어린 아이가 벌써 죽음을 바라보며, 죽을 곳을 찾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모습은 결코 정상적인 아이의 모습은 아닐 게야. 여타 아이들이라면 부모를 잃고 갈 곳이 없는 처지에도 어떻게든 살고 싶어할 텐데 말야. 그 때, 그 광경을 보았다면 많이 슬퍼했을 것 같네, 얼마나 깊은 절망에 빠졌으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며, 죽음을 위해 발악하며 다닐까, 라고 생각했을 테니."
  "그런 너의 삶을 변화시킨 계기가 있을 거야, 그렇지 않나?"
  "예, 있었지요. 어느 공장에서 있었던 일이에요."

  인간으로 치면 9 세 즈음의 일이었다. 그 때에도 나는 공장에서 일하며, 하루하루를 그저 그렇게 보내고 있었다. 그 날도 죽지 못하는 삶을 살다가 기숙사로 들어가 자려고 하는데, 어딘가에서 사람들이 오가며 뭔가를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변 일대로 시끄러워져 무슨 일인가 싶어, 창가를 바라보니,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공장의 공장장이 소중히 여기는 신발이 없어졌다가 발견됐는데, 쓰레기통에서 발견되었고, 그래서 범인을 찾아낸다고 공장장이 폭주해서 분위기가 험악해졌던 것. 하지만 범인은 나오지 않고, 누군가가 책임을 뒤집어써야 할 판인데, 아무도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작업반장을 비롯한 직원들의 대화를 듣자마자 나는 바로 공장장의 사무실로 갔다. 그리고 공장장에게 다가가서 신발을 쓰레기통에 빠뜨린 범인은 바로 나라고 외쳤다. 죽고 싶냐는 공장장 주변 사람들의 외침에 나는 이렇게 화답했었다.

그래요! 제가 그랬어요! 그 신발 쓰레기 같아서 제가 쓰레기통에 쳐 넣었어요!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넣는 게 무슨 잘못이에요!? 때려요! 때려 봐요! 죽여버리라고요!!! 공장장 아저씨는 남자고 여자고 어린애도 가리지 않고 쳐 죽이려 했었잖아요! 날 쳐 죽여 봐요!!! 저에게는 아무것도 없어요! 아빠는 원래 없었고, 엄마는 죽었어요!!! 의지할 사람도 없고, 갈 곳도 없어요! 이런 사람 하나 죽이는 게 뭐 어쨌다고요!? 저는 어차피 가진 것 없이 몇 년 살지 못하고 죽을 운명이었어요, 산다고 뭐가 달라지고, 죽는다고 뭐가 달라져요!!!!

쳐 봐요, 날 때려보라고요!!!! 누구든 쳐 죽일 수 있는 그런 사람이잖아요! 그렇다면 어서 쳐서 죽여보라고요오오오오!!!!!!!!

  그 이후, 공장장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주변에 있던 깡패처럼 보였던 남자들이 나에게 닥쳐오더니, 나를 마구 두들겨 패기 시작한 것이다. 그 때, 뒤쪽에서 이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야, 뭐하고 있어, 어서 저 애새끼 끌어내!
애새끼 이리로 데려오라고!!!!!!
하여간, 이 XX것들이 진짜...... 야!!! 겁쟁이 새끼들아, 비켜어어!!!!!

  이후, 깨어났을 때에 나는 천막 안의 침구에 누워 있었고, 침구 안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드벨파 족 남성 치고는 비교적 큰 체구의 젊은 남자로 짧게 머리를 깎았지만, 상당히 잘 생긴 미남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이, 정신이 들어?"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기절하기 직전, 나를 끌어내라 고래고래 고함치며 주변 사람들에게 욕을 했던 그 남자였다. 그러다가 결국, 주변 사람들을 겁쟁이라 욕하고 비키라 외쳤는데, 그 때, 나에게 뛰어들었던 것 같다. 그 역시 거하게 맞았는지, 왼쪽 눈에 멍이 들어 있었다.
  "여기는 어디에요?" 내가 물었다. 그러자 남자는 공원의 한 구석으로 여름만 되면 야영하는 사람들로 붐빈다고 답했다. 밤중이기도 하고, 여름 때도 아니라, 한적하다고 했다.

  남자의 이름은 주니오 (Junio) 로, 당시에는 공장의 조장이었다고 했다. 공장장이 고용한 깡패들을 죄다 두들겨 패버린 후에 자신을 데려와서 탈출했다고 했다. 어차피 그간 일하면서 모아둔 돈도 있고 해서, 공장 일을 그만 둘 참이었는데, 화려하게 그만두게 됐다며 나를 보며 조용히 웃었다.
  "그 놈들 한테 달려든 거, '총대 매기' 하려고 그런 거지?" 이후, 주니오가 물었다. 그러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모두 공장장과 그 패거리를 무서워하는 것 같아 자신이 나섰다고 말했다. 그러자 주니오가 다시 말했다.

죽으려고 그랬지? 어차피 죽을 인생, 화려하게 폭발하며 죽자, 이런 심보였냐?
예.
또라이 새키...... 너에 대해서는 들어서 알았어. 부모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고, 어차피 짧게 살다 갈 운명이라고 막 살았다매?
예.
공장장 그 놈도 질려하더라, 머리도 덜 큰 애새끼가 죽으려고 덤빈 꼴을 보니, 정신 못 차린 거지, 뭐.
........
그런데, 너 임마, 그렇게 죽어버리고 싶어?
엄마가 그 세상에 있을 테니까요, 엄마가 거기 기다리고 있을 거 아니에요.
그래......?

  주니오가 욕을 뱉어냈다. 그 때,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져서 무슨 감정을 표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이후로 그는 한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몸은 괜찮냐고 묻더니, 괜찮다고 답하자, 바로 "나와." 라고 한 마디만 말하면서 천막 밖으로 나갔고, 이에 나는 그런 주니오의 뒤를 따라 천막 밖으로 나갔다. 이후, 호수가의 한 곳에 이르자, 주니오의 발걸음이 멈췄고, 이후, 그는 근처의 벤치에 조용히 앉아서는 오른쪽 옆 부분을 가리키며, 거기 앉으라 했다.

  "그거, 예전 인류의 '해병대' 가 입고 다니던 옷 같은데 맞지?"
  "그렇다고 들은 것 같아요." 내가 당시, 겉옷으로 입고 다니던 군복과 모자를 가리키며 주니오가 물었고, 그 물음에 내가 그렇다고 답했다. 그리고 옷 가게에 버려져 있던 것을 주워서 대충 기워서 입고 다니고 있다고 말했다.
  "나도 특수 부대 출신이었어. 몇 년 전에 전역했는데, 특수 부대 나와 봐야 별 거 없더라."
  "......."

아무튼, 거기 구호에 대해서는 알아?
싸워서 이기고, 지면 죽어라 - 이런 어구는 들은 것 같아요.
그래? '이기면 살고, 지면 죽는다' 정도라 받아들여도 되는 거지?
모르겠어요.
하긴, 너 같은 애가 뭘 알겠어....... 아무튼, 그런 구호가 있다는 것은 나도 들어봤어. 그런데 말야, 이거 알어? '이기면 살고, 지면 죽는다' 고 했는데, 사실은 틀려.

'이기면 살고, 지면 죽는다' 가 아니라, '살면 이기고, 죽으면 진다' 가 맞아.

살면...... 이기고, 죽으면 진다고요?
그래, 임마. 이 세상에서 죽는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알어? 이 세상의 모든 것과 결별하게 되고, 더 이상 이 세상에 영향을 끼칠 수 없게 된다는 거지, 뭘 하는 것도, 뭘 만드는 것도, 뭘 이루는 것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거야. 어디 보면, 혼령이 뭔가를 해내려고 하는 게 보이는데, 그건 엄밀히 말하면 죽은 게 아니야, 다른 형태로 '소생' 한 거지.

아무튼, 죽음을 택하는 것은 살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살아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포기했으니까,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하게 되는 거고, 그래서 다른 산 자들에게 많은 것들을 추월당하게 될 거야. 살아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는데, 그걸 못하고, 다른 살아있는 것들이 네가 할 수 있는 것들까지 다 해내는 꼴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어떠할 것 같아? 그리고, 부모가 없다고 했지? 그런데, 너를 알아주는 사람들이 더 없을 것 같아? 부모 없고, 갈 곳도 없다고 콱 뒈져버리면...... 너는 모르겠지만, 네가 모르는 너를 알아주던 그 사람들 심정은 어떠할지, 너는 거기까지 생각해 본 적 있어?

전쟁도 마찬가지야, 살면 어떻게든 기회를 노려볼 수 있지만, 죽으면 그렇게 못하지. 죽어서 이기면 그래서 부질 없는 거야. 산 놈들은 지더라도 어떻게든 역전의 기회를 잡을 테니까. 살면 이기고, 죽으면 진다는 게 그런 의미야. 무슨 말인지 알아 먹겠냐?

너는 싸움에서 어지간하면 질 일은 없을 것 같더라, 어리고 아무 힘도 없는데, 그런 발악질로 공장장 새끼를 겁 먹게 했을 정도니, 실제로 싸울 수 있으면 오죽하겠어. 그런 너의 잠재력이 아까워서라도 너 이 새끼야, 데려오고 싶었어. 나도 더 이상 그 같잖은 공장에는 안 다닐 거야, 언제까지 저런 곳에 쳐박혀 있을 수는 없는 거 아냐? 너도 그렇지? 너 원래 어디 살았어? 여객선의 자리 살 돈은 있으니까, 같이 가자. 혹시 모르잖아, 나도 거기서 일거리 찾고 자리잡을 수 있을지.

아무튼, 죽고 싶다고 생각해도, 뭔 일이 있어도 죽으려고 하지 마, 내 앞에서 뒈지겠다면 나한테 뒈질 거야, 알았어? 네게 운명 지워진 삶이 짧을 거라 믿고, 실제로 그렇다고 할지라도, 네게 운명 지워진 삶 이상으로 살아보라고. 그리고 살아서 할 수 있는 게 뭔지 생각하고, 그 생각한 대로 살려고 노력해 봐. 내 앞에 나약한 놈이 있으면 그 딴 소리 안 할 텐데, 너 하는 꼴을 지켜본 바로 너 새끼의 사람 새끼 같지 않은 정신력으로는 충분히 가능할 거라 믿는다.

할 말은 여기까지, 먹을 거 가져왔으니까, 먹어 새꺄.

  "이후로 주니오는 정말로 있는 돈, 없는 돈 털어가며, 샤하르 행 여객선 자리를 마련해 줬고, 그 사람 덕에 샤하르로 돌아갈 수 있었어요. 거기서 에테르니 출신의 할머니가 자식과 동떨어져 살고 있다고 해서 그 집을 찾아가려 했었어요."

너도 알고 있을 거야, 세상은 언제나 행복하지만은 않다는 것. 원래 이 말은 X바 세상을 밝게만 살아온 온실 속의 화초 같은 놈들에게나 하는 말이고, 너 같이 어릴 때부터 짐승 같이 살았던 것 한테는 어울리지도 않는 말이지. 너는 오히려 오로지 너만을 위해 주고 너의 편이 되어줄 사람이 필요할 거야. 여기 할머니께서는 가족과 동떨어져 손주도 만나지 못하는 신세야. 사는 것은 부족함이 없으신 것 같은데, 많이 외로움을 타신다고 들었어.

너라면 할머니께 철 없는 모습을 보이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아, 너 같이 어릴 때부터 굴러다닌 애들을 보면, 패악질 부리는 게 걱정될 수도 있어 보이는데, 그 공장장 놈의 행패에 정면으로 맞선 용기를 낸 것을 보면, 너는 그렇지는 않을 거라 믿는다.

할머니~!

  이후, 주니오는 할머니의 집으로 혼자 들어갔다가, 나왔고, 그리하여 나는 할머니의 집으로 들어가, 그의 가족이 될 수 있었다. 주니오는 그 날까지 할머니의 집에 있었지만, 다음 날 아침에 할머니의 집 침실에서 깨어나 집을 둘러보았을 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에 의하면 주니오는 새벽 즈음에 이미 짐을 싸서 떠났다고 했다. 말도 없이 급하게 떠나간 탓에 그가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할머니께서는 물을 여지가 없었다고 하셨다.

  "저는 할머니께 손자 즈음 되는 사람이었기에, 할머니는 저를 손자 대하듯이 했고, 저도 할머니를 친할머니처럼 따랐어요. 그 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가 아닐까해요."
  그 때까지는 머리카락을 짧게 유지했었다. 할머니께서 머리카락을 깎아 주셨고, 그래서 소년처럼 살아갈 수 있었던 것. 샤르기아 유적의 탐험대의 일원이 되었던 것도 그 때였으며, 아잘리를 처음 만난 때도 그 때였다. 나이를 먹을 수록 머리카락 재생 속도는 길어졌고, 그래서 자주 머리카락을 깎아야 했는데, 한 때는 그 일련의 과정이 귀찮아서 그냥 머리카락을 대머리가 될 정도로 깎아버린 적도 있었다.
  "그 무렵, 제 친구가 왜 갑자기 대머리가 됐냐고 놀렸고, 어떤 선생님은 저한테 외계 종족의 노예로 오인받을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말도 들었어요."
  그 때의 객기에 나도 조용히 웃음이 나왔고, 그래서 미소를 띠며 그것에 대해 말하기도 했었다.   "군복은 언제까지 입고 다녔니?" 그 물음에 나는 할머니가 떠나고, 리사 선생님께 사사를 받은 후에 머리카락을 본격적으로 기르기 시작한 시점이었다고 말했다. 리사 선생님께서는 그 복장을 탐탁치 않게 여기시어, 내가 머리카락을 기르기 시작할 시점에서 그 군복과 모자를 몰래 가져가셨고, 그 이후, 군복과 모자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 아마, 그 선생님의 성격 상, 모자와 군복을 내가 모르는 어떤 곳으로 가져가 태워 버리신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후, 그 공장이 어찌됐는지에 대해서는 샤하르 공립 학교의 신문 폐지를 통해 우연히 알게 되었다. 아르데이스의 에테르니 서부 3 지구 모 공장의 공장장과 그 관계자들이 전부 구속되어 서부 3 지구 경찰서로 끌려갔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소년을 구타한 공장장 (THE PLANT MANAGER BEATS A BOY)' 이라는 기사 제목과 함께 호외 신문이 발간되었으며, 관련 기사로 공장의 모 업체인 모 기업의 대표 공개 사과 및 해당 기업에 의한 공장 강제 폐쇄 조치와 생산 시설 회수에 관한 소식이 이어졌다고 되어 있었다.
  폐지에서 소식을 보고 있을 때, 어떤 친구가 내게 다가와서 뭘 그렇게 심각하게 보고 있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급히 폐지 정리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후, 그 공장장이 무기한 징역을 선고 받고, 교도 시설에 수감되었으며, 사건의 여파로 재산이 전부 압류되었다는 것이 내가 접한 그 자에 대한 마지막 소식이었다.



  "그래서, 그 주니오라는 남자는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다고 하든?"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이후, 노파가 내게 묻자, 나는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의 근황에 대해서는 그 이후로 들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벌어들인 돈을 다 털어 샤하르로 왔으니, 샤하르 어딘가에서 어떻게든 일하며 살고 있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을 뿐이라 생각하고 있기는 했고, 그래서 그 생각 정도는 밝힐 수 있었다.
  "그랬구먼. 어쩌면 너의 가장 큰 은인이라 할 수 있을 텐데...... 혹여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좋은 시간 같이 보냈으면 좋겠어."
  "그런데...... 이제 와서 만나면, 그 사람이 저를 알아볼 수 있을까요?"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내가 그 남자와 헤어진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버렸고,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내 머리 모양은 이미 예전의 내가 아니었고, 그 남자 역시 예전의 모습은 아닐 것임이 분명했다.
  "그 때 이후로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서로 많이 변해 버려, 서로를 알아보지 못할 수 있다고 생각했구먼."
  노파가 답했다. 그리고 그가 나를 잊지 않고 있다면, 언젠가 나를 알아볼 수 있게 되는 때도 있을 것이라 말하고서, 그 남자로 추정되는 남자를 보게 되면, 우선 조심스럽게 그 모습을 지켜보라고 조언을 했으며, 이어 그 남자가 예전의 마음을 잃었다 싶으면 망설이지 말고 돌아설 것을 말하기도 하였다.
  "너에게 그 사람은 인생의 길목에 지나지 않을 게야. 진짜 소중한 사람은 다른 사람일 테고, 그도 너를 그 정도로 받아들이겠지. 그 남자가 너를 잊었다고 해도, 서운해 말게."
  "알겠어요." 그러다가, 문득 마음 속에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여차저차해서 우주 항구에 이르렀다가 여객선에 탑승한 이후, 선내 복도의 창가에 주니오와 함께 서 있을 무렵의 일로, 그간 잊고 있던 그 무렵의 대화가 떠오른 것이었다.

저기 창가 너머에 뭐가 있는지 알아?
우주 아닌가요?
그렇지. 우주, 그 무한한 공간 한 가운데에 지금 우리가 있는 거야.

내 꿈은 우주에 있었어. 저 무한한 우주를 돌아다니며,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것들을 해 보고 싶었다고. 어디 붙박지 않고, 온 우주를 싸돌아다니며, 때로는 악당으로부터 죄 없는 사람들을 구해주는 거지, 어때? 낭만적이지 않아?
그렇다면, 형은 모험가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

그렇지. 하지만 그 꿈은 이미 우주 저 멀리 가 버렸지. 공장 일을 전전하다보니, 어느새 나는 그 꿈과 멀어져 버렸더라고. 그 꿈을 이제 다시 돌아보고 있기는 하지만, 이제 와서는 다 헛된 것 같다. 늦었다고 생각됐을 때에 아직 늦지 않은 것이 있고, 정말 늦은 것이 있어. 나는 아무래도 후자인 것 같다. 누가 말하지, 노력하면 되지 않느냐고. 퍽이나...... 누구나 노력해서 다 되면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잘 나가고 있게? 어디서 되도 않는 낭만극 같은 소리나 하고 있어. 현실과 낭만극을 구분하지도 못하는 모지리들 같으니라고.

조언을 들어가며 성장하면 된다는 말도 들었는데, 그래, 참된 선생에게 도움 받아가며 성장하는 것은 좋긴 하지. 하지만, 내가 아는 바로 참된 스승은 저 딴 소리 안 한다. 그런 것들 중 대부분은 무슨 이유에서든, 누군가를 내리까는 우월감 혹은 자기보다 약한 것들을 지배하는 쾌감을 느끼며 살고 싶어하는 그런 부류의 속물들이야. 너는 그 딴 녀석들에게 속으면 안 돼, 알았어?

아무튼, 내 꼴이 그렇다고 해도, 그 꿈 만큼은 어떻게든 붙들고 싶어. 그런 꿈을 갖고 있었다는 기억 말야. 그 추억이 있기에, 내가 세상을 넓게 보자는 신조를 갖고, 이렇게 살고 있는 것 같아. 나는 아직 우주를 바라보는 삶을, 그리고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을 하나씩 둘러보는 것 같은 삶을 살고 싶다는 거야.

애송아, 네가 지금 머무르는, 네가 살고 있는 땅이 네 세상의 전부는 아니야. 그 땅이 자리잡은 행성, 그리고 그 행성이 있는 온 우주 역시 이 세상이라고. 네 눈에 보이는 것이 이 세상의 전부 같아 보여도, 돌아보면 세상의 또 다른 모습이 보일 거야. 세상의 모습은 다양하고, 그래서 이러하다가 함부로 단정지으면 안 되지. 세상을 한 곳만 바라보지 말고, 여러 곳을 봐야 함은 그런 이유가 있는 거야, 세상의 여러 모습을 가능한 많이 지켜봐야 세상의 진실된 모습에 그나마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는 거지. 이를 위해서는 많은 곳을 돌아다니고,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경험을 해야 해. 너는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형의 말 알아들어?

모든 사람들이 다 잘 될 수는 없어. 안 되는 것들은 뭘 해도 안 되더라. 하지만 너는 그런 사람은 아닐 거다. 너는 어딜 가든 잘 될 거야. 다른 누구에게라도 그런 말을 할 것 같지만, 너에게만큼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고 싶다. 언젠가 너를 다시 만나면 세상을 모험가처럼 용감하고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말을 듣고 싶다.

  "그랬었구나, 지금 네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만."
  내 이야기를 듣자마자 노파가 말했고, 이에 나도 조용히 미소를 띠고, "좋은 모습으로 다시 만나야 하겠지요." 라고 밝게 목소리를 내며 화답했다.  

  "할머니께서는 예전에 어떻게 지내셨어요?"
  "내게도 많은 일들이 있었지.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많은 일들을 했어."
  노파가 답했다. 그리고 노파는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며,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내가 젊었을 때...... 아마도, 이 세계가 아직 어릴 때라고 할 수 있겠지. 세상이 다시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은 때라 할 수 있겠구나. 아무것도 없는 땅에서 문명을 재건하려고 많은 의욕 있는 이들이 나섰고, 그들은 성계의 전 주인인 인류와 그 문명을 기반으로 문명을 재건하려 하였어. 이를 위해 인류의 기억과 지식이 필요했던 그들이 내게 왔지. 내가 인류의 기억과 지식을 온전히 가진 이 세상의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어.
  나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으로부터 나는 인류의 후예이며, 인류의 대를 이을 사람이란 가르침을 받으며 살았어. 그리고 사람들은 나를 인류의 후예로 칭했지. 인류의 지식이 필요했던 이들은 인류의 후예인 나를 존귀한 존재로 칭했고, 내가 인류의 지식을 전수하는 대신으로, 나에게 자신들이 가진 많은 것들을 전수해 주었지. 그들로부터 받은 것을 토대로 나는 마녀가 되었고, 마녀로서 여러 어린 이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사람이 되었지.
  가르치는 것 이외에도 여러 학업을 위해 나서기도 했어. 물론, 내 지식은 일천해서 전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겠지만, 행성의 거주민들이 나의 기억을 토대로 지식을 재구성해서 문명을 위한 지식을 재구축할 수 있었던 것 같아. 지금 이 세상에 통용되는 세니티아 문자도 그런 식으로 만들어졌어. 세니티아 인, 베라티사 인들과의 교류도 있었고, 그들의 도움도 있었기 때문일 게야. 나는 감수만 조금 해 주었고, 세니티아 인들이 문자 구성의 주역이었기에, 세니티아 문자가 된 게야.
  그렇게 가르침을 받은 이들 중에는 네 선조, 네 가문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사람, 아르사나 베르티 1 세 (Arsana Berti I) 도 있었을 게다. 그는 내게 가르침을 받고, 여러 성계를 여행하는 모험가가 됐지. 너나 네 어미처럼 뛰어난 마녀는 아니었지만, 굳센 마음씨와 정의감을 가진 훌륭한 모험가였지.
  사실, 아르사나 1 세에게는 한 가지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어. 자네도 들었는지는 모르겠다만...... '무한의 영 (Savol ov Unendlessness, Øënlimitaßïy Nëß)' 이 가진 힘에 접근할 수 있는 재능이었지. 본인은 그런 재능에 관심이 없었던 것 같고, 아마도 본인의 딸, 손녀에게 전승되지는 못했을 거야.

  무한의 영, 그것에 대해서는 들어본 기억이 있지만, 나도 자세히는 알지 못했다. 그것도 어머니가 아닌, 천문대 시절에 세니아로부터 들은 것이었고, 세니아 역시 무한의 영에 대해서는 자세히는 알지는 못하고 이야기를 했기에,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대충 넘어갔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렇게 살게 되신 거예요?"
  "큰 죄를 지었지." 그러자 노파가 답했다.

Am Rand der Welt fällt Gold von den Sternen
Und wer es findet, erreicht, was unerreichbar war
Sein heißt werden, Leben heißt lernen
Wenn du das Gold von den Sternen suchst
Musst du allein hinaus in die Gefahr.

세상의 끝에서, 황금빛 별이 내리고,
그것을 찾는다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이룰 수 있단다.
무엇을 배우며, 어떻게 살아가든,
바깥 세상의 시련을 겪어야만
황금빛 별이 있는 곳에 닿을 수 있단다. 뮤지컬 모차르트의 노래 'Gold von den Sternen' 에서
  딸이 한 명이 있었어. 모든 것을 내려놓고, 호숫가에서 낳은 자식이었지. 마지막 인간의 후예가 낳은 또 다른 인간의 후예가 태어났다며, 많은 이들이 축복을 내렸지. 그 만큼 나에게도 소중한 자식이었어. 나는 그 아이를 멸망의 여파를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 험난한 세상에서 지키고 싶었단다.
  하지만 그 아이는 그런 나의 바람과 점차 어긋나기 시작했어. 인간의 후예로서 세상의 보배로 살아가고 있었지만, 그 아이는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지.

  그 때, 어떤 사람이 내 딸을 찾아왔어. 음유 시인이었던가,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는구나. 그 사람은 나를 찾아오더니, 하나의 노래를 불러주었지. 아마도 그 사람은 그 아이의 꿈이 크다는 것을 직감하고, 꿈에 관한 노래를 불러주었을 게야. 그는 그렇게 그 아이에게 꿈을 이룰 수 있다고 격려하면서 바깥 세상으로 갈 것을 종용했던 것은 알고 있어. 이외에 또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그 아이의 바깥 세상에 대한 욕망을 크게 자극했던 것 같아.
  그 이후, 한 동안 그 아이는 집에서 나오지 않았어. 그래서 스스로 마음의 정리를 하려 하는 것 같았고, 그래서 그런 그 아이를 가만히 지켜보려만 했지. 나는 곧, 흐트러진 마음을 정리하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 같았지.

  "그 아이는 며칠 후, 편지 하나만을 남기고 떠나가 버렸어."
  그리고, 노파는 그 편지는 지금도 갖고 있다고 말하더니, 왼쪽 바지 주머니에서 곱게 접힌 종이 하나를 펼쳐서 내게 건네었다. 그 종이에는 어떤 사람이 필기체로 쓴 글이 적혀 있었으며, 어떻게 보더라도 편지글 형식이라 편지였음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사랑하는 어머니.

이렇게 편지로 작별 인사를 남기게 되어 죄송해요.

어머니께서 제가 집에 남아있기를 바라시는 마음은 이해해요. 이 곳에서의 삶이 답답했던 것도 아니에요, 이 곳에서의 삶은 풍족했고,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저를 공주처럼 받들었지요. 하지만 저는 그런 삶에 더 만족하고 싶지 않아요. 이 작고 초라한 곳의 공주로 남기보다는 더 넓은 세상의 여왕으로 살고 싶어요.

그 사람이 노래하면서 말했어요. 이 세상에는 황금빛 별이 내렸다고. 그리고 그 별빛을 찾기 위해서는 바깥 세상으로 나아가, 시련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요, 고통 없이는 얻는 것도 없는 것이겠지요. 그 의미를 깨닫기 위해 그 사람은 저에게 그런 노래말을 전달해 주셨던 것이겠지요.

어머니, 저는 알게 됐어요. 어머니께서는 실은 이 세상의 문명을 다시 일으킨 '위대한 마녀' 이셨다는 것, 그리고 위대한 문명을 구축했던 '인간' 의 후예이셨다는 것이지요. 저 역시 어머니의 자식으로 태어나 '인간' 의 후예가 되어 있겠지요.

옛 문명의 영광을 구축한 존재들의 후손으로서 사람들은 어머니와 저를 받들고 있지만 실은 그들은 우리를 '지나간 시대의 유산' 으로서 받들고 있을 뿐, 우리를 진심으로 자기들 세상의 일부로 받아들이지는 않을지도 몰라요. 어쩌면 위대한 마녀이자 세상의 여왕이셨을 어머니께서 그 영광을 더 이상 누리시지 못하시고 계신 것은 과거의 존재인 어머니를 사람들이 질시해 내쫓았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이대로 있다가는 저는 지금의 어머니처럼 사람들에게 '과거의 유물' 로서 사람들의 구경 거리가 될 뿐이라 생각했어요. 저는 그런 삶 따위 원치 않아요.

인간의 시작은 유인원이었어요. 하지만 어떤 축복을 받아서인지는 몰라도 높은 지성과 강인한 힘을 가진 종족으로 진화해 후세에 길이 남을 업적들을 남겼어요. 인간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종족이라는 것을 어머니께 배웠어요, 신보다도 위대하고, 악마보다도 사악한 종족이 될 수 있다고 했지요. 저는 그런 인간의 후예예요, 저는 여기 있는 그 무엇보다도 위대해질 수 있을 것이라 저는 확신하고 있어요. 저를 세상의 구경 거리 삼으려는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위대한 존재로 거듭나, 만인에게 경배받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거예요.

어머니, 제가 변해 가는 모습을 지켜봐 주세요. 저는 반드시 해낼 테니까요. 그 때가 되면 어머니를 모시겠어요, 그리고 어머니께 다시 세상의 존귀한 영광을 누리도록 하겠어요.

지켜봐 주세요,

사랑하는 딸 XXXXXX

  무슨 이유 때문인지 쓴 사람의 이름 부분은 마치 그 부분만 물에 적신 것처럼 잉크가 흐려져 보이지 않았다. 이는 고의적인 행동이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 작은 부분만 물에 적시거나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필체가 결코 낯설지 않았다. 학당의 학장실에서 몰래 보았던 올리비아 사반의 필적과 너무나도 유사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필체만큼은 사람의 고유 영역 중 하나이다. 필체를 위조하는 경우에도 온전한 복제는 사실 불가능하다는 말도 있을 정도다. 게다가 이는 필체 속이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에게 쓰는 편지에 어떻게 필체 속이기를 하겠는가. 그래서 필체의 주인에 대해 나름 확신할 수 있었고, 그러면서 노파에게 부탁했다.
  "할머니, 그 편지, 저 한테 주실 수 있겠어요?"
  "......." 노파에게 그 편지는 소중한 물건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의 표정을 보며, 쉽게 편지를 건네줄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뜻밖에 노파는 그 편지를 내게 쉽게 건네 주었다. 그리고 노파는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미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것 같군."
  그리고, 나에게 편지는 어떻게 처리해 버려도 상관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딸이 말한 것처럼, 지상에 황금빛 별들이 내렸고, 자신의 딸처럼 그 별들을 찾으려 한 이가 있는지는 알 수 없으며, 그래서 황금빛 별에 관해서는 믿지 않아도 좋다고 말하고서, 다만, 그는 황금빛 별이 이 세상에 내린 설화를 믿었고, 그 믿음 대로 별을 쫓는 삶을 살려 했다는 것만큼은 알아달라고 당부했다.

  "가만, 저기 저 비행기는 뭔가?"
  그 후, 노파는 나더러 하늘을 보라는 듯이, 바다 건너편 상공을 가리키며, 내게 물었다. 그리고 그 물음에 반응해 내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을 때, 하얀 빛을 발하는 날개를 펼친 비행기, 아니 창이 마치 노파와 나를 내려다 보는 듯이 자리잡고 있었다.
  "리사가 말했던 '성창' 이 저렇게 생겼던가. 그 '성창' 은 전투기처럼 독자적인 비행도 할 수 있다고 했는데 말이다."
  노파의 말에 다시 창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성창' 에 의해 인생을 빼앗긴 자의 잔류 사념이 들고 있던 창의 모습은 그 창의 모습과 너무도 닮았다. 자신의 인생과 영혼을 빼앗은 '성창' 에 대한 사념체의 집념을 생각하면 그 '성창' 은 그 때 보았던 창과 닮은 모습을 가졌을 것임이 분명해 보이기는 했고, 그래서 이렇게 답했다.
  "그러할 것 같아요, 아마도." 그 이후, 노파는 나에게 그 창이 언제부터 자신과 나를 지켜보고 있었을 것 같냐고 물었고, 그 물음에 나는 이렇게 답했다.
  "저와 할머니가 이렇게 있는 동안 계속 지켜보고 있었을 것 같아요."
  창은 한 동안 상공에 계속 머무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무슨 이유 때문인지 기억의 사당이 있는 쪽으로 날아가려 하면서 나의 눈앞에서 사라져 갔다. 그 무렵, 나 역시 슬슬 아잘리 그리고 리사 선생님의 곁으로 돌아가려 하였고, 그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후, 나는 친구와 함께 동행하다가 홀로 떨어져 나왔는데, 너무 오래 절벽가에 있으면 친구가 걱정할 수도 있음을 밝히며, 이제 헤어져야 함을 알린 이후에 작별 인사를 하고, 그간 걸어왔던 길을 되짚으며, 리사 선생님의 거처로 돌아가려 하였다. 리사 선생님 등은 숲길 입구의 가장자리 한 곳에 머무르고 있었던 만큼, 금방 그 거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내가 아잘리 그리고 리사 선생님의 곁으로 돌아왔을 무렵, 아잘리가 리사 선생님께 뭔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전에는 어린 시절의 즐거운 일에 관한 이야기들이 이어졌던 것 같지만, 그 이후로 그의 어린 시절에서의 시련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데, 결코 낯선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샤하르의 평범한 소녀들 중 한 명으로 여느 아이들처럼 때가 되자 샤하르의 중앙 학교에 입학했다. 그 역시 그 때에는 평범한 교육을 받고, 평범하게 학교 생활하는 학교의 여느 학생들 중 하나였다. 다만, 그의 장래 희망은 모험가로서, 세상의 여러 곳들을 여행하는 것이 꿈이었다고 했다. 나는 머리카락을 짧게 깎고, 머리에 띠를 두르며 살고 있었는데, 강한 소년처럼 보이고 싶었던 것이 그의 이유였다. 하지만 그런 꿈을 놓아둔 채, 여느 친구들과 함께 놀러다니는 것에 전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학급에 어떤 소년이 전학 오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짧은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빗은 거친 머리 모양을 가진 소년으로 외모는 곱상했지만, 뭔가 많은 일을 겪었는지, 표정이 밝지는 않아 보였고, 어쩐지 험악한 분위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 학생이 내 옆 자리에 앉기를 원치 않고 있었고, 자신처럼 자신의 옆 자리가 빈 경우가 몇 있어서 자기가 옆 자리에 앉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나쁜 예감대로, 그 학생의 옆 자리는 내 바로 옆 자리가 되고 말았다. 이것이 나와 그 '소년' 이 가진 인연의 시작이었다.

  공장에서 일하다 왔다고 해서, 여느 학생보다 학업이 모자랄 것 같은 '소년' 은 다른 말 없이 공부에만 전념했다. 그래서인지 '소년' 의 학업 성적은 놀라울 정도로 좋았다. 학교 선생들이 공장 다니던 애라는 사실을 믿지 못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학업이 좋으면 운동이라도 못 하면 좋았을 텐데, 녀석은 운동 신경도 좋았다. 공장에서 일했다는데, 무슨 위험한 일 하다가 온 것인지. 아니면 광산에 있기라도 했나. 다만, 공 차기 놀이 같은 것에는 잘 어울리지 않았다. 하긴, 벌써부터 세상의 쓴 맛 다 본 녀석에게는 시시한 놀이였겠지.
  이런 녀석이 잘 생기기까지 해서 몇몇 여자애들이 좋아하고 따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것은 녀석이 학당을 졸업할 때까지 이어진 것으로 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짓이었는데, 그 때의 나는 그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진 것 없는 천애고아에 공장을 전전했던 녀석이라는 것은 알 바 아니었다. 문제는 이 녀석의 언행이 꽤나 거칠었고, 장래 희망도 당시의 내 기준으로 참 천박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저런 말도 험한 독종에 장래 희망도 고작 용병인 녀석에게 저런 좋은 학업 성적과 운동 신경 같은 것이 주어지냐, 이것이 내게는 못 마땅했던 것이다. 그 학업 성적이 내 것이라면 보다 나은 장래 희망을 더 잘 이룰 수 있을 텐데, 라는 생각도 들었다.

  "...... 본인은 몰랐겠지만, 여자애들 중에 그 녀석을 좋아하는 애들도 있었어요. 그런 시절이잖아요, 시쳇말로 '싸가지 뭣도 없지만, 잘 생기고, 능력 있는 녀석' 이었고, 뭔가 과거 이야기도 있는 그런 녀석 아니에요? 그런 시절 아이들 마음을 흔드는 뭔가가 있었던 거예요."
  아잘리가 말했다. 그러자 리사 선생님께서 그런 아잘리에게 물어보셨다.
  "그런 애한테, 분명 열등감 같은 것을 느낀 때가 있을 거야, 그렇지 않니?"
  "당연히 있었죠." 아잘리가 답했다.

  나는 점차 '소년' 을 못마땅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그런 공부에 뜻도 없는 녀석한테, 저런 재능이 옮겨간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했었다, 그것 때문에 신을 원망한 적도 있었으니....... 결국 어느 날 밤, 녀석이 샤하르 서쪽 강변에 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그 원망이 폭발해 버리고 말았다.

나 좀 보지 않을래?
아잘리야?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무 것도...... 그건 그렇고, 세상 참 불공평하지 않냐?
갑자기 뭔 소리야?
야,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너 같이 공부에 뜻도 없는 한테, 세상이 그럴 수 있냐고.
내가 뭐 어쨌는데?
너도 알잖아, 너 학교 성적 X라게 좋다는 거, 게다가! 너는 잘 생겼지, 운동도 잘 하지, 못 하는 게 뭐 있냐? 너 같이 싸가지도 없는 애한테 왜 그런 재능이 가는 거냐고!
그래......? 맞아, 나 싸가지 없어. 그래서 신은 공평한 거 아냐? 재능을 준 대신에 인성을 뺀 거잖아.
그게 문제인 거야, 이 새X야!!! 인성도 뭣 같고, 말도 험한데, 장래 희망도 그 따위잖아!!! 그런 재능이 공부에 뜻도 없는 너한테 간다는 게 말이 돼!? 말이 돼냐고!!!
그런 건 나와 아무 상관 없어!!! 나도 공부 같은 거 필요 없으면, 얼마든지 때려 칠 수 있다고!!!!
때려칠 수 있다고? 그럼 때려 쳐!!! 그런데 안 때려 칠 거 잖아? 내가 모를 것 같아? 너 같은 새X가......!
어? 왜 갑자기 말을 멈춰? 더 말해 봐! 말 못 잇겠어?

아냐!!! 너 같이 못 되 먹은 애들이 자기 재능만 믿고 뻐기는 꼴 못 봐 줘! 평소에는 이렇게 싸가지 없는데, 윗사람들 앞에서는 좋은 사람인 척이나 하고!!! 그런 애들이 나중에 커서 뭐가 되겠냐고!?

  그 때, 그 말이 녀석의 마음을 세게 후벼팠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못된 짓인데, 당시의 나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난 커서 그 딴 놈들 따위 되고 싶지 않아.......!
거짓말쟁이.....!!!!

  이후로 녀석에게서 주먹이 나갔고, 그 때문에 강변의 공원 한복판에서 싸움이 나고 말았다. 서로가 서로를 주먹질하고 발길질하다가 나중에는 바닥 위를 구르기까지 했다.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지, 나중에 온 몸에 멍이 들고 바닥에 긁힌 상처가 곳곳에 났었다.
  녀석은 생각보다 강했다. 주먹으로 맞는데, 돌에 맞는 것 같았고, 팔로 치는데, 몽둥이로 맞는 느낌이었다. 나중에는 너무 아파서 일어나지 못할 지경이었는데, 녀석은 어찌어찌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녀석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야, 일어나! 일어나라고!!!
그래, 네가 이겼어...... 그런데, 더 때리고 싶어? 내가 졌어, 아프니까, 이제.......
일어나라고.
이제 못 일어나겠어, 그러니까.......!
일어나라고, 당장!!!!!
.......
왜? 너 그 정도밖에 안 돼? 방금 전까지 너한테 나는 뭐 였어? 때려 부수고 싶은 악당 아니었냐고!
아니, 내가 악.......
일어나란 말이야, 이 새X야!!!!!
.......!

너 장래 희망이 뭐였어? 모험가였다며? 이렇게 싸워서 두들겨 맞고 악당한테 잘못했다고 싹싹 비는게 모험가야!? 기세 좋게 악당을 두들겨 패겠다고 나섰다가 두들겨 맞고, '악당은 당신이 아니라 바로 저입니다!' 이러는 게 모험가냐고!!! 그래서야 무슨 모험가를 꿈꾸고 앉아 있어!? 그건 모험가가 아니야!!!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돌아다니는 부랑자고, 도망자지!!!!

나 같은 악당, 깡패 하나한테 기 쓰고 덤비지 못해서, 용사고 모험가고 어떻게 될 수 있겠어? 어서 일어나지 못 해!?

  그런 녀석의 도발에 자존심이 상해 버린 나는 기어이 일어섰다. 그리고 녀석한테 달려들었다. 그 때에도 녀석은 나에게 맞대응하려 하는 듯했지만, 이전처럼 매섭게 대하지 않았다. 내가 악을 쓰며 달려들었을 때에도 가만히 있었고, 그 이후에도 내가 때리는 대로 맞아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죽을 정도로 때리기를 반복해 서로 지쳐 쓰러지고 나서야 싸움은 멈추었다.

  "애들이란 원래 그렇지, 별 대단치 않은 이유로 치열하게 싸우고는 하지. 그러면서 크는 것이 또 애들이란 말도 있기는 하더라."
  "그런 것 같아요." 아잘리가 리사 선생님의 말에 조용히 미소를 띠며 답했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고?
응...... 언젠가 네가 이렇게 달려들 거라 생각했어.
내가 그럴 줄 알았으면서, 왜 나를 그냥 내버려 두었던 거야?
언젠간 네가 나한테 싸움을 걸 거라 생각했고, 그 때를 기다리고 있었어. 웬지 오늘이 그 때 같았고, 그래서 밖에 나왔던 거야.

  그렇게 나한테 욕을 듣고, 도발을 당하고, 맞기까지 했음에도 녀석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미친 애 같아 보이기도 하는데, 아무튼, 맞을 일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의 도발에 강하게 응한 것도 어쩌면 싸움을 기대하며 일부러 그랬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 맞으면서 안 아팠어? 무진장 아팠을 텐데.
아팠지. 그런데, 더 어릴 때, 떡대들한테 두들겨 맞을 때를 생각하니,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더라고.
....... 너 꼬맹이 맞냐?

  그 때, 빈정거리는 듯한 나의 물음에 녀석이 웃고, 그 꼴을 보며, 나도 웃었다. 바닥에 뒹굴며 싸웠던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크게 웃었던 것 같다.

네가 적과 만났을 때, 어떻게 싸우는지, 그게 보고 싶어서. 모험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지? 때로는 약자들을 지킬 수도 있는 그런 사람.
어......
모험과 여행은 다른 거 알지?
어......

모험은 그런 거야, 때로는 누군가와 맞서 싸울 일도 생길 수 있는 거야. 모험을 하려면 그 무언가가 당당히 맞서 싸워 이겨낼 수도 있어야지. 늘 맞서 싸울 수는 없을 거야, 그러다가 정말 목숨을 잃을 수도 있거든. 하지만, 목숨이 중요하다고 해서, 위험이 닥쳐올 때마다 도망다니거나 자존심을 굽혀가며 목숨 부지하고 앉아 있으면, 그것을 모험가라 할 수 있겠어? 나는 그런 것들을 모험가라 생각하지 않아.

그리고, 애초에 약자들을 지키는 삶도 살고 싶다고 했잖아, 이를 위해서는 약자들을 맞서 싸울 수 있어야지. 물론 그런 상황에서 대화로 해결할 수도 있겠지만, 싸워야 하는 그런 때도 있어. 그럴 때에 가장 필요한 것은 힘이지만,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용기라고 생각해. 나는 그런 용기가 너에게 있는지 알고 싶었어. 네가 일어서지 못하면 거기서 그만두려 했는데, 일어섰으니까, 어떻게든 맞서 싸울 용기가 있다고 생각했고, 네가 싸움에서 이기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그냥 맞아준 거야.

  이후, 녀석은 마치 어른이 아이한테 하는 것처럼 말했다. 평소 같으면 자존심 상할 소리 같았지만, 언제는 그러하지 않았겠냐만은, 녀석은 도저히 전형적인 애들 같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아주 어릴 때부터 부모의 품을 어쩔 수 없이 벗어나, 어른의 영역에 머무르며, 세상의 어두운 면을 볼 만큼 봤던 녀석이다. 그런 녀석의 말이 가볍게 여기어지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를 듣다가, 근본적으로 궁금해진 것이 있었다. 거친 언행에 성질도 더러운 그 녀석이 왜 공부에 연연하는지 그 이유를 묻고 싶었던 것이다. 그 때, 녀석의 답은 이랬다.

집에 계신 할머니를 기쁘게 해 주고 싶었어, 그 뿐이야.
할머니? 어, 내 집에는 나와 할머니밖에 없어. 내가 고아가 되고, 공장을 전전하고 있을 때, 어떤 형이 나를 공장에서 구해 준 이후에 자기가 아는 사람이라며 할머니를 소개시켰는데, 그걸로 내가 홀로 사는 할머니 집에서 살게 된 거야.
.......
할머니께서는 늘 나를 위해주시는 좋은 분이셔. 야단 하나, 꾸중 하나 못하시는 그런 분이야. 그런 할머니께 좋은 모습 보여주고 싶은데, 그렇게 하려면 학교에서 좋은 성적 받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공부하고, 운동하고 그러는 거야.
손자가 모범생으로 알려지면, 할머니께서 좋아하실 테니까?
어...... 어쩌면 그게, 여기저기 떠돌며 살고 싶은 생각 하나 안 들었던 나한테, 안심하며 살 수 있는 곳과 더불어 삶의 희망을 주셨던 할머니께 해 드릴 수 있는 유일한 보답일지도 몰라서 그래.
그랬었구나.
그런 공부 따위 필요 없다면 난 얼마든지 때려 치울 수 있어. 애초에 좋은 직업 따위 갖고 싶지도 않아. 나 같은 게 학교 성적 잘 나오고, 그것 덕에 좋은 학교 가서, 좋은 교육 받아서, 좋은 직업 가지면, 세상이 어찌 되겠어? 좋은 직업은 그 직업에 어울리는 사람에게 주어져야 하지 않아? 나는 공부 잘하는 것만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방금 전까지 쭉 생각해 봤는데.......
뭐?
....... 너 꼬맹이 맞냐? 난 너 같은 애가 이 세상에 있다는 게 믿겨지지 않아, 정말로.

그런데, 할머니께서는 네 친할머니는 아닐 거 아냐, 그렇지?
어.
언젠가는 헤어질 때도 있겠네?
어.
할머니와 헤어지고 나면 어떡할 거야? 다시 혼자 될 것 같은데.
어떻게든 살아야지. 이제는 더 이상 그 어릴 때처럼 죽지 못해 살지는 않을 거야.

날 공장에서 구해서 여기로 데려온 형이 말했어, 살아서 할 수 있는 일들이 아주 많이 있을 거라고, 그리고 할머니의 보살핌도 있었어. 그 형과 할머니가 해 준 것을 생각해서라도, 나는 내가 살 수 있는 데까지 한 번 살아 볼 거야. 지금 이후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있겠지. 그것들을 찾아가며, 내 삶을 이어갈 거야. 그러하다 보면, 어떻게든 삶을 이어갈 수 있을 거야. 그러하다 보면, 거기서 희망이라는 것을 찾을 기회가 생길 지, 어떻게 알겠어?

  "녀석한테 그 형이라는 남자가 이렇게 말했다더군요, 노력이 꼭 사람의 기대에 응하는 것은 아니지만, 녀석에게는 뭐든 하면 될 수 있을 거라고. 그 남자는 노력하면 되는 사람이 아니고, 안 되는 사람이 있는데, 녀석은 되는 사람으로 생각했나 봐요."
  "그랬던 애가 어느새 여자애 같은 모습으로 변해가더라, 그랬었지?"
  "예, 할머니께서 떠나신 이후로, 머리 깎아줄 사람이 없어졌대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머리카락을 기르기 시작했대요. 또, 이런 말도 있더라고요, 선생님께서 그 애를 불러 갖고는, 머리카락이 긴 편이 어울린다고 하셨죠?"
  "맞아." 이후, 아잘리의 물음에 리사 선생님께서 답하셨다. 이후, 아잘리가 한 말에 의하면, 내가 머리카락을 기르기 시작하자, 자신도 그것에 맞춰 머리카락을 기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자신은 나와 학급이 나뉘어 몇 년 간, 헤어졌다가, 이후에 다시 만났는데, 다시 만났을 무렵에는 그 소년 같았던 모습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고 있었다고 한다.
  "처음 봤을 때에는 알아보지 못할 뻔했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필적을 보기도 하고, 어릴 적 초상화와 이후의 초상화를 대조해 보기도 했는데, 그 애가 맞더라고요."

  "그건 그렇고, 그 할머니 집을 리사 선생님께서 찾아오셨고, 이후에 할머니와도 면담을 하셨다던데, 어쩌다가 그 할머니 집을 알게 되신 거예요?"
  하지만 리사 선생님께서는 아잘리의 그 물음에는 명확한 답변을 하지 않으셨다. 내게 들려온 그 분의 목소리께서 들려주신 답변은 어릴 때부터 공장에서 일하다 온 아이치고 높은 학업 수행 능력과 적극적인 학업 태도에 주목했다는 것 정도. 하지만 아잘리는 그런 답변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은 반응을 보였다.
  "공장에 다니다 온 애라는 게 그렇게 특별할 리는 없을 것 같은데요, 전에는 배달 일을 하다 온 애도 본 적이 있거든요. 공장에서 일하다 온 애가 공부를 잘하는 것도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닌 것 같고......"
  그러다가 뭔가 의심되는 바가 생겼는지, 선생님께 이렇게 물어보는 것이었다.
  "리사 선생님, 혹시 그 애와 예전에, 아는 사이였어요?"
  사실, 나는 리사 선생님을 어릴 때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잠깐 만나 본 정도였을 뿐, 그렇게 의미가 있거나 하지 않았고, 학교에 다닐 즈음에는 그랬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기도 했었다. 물론 그것은 내 생각이고, 리사 선생님께서 무슨 이유로 나를 특별히 여기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리사 선생님께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고, 그 때에도 그러려고 하시는 것 같았다. 마땅한 대답을 하지 않고 계셨다. 그러다가, 바로 앞에 내가 온 것을 보시더니,
  "아르사나가 왔구나, 그렇게 됐으니, 그 이야기는 일단 나중에 하자. 지금은 아르사나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지 않겠니?"
  라고 말씀하시고서, 곧바로 나를 불러 당신이 있는 곳으로 오라 하셨다. 이후, 내가 아잘리 그리고 리사 선생님의 곁으로 오자마자 리사 선생님께서는 아잘리의 오른편에 앉도록 하시더니, 내가 아잘리의 오른편에 앉자마자 곧바로 나에게 물으셨다.
  "그 동안 어디에서 뭘 하고 있었니?"
  "절벽가에 있었어요." 내가 답했다. 그리고 호숫가에 살고 있던 노파가 절벽가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았음을 알렸다. 원래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했었다는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으려 했지만, 노파와 함께 있으면서 어떻게 지냈느냐고 아잘리가 묻고 나니, 어린 시절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하면서 어린 시절에서 공장에서 일했던 이야기, 공장에서 자신의 삶에 변화를 주었던 '어떤 형' 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아잘리와 싸웠던 것에 대한 이야기까지 했었다고 알렸다.
  "예전에 살던 곳 근처에 살고 계신 분이야. 어머니께서도 생전에는 자주 만나셨어. 그 분께서 내가 어떻게 지냈냐고 물으시기에 대답을 한다고 그런 이야기를 하게 된 거야."
  "그랬었구나." 그러자 아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다. 그 이후, 나는 그 노파의 과거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들었음을 알리고, 그에게는 딸이 있었고, 그 딸을 바깥 세상의 위험으로부터 어떻게든 지키려 했지만, 딸은 우연한 계기를 통해 바깥 세상을 동경하며, 집을 떠났다고 들었음을 말하기도 했다.
  "할머니께서는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하셨어. 아무래도 딸을 잘못 키운 것에 대한 자책감을 갖고 계신 것 같아."
  그 이후, 나는 아잘리에게 편지를 건넸다. 노파로부터 받은 노파의 딸이 자신의 집을 떠나면서 자신의 어머니에게 남겼다는 편지로 그것을 주머니에서 꺼내서 펼치면서 나는 그 편지에 대해 노파가 줄곧 간직하고 있던 것을 받아온 것이라 알렸다.
  "그런데, 그 편지에는 한 가지 주목할 것이 있었어."
  "그게 뭔데?" 그러자 아잘리가 바로 물으니, 그 필체라 답하면서 편지를 펼쳐서 아잘리에게 건네었다. 나는 이미 편지를 읽어 보았고, 필체까지 알아본 상태였기에, 바로 아잘리에게 편지를 보여주고, 필체를 확인하도록 한 것이었다.
  "누구의 글씨체인지 알 것 같아?" 이후, 한참 편지를 읽고 있던 아잘리에게 내가 묻자, 아잘리 역시 알 것 같다는 반응을 보였고, 그 이후에 나에게 이렇게 답했다.
  "이거, 그 사람의 필적 같은데? 그 올리비아 사반이라는 학장 아줌마."
  "알고 있었네." 내가 편지를 보자마자 필체를 바로 알아보고, 누구의 것인지 확신할 수 있었듯, 아잘리 역시 필체를 보자마자 바로 올리비아 사반의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 편지의 이름 부분만 물에 넣은 듯이 지워져 있던 것에도 주목하고 있었다.
  "이건 분명, 행여나 딸의 이름이 외부에 밝혀질 것을 우려하셔서 그 어르신께서 일부러 지우신 것일 거야. 딸이 뭔가 큰 죄를 저질렀고, 그 죄로 인해 딸이 욕되는 모습을 보며 마음 아파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그러하셨던 것 같아."
  그리고 지워진 부분은 여섯 글자이며, 앞 부분이 O 에 그 뒷 글자가 막대기 모양이었음을 지적하면서 분명 올리비아일 것임이 틀림 없다고 말하더니, 외부에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그가 여러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이미 아는 사람들은 알고, 그런 사람들에 의해 관련된 이야기가 그 모친인 노파의 귀에도 들어갔을 것이라 추측하기도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노파가 딸의 행보에 대해 자신을 죄인이라 칭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황금색 별빛' 이란 이상을 찾아 무작정 떠나갔다는 자신의 딸이 어느새 악당이 되어 악행을 저지르며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노파가 어머니로서 얼마나 마음이 아플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리사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아르산을 알아보고 그 할머니 집을 찾아가신 거예요? 뭔가 이유라도 있었나요?"
  그렇게 하나의 화제가 마무리되자, 아잘리는 이전까지 잠깐 묻어두었던 것에 대해 다시 리사 선생님께 여쭈려 하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리사 선생님께서 마땅한 대답을 하지 않으실 것 같아 보여, 별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리사 선생님의 답변하시는 모습을 지켜보려 하였다.
  "내가 가르치던 제자들 중 한 명을 데리고 샤하르 거리로 간 적이 있어."
  하지만 리사 선생님은 이번에는 의외로 아잘리에게 말을 아끼려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냥 넘어가려 했다가, 아잘리가 재차 묻기도 했고, 내가 옆에 있게 된 이상 나에게도 들려줄 겸, 그 이야기를 풀어놓기로 결심하신 것 같았다.

  리사 선생님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 제자가 길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어떤 소년처럼 보이는 아이가 마을 한 곳의 집으로 뛰어가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집에서 할머니가 맞아주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고. 그러면서 그 제자는 그 똘똘해 보이는 소년이 할머니와 단 둘이서만 살고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서 그 소년의 후원자가 되어달라고 부탁했고, 리사 선생님께서는 그런 제자의 부탁에 따라 소년이 다니는 학교를 수소문해 그 학교의 교사로 부임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때가 내가 학교의 교사가 되기로 한, 그 3 일 즈음 전이었을 거야. 집의 주소는 그 제자가 잘 알려 줬고, 그래서 할머니를 찾아가 면담도 하고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지."
  "그렇다면, 그 할머니와 만나서는 무슨 이야기를 했어요?"

  리사 선생님께서는 소년 (나였으므로, 이후로는 '나' 로 칭한다) 의 할머니를 찾아갔고, 그로부터 자신의 일가 사람들이 자신을 부르려 한다는 이야기, 그리고 할머니께서 몇 주 즈음 후에 집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실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셨다. 그러자 리사 선생님께서는 할머니께 자신이 나의 후원자가 되어줄 수 있겠느냐고 청하셨고, 그러면서 내가 다시 가족도 의지할 곳도 없는 고아가 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고 이어 부탁하시니, 할머니께서는 그런 리사 선생님의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하셨다고 한다.

  "그 무렵에 그 애는 중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뭐든 일을 하러 가겠다고 했어. 그랬던 그 애에게 생활비, 학비를 다 지원해 줄 테니, 학업은 계속하고, 이후에 대학교를 졸업하든, 중퇴하든 한 이후에 취업을 하든 뭘하든 하라고 했어. 그러면서 나에게도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면서 내가 이것저것 가르침을 전해주기도 했던 거야."
  "학비를 대주는 대신에 스승으로서 대접을 받게 했다는 것이로군요."
  "그렇게 됐지." 이후, 아잘리의 말에 리사 선생님께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답하셨다.
  "어르산이 리사 선생님께 사사를 받게 된 시기가 그 때 부터였겠네요, 초등학교 다니던 때였을 텐데."
  "맞아." 이후, 아잘리의 물음에 리사 선생님께서 답하셨다. 학업에 대해서는 내가 학교에서 어떻게든 배울 것이고, 스스로 공부하는 자세도 있으니, 그것에 대해 딱히 걱정은 하지 않으셨지만, 무술은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만큼, 자신이 직접 가르치기로 하셨고, 자신이 직접 이것저것을 가르치려 하셨다고 한다.
  실제로 다른 것은 몰라도, 무술은 리사 선생님으로부터 직접 배웠다. 일주일에 2, 3 번씩 리사 선생님께서 거처로 찾아오셔서 각종 체술부터 무기 다루는 법까지 하나둘씩 가르쳐 주셨다. 처음에는 몸으로 싸우는 법을 먼저 가르치셨는데, 전장에서는 주로 무기로 싸운다고 하더라도 몸으로 싸우는 법이 싸움에서는 근본이자 기초이기에 그 기본부터 익혀야 무기로 싸우는 법을 제대로 익힐 수 있기 때문이라 하셨고, 싸우는 방법을 잘 몰랐고, 리사 선생님의 말씀은 무조건 옳다고 여기었던 당시의 나는 그런 리사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몸싸움, 체술 방법부터 익히려 하였다.
  체술을 익힐 때도 그렇고, 검술을 익힐 때에도 기본적인 동작부터 차근히 배워갔다. 칼싸움의 기본적인 방법만 익혀도 무기를 마구 휘두르는 것보다는 훨씬 더 잘 싸울 수 있다는 가르침과 그것에 관한 기대감이 있었기에 기본적인 동작부터 제대로 익히려고 노력했었다. 싸움은 화려한 기술로 시작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에는 기본적인 격투술, 무기 기술의 싸움과 마음 읽기와 같은 판단이 중심이 되며, 그러하기에, 근본, 기본기가 훌륭한 무인은 쉽게 패배하지는 않는다는 리사 선생님의 가르침도 한 몫 했다.
  "리사 선생님께서는 화려한 기술을 앞세우시고, 그러하시잖아, 그런 모습이 부럽거나 하지 않았어?"
  "부럽긴 했어. 그래서 언제 그런 기술을 익힐 수 있겠냐고 질문한 적도 있어. 그 때, 이런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나, 때가 되면 언젠가 그런 기술을 생각해낼 수 있는 그런 때가 있을 것이라고. 나라면 그런 때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그 때를 바라보며, 수련에 매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
  처음에는 그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지만, 어찌어찌 하다 보니, 어느새 나도 빛의 기운, 감빛 기운을 이끌고, 그것들에 관한 기술들을 나름 고안해 낼 수 있었다. 나에게 필요한 것, 내가 원하는 것을 구현할 수 있는 능력을 내 스스로 터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릴 적부터 가르침을 받은 경험을 토대로 어느 정도 기반을 갖출 수 있었기에, 무난히 내 것을 스스로 터득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과 한 번씩 여행도 다녔었지? 2 달에 한 번씩, 세상 구경 시킨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게 하셨었잖아."
  "맞아, 그러기도 했었어." 이후, 아잘리의 물음에 내가 답했다. 아잘리가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은 아잘리도 나와 리사 선생님의 여행에 동참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적으로 맞설 만한 이런저런 개체들을 마주했고, 내가 직접 상대해 보기도 했던 기억이 있었고, 아잘리도 함께 나선 바 있었다. 이 여행은 내가 고등학생 과정에 이를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무렵, 전투기의 형상을 갖추고 있던 창이 나의 머리 위를 지나치다가 길 너머를 가리키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보자마자 나는 리사 선생님 그리고 아잘리에게 어서 일어나서 가야할 것 같음을 알렸다. 리사 선생님도, 아잘리도 그런 나의 말에 이의를 드러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 모습을 지켜보자마자 나는 앞장서 길을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뒤를 돌아보니, 아잘리가 리사 선생님을 모시고 나의 뒤를 따라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전 때도 그러하였지만, 언제 어디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었던 만큼, 빛의 기운으로 검을 생성해 오른손에 쥐면서 앞장서 가려 하였다. 가끔 소형, 중형 기계 병기들이 몰려오기도 했지만, 내 선에서 어떻게든 모두 처치할 수 있었던 것들이었다.
  그 중에는 상공에 머무르고 있으면서 광자 미사일들로 지면에 폭격을 가하려 하는 대형 전투정들도 있었지만, 격파 자체는 흔하게 나타나는 중형, 소형 병기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끔 몰려오는 병기들을 처치하며 길을 걸어가는 동안, 뒤따르고 있었을 리사 선생님의 과거를 떠올려 보았다.

  "너는 무엇이 되기를 원하니?"
  "전사가 되고 싶습니다."
  리사 선생님과 첫 대면 때, 그의 물음에 대한 답이었다. 당시 나는 별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나는 용병이나 괴물 사냥꾼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 늘 생각했었다. 그런 직업이 멋지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렇게 사는 것이 내 운명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정도가 아니면 막노동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던 것일까. 이에 당황하며 리사 선생님께서 재차 그것이 내 장래 희망이 맞냐고 물었을 때에도 나는 똑같은 대답을 했다.
  "이 정도가 제 운명이겠지요. 이것이 아니면 막노동을 하며 전전하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전부가 아닐까 해요."
  "다시 한 번 물을게, 떠돌이 전사로서 사는 것이 정말로 네가 원하는 삶이니?"
  "...... 몇 번을 질문하더라도 변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이후, 리사 선생님께서는 알았다고 답하셨다. 도중에 뭔가 내키지 않을 일을 하게 될 것 같아 보이는 표정을 지으셨지만, 이내 곧, 표정을 다잡으시더니, 나에게 그리 됐으니, 전사로서의 가르침을 전수해 주겠다고 말씀하셨고, 그리하여, 나는 리사 선생님으로부터 전사로서의 소양을 배우게 되었다. 일주일에 2 번씩, 학교 생활을 마치고 나면 리사 선생님께 지도를 받았다.
  리사 선생님의 지도는 체력 단련부터 시작됐으며, 기본기 연습이 주가 되었다. 특정 목표를 설정하시고, 안 되면 될 때까지 하는 것이 그 분께서 지향하신 교육의 유형이었던 것 같다. 그것 때문에 밤을 지샌 적도 있었다.

  "보통의 아이들 같으면 선생을 잘못 만났다, 그만하고 싶다, 이런 말이 나올 텐데, 이 아이에게는 그런 말이 안 나오네. 이 보다 더한 꼴을 이미 많이 겪어 봐서 그런가."
  어쩌다가 들은 리사 선생님의 혼잣말이었다. 그 때, 나는 혹시 저 사람이 나를 이용하는 것은 아닌가, 하며 두려워 했고, 그 기억을 읽으셨는지, 그 이후, 리사 선생님께서도 흠칫 놀라시는 모습을 본 기억이 있다. 그 무렵의 리사 선생님께선 뭔가 두려움 혹은 죄책감 같은 것을 느끼신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나도, 그 분도 그것에 대해 뭐라 말하지는 못했다. 어쩌면 그랬던 것 같다. 하고 싶은 말은 있었겠지만 하지 못했으리라는 것으로 서로 간의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일이라 생각해서 그랬던 것 같다. 그 이후로 리사 선생님께서는 내 앞에서 나에 대해 혼잣말을 하거나 하지는 않으셨다.

  그 분의 지도는 내가 초등학교로서 다니던 학교를 졸업하고, 중등학생 과정에 진입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 분의 지도 유형은 내가 중등학생이 된 이후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한 번씩 밤을 지새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리사 선생님께서는 학업 역시 중요할 것이라 말씀하시면서 이전처럼 오랜 시간 동안 지도하시지는 않으셨고, 방문 지도도 일주일에 한 번으로 줄이셨다. 이후에는 스스로 강해지기 위해 단련하는 일이 많아졌다. 틈나는 대로 무술이나 검술 단련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회상을 이어가며, 자갈밭길을 한참 걷고 있을 즈음, 커다란 전투정 3 척이 상공 먼 곳에서 내가 있는 일대를 붉은 광선들을 발사해 가며, 공격하려 하였다.
  너무 먼 곳에서 공격하려 한 탓인지 나를 바로 쏘아 맞히거나 하지는 못했으나, 광선이 착탄되는 곳마다 큰 폭발이 일어났고, 광선이 나를 직접 공격하지 못한다고 안심하고만 있다가는 폭발에 휩싸일 수 있으므로 그 점을 유의하며 폭발을 계속 피해가려 하였다.
  그렇게 폭발을 피해 가며, 빛의 기운을 통해 곡선을 그리는 빛 줄기들을 계속 발사하며, 반격을 행하였고, 그 반격을 통해 앞장서던 전투정을 시작으로 3 척의 전투정들을 잇달아 격침시킬 수 있었다. 격침된 전투정들은 몸체에서 폭발을 일으키기 시작하며 해수면 쪽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들 중 두 척은 수면에 도달하기도 전에 공중에서 폭발하며 화염와 열기, 연기를 터뜨렸으며, 한 척은 수면 위로 떨어졌다가, 그 수면 아래에서 폭발해 한 차례 거대한 물기둥을 일으켰다.

  그러다가 중등학생 과정에 진입하고, 몇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잘 했어, 잘 하고 있어. 이 정도면 사실, 무술을 배우는 학생들 중에서는 아주 우월한 실력이라 할 수 있을 거야. 무술을 배우는 데에서 중요한 것은 열의인데, 특히 너는 그런 점에서 아주 우수한 것 같아. 다만, 바깥 세상에서 괴물들과 맞서려면 더 많이 노력해야 할 거야. 나에게만 배우려 하지 말고, 여러 사람들에게 많은 배움을 가졌으면 좋겠다. 어쩌면 그 사람들이 나보다도 더욱 훌륭하게 가르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체력 단련이야. 체력이 받쳐줘야 무술은 뭐든 할 수 있음을 늘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 당시, 리사 선생님께서는 정식으로 내 실력을 평가하기 위해 대련을 하자고 하셨고, 내가 응하면서 대련을 하게 되었다. 그 대련 때에서만큼은 리사 선생님께서는 이전과 달리 자신의 실력을 거침 없이 드러내며, 나를 몰아 붙이셨고, 나는 체력 면에서, 기량 면에서 리사 선생님을 이길 수 없었다. 지금도 자신 없을 판에, 그 때는 오죽했을까.
  또 이전 연습 대련 때와 달랐던 점은 연습 대련 (리사 선생님과 일주일에 한 번씩 연습 대련을 했다) 때에는 늘 이런 면에서 부족하다, 저런 면에서 부족하다, 이런 지적을 이어 가시기만 하던 리사 선생님께서 그 때만큼은 잘 했다고 계속 칭찬을 하시고 계셨던 것이다.

연습 때에는 늘 지적만 들어서, 이번에도 또 지적 받겠구나, 그런 생각했구나, 그렇지?
예.
그 때는 연습이라서 그랬어. 연습은 단련을 통해 보다 나아지기 위함이 목적이기에, 부족한 점이 생기면 그것을 보완해야 할 필요가 있어. 그래서 너를 지켜보며, 이건 아니다, 저건 아니다 싶을 때에 지적을 했었지, 그것이 옳은 지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지만 방금 전까지는 네 실력을 평가하기 위한 자리였잖니? 이런 평가를 위해 그간 연습과 노력을 해 온 거야. 내가 봤을 때, 너는 열심히 노력했고, 그 노력은 어떻게든 보상 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이후, 리사 선생님께서는 어릴 적의 나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씀하셨다. 아르데이스의 에테르니 서부 지구에 이르렀다가, 그 곳에서 '소년을 폭행한 공장 주인' 사건에 관한 호외를 본 이후, 내가 그 공장에서 살고 있었을 것이라 판단을 내리고, 공장을 찾아가셨지만, 이미 공장은 폐쇄되었고, 나에 대해서는 어떤 청년과 함께 샤하르로 떠났다는 소식만 들으셨을 따름이라고 하시면서 이후로 삶에 대한 의지가 강해진 나를 보시면서 그 청년이 나에게 많은 좋은 것들을 가르쳐 준 것 같다고 말씀하시며 기뻐하셨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 때의 마음 가짐을 늘 잊지 않고, 뭐든 열심히 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너는 뭐든 잘 할 수 있을 거야."
  리사 선생님께서 그 때 하신 말씀이었다.

  그 이후로, 리사 선생님의 지도 형태는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이후로는 자신의 검술, 마법술에 대한 가르침을 전해준 후에 직접 연습을 시켜보는 가르침의 시간을 더 많이 가지셨다. 이전처럼 밤새 단련시키는 일은 이제 거의 하지 않으셨는데, 그 시점에서는 내가 어지간하면 자신이 원하는 기준을 잘 따라오고, 그렇지 못하더라도 스스로 노력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 굳이 그 기준을 따라오게 하도록 계속 단련시킬 필요를 느끼지 않으셨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다가 고등학생으로서의 진학을 위해 샤하르의 학당에 입학하고 1 년 즈음 지났을 무렵, 다시 리사 선생님과 대련을 했다. 여전히 리사 선생님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리사 선생님께서는 이전 때에도 잘 했지만, 그 때에 비해 훌륭하게 발전했다고 칭찬을 이어가셨다. 그리고, 그 정도면 완벽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어디에 있더라도 충분히 잘 싸울 수 있으며, 적어도 불량배 앞에서 기 죽을 이유는 없을 것 같다고 말씀하시기도 하셨다.

너를 가르치겠다고 괜히 나선 것 같아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 다른 애들한테는 안 그러는데, 너에게 못된 스승으로 기억될 것 같아.
못 되긴요, 제가 원한 것이 그러하니,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겠지요.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이전에 제자를 가르치신 적이 있었어요?

  있...... 었다고 해야 할까. 나는 한 때, 군인이었고, 교관으로서 누군가를 가르치는 입장에 있은 적이 있기는 했어. 하지만 나는 가르치는 데에는 미숙했고, 좋은 교관은 아니었지. 어쩌면, 나는 너를 스승이 아닌 교관으로서 대했던 것일지도 몰라.
  연습할 때마다 말했지, 너는 아직도 부족하다고. 사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야. 그런 것을 솔직히 털어 놓았어야 했는데, 내가 못 나서, 가르치는 사람으로서의 자존심이 앞섰고, 그래서 그런 말을 하지 못했던 것 같아.
  너 말고, 내가 애제자로 두는 한 사람의 제자가 있어. 그는 나를 잘 따르는 사람이지만, 그 애한테도 몹쓸 짓을 한 번 한 적이 있었지. 그래서는 안 됐는데.......

  그 때가 먼 저편에 섬들이 보이는 지점에 이르렀을 무렵이었을 것이다. 상공 먼 저편에서 검은 갑주의 형상을 갖춘 인간형 병기 4 개체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내 키의 1.5 배 즈음은 되어보이는 대형 병기들로 팔마다 하나씩 총포를 갖추고 있으며, 어깨에도 공격 장치를 갖추고 있는 개체들이었다.
  그 인간형 병기들은 먼 곳에서 각자의 공격 장치들을 이용해 붉은 광선, 붉은 화구들을 발사하며, 내가 위치한 일대에 폭격을 가하는 방식으로 나를 위협하려 하였지만, 이전에 비슷한 공격을 겪은 경험이 있었던지라, 크게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그들의 공세를 피해내고, 이전에 나타났던 전투정들의 경우처럼 빛의 기운으로 곡선을 그리는 빛 줄기들을 발사해, 이들을 하나씩 격추시켜갔다.
  격추된 이들은 공중에서 폭발하며 추락하기 시작하더니, 모두 수면에 닿기도 전에 큰 폭발을 일으키며, 몸체가 부서지는 모습을 보였다.

  그 이후로는 원반형 혹은 고리가 달린 행성처럼 생긴 병기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들은 정찰기 정도였는지, 구형을 이루는 몸체에서 유도성 미사일들을 발사하고, 고리처럼 생긴 날개에서 광탄들을 발사하는 것이 공격의 전부였고, 내구성도 약했는지, 곡선을 그리는 빛 줄기 몇 번으로 바로 격추되고 폭발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무튼, 다시 물을게, 여전히 거대한 힘 그리고 악한 힘과 맞서 싸우는 것을 원하니?
예, 이제 그것 외에는 제가 추구할 수 있는 것이 없을 것 같아요.
그렇구나. 네 어머니와 비교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니?
그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전사라든가, 용사의 길을 택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악한 자들의 힘 앞에 머리를 조아리지는 않는, 그런 삶을 살고 싶어요.

  그 무렵의 리사 선생님께서 지으신 표정은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무언가 의미심장한, 복잡한 심경을 드러내는 듯한 표정. 그 표정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그 때에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서 리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고등학생이 되면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면서, 이제는 자신의 일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스스로 찾아서 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고. 그리고서 그 분께서는 내게 그 날 이후로는 나를 그저 관망만 하고 있겠지만, 원한다면 얼마든지 자신을 찾아오라고 당부하셨다.

  애제자에게 몹쓸 짓을 한 건에 대해서는 이후 질문 있느냐는 말에 내가 건넨 질문을 통해 듣게 되었다. 처음에는 당혹해 하시면서 어떻게 그런 것에 대해 들었느냐고 되물으시면서 답을 하지 않으려 하시다가, 이후에 다시 내가 여쭈었을 때에 정녕 알고 싶냐고 질문하신 후에 내가 답을 하고 나서야 그것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사연인 즉, 이랬다. 그 애제자가 교수로부터 재능을 인정 받아 그로부터 지팡이를 하나 얻어왔는데, 그 지팡이를 보자마자 뭔가 나쁜 생각이 떠올랐고, 그래서 그 제자에게 지팡이를 돌려놓으라 했지만 제자는 듣지 않았고, 그 때문에 따귀를 치고 말았다는 것. 그것에 대해 리사 선생님께서는 자신이 한 때, 제 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고 말씀하시고서, 그 일에 대해서는 이후에 제자에게 직접 사죄했으며, 이후로 제자에게 지팡이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으려 하셨다고 한다.
  지팡이는 그 이후로도 계속 제자가 소지하고 있었다고.

  그렇게 뭔가를 계속 생각하며 길을 가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서 상공을 바라보았는데, 이전까지 보였던 그 전투기 행세를 하던 창이 보이지 않았다. 전투도 더 이상 없는 마당에 더 날아다닐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테니, 잠시 쉬고 있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숲길 너머의 내리막길을 통해 내려가고서, 그 너머로 잠시 이어지는 해변길을 걷던 도중에 어딘가에서 누군가 말을 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결코 낯선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 학생은 베라티사의 예나 교수로부터 받아온 거래. 마법 학당에 유물로 보관되어 왔던 것을 고귀한 보배에 걸맞는 재능을 가진 사람에게 주겠다면서 받아왔지. 그러다가 자신이 인정할만한 재능을 가진 학생을 보더니, 그 학생에게 건네준 것이었는데, 학생이 리사 교수가 그 지팡이를 보여드렸는데, 지팡이를 보자마자 그는 지팡이 그리고 제자의 모습을 보며 충격에 빠진 듯한 표정을 짓더니, 격노했다더라. 그러더니, 왜 그런 지팡이를 받아왔냐고 소리치다가 학생의 따귀를 치고 만 것이었지.

  그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오른편에 돌렸을 때, 절벽가에 기대어 서 있는 소리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다가 내가 자신과 가까워지려 하자, 바로 발을 떼기 시작하더니, 나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서 뒷짐을 진 채, 나의 앞에 섰다.
  "여기서는 보지 못할 줄 알았지?"
  "어떻게 여기로 온 거야?" 그의 물음에 상관 없이, 나는 소리에게 대체 어떻게 왔느냐고 바로 물었다. 내가 있는 곳은 기억의 사당과 이어지는 다리가 위치한 절벽가 근처의 해안 길로 나만 하더라도 거기까지 오기 위해 수없이 많은 여정들을 거쳐왔고, 그러면서 여러 기계 병기들을 격파하며 앞길을 헤쳐가야만 했다. 그러다가 탐파, 사라만한 나이 대의 어린 아이인 소리가 눈 앞에 별 위험 없이 서 있는 모습을 보며, 나는 그간의 여정들을 떠올리면서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여기까지 별 일들을 다 거치면서 왔는데, 너 같은 어린 아이가 어떻게 여기까지 별 위험 없이 온 거야? -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지?"
  그러자, 소리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다 알아챈 듯이 그렇게 물었다. 이런 그의 당돌한 물음이 건방지게 보이기는 했지만,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틀리지는 않았기에, 그의 생각을 인정하는 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못마땅하다는 생각을 버리지는 못해서 짐짓 짜증내는 어투로 "그래, 그랬어!" 라고 답했다. 하지만 소리는 나의 그런 반응을 보면서도 나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이렇게 말을 건네었다.
  "내가 편하게 온 것 같아서 마땅하지 않아 보였던 거로구나. 사실, 이런저런 도움이 있어서 편히 올 수는 있었어. 덕분에 이렇게 바닷가 구경도 할 수 있는 거고."
  그리고 잠시 따라가고 싶다고 말하고서, 같이 가도 되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그러자 나는 "그래." 라고 답하고, 그와 동행하면서 해변의 자갈밭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는 소리에게 소르나로부터 또 무슨 이야기를 들었느냐고 물었다. 늘 소리는 늘 나에게 뭔가 신기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면 소르나로부터 들었다고 알려주고는 했었기 때문에, 그 때에도 그랬겠거니, 하고 생각하며, 그에게 그렇게 물었던 것이다.
  "소리, 이번에는 또 소르나로부터 뭘 들은 거야?"
  "......." 또 소르나에게 뭔가를 들은 것 아니냐는 질문에 소리는 반박을 하지 못했고, 그래서 그 때에도, 소르나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을 것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하지 않았다면, 그 성격 상, 반박하지 않을 리 없는데. 이후, 소리는 뭔가 들은 이야기가 있다면서 나에게 그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었다.
  "예나 교수가 지팡이를 얻어오면서 지팡이의 유래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했지만, 그 누구도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기에, 지팡이에 대한 기록들을 일일이 찾아보고, 지팡이가 발견됐다는 장소를 답사했다는 이야기도 있어. 지팡이의 재질에 대해 자문을 구하기도 했었는데, 거기서 예나 교수가 알게 된 것은 이러하였대, 그 지팡이는 베라티사의 양식을 갖고 있지도 않고, 베라티사의 기술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었다는 거야."

  지팡이가 발견됐다는 지역의 전승에 의하면 태초에 행성은 생명이 없는 황무지였는데, 그 황무지 한복판에 한 자루 빛나는 지팡이가 꽂혀 있었대. 그 지팡이가 마을 사람들에 의해 발견된 이후, 마을 그리고 베라티사 시청에서 지팡이를 잘 다룰 것 같은 마법 학당에 인도했고, 마법 학당의 학자들은 그것을 그대로 학당 내의 박물관에 보관했지. 학자들도 어떻게 개수를 하고 싶었지만, 자신들의 능력으로 지팡이의 기술을 온전히 재현할 수 없었던 것이 그 이유였대.
  그러다가 예나 교수가 지팡이를 건네 받으면서 지팡이의 끝 부분을 마나 광석으로 교체해서 소지하고 있다가, 그 제자에게 건넨 것이었지. 그 물건을 리사 교수가 보면서 뭔가 떠오른 것이 있었는지 제자를 보며 격분했던 것이고.

  "...... 사나, 리사 교수에게 건네었던 그 일기장 있지? 그 일기장에 병사의 일기가 쓰여 있었잖아."
  "그래." 이후, 소리가 건네는 물음에 내가 답했다. 그리고 그 일기장 그리고 일기장의 주인공인 병사와 지팡이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물었고, 그 물음에 소르나가 이런 가설을 내세운 적이 있다며, 나에게 그 가설을 이야기 해 주었다.
  "실은, 병사를 파멸시켜버린 후, 여기사에 의해 회수된 그 '성창' 이 실은 그 지팡이였다는 가설이 있다고 하더라. 여기사는 그 창을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하도록, 사람은 커녕 생명체 하나 없는 어느 외딴 행성의 황무지 한복판에 꽂아두고 행성을 떠났다던데, 그 행성이 지금의 베라티사였다는 이야기가 있어."
  그리고, 그런 이야기가 있다는 것 정도만 알아두라고 말하고서, 리사 교수도 그 창과 지팡이가 같은 물건이라 생각한 것은 자신의 착각이었을 뿐이라 단언했고, 소르나 역시 그 지팡이와 '성창' 이 같은 물건인지에 대해서는 곧이 곧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고 자신에게 알린 바 있음을 밝히기도 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야기 해 주고 싶은 것이 있는데......." 라고 말하면서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으려 하였다.

  "그 할머니께서 해 주신 이야기 있잖아, 그 무한의 힘에 대한 이야기 말야."
  그리고, 그 힘에 대해 자신이 들은 이야기가 있다면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 힘의 실체에 대해 할머니께서는 잘못 아시고 계신 것 같았어. 그 무한의 힘은 특정한 집안의 사람들에게 유전되거나 하지는 않아. 아무래도 할머니께서는 그 아르사나 1 세의 모습을 보시면서 그 집안 사람들에게는 그런 힘이 있을 것이라 지레 짐작하셨을 거야.
  무한의 힘이 허락되기 위한 조건은 별 것 없어, 이 행성계를 비롯해 세니티아 성계권에 있었던 인간들과 인연이 닿을 것, 그 정도이지. 그 말이 무슨 의미인 줄 알아? 옛 문명 시대의 인간들과 인연이 있거나, 전생에 그 시대의 인간이었던 모든 이들은 그 무한의 힘을 허락받을 수 있는 거야. 다만, 무한의 힘에 닿을 수 있는 방법을 모를 뿐이지. 아르사나 1 세 역시 무한의 힘에 닿을 수 없었고, 굳이 닿으려 하지 않았기에 그 힘을 활용할 수 없었던 거야. 할머니 역시 그 힘을 어떤 방법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셨겠지만, 구체적으로 그 방법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신 것 같았어.

  "그렇다면, 그 힘을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이란 게 있는 거야?"
  그러자, 내가 물었다, 아무도 활용법을 모르는 힘이라는 것이 과연 실체가 있는 것인지, 의문을 품으면서. 그러자 소리는 방법은 있다고 답했다. 그러더니, 리사 선생님, 예나 그리고 세나는 그 힘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하고서, 그 힘에 대해 마지막으로 나에게 이렇게 말을 건네었다.
  "어떻게 그들이 그 힘을 사용할 조건을 충족했을지, 한 번 생각해 보면 좋을 거야."

  해안의 자갈밭길 너머로는 바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위들을 건너가면서 그 끝의 오르막길을 통해 절벽길에 이르러야 기억의 사당으로 접근할 수 있었던 것 같았다. 이제 사당에 가까이 접근한 탓인지, 기계 병기들의 습격도 곳곳에서 이전보다 빈번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바위에 올라가려 할 즈음에는 갑자기 상공에서 수송기가 사당 쪽으로 날아가더니, 수송기에서 커다란 포대 하나를 내가 올라선 바위 건너편에 떨어뜨렸고, 그 이후에는 작은 전투정이 내가 위치한 곳, 바로 앞의 상공에 2 척의 전투정이 머무르더니, 전투정 근처에 있던 인간형 병기들이 나를 향해 날아오는 일도 있었다.
  처음에 나타난 포대의 포신은 기관포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는데, 발견하자마자 집중 타격을 가해 폭파시켰고, 이후에 나타난 전투정의 기관포, 미사일 지원 공격 하에서 나를 향해 돌진해 오던 다섯 인간형 병기들은 소리에게 일단 물러나 있으라고 한 다음에 포탄, 미사일들을 피해 가면서 우선 빛의 기운을 통해 곡선을 그리는 빛 줄기, 하얀 화염탄들을 계속 발사해 가며, 하나둘씩 격파했다. 그렇게 인간형 병기들을 격파한 이후에는 공중에 머무르고 있던 전투정들도 공격해 그들 역시 처단해 버렸다.

  이후에도 한 번씩 거미 모양의 병기들이 나타나기도 하고, 파리의 그것과 같은 날개를 가진 벌레 모양의 전투기들이 다수 몰려오기도 했지만, 이전 때와 다를 바 없이 처치하면서 앞길을 열어갔다. 그러면서 바위들을 하나씩 뛰어넘어가며, 건너편의 오르막길을 향해 가려 하였다. 바위들 중에 작은 것들은 여간 미끄러운 것이 아니었는지라, 조심하면서 걷고 건널 필요가 있었다.
  "소리도 어릴 때에는 이런 바위들을 자주 뛰어넘어 다녔지?"
  "기본이었지~." 이후, 내가 건네는 물음에 소리가 활짝 웃으면서 바로 답했다. 그리고 나에게 한창 때에는 나를 데리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놀고 싶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바위 무리를 지나친 이후에는 다시 자갈밭길을 걷게 되었다. 그 자갈밭길 너머에 오르막길이 있어서 그 오르막길을 통해 마지막 절벽길을 걸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전의 대화 이후로 그 길에 도달할 때까지 아무 말 없이 나를 따르기만 하던 소리는 이후, 문득 생각난 바가 있는지 나에게 다시 물으려 하였다.
  "사리 공주를 구원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지?"
  "응, 눈 앞에서 잡혀가는 모습을 지켜봤는데, 어떻게 구하러 가지 않을 수 있겠어?"
  "그렇구나." 그러자 소리는 조용히 미소를 띠며 나의 말에 반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더니, 소르나가 이전에 포레 느와흐의 행적을 살피려 계속 노력했지만 끝내 그 구체적인 위치까지 알아내지는 못했음을 밝혔다. 이외에는 탐지 능력이 되지 않거나, 관심이 없거나, 아니면 포레 느와흐가 부활했음을 알지 못해서 그의 행적을 추적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았을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소르나는 왜 그 행적을 알아내지 못한 거야?"
  "그 검은 섬 있지? 가마일 산 건너편에 늘 보였던 검은 섬 말야."
  그리고, 소리는 소르나로부터 포레 느와흐가 그 검은 섬 안으로 숨어 들어갔으며, 검은 섬은 외부로 투사되는 검은 기운으로 인해 마력 등에 의한 신호를 차단해서 그 내부를 관찰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으며, 나도 그 말을 거짓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을 것으로 여기었던 것이 현재 천문대를 지키고 있는 레테사가 이전에도 검은 섬은 검은 기운에 의해 송산, 수신파가 차단되어 검은 섬과 그 주변 그리고 내부 관찰은 물론, 그 주변 일대의 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포레 느와흐는 부활 후에 섬 안으로 들어섰고, 섬 내부의 실상을 알 방법이 없기에,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사람들이 알 수 없다는 거지?"
  "응, 더 나아가, 그 안에 뭔가 어둠의 산물이 숨겨져 있을 텐데, 그것을 포레 느와흐 같은 사악한 자들이 이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도 심각성이 높다고 했어."
  소르나가 한 번씩 레테사에게 검은 섬을 작정하고 사람들이 폭파시켜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드러낸 적도 있었는데, 검은 섬 내부를 관찰하지 못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 누구도 내부를 알 수 없는데, 어떤 악당이 섬 안으로 작정하고 숨어들어 그 안에 숨겨져 있을 어둠의 산물들을 이용해 세계에 해악을 끼치려 하더라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지 않겠느냐는 것.
  "그렇다면, 사나, 한 가지 더 물어볼게."
  "뭔데?" 그러자 소리가 바로 이렇게 질문을 했다.
  "네가 슈라일에 있었을 때를 생각해 봐, 사리 공주와 그 일행이 너의 눈앞에서 갑자기 하늘 저편으로 포레 느와흐에 의해 끌려갔어. 그 때, 그 광경을 보며, 욕하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고, 그래서 사리 공주를 찾을 생각도 하고 있잖아. 여기서 질문을 할 거야, 네가 만약에 포레 느와흐라면 사리 공주를 어떻게 할 거야?"
  그 때, 나는 별 생각 없이 바로 이렇게 답했었다.
  "바로 죽였겠지." 그리고 더 나아가, 아직 살아있는 것처럼 꾸며서 공주와 그 무리를 구하려 하는 이들을 속이려 하면서, 사리 공주를 어떻게든 구출하려는 이들을 먼 발치에서 지켜보며 비웃으려 할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소리는 전혀 놀라는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어린 아이라면 공주가 죽었을 리 없다고 반발할 수도 있을 법하건만, 소리는 그런 보통 애는 일단 아니었기에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나의 대답에 대해 그렇게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이며 소리는 이렇게 말했다.
  "그 말 대로야." 그리고 사리 공주를 포레 느와흐가 노출시킨다면, 그것은 속임수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면서 또, 이런 말을 나에게 건네기도 했다.
  "소르나가 사리 공주의 생존 가능성에 대해서는 나에게 별 이야기를 하지 않았었어. 물론 포레 느와흐가 숨어 들었다는 검은 섬 내부를 자세히 관찰할 수는 없었겠지만, 그것과 별개로 사리 공주를 가만 두지 않았을 것이고, 그의 영혼 등을 이용해 너를 비롯한 이들을 속이려 할 것이라는 추측은 이미 하고 있었던 것 같아. 그래서, 사리 공주를 살아서 만날 것에 대해서는 기대하지 않아야 할 거야."
  그리고서, 소리는 내가 오르막길을 통해 절벽길에 이르려 할 즈음에 자신은 또 가 봐야 할 곳이 있다면서 헤어지려 하였고,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소르나가 포레 느와흐와 그 추종자들의 행적에 대해서는 최대한 찾을 수 있는 만큼, 찾고 있으며, 곧 그 결과를 알려줄 수 있을 테니, 기다려 줄 것을 부탁하였다.

  '암만 소르나와 친하다고 하지만, 그렇게까지 그의 사정을 자기 일처럼 말해도 되는 거야? 그리고, 이런 위험한 곳에서 어디 가려고 하는 건지......'
  그와 헤어진 이후, 그의 이해할 수 없는 몇 가지 모습에 대해 그렇게 푸념을 늘어놓으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무렵, 나를 따라오고 있었을 아잘리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잘리는 리사 선생님과 더불어 꽤 나와 멀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나의 바로 뒤까지 따라온 것. 그렇게 나의 근처에 이르면서 아잘리는 리사 선생님께서는 걸어서 따라오시느라 늦는다고 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바로 온 거야?"
  내가 묻자, 아잘리가 전투기 행세를 하던 그 창이 자신들의 앞에 이르더니, 갑자기 마법진이 생겼고, 마법진이 생성되자마자 비행체는 하늘 저편 먼 곳으로 사라졌다고 했다. 1 회용 마법진이었고, 그래서 리사 선생님께서 마법진의 이용을 그에게 양보해서 아잘리가 마법진을 통해 내가 있는 곳 근처에 이를 수 있었다고.
  "그래?" 그 말에 나는 짐짓 놀란 듯한 반응을 드러냈다. 어느 정도 납득이 되기는 했었던 것이, 창이 원래는 자의식을 가진 마법 생명체이고, 높은 수준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면, 자신의 마법 능력을 통해 아잘리가 있었던 곳과 내가 있던 곳을 이어주는 마법진을 생성할 수는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창은 계속 비행하면서 나를 비롯한 이들을 관찰하고 있었던 만큼, 나의 위치와 아잘리의 위치를 파악하고 그것에 관한 전이 마법진을 생성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아르사나, 그 비행기처럼 생긴 것, 못 봤어? 마법진 생성 이후에 저 너머로 날아간 이후로는 보이지 않던데."
  "그래?" 그러고 보면, 내가 한참 해변의 바위들을 타며, 앞길을 열던 그 무렵에는 전투기 행세를 하던 하얀 창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으며, 그것을 인지하자마자 소리가 나타나, 한 동안 나와 동행하기도 했었는데, 그 이후에도 그 하얀 창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나도 본 적이 없어." 이후, 아잘리의 물음에 내가 답했다. 그리고 그 대신, 어떤 여자아이가 자신과 함께 했었고, 전투기처럼 보이던 하얀 창이 사라진 이후에 나타난 아이로, 한참 자신과 동행하다가 내가 언덕길에 이를 즈음에 다른 어딘가로 떠나며 사라졌음을 알렸다.
  "그냥 우연일 뿐이었겠지?" 그러자 아잘리는 뭔가 짐작되는 바를 느낀 듯이 나에게 물었고, 그 물음에 내가 우연이었을 것이라 답하자, 자신도 그리 생각했지만, 나라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할 것 같았는데, 그렇게 말하지 않아서 아쉬웠다고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우연이 아니었다면, 꽤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올 수 있었을 것 같아서 그렇지?"
  "그렇지." 그리고 내가 묻자, 바로 그렇다고 답했다.

  그러다가, 다시 절벽길을 따라 나서며, 다리와 가까운 길목으로 우측에 숲이 자리잡은 어느 구역에 이르렀을 무렵, 이전에 사라졌던 하얗게 빛나는 날개로 전투기 행세를 하던 하얀 창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창은 자신의 날끝 (기수) 부분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어딘가를 가리키는 것만 같았다.
  "아르사나, 보고 있어?" '그 창' 을 보고 있느냐고 아잘리가 물었고, 그 물음에 나는 보고 있다고 즉시 답했다.

"보고 있어."
"마치, 우리에게 뭔가 가리키는 것 같지 않아?"
"그렇게 보인다."
"대체 뭘 가리키려 하는 거야?"

  이후, 아잘리가 바로 창이 가리키는 쪽으로 가려 하였고, 나 역시 그런 아잘리를 따라 앞길을 따라 뛰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창날이 가리키고 있었을 지점 부근에 이르렀을 때, 아잘리로부터 나를 조용히 부르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잠깐! 아르사나, 저기를 봐, 뭔가 있어!"

  아잘리의 외침에 바로 그가 가리켰던 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정말 그가 가리킨 방향 쪽, 다리와 아주 가까운 한 곳에 어떤 이의 그림자가 보이고 있었다. 외투를 둘러쓰고 있는 듯한 이의 모습으로 얼핏 보면 유체 괴물이 서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아직 멀리 있고, 어둠 속이다보니,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가까이 다가간다고 한들, 얼굴이 보이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모습이 구체적으로 잘 보이지 않기는 했지만,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 우선, 내가 직접 만났던 그 사당을 지켜왔다는 사람 말일세. 그 사람은 가브릴리아 사람은 아닌 듯해 보였어. 델바 족에게도 없는 인상이었지. 그래서, 일단은 그 사람이 케레브 족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네.
  그 남자는 낡은 천으로 머리와 얼굴을 감싸고 있었지. 낡은 천을 망토삼아 두르고, 남루한 상의와 바지를 입고 있었으며, 손과 발을 검은 장갑, 검은 부츠로 가리고 있어서 얼굴 모습은 고사하고, 맨 살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아 그가 원래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는 알아볼 수 없었지. 하지만 시야 확보를 위해서인지 얼굴을 감싸는 천에서 눈가 부분에는 약간의 틈이 나 있었으며, 검게 보이는 틈 사이로 두 눈이 하얗게 번뜩이고 있었어.

  알프레드 노인이 묘사한 그가 만났다는 '사당을 지키는 남자' 에 대한 묘사였다. 그는 사당 인근에 천막을 치고 살았다고 했으니, 그 기억을 되짚으며, 알프레드 노인이 묘사한 바 있는 남자의 모습과 닮은 듯한 그가 있는 곳 일대를 살펴보며, 천막이 있는지를 보려 하였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가 위치한 곳의 우측 가까운 곳에 천막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자리잡고 있는 모습이 보였으니, 이를 통해, 나는 그 자가 알프레드 노인이 묘사한 그 남자일 것임을 바로 확신할 수 있었다.
  "아잘리, 내가 먼저 저 남자에게 다가가 볼게. 너는 여기에 있어, 이후로는 나 혼자 해결해야 할 일이니까."
  그 남자를 알아본 이후, 나는 어둠의 기운으로 변장한 듯한 모습을 보이며, 다가가기로 하고, 아잘리에게 한 곳에 머물러 줄 것을 당부한 이후에 그 남자에게 다가가려 하였다. 이후, 나는 어둠의 기운을 둘러쓰며, 그 남자가 그 남자에게 익숙할만한 모습-어둠의 망토를 둘러쓴 모습-으로 보이도록 한 이후에 이전에 이야기를 들었던 '죽음의 기사' 들마냥, 두건과 망토로 몸을 감추고 있었을 그 남자의 바로 앞에 다다랐다.

  "누구냐?" 그 남자의 바로 앞에 도달했을 때, 그가 서 있는 쪽에서 어떤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알프레드 노인이 묘사한 바대로, 눈가를 제외한 머리와 얼굴의 모든 부분에 천을 둘러쓰고 있었으며, 어두운 색을 띠는 낡은 옷, 검은색이 배어들었을 낡은 바지를 입고 있었으며, 손과 발을 검은 장갑과 부츠로 감추고 있었다. 천으로 감싸지 않은 눈가도 그림자가 져서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으며, 다만, 눈에서 하얀 빛이 번뜩이고 있어서 선한 인상 같지는 않았다.
  그런 그에게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매우 어둡고 음침했다. 불길함이 느껴질 정도의 목소리였던지라, 그 목소리를 들으며, 알프레드 노인이 두려워하며, 접근하지 못한 것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그는 두렵고 사악한 존재임을 그 인상과 목소리를 통해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자신과 인상이 비슷해 보였을 나를 보며, 처음 보는 존재로서, 낯설게 여기기는 했지만, 적의를 가지고 대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한 때, 포레 느와흐를 섬기었던 된 사람입니다. 안부 인사 여쭙고자 왔습니다."
  그의 물음에 태연히 '포레 느와흐를 섬기다가 그를 버린 사람' 이라 답하고서, 안부 인사를 드리기 위해 왔노라고 답했다. 그 이후, 나는 조용히 나를 지켜보던 남자를 응시하며, 그의 반응을 기다리려 하였다. 기계 병기 무리를 추종하는 포레 느와흐를 더 이상 섬기지 않는다는 것만을 알렸고, 그래서 그 남자가 나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

  "그런가?" 이후, 남자는 조용히 나에게 이렇게 물음을 건네는 듯이 반응했다. 하지만, 이후로 그는 내 예상과 전혀 다른 말을 건네고 있었다.
  "그리 되었군." 그러더니, 남자는 그의 요즘 실태를 보면 더 이상 그를 따르지 않으려 하는 것도 납득이 된다고 말을 건네었던 것.
  "포레 느와흐, 본래 이름은 쥘리앙 (Julian) 이라 했던가? 아무튼, 그는 본래 엘베라는 인류서 유래된 종족의 마법사였지, 자신의 힘으로 진화시킨 동족들을 보다 높은 경지로 인도한다는 대의로 자신의 무리 '에레브 족' 을 이끌었던 자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한 때, 자신의 마력과 군세로 이 행성계의 일부를 점령했다가 패배하고 죽은 이후에 부활한 이래로, 그는 더 이상 동족들의 인도자가 아닌 세피라 로타의 추종자임을 내세우고 있지만, 이 행성계에 뿌리내리고 있던 다스 에레보사 (Das Erebosa) 를 비롯한 여러 세력이 그를 추종하고 있었고, 그가 그 세력의 주 종족인 에레브 인들의 정신적 지주였음은 틀림이 없지."

  이미 에레브 인들은 여러 구역에서 실패를 거듭하고 있어. 실패한 세력들은 모두 몰락했고, 그나마 남은 잔여 무리들은 소탕당해 이 행성계에 거의 남아있지 않아. 포레는 그들의 일을 남의 일로 여기고 있겠지만, 참으로 안 됐지, 몰락하고 죽어갔을 자들은 모두 그의 이름을 부르짖었을 것이고, 그래서 세피라 로타를 비롯한 이들은 그들의 실패를 포레의 실패로 간주하고 있으니 말야.
  행성계의 일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가 순식간에 몰락한 이래로 그는 자신의 무리 하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는 무능한 자로서 세피라 로타에게 기억되고 있을 게다. 그런 줄을 한 동안 모르고 있다가, 이제서야 뭔가 짐작된 바가 있었는지, 자신의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 그간의 모든 실패를 자신의 추종자인 올리비아 탓으로 돌리려 하고 있어. 그리고, 여차하면 그를 내버리고 그의 존재를 모른 척할 생각부터 하고 있지, 그가 거두었던 그의 동족들과 마찬가지로 말야.

  올리비아라면 이전부터 한 번씩 들었던 이름, '올리비아 사반' 을 말함일 것이다. 이전에 레이나라 칭해졌을 병기가 올리비아는 포레 느와흐의 추종자이며, 기계 무리가 나의 분노를 그들에게 돌리려 하고 있다는 정황을 내세운 바 있으며, 소리가 그것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음을 알렸었는데, 여기에 포레 느와흐가 자신을 추종하던 올리비아를 내버리려 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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