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rtiA - 6. The Flower of the Abyss : 4


  "잠깐! 너희들, 벽면 봤어?" 이후, 나는 앞장서 가던 카리나를 비롯한 일행을 불러서 주목하게 하였다. 그 이후, 자신이 소환한 빛을 횃불 삼아 앞장서던 카리나가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며 "뭘 본 거야?" 라고 묻자, 바로 벽 내부에 숨은 빛들을 가리켰다.
  "이런 것들이 숨어 있더라고." 이후, 카리나의 물음에 대한 답으로써 그렇게 답했다. 그리고 빛들이 천천히 깜박이는 모습을 카리나 등에게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괴물의 몸 속에 갇힌 영혼들이 저들인가 봐."
  "그래?" 그러자 카리나는 바로 벽면 쪽으로 다가가서 희미하게 깜박이는 빛들을 보려 하였다. 아마 그 이후, 카리나는 의도적으로 그런 행동을 취하지는 않은 것 같다. 창가 등에 다가갈 때마다 습관적으로 두 손을 유리에 갖다대고는 했었으며, 그 때에도 자기 버릇대로 반 즈음 투명한 통로의 내벽으로 두 손을 내밀더니, 그 두 손을 벽면에 대고, 고개를 벽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습관적인 행동이었음을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그런 그의 모습을 아무렇지 않게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 때, 갑자기 뭔가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카리나의 두 손이 갑자기 하얗게 빛을 발하더니, 벽면 안쪽의 빛들이 밝아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카리나 씨, 일단 손을 떼지 말고 있어 봐요." 그 무렵, 카리나의 뒤에서 따라오던 세나가 그런 카리나의 모습을 보더니, 그에게 손을 떼지 말고 있어달라고 청했고, 이에 카리나는 답은 하지 않았지만, 그 요청에 응해 손을 떼려다가 그만 두고 계속 손을 벽면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카리나의 손에서 일어나는 빛에 반응한 듯이 벽 내부의 빛들이 서서히 그의 손 쪽으로 다가가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건 분명 뭔가 징조 같은데......." 암만 생각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도 그런 빛의 움직임을 두고 모종의 '현상' 같은 것이리라 짐작하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카리나 역시 그것을 모종의 '징조' 로 여기고 있었고, 그러면서 나에게 무슨 징조 같냐고 물어 보았지만, 나라도 딱히 짐작되는 바가 있는 것이 아니라서 (나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카리나와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답을 하거나 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한편, 세나는 카리나의 좌측 곁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뭔가 생각이 떠오른 듯,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더니, 왼쪽 벽면을 향해 다가가서는 검을 잡고 있지 않던 자신의 왼손을 높이 들어 벽면의 높은 부분에 올렸다. 그 순간, 세나가 손을 올린 부분이 하얗게 빛나기 시작하더니, 그 빛에 반응한 듯이, 벽면 내부의 빛들이 빛에 이끌리기 시작했다.
  "빛을 보고 이끌리는 생물들 같아." 그 때, 내 곁에서 그 광경들을 지켜보던 아잘리가 그렇게 말했고, 이후, 나에게 벽면을 만져보거나 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 전에 네가 해 보지 그래?" 그러자, 나는 바로 그렇게 되물었고, 그 이후, 아잘리는 "그러하지, 뭐." 라고 답하더니, 곧바로 먼 저편으로 몇 걸음 뛰어 가더니, 오른쪽의 벽면에 자신의 왼손을 갖다 대었다. 하지만 아잘리의 손에 벽은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거 봐." 아잘리가 말했다. 그러더니, "원래, 난 아무렇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어." 라 이어 말했다. 그 모습을 그를 따라가서 지켜보며, 나는 벽면 안쪽의 빛들에 특별히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이들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고, 카리나, 세나는 그런 반응을 일으킬 수 있지만, 아잘리 그리고 나는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했고, 그것에 대해 카리나, 세나가 벽 속에 갇힌 과거의 영혼들과 모종의 인연이 있기에 (둘 모두 과거의 영혼들과 인연이 있을 법한 뭔가가 있었다) 그런 반응을 일으킬 것이라 생각했다.
  이후, 나는 아잘리에게 물러서 보라고 하고서, 아잘리가 손을 댔던 그 벽면에 그를 대신해 다가갔다. 그리고 그 벽면에 아잘리처럼 왼손을 올려 보았다. 나 역시 아잘리처럼 특별히 반응을 일으킬 것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특별히 기대하지는 않으며 벽면을 지켜보려 하였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벽면의 내가 손을 대고 있는 부분이 파랗게 빛나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벽면 속의 빛들이 깜박이는 반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반응은 카리나, 세나의 그것과는 완전히 달라서 내 손에 의해 나타난 푸른 빛에 다가가며 하얀 빛들이 불안정하게 떨리고 있었으니, 마치 빛에 섣불리 다가가지 못하고 방황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손을 올린 부분에서 생성된 푸른 빛은 불꽃처럼 벽면 내부로 퍼져갔으며, 그 불꽃의 형상을 보며, 빛들은 마치 두려워하는 듯이 물러서고 있었다. 여기에 불꽃의 형상이 퍼져가면서 기괴한, 마치 울부짖는 듯한 괴악한 소리가 울려 퍼지기도 하였다. 그 괴악한 소리는 사악한 웃음 소리 같다가도, 갑자기 흐느끼는 소리를 내기도 하니, 나 자신에게도 불안하게 들렸고, 결국 나 자신도 그 소리에 놀라며, 나도 모르게 손을 벽면에서 떼게 되었다.

  "방금 전에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은데?" 그 때, 카리나가 다급히 나의 곁으로 다가오면서 말했다. 그러자 나는 내가 벽면에 손을 대더니, 푸른 불꽃이 벽면 안쪽에서 일어나면서 괴악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고 나름 사실대로 밝힌 후에 다시 오른손을 벽면 위에 올려 보았다. 그러자 이전 때처럼 벽 내부로 푸른 불꽃의 형상 같은 것이 퍼져갔고, 벽면 안쪽의 빛들이 그것에 반응해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나는 불꽃이 퍼지기 전에 손을 내렸다. 그 괴악한 소리는 다시 듣고 싶지 않았다.
  "분명 카리나, 세나의 손에 의해 일어난 반응과는 많이 달라, 그렇지?"
  이후, 나는 나의 곁으로 다가온 세나, 카리나에게 그렇게 물었고, 그 물음에 카리나가 "그런 것 같네." 라고 답했다. 세나 등이 벽면에 손을 대자마자 벽면에 빛이 일어나면서 벽면 안쪽의 작은 빛이 그 빛에 이끌린 것과는 누가 보더라도 대조적이었고, 이는 뒤쪽에서 일행을 조용히 따라오던 잔느 공주도 같은 생각일 것이라 확신했다.
  "공주님, 잔느 공주님께서는 방금 전의 현상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세나가 나를 대신해 잔느 공주에게 물었고, 그러자 잔느 공주가 일행 사이에 이르더니, 내가 손을 대었던 벽면 근처로 다가갔다. 그는 잠시 벽면 안쪽의 빛들을 살펴 보더니, 그 현상에 대해 깊이 생각하거나 하지 않고, 바로 이렇게 말했다.
  "서로 상반된 감정을 드러냈고, 그래서 상반된 반응이 나온 것 같아요."
  잔느 공주는 벽면 내부의 빛들을 보면서 나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영혼의 일종일 것이라 믿고 있었으며, 그러면서 카리나, 세나가 손을 올렸을 때와 내가 손을 올렸을 때를 관찰하며, 각각의 현상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방금 전에 아르사나가 손을 대었을 때 푸른 불꽃 같은 게 벽 내부를 물들이고 있었잖아요, 그리고 제가 손을 대었을 때에는 하얀 빛이 퍼지고 있었고요, 뭐가 다른 거예요?"
  이후, 일행은 통로의 깊숙한 곳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중간 즈음에 위치한 잔느 공주와 동행하면서 카리나가 물었다. 그러자 잔느 공주는 자신의 생각을 밝혀도 되겠느냐고 물었고, 이에 카리나가 그렇다고 답하자, 목소리를 가다듬으려 하는 듯한 행동을 취하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서야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 아무래도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쉽게 언급해서는 안 되는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세나 님, 카리나 님의 경우에는 그 빛에서 자신에게 낯설지 않은 무언가를 찾은 것 같았어요. 그 빛의 밝음을 통해 자신에 대한 구원의 희망을 찾고, 그 빛을 향해 모여든 것이라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세나 님, 카리나 님에 대해서는 지금 생은 아닐지라도 이전 생애에 그들과 인연을 맺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아르사나의 경우에는......?"
  "아르사나 님의 경우에는...... 그 빛에서 영혼들이 끔찍한 기억을 느낀 것 같았어요. 방금 전에 카리나 님께서 불꽃이 퍼져간다고 말씀드리셨고, 저도 그렇게 보았지만...... 그 불꽃처럼 보인 형상은 실은 불꽃이 아닌 다른 거예요."
  "불꽃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인 것이지요?"
  "피. 사람이 흘린 피예요. 아르사나 님의 영혼에서 피의 기운 같은 것이 나와, 벽면 내부로 스며들고, 그 기운을 감지한 영혼들이 끔찍한 기억을 느낀 거예요. 이전에 울려퍼진 흐느끼는 소리는 영혼들이 과거를 떠올리며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소리였던 것이지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나에게 심각한 심정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설마했지만, 불길한 기운이 내 몸 속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이 좋게 들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듣는 동안 잔느 공주에게서 이런 말이 나왔다.
  "아르사나 님은 이런 피의 기운을 스스로 습득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렇다면, 선천적으로 이어받았다는 것인데, 아무래도 어머니로부터 이어받은 것이 아닐까, 해요. 그리고 그 어머님께서는 아르사나 님의 할머님으로부터 그 피의 기운을 이어받으셨을 것이고...... 아르사나 님은 적극적으로 마법을 사용하다보니, 피의 기운이 더욱 두드러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그렇다면, 아르사나 씨의 그 기운이 어디에서 유래됐는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후, 세나가 묻자, 잔느 공주가 바로 답했다.
  "그 힘이 사악한 것에만 쓰이는 것은 아닐 테니, 사악한 존재는 아니겠지요. 다만, 피의 기운인 만큼, 피에서 유래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
  "그 피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시는 것이지요?" 이후, 세나가 다시 물었을 때, 잔느 공주는 잘 모른다고 답했다. 다만, 벽면 안의 영혼들은 옛적 인간들의 영혼들일 것이고, 그들이 피의 기운을 보며 괴로워하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하면서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아마도 그 피의 기운을 통해 괴로움이나 공포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그 괴로움과 공포의 기억은 괴물이라 칭해졌던 기계들에 의해 피를 흘리며 죽게 된 것에서 유래가 되었겠지요, 당시 사람들의 영혼들은 기계에 의해 죽어간 이후, 그 몸 속에 갇혀 이렇게 된 것이었으니까요."
  "기계도 피를 흘리기는 하지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피는 아니겠지요."
  세나가 말했다. 그 이후, 자신이 우연히 들은 바가 있다고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

  옛 문명 시대, '인간들의 시대 (Era Hominum, Era Øominum)' 라 칭해졌던 그 먼 옛날에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할 때가 종종 있었어요. 전쟁이라든지, 재난, 학살 같은 끔찍한 일들이 한 번씩 벌어졌다는 것이지요,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땅에는 인간의 피가 많이 흘러서 스며들었고, 그 땅 깊숙한 곳에 피의 기운이 자리잡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 피의 기운 속에서 영체가 태어날 때가 있었대요. 피의 기운과 피를 흘린 기억이 더해지면서 거기서 영체들이 자연적으로 태어나게 되었다고 하지요. 그 영체들은 피가 스며든 땅에 남은 피를 흘린 기억을 갖고 있어서 그것에 기반한 성격을 갖게 되었다고 해요.

  "여기서 태어난 피의 영체가 있다면, 이 행성 전역에 걸쳐 기계에 의해 학살당한 불행한 사람들이 남긴 피의 기운에서 태어났겠지요. 그리고 그 영체의 자손들 중 일부가 인격체가 되고, 그들이 어떤 식으로든 자손을 남겨, 그 자손이 세상에 흩어졌는데, 아르사나 씨의 일가 선조가 그 자손 중 하나라면......?"
  "그렇다면, 그 피의 기운을 보며, 왜 영혼들이 두려워하고, 괴로워하는 것일까요?"
  "그 기운에 서린 피의 기억을 느끼고, 자신이 피를 흘린 기억을 떠올렸기 때문일 거예요."
  그리고 잔느 공주가 묻자, 그렇게 답했다. 이후, 세나가 언급하기를, 피의 기운이 마력에 영향을 주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고 했다. 내가 얻은 마력은 어머니 등으로부터 이어받은 것으로 내가 설령 그런 피의 기운을 갖고 있더라도, 그것은 마력과는 관계 없다는 것이었다. 나도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그런 피의 기운을 이어받았다면, 이는 어머니께서도 같은 기운을 이어 받으셨음을 의미하겠지만, 어머니께서 강한 마력을 내세우거나 하신 적은 없으셨기에. 다만, 세나에게서 이런 말이 나오기는 했다.
  "아르사나 씨께서는 마력을 스스로 단련하셨을 것이고, 피의 기운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이 뭔가 결정적인 영향을 주거나 하지는 않았겠지요. 하지만 그 피의 기운이 영혼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켰듯, 그 피의 기운에 서린 기억이 학살의 원흉에 대한 본능적인 무언가를 일깨울 수 있을 거예요."   "그러고 보면, 아르사나는 그런 녀석들만 보면 용서하면 안 되니 뭐니, 자주 그랬었는데......."
  그 때, 아잘리가 나를 따라가고 있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더니, 나한테 내가 이전부터 '그런 막 나가는 것들이 세상에 다시 있으면 안 된다' 라고 자주 말하거나 하지 않았느냐고 어릴 적 일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더니,
  "녀석이 그런 말을 할 그런 성격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본능적인 현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거네요."
  "예." 그러자 세나가 답했다. 그러더니, 그 피의 기운이 몸 속에 있다면 본능에 의한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 이어 말하기도 했다.



  일행의 발걸음은 첫 모퉁이에 이르렀다. 왼쪽을 향하는 길목을 지나쳐, 벽면을 따라 걷고 있던 그 때, 벽 안쪽의 빛들이 조금씩 밝아지더니, 일행이 걸어오는 쪽으로 이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뭔가 나지막히 울리는 소리 같은 것이 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이 환청일 수도 있어서 정말 뭔가 소리가 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신을 할 수 없었다. 당시에는 카리나, 세나가 앞장서고, 나는 아잘리와 함께 잔느 공주를 지키는 역할을 맡고 있었기에, 카리나에게 이렇게 청해 보았다.
  "카리나, 벽면에 손을 한 번 대 보지 않을래?"
  "그래." 그러자 카리나는 바로 알았다고 화답하고서 발걸음을 멈추고 벽면의 오른쪽 한 곳에 자신의 왼손을 대어 보았다. 그러자 이전 때처럼 왼손으로 만진 부분 안쪽이 빛을 발하는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벽면 안쪽의 영혼들이 밝게 빛을 발하며 이끌리는 모습을 보였다.
  "이전 때와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잖아." 카리나가 말했다. 그러는 동안 영혼들은 빛의 형상으로 변해 가면서 카리나가 일으킨 빛에 점차 모여들고 있었으며, 그 동안 벽면 안쪽에서 뭔가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시간이 지날 수록 점차 커지고 있었으며, 환청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이전 때와 달리, 아잘리에게도 분명히 들렸다.
  카리나에 의해 일어난 빛은 점차 벽면 안쪽으로 퍼지고 있었으며, 그것에 따라, 영혼의 빛들을 제외하면 어둡기만 했던 벽면 내부가 점차 밝아져가니, 벽면에 빛이 퍼져가는 것에 벽면 속의 빛, 영혼들이 조금씩 반응하기 시작했다, 영혼들이 빛에 이끌리는 것을 넘어 조금씩 그 형상이 밝아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카리나 님께서 발하시는 빛에 의해 영혼들이 희망을 얻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하겠지요." 이후, 내 곁에 있던 잔느 공주가 말하자, 나 역시 같은 생각임을 드러내는 목소리를 내었다. 그러는 동안 카리나는 검을 왼손에 쥐고 오른손을 벽면의 오른쪽에 대고 있으면서 앞쪽으로 걸어나가려 하였다. 빛의 궤적이 손을 따라 움직이면서 영혼들을 이끌고 있었다.

  카리나가 벽면에 손을 대며, 벽면을 따라 발걸음을 옮겨가는 동안 카리나의 손에서 생성된 빛이 점차 벽면 안쪽 깊숙한 곳으로 계속 퍼져가고 있었으며, 벽 속의 빛처럼 보이던 벽 내부에 갇힌 영혼들도 그것에 힘을 얻어가는지, 점차 그 형상이 더욱 밝아져 가니, 이제는 영혼들이 뿜어내는 빛들 만으로도 앞길이 밝아져 내부의 통로를 훤히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다.
  "이것 봐, 아르산, 저 빛들이 앞길을 인도하고 있잖아."
  아잘리가 말했다. 그 말 대로, 빛들이 커지고 밝아지기 시작한 이래로 영혼들의 빛은 일부는 길을 따라 빛을 내고, 일부는 카리나를 비롯한 일행의 움직임을 따르면서 마치 일행을 인도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모인 빛이 얼마나 밝았는지, 방에 등불을 환히 밝히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커다란 등이 길마다 일정 간격으로 놓인 정도로 공간 내부가 밝아지게 되었다, 어둠 속에서 어둠의 존재가 기습을 하더라도 그 형상이 빛 속에서 훤히 보일 수 있을 정도로.
  카리나가 손을 대는 벽면 내부의 빛에 반응을 한 탓인지, 건너편이라 할 수 있는 왼쪽 벽 내부의 영혼들 역시 오른쪽 벽 내부의 영혼들처럼은 아니더라도 빛을 발하려 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어떻게든 밝은 빛을 내려 하기도 하였다. 그 모습을 본 세나가 이전 때처럼 왼쪽 벽면에 왼손을 올렸고, 그러자 벽 안쪽에서 반응이 일어나 벽 안쪽에 빛이 생성되기 시작하였고, 그 빛은 카리나에 의해 생성된 빛보다 더욱 빠르게 확산되어 가면서 영혼들의 반응을 이끌어 갔다.
  "이런 빛이 지속적으로 벽에 남거나 하도록 할 수는 없는 일이야?"
  내가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물었다. 만약의 경우, 싸움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세나, 카리나 모두 어떻게든 전투에 참여해야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나나 아잘리가 있기는 하겠지만, 두 사람만으로는 한계는 명확했다. 우선 나도 그렇고, 누군가를 지킬 수 있기에는 많은 것이 부족했다-. 그래서 안 될 줄은 알고 있었지만 (영혼의 기질에 벽 내부 그리고 벽 내부의 영혼들이 반응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만약의 경우에 두 사람을 대신할 무언가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서 어떻게 하면 그런 존재를 내세울 수 있을지에 대해 물어보려 한 것이었다. 그 물음에 이런 대답이 나왔다.
  "그런 것은 안 되는 것 같아요, 손길의 영혼에서 퍼지는 기운에 반응하는 것이라서 그래요. 뭔가 빛을 스며들게 하는 것을 아르사나 씨라면 하실 수 있을 것 같지만, 적어도 지금 보이는 것 같은 반응은 나오지 않을 거예요."
  세나의 대답이었다. 카리나 역시 그 대답을 듣자마자 그렇다면 영혼들의 지속적인 반응을 이끌려면 계속 손을 벽면에 대고 있어야 하느냐고 물었고, 세나가 그 대답으로 그런 것 같다고 답하였다.

  그 이후, 세 갈래 길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후, 나는 갈림길의 중심에 이르러서 처음에는 우측 방향에 보였던 길목 건너편을 바라보며 서려 하였다. 그 너머에는 문 혹은 동굴의 입구 같은 곳이 자리잡고 있어서 그 통로로 가야 할 것임을 바로 알리고 있었다.
  "두 갈래 길이 하나가 되는 곳이 그 지점일 거야, 그 지점 너머에 문이 있으니, 그 문으로 들어가야 깊숙한 곳 혹은 중추로 들어갈 수 있겠지."
  아잘리가 말했다. 그리고 문이 보이는 길목으로 어서 가자고 청하기도 했다.

  한편, 벽면에 손을 대며 길을 걷던 카리나는 갈림길에 이르자마자 벽면에서 손을 떼고, 다급히 내가 있는 쪽으로 뛰어왔다. 그리고 이후부터는 자신이 앞장서 가겠다고 말하고서, 바로 그 이유를 말하려 하였다.
  "이제 중추에 이를 거 아냐, 분명 녀석의 힘을 가진 뭔가가 있을 거라고. 언제까지 그렇게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아."
  그 무렵, 세나 역시 벽면에 손을 떼고 나와 아잘리 그리고 잔느 공주의 근처에 이르렀다. 이후, 잔느 공주가 벽면에 손을 대어 영혼들과 접촉하는 역할은 자신이 맡겠음을 알렸다. 그 역시 그 너머에는 싸움이 있을 것임을 예상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그것에 대비하도록 하겠음을 밝혔다. 밖에서 기다리게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잔느 공주 홀로 밖에 있게 될 판이었다. 어떻게 할까, 하다가 잔느 공주가 그 안의 영혼들과도 접촉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니, 같이 안으로 들여보내게 되었다.
  "싸움은 세나, 카리나 둘이 맡았으면 좋겠어. 나와 아잘리는 잔느 공주님을 지킬 테니까.'
  "너와 친구 분, 둘로 괜찮겠어?" 그러자 카리나가 물으니, 내가 답했다. "너부터 잘하면 돼."

  "잔느 공주님, 이전 때처럼 보호막이 지켜주지 않겠지만, 제가 공주님을 어떻게든 지켜드릴게요."
  아잘리가 말했다. 어릴 때부터 쓸데 없이 자신감은 컸던 아잘리는 그 때에도 잔느 공주에게 그런 포부를 드러냈던 것. 이후, 카리나가 앞장서서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세나가 그 뒤를 따랐으며, 잔느 공주를 호위하며, 나와 아잘리가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의 뒤를 따르며 나는 벽면 쪽을 살펴보려 하였다, 영혼들의 상태가 어떠한지 살펴보려 하였던 것. 카리나, 세나의 영향이 없어진 만큼, 영혼의 빛이 약해졌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그 형태를 보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벽 안에 갇힌 영혼들의 기운은 약해지지 않고 있었다. 이전 때처럼 지속적으로 빛을 발하고 있었으며, 일부는 문이 있는 쪽으로 일행을 인도하려 하고 있었다. 이미 문이 있는 쪽이 일행이 가야할 곳임을 알고는 있었지만, 몰랐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인도가 있어서 그 쪽으로 갈 수 있었음은 분명해 보였다.
  "그들이 이제 깨달은 것 같아요." 그것에 대해 잔느 공주가 말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손길을 느끼면서 두 사람이 자신의 편이며, 자신과 가까운 사람이었을 것임을 직감하고, 자신이 가진 힘으로 두 사람을 인도하려 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저 너머에는 분명 위험한 무언가가 있을 텐데......."
  "그 위험한 존재를 두 분이라면 없애줄 것이라 믿고 있을 거예요."
  이후, 내가 건네는 물음에 잔느 공주가 바로 그렇게 화답했다. 그렇게 대화를 마치고, 길을 따라 걷다가 문 앞에 도달할 무렵, 벽 안쪽에서 뭔가 사람의 형상 같은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가 사라졌고, 그 때문에 잠시 놀라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내 곧, 아무래도 이런저런 환상들을 보다 보니, 헛것을 보기 시작한 것 같다고 생각하고, 진정하고 정신 차리자고 생각했었다.
  "아르산, 왜 그래? 뭔가 안 좋아?"
  "아니, 헛것을 본 것 같아서." 그 때, 내 곁에 있던 아잘리가 그런 나를 보더니, 그렇게 물었다, 이상 행동을 했다고 여기고, 걱정을 했던 것 같다. 그러자 나는 별 일 아니라는 식으로 화답했고, 그러면서 먼저 들어선 카리나, 세나의 뒤를 따라 세 번째로 문을 넘어섰다.


  문 너머로는 하나의 거대한 공간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동굴의 공간 같은 공간의 입구 건너편 끝에는 고목 줄기처럼 생긴 종유석 기둥 하나, 그 둘레만 하더라도 몇 아름은 되어 보일 법한 거대한 기둥 하나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 주변으로 나무 뿌리 같은 돌이 돌출되어 있어서 고목 같은 느낌을 전해주려 하고 있었다. 나무 뿌리처럼 생긴 돌 내부로는 빛들이 불안하게 깜박이고 있으면서 나무 줄기 같은 돌기둥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으며, 그 흐름의 끝은 나무의 밑둥 즈음에 해당되는 돌기둥 하단의 한 지점으로 돌기둥 하단에는 붉은 빛을 발하는 핏덩어리 같은 것이 맥동하고 있었다.
  돌기둥 안쪽의 덩어리는 처음 봤을 때에는 핏덩어리 같아 보였고, 그 이후로 자세히 보니, 인간의 심장 같아 보이기도 하였다. 계속 박동하고 있으면서 자기 주변으로 붉은 빛을 확산시키고, 기둥 외부로 붉은 기운을 퍼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관찰하고 있을 때, 벽 내부를 빛내고 있던 영혼들의 기운이 벽 바깥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돌기둥 쪽으로 접근해 가던 카리나 혹은 세나의 기운에 반응해서 영혼들이 기운이나마 표출시키려 했던 것 같다.

  "아르산, 저길 봐."
  "뭔데?" 그 때, 아잘리가 공간 우측의 벽면을 가리켰고, 그러자 내가 뭐가 있느냐고 물으면서 아잘리가 가리킨 쪽을 돌아보려 하였다. 그 순간, 나의 눈앞으로 사람의 형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얀 빛으로 이루어진 형상으로 성인 인간의 모습을 한 무언가였다.
  '방금 전에 비슷한 모습을 본 것 같은 때가 있었는데.......'
  그러자 나는 이전의 잠깐 헛것을 본 것 같았던 때를 떠올렸다. 사람의 형상 같은 것이 잠깐 눈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졌고, 다른 이들은 보지 못해서 내가 환각을 본 것 같다고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려 했었는데, 그 때와 같은 형상이 다시 보인 것은 물론, 아잘리에게도 보인 것이었다.
  처음에는 하나만 보였으나, 그 이후로 하나씩 그 형상이 추가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날 무렵에는 하나가 아닌 둘, 셋, 한 무리씩 그 형상이 나타나면서 돌기둥 주변에 여러 희미한 형상들이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희미한 형상들은 하나의 모습만을 하고 있지 않았고, 각자 다른 모습에 다른 크기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래서 그 영혼들 중에는 어린 아이들도 있음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 형상들은 카리나 등에게도 보였는지, 카리나 역시 주변 일대를 둘러보며, 희미하게 빛나는 형상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Kiuj vi estas? (누구십니까?)" 오른손에 검을 쥔 카리나가 형상들에게 물었다. 어떤 말을 할 지 알 수 없다보니, 에스페란타 (Esperanta) 를 활용하려 하였던 것 같다. 하지만 형상들은 어떤 답도 하지 않았고, 그 이후, 그의 오른편 곁에 있던 세나가 형상들에게 물으려 하였다.
  "Who are ye? (누구신가요?)" 그 이후, 그는 갑주 형태의 환수를 소환해 자신의 우측 곁에 머무르도록 하려 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형상들에서 목소리 같은 것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희미하게 울음 소리 혹은 한탄하는 소리 같은 것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어떤 목소리가 일행에게 말을 걸려 하였다.

Nunadrl, wri mosîbi boyscinayo?

  어린 아이의 목소리였다. 성별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목소리만으로 어린 아이의 성별을 감별한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는 편이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것을 두고, 처음에는 짧게 말한 것에 희미하게 들려서 그런가, 했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후에 알게 되었다.
  "Who? (누구야?)" 이후, 아잘리가 말했다. 그에게도 뭔가 소리가 들렸던 모양으로 내 주변의 모든 이들이 그 소리를 들을 수는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전하는 의미를 알 수 있는 이들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다만, 마지막의 억양을 통해 목소리의 주인이 공간 내부로 들어선 이들, 나를 비롯한 일행에게 물음을 건네려 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Nunadrl, iri wa boseyo.

  이후,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전과 같은 어린 아이의 목소리로 이전 때처럼 건네는 말의 의미를 알거나 할 수는 없었지만, 나를 비롯한 이들을 부르고 있다는 것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목소리가 전하는 억양이 평상시에 누군가를 부를 때의 그것과 거의 일치했기 때문으로 '이 쪽으로 와 봐라' 정도의 의미를 갖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었으며, 앞 부분은 뭔가를 부를 때의 목소리로, 처음 들린 목소리와 같은 뭔가를 말하고 있어서 누구인지 몰라도 같은 이를 지칭하고 있음을 유추할 수는 있었다.

Are you asking me to come here? (이리로 오라는 거예요?)

  두 번째 들린 아이의 목소리에 내가 바로 그렇게 되물었다. 에스페란타는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보였으나, 옛 브리태나는 알아들은 것 같아서 그 쪽 말로 대화를 시도해 보려 한 것. 그러면서 카리나와 함께 나무 안쪽의 심장처럼 보이는 것을 향해 조금 더 앞으로 다가가 보려 하였다.

  그 순간, 나의 눈앞으로 뭔가 하나의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무 주변으로 여러 빛들이 떠오르더니, 그 중에서 나무 안쪽의 '심장' 바로 앞에 있던 빛이 점차 커지면서 하나의 희미하게 빛나는 형상을 이루기 시작한 것.
  잠시 후, 그 형상은 자그마한 아이의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짤막한 머리카락과 낡은 옷차림을 했을 법한 소년, 인간 나이로 치면 6 ~ 7 세 즈음 되었을 법해 보였던 소년의 형상이 내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소년의 형상은 앞장서 가던 카리나의 바로 앞에 있었기에, 이를 두고 나를 비롯한 다른 이들이 아닌 카리나의 움직임에 반응해 그 형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아닌가, 하는 추측도 해 볼 수 있었다.
  다소 희미하기는 했어도, 소년의 얼굴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 표정은 그렇게 밝지 않았다. 그 곳이 괴물의 몸 속이며, 괴물의 육신이 자리잡은 사당에 이르기 전부터 어떻게 소년 같은 이들이 그 육신 내부에 있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들은 바 있었기에, 그 표정이 밝을 리 없음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르사나, 저기를 봐." 그 때, 카리나가 나를 불러서 주변을 보라는 의미의 말을 건넸고, 그 말에 나는 바로 주변 일대를 둘러보며, 나무와 '심장' 주변 일대의 빛들이 사람의 형태로 변화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들 역시 어둡고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그들 사이로 음울한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Nunadrl, wrinîn yâgi-e gacyâißâsâyo, azcu oräzcânbutâ.

  소년으로부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슨 말인지 알 수는 없기는 했으나, 한 가지 떠오른 바가 있었다. 이전에 들려왔던 괴물과 잔느 공주의 대화가 우선 떠올랐고, 이어서 괴물의 빛과 카리나의 빛이 서로 부딪쳐서 빛이 퍼졌을 때에 떠오른 그림을 그리는 듯이 펼쳐졌던 환영, 그리고 그 환영 속에서 들려온 목소리들이었다. 서로 다른 상황이기는 했지만, 어느 쪽이든, 비슷한 느낌의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잔느 공주님이라면 그 말을 알아들으실 수 있을 거야.'
  그 이후, 나는 잔느 공주가 자신도 괴물의 몸 속으로 들어가겠다고 말한 것, 그리고 잔느 공주의 목소리가 환영 속의 목소리를 통역해 준 것을 떠올리며, 나의 뒤쪽에 있던 잔느 공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때, 잔느 공주가 그런 나의 왼편으로 다가가더니, 바로 이렇게 말을 건네려 하였다.
  "저희들에게 이 쪽으로 와 보라 했어요, 그리고 자신을 비롯한 이들에 대해 말했어요, 아주 오래 전부터 갇혀 있었노라고."
  그러더니, 나와 카리나가 있는 곳을 넘어, 나무 밑둥 쪽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더니, 소년의 영혼에게 자신이 직접 말을 걸려 하였다.

Oräzcânbutâramyân, ânzcebutâ gacyâißâdângâni?
Izcen, zcâdo zcarlmorgeßëyo. Narîrl senîngâdo yimi izcâbâryâco. Yâgi-tnîn dõan apîm gwa görowmi nâmu manaßëyo, âtâke narîrl serlsu itgeßëyo?
Gîrâkuna. Gîrâtamyân, yâgiro ogi zcânenîn sesãi âtätnînzci, marhä zcuzci angketni?

  그러는 동안 먼저 괴물의 몸 속으로 들어선 나와 아잘리, 그리고 잔느 공주를 이끌고 온 세나, 카리나 모두 그의 뒤에서 조용히 그가 영혼과 대화를 이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 동안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그들 사이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서 잠깐 카리나 그리고 그 왼편 곁에 있던 세나의 오른편 곁으로 다가가 보려 하였다. 그 동안, 카리나는 세나와 함께 어린 소년의 모습을 한 영혼과 대화를 이어가는 잔느 공주의 모습을 지켜보려 하고 있었다.
  "카리나, 지금 들리고 있는 말이 무슨 종류의 말인지 알 것 같아?"
  카리나의 우측 곁으로 다가간 이후에 그에게 물었다. 여러 지역을 전전하였을 카리나라면 혹시 아는 바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대와 달리 카리나에게는 긍정적인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나도 여기 오기 전까지는 들어보지 못한 종류의 말이야."
  카리나에 의하면, 알바레스 (Albares) 라 칭해진 비교적 멀리 있는 행성 등지에 거주하는 '고양이 요정족' 사람들이 주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닌, 특이한 말을 익히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실제로 고양이 요정족 사람을 만나, 해당 언어를 들어본 기억도 있기는 했지만, 그들이 익히고 있던 그 특이한 말과는 비슷한 느낌은 없었다고 했다.
  "비슷한 느낌 하나조차도 없다는 거지?" 이후, 그렇게 묻자, 카리나는 확신에 찬 듯한 목소리로 그렇다고 답했다. 그리고서, 옛 브리태나는 알아듣는 것으로 보아, 말을 하는 이들은 옛 인류의 일원으로서, 그 말 역시 옛 인류의 말들 중 하나임은 확실해 보인다고 말하고서, 그 사람들은 어느 정도 옛 브리태나 지식을 갖고 있을 것이라 이어 말하니, 그들과 대화를 시도할 때에는 옛 브리태나로 말을 걸기로 했다.

Zcarîn morîgeßëyo, gapzcagi sayreni urlryâtgo saramdri zcibîrl dagîphi tdwicânagago ißësëyo. Ayidrlbutë ârîndrlkgazci modu musâwâhanîn pyozcângiâßëyo. Gîräsâ, zcâdo musâwâßëyo, mwânga napbîn yri irânarlgâpman gataßëyo.

  그 무렵에 소년의 영혼이 잔느 공주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잔느 공주가 바로 차분히 목소리를 내며 소년의 영혼에게 물었다.

Gîrâmyân...... tarlcurlîn...... harlsu ißëni?
Nyusrîrl bogo gazcokdri zcibîl nawa tdânaryâ häciman...... gîtdä gömurldri cyâdrâwaßëyo. Zcâdo apba, âmmawa hamkge tdwidaga...... bici bânzccagyâtgo....... kgä-âboni yâgiyâßëyo.
Gîrätguna.......

  이후, 소년이 다시 목소리를 이어갔다. 그 무렵의 목소리는 이전 때보다도 슬프게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Nâmu manîn saramdri zcugâßëyo...... gömurldri saramdrîrl magu zcabamâggo burltäwugo ißësëyo. Urîmsori, bimyângsoriga yâgizcâgisâ drlryâßëyo.......

  그 목소리가 다 들리고 나서야, 잔느 공주는 일행을 향해 돌아서더니, 바로 이렇게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여기 있는 아이는 지금은 바닷속에 있을 도시에 살고 있던 인간들 중 한 명이었을 거예요. 도시에 살던 평범한 가족의 일원으로 당시의 평범한 소년들 중 한 명이었겠지요. 그러다가 재난 경보가 도시에 퍼지면서 그 경보를 알아듣고 가족들이 집을 나와 도시를 탈출하려 했지만, 이미 괴물이라 칭해진 기계 병기들이 도시를 습격했고, 병기들의 폭격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던 것 같아요.
  아이는 병기들의 습격 도중에 병기들이 사람들을 잡아먹고, 빔이나 화기로 폭파시키고 태워서 죽이는 광경들을 계속 지켜봤었고, 그러면서 사람들의 비명, 절규, 통곡 소리를 계속 듣고 있었던 것 같아요. '괴물' 이라 칭해진 병기들의 재앙을 너무도 두려워 했었어요.

  "그렇다면, 여기에 있는 다른 영혼들처럼 기계 병기들이 일으킨 재앙의 희생자들 중 한 명으로 오랫동안 여기에 갇혀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러자 세나가 잔느 공주에게 그렇게 물었다. 소년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뭔가 크게 느낀 바가 있는 듯이, 심각해진 목소리로 묻고 있었다. 그런 그의 물음에 잔느 공주는 그러할 것이라 답하고서, 조용히 눈을 감으며 이렇게 말을 이어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폭발에 휘말려 그리 되었다는 것이었지요. 적어도, 기계 병기의 몸 속에 들어가거나 하지는 않았으니까요."
  "병기들의 몸 속에 들어가면 그 안에서 살갗부터 잔인하게 해체되는 일을 겪었을 테니까요, 그렇지요?"
  그 이후, 세나가 묻자, 잔느 공주는 그러하다고 답했다.

  그러는 동안 먼저 괴물의 몸 속으로 들어선 나와 아잘리, 그리고 잔느 공주를 이끌고 온 세나, 카리나 모두 그의 뒤에서 조용히 그가 영혼과 대화를 이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 동안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그들 사이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서 잠깐 카리나 그리고 그 왼편 곁에 있던 세나의 오른편 곁으로 다가가 보려 하였다. 그 동안, 카리나는 세나와 함께 어린 소년의 모습을 한 영혼과 대화를 이어가는 잔느 공주의 모습을 지켜보려 하고 있었다.
  "카리나, 지금 들리고 있는 말이 무슨 종류의 말인지 알 것 같아?"
  카리나의 우측 곁으로 다가간 이후에 그에게 물었다. 여러 지역을 전전하였을 카리나라면 혹시 아는 바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대와 달리 카리나에게는 긍정적인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나도 여기 오기 전까지는 들어보지 못한 종류의 말이야."
  카리나에 의하면, 알바레스 (Albares) 라 칭해진 비교적 멀리 있는 행성 등지에 거주하는 '고양이 요정족' 사람들이 주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닌, 특이한 말을 익히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실제로 고양이 요정족 사람을 만나, 해당 언어를 들어본 기억도 있기는 했지만, 그들이 익히고 있던 그 특이한 말과는 비슷한 느낌은 없었다고 했다.
  "비슷한 느낌 하나조차도 없다는 거지?" 이후, 그렇게 묻자, 카리나는 확신에 찬 듯한 목소리로 그렇다고 답했다. 그리고서, 옛 브리태나는 알아듣는 것으로 보아, 말을 하는 이들은 옛 인류의 일원으로서, 그 말 역시 옛 인류의 말들 중 하나임은 확실해 보인다고 말하고서, 그 사람들은 어느 정도 옛 브리태나 지식을 갖고 있을 것이라 이어 말하니, 그들과 대화를 시도할 때에는 옛 브리태나로 말을 걸기로 했다.

Zcarîn morîgeßëyo, gapzcagi sayreni urlryâtgo saramdri zcibîrl dagîphi tdwicânagago ißësëyo. Ayidrlbutë ârîndrlkgazci modu musâwâhanîn pyozcângiâßëyo. Gîräsâ, zcâdo musâwâßëyo, mwânga napbîn yri irânarlgâpman gataßëyo.

  그 무렵에 소년의 영혼이 잔느 공주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잔느 공주가 바로 차분히 목소리를 내며 소년의 영혼에게 물었다.

Gîrâmyân...... tarlcurlîn...... harlsu ißëni?
Nyusrîrl bogo gazcokdri zcibîl nawa tdânaryâ häciman...... gîtdä gömurldri cyâdrâwaßëyo. Zcâdo apba, âmmawa hamkge tdwidaga...... bici bânzccagyâtgo....... kgä-âboni yâgiyâßëyo. Gîrätguna.......

  이후, 소년이 다시 목소리를 이어갔다. 그 무렵의 목소리는 이전 때보다도 슬프게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Nâmu manîn saramdri zcugâßëyo...... gömurldri saramdrîrl magu zcabamâggo burltäwugo ißësëyo. Urîmsori, bimyângsoriga yâgizcâgisâ drlryâßëyo.......

  그 목소리가 다 들리고 나서야, 잔느 공주는 일행을 향해 돌아서더니, 바로 이렇게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여기 있는 아이는 지금은 바닷속에 있을 도시에 살고 있던 인간들 중 한 명이었을 거예요. 도시에 살던 평범한 가족의 일원으로 당시의 평범한 소년들 중 한 명이었겠지요. 그러다가 재난 경보가 도시에 퍼지면서 그 경보를 알아듣고 가족들이 집을 나와 도시를 탈출하려 했지만, 이미 괴물이라 칭해진 기계 병기들이 도시를 습격했고, 병기들의 폭격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던 것 같아요.
  아이는 병기들의 습격 도중에 병기들이 사람들을 잡아먹고, 빔이나 화기로 폭파시키고 태워서 죽이는 광경들을 계속 지켜봤었고, 그러면서 사람들의 비명, 절규, 통곡 소리를 계속 듣고 있었던 것 같아요. '괴물' 이라 칭해진 병기들의 재앙을 너무도 두려워 했었어요.

  "그렇다면, 여기에 있는 다른 영혼들처럼 기계 병기들이 일으킨 재앙의 희생자들 중 한 명으로 오랫동안 여기에 갇혀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러자 세나가 잔느 공주에게 그렇게 물었다. 소년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뭔가 크게 느낀 바가 있는 듯이, 심각해진 목소리로 묻고 있었다. 그런 그의 물음에 잔느 공주는 그러할 것이라 답하고서, 조용히 눈을 감으며 이렇게 말을 이어갔다.
  "이후, 폭발에 휘말렸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이 곳에 있었대요."
  "폭발에 휘말렸다면, 그 몸이 기계 병기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을 텐데......."
  "그러하였겠지만, 그 영혼이 기계의 몸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경우는 있었을 거예요, 이전에 루이즈와 함께 예나 님과 함께 있었을 때, 그런 이야기가 있었어요. 또, 이런 경우도 있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무슨 경우지요?"
  "폭발에 휩싸여 죽은 자의 시신이나 죽어가기 직전의 육신을 몸 속에 끌어들여, 그 살과 피를 취하는 행위를 말함이에요."
  "...... 시체 훼손 아닌가요, 그거!?" 그러자 카리나가 잔느 공주에게 물었다. 물음을 건네는 그 표정에서 당혹감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애초에 카리나가 감정 표출을 잘 하는 편이기는 했으나, 그 때에는 감정 표출을 자제하려 애를 쓴 것 같았는데도, 그런 감정 표현이 나와버린 것이었다. 그런 카리나의 물음에 잔느 공주가 답했다.
  "인간의 몸에서 뭐든 취하기 위해서는 산 자, 죽은 자를 가리지 않으려 한 것은 아닐까요? 죽은 자라 하더라도 적어도 뼈는 취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뼈를 가공해서 보석이든, 뭐든 만들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러하겠지?"
  잔느 공주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내가 카리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아다만티아라 칭해지는 보석, 그 보석은 석탄과 동족이라 하였으며, 석탄 그리고 그 친척이라 할 수 있는 페트롤레온 (Petroleon) 은 죽은 생물이 변질된 것으로 생물과 석탄, 페트롤레온 그리고 아다만티아는 모두, 카르본 (Karbon) 이란 물질이 그 근원이라 하였다.
  어딘가에서는 생물의 뼈를 가공해서 보석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들은 바 있다, 거기서 만들어진 보석은 아다만티아로 뼈와 아다만티아는 카르본이란 같은 본 바탕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 기계들도 인간의 뼈를 그렇게 가공해서 광학 병기 발사를 위한 보석을 만들려 했을 것이고, 그래서 시체라도 뼈는 취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인간의 시체, 유해마저 자신들의 몸 속으로 가져가려 했다면 말이다.



  이후, 소년에게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고, 잔느 공주는 그런 소년의 목소리에 다시 귀를 기울이려 하였다.

Yâgi i'nîn saramdrl, giyomi zcugyâßâyo.
Zcugyâtdago? Giyomi?
Ye, gömurira burlin gigyedri zcâhirîrl magu zcugyâßâyo, gidr'y däzcãi giyomi-eyo.
Gîra'khuna. gîrâmyân, giyomi âtân saraminzci ârlmana arlgo i'ni?
Saramdri marhäzuâßâyo.

  "기욤이란 말이 들렸어." 그 무렵, 카리나가 내게 조용히 말을 걸었고, 그 말에 바로 "나도 들었어." 라고 답했다. 소년의 목소리, 그리고 잔느 공주의 목소리에서 '기요미 (Giyomi, giyomi)' 란 단어가 한 번씩 거론되었으니, 그것이 기욤 (Giyom, Guillaume) 과 관련되어 있을 것임이 확실해 보였다.
  "기욤이란 이름의 격 변화 (Deklensia) 에 해당되려나." 이후, 아잘리가 내게 물었고, 그 물음에 나는 그러할 것이라 답했다. 특정 이름 역시 이러한 '격 변화' 를 통해 명칭이 달라지는 경우가 있으며, 도중에 들려온 '기요미 (Giyomi)' 라든가, 후술할 '기요믄 (Giyomîn)' 등이 여기에 해당될 것으로 보았다.
  이후로도 소년의 영혼 그리고 잔느 공주의 대화는 계속되고 있었으며, '기욤' 에 관한 단어들 역시 계속 들려왔다.

Giyomîn mân yetnarl, wurisegyega i'kgi zcâne sara'dën saramiëßëyo, luhmaranîn zcegug'y guniniëciyo. Yizcerîranîn dosciesâ banlanîrl zcinaphandago, saramdrîrl magu zcugyâ'däyo, gîrigo, saramdr'y sarîrl mâggo, pirîrl masciryâhä'däyo.

Gîgâ, scigin anini? Wä gîrân zcisîrl hä'nînzci marhahrlsu ißâ?
Giyomîn hîphyârlgwiga döryâhäßëyo, bämpaiyâ mari-eyo.

  "도중에 뱀파이어 (Vampire, Væmpaiyâ) 란 말이 들린 것 같은데?"
  대화 도중에 뭔가 익숙한 단어가 들렸는지, 카리나가 다소 심각해진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물었다. 나도 그 단어는 확실히 들었고, 그래서 "나도 들었어." 라고 화답했다. 그리고 카리나에게 그 단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밤피르 (Vampir) 와 같은 말인 것은 알지?"
  "당연하지." 카리나가 화답했다.

  "그러고 보니, 밤피르에 대해서는 그 '괴물' 이 있는 곳에서 들은 바 있다고 했었지?"
  이후, 카리나가 생각난 것이 하나 있다면서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러자 나는 '괴물' 이 인간의 모습으로 변장했을 때를 떠올리려 하였고, 그 이후에 바로 그렇다고 답했다.

  There are demons here that have been called 'monsters'. They ate our blood and flesh, and wanted to trap the rest of our souls. (이 곳에는 '괴물' 이라 칭해진 악마들이 있어요. 그들은 우리들의 피와 살을 먹고, 남은 영혼들을 가두려 하였어요)
  To do so, the demons trapped our souls in the thing they created. I'm one of those souls trapped in this place. (그렇게 하려고, 악마들은 자신들이 만든 것에 우리들의 영혼을 가두었지요. 저도 그렇게 이 곳에 갇힌 영혼들 중 하나랍니다)

  기욤은 예로부터 인간을 비롯한 짐승들은 자신보다 낮다고 여기어진 짐승들의 살과 피를 향유했으며, 그래서 더욱 높은 존재가 되고자 한 자신은 인간의 피와 살을 향유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여기었대. 그리고 신들은 예로부터 인간의 피를 생명의 물로 여기었다는 생각을 서슴없이 드러내기도 했었지.

그렇다면, 기욤은 자신을 밤피르라 생각했던 거예요?
그랬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서' 학살을 벌일 수 있겠니?

  밤피르가 언급되자마자 이전에 내가 했던 말, 그리고 내가 들었던 말들이 떠올랐다. 모두 '기욤' 이란 인물의 행적과 관련된 말이었다. 소년의 영혼과 잔느 공주의 대화를 잘 알아듣지 못해, 대화의 내용이 어떠한지 알 수 없기는 했지만, 기욤이 루마 제국이란 나라에서 벌인 만행 그리고 그가 환생한 이후에 벌인 행각, 나도 소리를 통해 들어서 알았던 것에 관해 어느 정도 이상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저 아이는 그런 것들에 대해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이 곳에서는 저 아이처럼 억울하게 죽은 자들이 많아, 그런 이들을 통해 잘 알 수 있었을 거야."
  아잘리가 묻자, 내가 답했다.

  그리고, 주변 일대의 혼령들을 둘러보고 있던 잔느 공주에게 소년의 목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뭔가 물음을 건네는 목소리였을 것이다.

Nuna, muâsîl ca'go gyescin gâyeyo?
Ani...... amugâ'do...... hoxi, yirân saram âpsë'ni, zcang hyânsurago.
Zcang hyânsu baxa marige'co? Gînîn yâgi-e âpsëßëyo. Gîbunkgesënîn dosci-esâ doragascizci anîscyâßëyo. Gîrakhuna. Gîbunkgesâ doragascin gosedähäsânîn.......
Zcösonghäyo.

  그 대화 이후, 나무처럼 보이는 구조물 안쪽의 '심장' 이라 칭해진 덩어리가 불안하게 깜박이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카리나, 아잘리 모두 심상치 않아 보인다고 말했으며, 이어서 아잘리가 나에게 심장의 현상에 대해 뭔가 말을 해 볼 것을 청했다.
  내가 보기에도 그 현상은 심상치 않아 보였고, 그래서 전투 준비를 해야할 필요를 느끼면서 그간 어둠을 비추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던 빛의 기운에게 빛의 힘을 일으키도록 하면서 아잘리에게 이렇게 말을 건네었다 :
  "안쪽의 심장 같은 것이 깨어나려 하는 것 같아."
  그 한 마디 말을 듣고 난 이후, 아잘리는 바로 그간 허리에 꽂아두고 있던 총을 다시 꺼내고, 왼손에 기운을 일으켰다. 곧 전투가 발발할 것임을 그 말을 듣자마자 바로 알아차린 것이었다. 카리나 역시 심장 앞으로 다가가면서 검을 들고 방패 소환을 준비했다, 공격을 막아내고 일행을 지킬 준비를 하려 하였던 것.

Nunadrl, nunadrldo ascige'zciman, izce gîgâsi kgä-ânarlgëyeyo,
Wrirîrl zcugin gömurdr'y däzcãîy scimzcãîro musâwun himîrl gazcigo ißëyo. Budi, zcoscimhä zcuseyo.

  소년의 목소리 전반에 대해서는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다만, 마지막에 소년이 남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부디 조심해 주세요.' 정도가 아니었을까. 나를 비롯한 눈앞에 보이는 이들이 전사로서, '심장' 과 싸우려 하는 이들임을 알아차린 소년의 목소리가 뭔가를 당부하는 듯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으니, 자신을 위하려 하는 전사들에게 당부할 수 있는 말은 그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후, 소년의 목소리는 잔느 공주에게 뭔가 목소리를 내려 하였다, 중요한 발언 같았지만,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사람은 당장에는 잔느 공주 한 사람 뿐이었으리라.

Nuna, scimzcanganenîn sarami gacyâißëyo. Scimzcãîy hime gacâisîmyânsâdo urirîrl zcikyâzcuscin gomawun buni-eyo.
Gîräsâ marlßîmdrirlkgeyo, gîbunîrl kgok guhäzcuseyo.
Araßâ, yâgiro oscin bundriramyân mwâdîn hänäscirltenikga, nâmu gâkzcâng marlgo zcikyâboazcwâ.

  그리고 잔느 공주의 대답 이후, 심장이 한 차례 파동을 일으키면서 심장에서 괴물의 울음 소리 같은 것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후, 영혼들의 모습이 사라지더니, 영혼의 실체였던 빛들이 갑자기 심장 쪽으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남성, 여성 그리고 어린아이, 젊은이, 노인의 울음 소리, 비명 소리가 혼령들이 자리잡았을 공간 전체에 울려퍼져갔다.

Nunadrl, budi...... zcukzcimarayo!!!!

  이후, 소년에게서 그 말이 들려왔고, 이후로 소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한편, 빛을 깜박이며 맥동하기 시작한 심장은 소년을 비롯한 영혼들의 빛을 자신의 몸 속으로 빨아들이면서 더욱 격렬히 맥동하기 시작했으며, 맥동과 더불어 깜박이던 빛도 이전에 비해 더욱 격렬해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심장이 있는 쪽에서 괴물의 울음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심장이 깨어난 것이었다.

  심장은 깨어나자마자 새하얗게 빛나고 있던 그 몸체의 중심에 검은 덩어리 같은 것을 생성하기 시작했고, 처음에는 흑점 비스무리한 모습을 보이던 검은 부분이 점차 심장의 표면을 뒤덮기 시작해, 결국 심장 전체를 검게 물들였다. 그 표면에 검은 점이 생성되고 나서, 대략 20 초 정도 지난 이후였다.
  이윽고 검은 덩어리에 의해 검게 물들어 버린 심장의 맥동이 격렬해지고, 검게 변한 심장의 표피에서 검은 연기가 분출하기 시작하니, 그야말로 한창 타오르는 불에서 연기가 분출되는 것만 같았다.  연기는 그야말로 순식간에 나무 밑둥과 뿌리의 형상이 자리잡은 일대를 덮으려 하였으며, 연기에 노출된 부분들은 마치 유리가 갈라지듯, 균열이 발생하다가 바스라지기 시작했다. 그 바스라지는 모습이 유리 조각이 깨어지면서 가루가 되었다가 그 가루가 연기로 변해 흩어져 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검은 연기에 의해 나무와 뿌리를 이루는 물질이 부식되고 부서지는 동안 공간 전체에서 유리가 갈라지고 바스라지는 소리가 계속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한편, 검게 변한 심장에서 퍼져 나온 연기가 나무의 형상을 이루는 물질을 부식시키는 성질을 갖고 있음이 밝혀지면서 연기가 퍼져가는 모습을 경계하려 하였으며, 그래서 뒤쪽으로 물러서면서 카리나에게 방패로 연기를 막아줄 것을 요청했다.
  카리나 역시 연기가 퍼져가는 것을 좋지 못한 징조로 여기고 있기는 했었고, 그래서 내가 말을 건네기 전에 이미 왼손의 방패를 앞세우고 빛의 보호막을 펼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말을 건네자마자 바로 빛의 보호막을 펼치면서 검은 연기가 퍼지는 모습을 주시하려 하였다.
  그러나, 검은 연기는 나무의 밑둥과 뿌리를 뒤덮고 그 윗 부분까지 퍼져가려 하고 있었지만, 일행이 있는 쪽으로는 나아가지 않았다. 수직 방향으로도 높이 올라가려 하지도 않아서 마치, 나무의 밑둥과 뿌리에 머무르며, 해당 부분만을 부식시켜 부수려 하는 듯한 움직임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
  "아랫 부분이 부식되고 윗 부분을 지탱하지 못하게 되면, 윗 부분이 자빠질 거 아냐, 검은 녀석은 분명 그걸 노리는 것 같아!"
  그 광경을 목도하자마자 아잘리가 말했다. 그 형상이 공간의 천장에 닿을 정도였으니, 윗 부분이 쓰러지면 일행을 덮칠 것임은 너무도 분명했고, 그래서 카리나가 방패를 통해 보호막을 마련한 이후에도 내가 쓰러지는 형상을 격추, 파괴시켜야 할 필요를 느끼고, 그것에 대한 대비를 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현상은 그런 우려와 다르게 진행되었으니, 나무의 밑둥, 뿌리에 해당되는 부분이 부식으로 인해 부서져 갈 때, 공중에 붕 뜬 것처럼 되어갈 것 같았던 나무의 가지 부분 역시 마치 스스로 그런 최후를 맞이하려는 듯이, 갈라지고 깨지며, 부서져 갔다. 유리가 갈라지고 깨지는 소리가 나뭇가지 부분이 부서지고 떨어지며, 깨져, 하얀 연기로 변해 심장의 형상을 가리는 동안 유리 바스라지는 소리를 대신해 울렸다. 그런 공간을 깨부수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몇 차례 울려 퍼진 끝에 나무의 형상은 완전히 부서지고, 연기로 변해 소멸하게 되었다.

  심장을 감싸고 있던, 나무 형상이 소멸하고, 연기가 걷히면서 검은 심장이 다시 온전히 모습을 드러냈을 때, 심장은 이전보다 훨씬 커져 있었다. 이전에도 갓 태어난 아기의 신장 정도는 될 정도로 거대했으나, 연기가 걷히고 드러난 형상은 어지간한 어린 아이보다 훨씬 커져 있었다. 나무 형상이 부서지고 깨어지는 것과 함께 검은 물질이 힘을 내면서 심장의 형상이 커져버린 것이었다.
  형상이 커지면서 형상의 맥동도 더욱 급격해졌다. 맥동은 더 이상 빨라지거나 하지는 않았으나, 맥동의 정도는 이전에 비해 더욱 커졌다. 맥동에 따라 어린 아이만큼 커졌던 심장의 형상이 태아의 크기 정도로 축소되었다가 원래 크기로 돌아가기를 계속 반복해 갔다.
  그러다 마침내 검게 물든 심장의 표면에서 붉은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고, 이를 통해 나는 그 괴물체에서 에너지가 분출되고, 이를 통해 공격적 행동을 보이기 시작할 것임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후, 심장의 표면에서 붉은 광탄들이 흩뿌려지기 시작했고, 카리나가 이를 빛의 방패로 막아내는 동안, 내가 빛의 기운을 통해 곡선을 그리는 하얀 빛 줄기들을 발사, 심장에 닿도록 하였다. 그러는 동안 아잘리 역시 자신의 총포를 오른손으로 잡고, 총포에서 광탄들을 계속 발사, 광탄들이 심장에 닿아 폭발하도록 하고 있었다-왼손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일단 가만히 놓아두고 있었을 것이다-.
  잠시 후, 세나 역시 불새 형상의 환수와 빛을 발하는 새 형상의 환수를 소환했으며, 불새는 입에서 불을 뿜도록 하고, 하얀 새는 깃털들을 쏘아 보내도록 하면서 심장을 집중 타격하도록 하니, 이렇게 잠시 동안 카리나가 방패로 심장에서 분출되는 힘을 막아내는 동안 뒤에 있던 이들이 집중 타격을 가하는 상황이 이어져 갔다.
  한편, 잔느 공주는 어느새 무지갯빛 보호막에 의지한 채로 공중에 떠올라 검은 심장 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는 보호막에 의지한 채 가만히 앉아있기만 할 줄 알았으나, 얼핏 보았을 때에 그렇게 보였을 뿐으로, 자세히 그 모습을 보려 하니, 고개를 자신의 왼편으로 돌리면서 뭔가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앞쪽의 소리가 워낙 컸던 데다가, 원래 보호막 안쪽은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던지라 뭐라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깨어나자마자 집중 타격을 받던 심장은 표면 안쪽의 붉게 빛나는 부분에서 붉은 광선들을 전방 쪽으로 방출하려 하였다. 붉은 광선들이 여러 방향으로 분출되고 있었기에, 카리나는 마력을 방패 쪽으로 집중시켜, 빛의 보호막이 반구의 표면을 이루도록 하면서 광선들을 막아내려 하였다.
  같은 마력을 들이면서 보호막을 넓게 펼치고 있었던 만큼, 보호막의 방어력 자체는 약해질 수밖에 없었겠지만, 카리나는 그 정도로 충분하다 여기었고, 실제로 빛 줄기는 얇게 펼쳐진 보호막에 의해 바로 막히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면서 눈앞의 괴물 (심장) 이 더욱 큰 힘을 내려 할 것임이 틀림 없고, 심장이 더 큰 힘으로 광선을 발사하면 뚫릴 가능성이 높았기에, 힘을 내지 못하도록 가능한 빨리 심장의 표면을 제압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아잘리, 가자!" 판단을 내리자마자 나는 아잘리에게 가자고 청했다.
  "어딜 가자고?" 이후, 아잘리가 묻자, 바로 심장의 근처로 가자고 말한 다음에 괴물의 공세를 뚫고 도달해야 하는 만큼, 각오는 해야 한다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그러자 아잘리는 잠시 망설이는 듯한 모습을 보이다가, 나갈 준비를 하면서 말했다.
  "그래, 우리가 한다는 게 이런 거지, 뭐겠냐?"
  그리고서 그는 보호막의 우측 가장자리 쪽으로 뛰어간 이후에 광선이 분출되는 광경을 그 쪽 방향에서 바라보면서 내게 광선의 출력이 약해질 즈음에 가는 것이 어떠하겠느냐고 물었고, 그러자 내가 바로 그런 그에게 이렇게 답했다.
  "녀석의 광선은 결코 약해지지 않을 거야, 저 공격이 막히고 있음을 알아차렸기에, 분명 출력을 높이려 하겠지, 보호막을 뚫으려고 말야. 녀석은 이미 판단을 내렸을 것이고, 곧 실행에 옮길 거야, 그 판단을 실행에 옮기기 전에 녀석에 피해를 줄 필요가 있어."
  이후, 나는 내가 먼저 갈 테니, 상황 변화가 올 것 같으면 그 때, 내가 그를 부르겠음을 알리고서, 먼저 보호막을 뚫고, 광선 돌파를 시도했다.

  한편, 괴물은 여러 줄기의 붉은 광선으로 곡선을 그리고 있었으며, 각 곡선은 카리나가 소환한 빛의 보호막에 막혀서 열기를 내고 있었다. 곡선의 궤적은 일정했지만 짧은 주기로 궤적의 형태가 반복적으로 변했기에, 하나의 궤적을 보며, 궤적의 틈을 따라 가기만 하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되었다.
  하나의 곡선을 뛰어넘은 이후, 일어서려 할 즈음에 곡선의 궤적이 변화하려 하였고 (바로 앞에 보인 광선의 출력이 살짝 약해진 것이 보였다), 그 조짐을 느끼자마자 바로 엎드린 이후에 앞으로 미끄러져 가려 하였다. 다행히도 광선은 나의 바로 위를 지나쳐가고 있었으니, 그 때, 가만히 있었으면 광선에 허리가 절단났을 것이다.
  괴물은 여러 방향으로 광선들, 광선 다발을 발사하고 있었지만, 맹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정면 쪽의 공격이 다소 부실했다는 것이 그 맹점으로 광선 궤적의 변화에 따라 정면이 빌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주기가 아주 짧긴 했어도, 공격이 비는 구간이 있었다. (다만, 정면 쪽은 광선 다발에 빛 기둥까지 분출되었기에 섣불리 다가갔다는 측면으로 접근하는 것보다 더욱 위험했다) 그 정면을 노리려 하였다.
  괴물의 정면 근처에 도달하자마자 바로 정면의 표면을 찢으려 하였다, 안전 지대 혹은 사각 지대가 없었기에 (괴물이 광선을 발사하는 범위 내에서는 어느 곳이든 광선이 나아갈 때가 있었다), 바로 괴물의 정면 부분으로 접근하려 하였으며, 확실한 타격을 위해 빛의 기운으로 검을 생성해 오른손에 쥐었다.

  광선이 정면 부분에서 방출되고 있을 동안에는 그 근처에 앉아서 기다렸다가 바닥에서 열기가 느껴질 즈음, 바로 괴물의 정면 쪽으로 달려들었다. 괴물의 정면 근처로 광선이 발사될 즈음에는 정면 쪽의 공격이 약해지다가, 결국 비게 되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그것의 정면 근처에서 광선이 방출될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자, 바로 그 때를 노리고 타격을 가하려 한 것이었다.
  괴물의 정면이 비게 되자마자 바로 그 정면을 향해 뛰어들어서는 두 손으로 빛의 칼날을 거꾸로 잡아 그 날의 끝으로 괴물의 표면을 궤뚫고서, 곧바로 왼쪽으로 한 번 베어낸 이후에 오른쪽으로 크게 베어내는 것으로 심장처럼 생긴 괴물의 표면을 도려내려 하였다. 이후, 괴물의 표피가 갈라지면서 표피가 네 방향으로 갈라졌다, 마치 검은 꽃잎이 펼쳐지면서 붉은 안쪽이 드러나는 것처럼.
  그 때를 같이 해, 괴물에게서 고통을 느끼는 듯한 괴성이 울려 퍼졌고, 그와 함께 광선의 발사가 멈추니, 그 때를 같이 해, 아잘리가 내가 있는 쪽으로 달려들려 하였다. 주변의 저항도 없었기에 금방 내 곁으로 올 수 있었을 것이다.

  표피가 찢겨지고 네 방향으로 갈라지면서 드러나는 괴물의 내부, 핏빛을 띠며 빛나는 안쪽 깊숙한 곳에 붉은 돌처럼 생긴 기관이 하나 자리잡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괴물의 눈과 같은 기관이 무수히 자리잡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눈앞에 보인 그 기관들이 광선 분출을 행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붉은 돌처럼 생긴 기관은 처음에는 보석 같은 모습을 보이다가 맥동하면서 투명한 피막을 가진 생물과 같은 모습도 보이게 되었다. 그렇게 기관이 맥동하면서 그 내부에서 붉은 에너지가 차오르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보자마자 바로 칼자루를 거꾸로 쥐고 칼날로 그 기관을 깊숙히 찌르려 하였고, 이에 아잘리 역시 나의 우측에서 총구에서 방출된 빛의 칼날로 괴물의 기관을 궤뚫었다. 두 방향에서 파고든 빛의 기운이 심장으로 파고들고, 그 이후로 기관의 내부에서 폭발이 일어나려 하였다.
  "이전에 빛의 보호막과 괴물의 빛이 충돌했을 때와 비슷한 상황일 거야."
  아잘리가 말했다. 규모가 다르기는 하지만 괴물이 방출하는 에너지 그리고 빛의 에너지가 충돌하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폭발이 발생하려 하고 있었음은 같았다. 이전 때처럼 누가 폭발의 위험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해주거나 하지도 못했기에 폭발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마자 바로 그 자리에서 멀어지려 하였고, 그래서 다급히 심장 형태의 괴물이 위치한 그 반대 방향으로 뛰어가려 하였다.
  원래는 아잘리의 손을 잡고 같이 뛰려 하였으나, 그런 생각을 할 즈음, 아잘리는 이미 세나, 카리나가 있는 쪽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시간을 다투는 촉박한 상황을 마주했다보니, 누군가를 의식할 여유가 없기는 했으리라. 그 광경을 보자마자 나 역시 아잘리를 따라 세나가 있는 쪽으로 뛰어갔다.

  그 무렵, 카리나는 보호막을 거두고, 세나와 함께 심장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심장에서의 공격이 멈추고, 나와 아잘리가 칼날을 심장에 꽂았음을 확인하면서 방어 및 공격 행동을 중단해도 괜찮다고 판단을 내린 듯했다.
  그런 카리나, 세나의 곁으로 아잘리가 도달했을 무렵, 괴물 혹은 심장이 있는 방향에서 진동이 느껴졌고, 그 진동을 느끼자마자 바로 괴물이 위치한 방향을 향해 돌아섰다. 괴물의 몸 속을 파고든 빛은 바깥으로 표출되려 하다가, 마침내 폭발하여 폭풍과 함께 공간 내부를 격렬히 진동시켰다. 폭풍이 얼마나 거셌는지, 그 폭발이 공간의 한쪽을 거의 뒤덮고, 진동이 공간 전체에 이르러 공간에 자리잡은 모두를 뒤흔들려 할 정도에 이르고 있었다.
  그러나, 폭발 이후에도 심장 형태의 괴물은 완전히 소멸하지 않았다. 폭발한 것은 심장의 앞 부분 그리고 내부의 기관일 뿐으로, 뒤쪽 부분은 여전히 남아 있으면서 검은 내부를 드러내고 있었다. 괴물의 남겨진 부분, 그 내부는 검은 기운으로 채워져 있었으며, 언제라도 전방 일대로 기운을 퍼뜨릴 것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저 정도면 검은 연기 같은 것이 내부에서 분출된다고 하더라도, 보호막에서 방출되는 빛의 기운으로 충분히 무력화시킬 수 있어. 내가 앞장서서 방패에서 분출되는 빛으로 어둠의 기운을 밀어붙일 거야. 그러다 보면, 연기의 분출이 멈출 때가 있을 텐데, 그 때, 누구든 나서면 될 거야."
  그리고서, 카리나는 내부에는 분명 핵이 자리잡고 있을 것이라 말하고서, 괴물의 남은 부분이 무력화되고 나면 핵을 바로 공격해 파괴시킬 수 있을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제가 그 역할을 맡을게요." 카리나가 말을 마치자마자 세나가 자신이 나서겠음을 청했고, 카리나는 알았다고 화답했다. 이후, 카리나는 세나에게 이후의 일은 그에게 맡기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말하고서,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밝히려 하였다.
  "심장에 갇힌 영혼들과의 대화는 아무래도 나 아니면 세나가 맡아야 할 텐데, 나는 아무래도 아는 게 없다 보니, 나처럼 인간과 인연이 있으면서도 뭔가 아는 게 많은 세나, 네가 이후의 일에 적합할 테니까."
  그리고서 카리나는 왼손에 방패를 소환하고 방패에서 빛을 방출, 그 빛으로 심장에서 분출되는 검은 연기를 막아내며, 심장의 바로 앞까지 접근해 가려 하였고, 세나가 그런 카리나의 뒤를 따랐다. 그러면서 세나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검에 빛의 기운을 일으키니, 괴물의 핵을 찔러서 바로 핵을 파괴하기 위한 일이었을 것이다.
  한 동안 괴물의 내부는 검은 기운을 연기처럼 일행 쪽으로 퍼뜨리고 있었으나, 검은 연기는 카리나가 소환한 빛의 보호막에 격렬한 빛의 반응을 일으키기만 할 뿐으로, 그 이상의 무언가를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검은 기운 분출은 멈추지 않고 있었으나, 숨을 계속 내쉴 수 없는 것처럼, 분출에도 한계점이 있을 것인 만큼, 그 때가 괴물의 마지막이 될 것임이 분명했다. 카리나도 그것을 알고, 괴물이 무력화될 것임을 전제로 세나에게 핵을 파괴할 것을 지시했을 것이다.
  이후로도 심장은 검은 연기의 분출을 이어가고 있었다. 카리나가 언젠가 검은 연기의 분출이 끝날 때가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은 이후로 나는 그 분출이 오래지 않아 끝날 것 같다고 예상했지만, 그 분출은 금방 끝나지 않았고, 오히려 상당히 오래 갔다, 마치 그 때가 아니면 다음은 없다는 식으로 오랫동안 검은 연기를 계속 뿜어냈다.
  그러나, 카리나의 방패 뒤에서 검은 연기를 지켜보며, 그 분출이 한 동안 오래 간다고 생각했을 즈음, 검은 연기의 분출이 멈추었다, 이후, 심장 내부의 핵을 가리는 장막 역할을 했을 검은 연기까지 걷히면서 핵이 그대로 드러나게 됐으나, 핵은 여전히 활성화할 여지가 있었는지, 붉은 빛을 번뜩이고 있었다.
  핵이 여전히 활성화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음을 카리나 역시 알았는지, 핵을 감싸던 장막마저 걷혔음에도 그는 빛의 보호막을 거두지 않고 있었음에도 세나는 핵을 감싸던 연기 장막마저 걷히자, 검을 들고 뛰쳐나갈 준비를 했다. 이전의 '검은 연기가 걷히고 나면, 핵을 공격해 파괴시킬 수 있다' 라는 말을 기억해 두고 있다가, 그 말대로 행동하려 했을 것이다.
  "아직 나가면 안 돼! 이후에 무슨 일이든 일어날 것임이 분명하다고!"
  그 모습을 보자마자, 바로 세나를 따라잡아서 그를 붙잡으며 그를 말렸다, 이미 핵이 여전히 활성화할 여지를 남기고 있었으며, 카리나도 여전히 빛의 보호막을 해제하지 않고 있던지라, 그 와중에 결정타를 위해 뛰쳐나가는 것은 너무나 무모한 행동처럼 보였음이 그 이유.
  그리고 그 말이 끝나자마자 붉게 번뜩이던 핵에서 빛이 퍼져서 붉은 구체를 형성하고, 그 구체를 중심으로 여러 방향으로 구체들이 방출되기 시작했다. 카리나가 여전히 활성화하고 있던 빛의 보호막으로 구체들을 막아내고, 나는 세나를 붙잡은 채, 구체들이 방출되어 퍼져가는 모습을 카리나의 뒤에서 지켜보려 하였다.
  구체의 방출은 오래가지 못했다. 구체의 폭발 자체는 연기보다도 강력했겠지만, 핵이 검은 연기를 분출하면서 기력을 너무 많이 들여, 구체를 방출할 여력이 많지 않았음이 그 이유였던 모양. 붉은 구체의 방출마저 멈추어, 핵이 노출되기 시작하고, 핵마저 이전의 섬뜩하게 번뜩이던 붉은 빛을 잃게 되자, 이제 때가 왔다고 판단을 내리고서, 그 광경을 같이 보고 있었을 카리나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런 의사를 전하려 하였으며, 이에 카리나 역시 나를 보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알았다고 응답을 한 이후에 다시 고개를 정면 쪽으로 돌리고서, 그간 펼치고 있던 빛의 장막을 해제시켰다.
  빛의 장막이 해제되자마자 나는 세나의 왼팔을 잡고 있던 오른손을 놓았으며, 이후, 세나는 빛의 기운이 집중된 검을 오른손으로 잡은 채, 곧바로 카리나가 서 있던 곳을 지나쳐서 핵이 있는 쪽으로 뛰쳐 나갔다, 핵이 있는 쪽으로 돌진해 가려 한 것이었다.
  맥동하는 검은 핵으로 뛰쳐나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나는 핵의 바로 앞에 이르자마자 검을 자루를 두 손으로 거꾸로 잡으며, 맥동하는 검은 핵의 표면을 찔렀다. 상당히 힘을 주어 찔렀는지, 하얗게 빛나는 칼날이 대략 3/5 정도만 보일 정도로 깊숙히 파고들었으며, 이후, 칼날을 감싸는 빛의 기운이 핵의 검은 기운과 반응을 일으키기 시작했는지, 칼날에 찔린 부분을 중심으로 마치 나무 줄기 혹은 거미줄처럼 빛이 갈라지며 퍼져가기 시작했다.
  하늘색 기운을 띠는 하얀 빛 줄기가 검은 핵의 표면에 줄기처럼 퍼져가기 시작하자, 심장 역시 발악하려는지, 몸체의 재생을 시도하기 시작, 절단된 표면이 재생되면서 마치 꽃잎과도 같은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빛은 핵을 넘어 심장의 남은 부분까지 퍼지고 있었으며, 심장의 재생이 이루어져 꽃잎처럼 보이는 부분까지 빛 줄기가 퍼져가는 모습이 보였다.
  꽃잎처럼 보이는 부분에까지 빛 줄기가 퍼져갈 즈음, 세나는 다시 칼자루를 두 손으로 바로 잡은 이후에 핵에 칼날을 꽂은 채로 검을 우선 왼쪽 방향으로 크게 휘둘러, 핵의 왼쪽 표피를 갈랐으며, 이후, 곧바로 반대인 오른쪽 방향으로 핵을 다시 강하게 베어 남은 우측 부분까지 갈라, 핵을 완전히 둘로 쪼개냈다. 둘로 쪼개진 핵은 표피 안쪽과 더불어 검격으로 생겨난 빛을 표출하기 시작했으며, 해당 부분을 중심으로 이미 빛이 퍼져간 부분을 중심으로 빛이 다시 퍼져나가며, 핵에 파고든 빛이 증폭되고 있음을 알렸다.
  핵의 중심에 파고든 빛이 증폭되고 퍼져가는 모습을 보자마자 세나는 곧바로 핵 근처를 떠나, 카리나가 위치한 일대까지 뛰어서 돌아갔으며, 이후, 일행은 카리나가 위치한 지점-핵에서 대략 30 걸음 정도 뒤에 있었다- 근처에서 핵에서 폭발하기 직전의 빛을 지켜보려 하였다.

  빛은 결국 재생을 시도한 심장의 표면 끝까지 퍼졌으며, 심장의 재생으로 인해 생성된 꽃잎 같은 부분들은 결국 빛과 열기에 의해 마르고 타면서 바스라져 검은 재처럼 흩어져갔다. 이후, 심장의 표면이 가장자리부터 빛에 의해 바스라지고, 부서져 가더니, 마침내 핵의 내부에 퍼진 빛의 힘을 검은 핵의 표면과 심장의 남은 표면이 감당하지 못하고 찢어지면서 검은 표면이 억누르고 있던 빛이 한꺼번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핵과 심장의 모든 부분에서 빛이 분출되면서 충격파와 폭풍이 이어서 터져 나오고, 공간 전체가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뒤를 따랐다.
  굉음과 함께 빛이 폭발하는 듯이 확산했으며, 충격파는 카리나가 있던 곳까지 닿지는 못한 것 같았으나, 빛은 그 너머를 거쳐, 공간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퍼져갔다. 다행히도 빛은 심장이 폭발하는 근처를 제외하면 위협적인 힘을 발휘하지는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빛이 심장의 몸을 파열시킨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심장의 몸이 파열되고, 찢겨지고, 타서 재가 되어 무너져 드러난 빛 덩어리가 다시 폭발하려 하고 있었으니, 그 모습을 가장 앞에서 지켜보던 카리나가 세나에게 물었다.
  "세나, 네가 이렇게나 많은 빛을 저 괴물의 몸에 주입했을 리는 없을 텐데, 그렇지?"
  "뭔가의 이유로 증폭돼서 그렇게 된 것일 거예요." 세나가 답했다. 괴물의 심장에 갇힌 혼들의 영향으로 빛의 기운이 증폭되고, 그로 인해 심장의 형체가 파열되고 불타버릴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빛 덩어리가 점차 커져가기 시작하는데, 그 모습이 부풀어오르다 못해 터져가려 하는 풍선 같아 보였고, 또, 책 등을 통해서나 보았던 신성 (Nova) 혹은 초신성 (Supernova) 의 모습 같아 보이기도 하였다.
  "우주에서 별이 붉게 부풀어 오르면 터져버린다고 하지 않았어?"
  "그랬지, 그것을 두고 우주에는 수많은 풍선들이 산다고 했었잖아."
  어렸을 적, '거성 (Ëcënibiol)' 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별이 태어나면 각자 다른 색을 띠다가, 수명이 다 되어가면 붉게 변하는데, 일부는 그 와중에 점차 그 형상이 커지다가 마침내 터져버린다는 것이었다. 터지는 방식도 각자 다르며, 그 중에서 가장 극단적인 경우가 신성 혹은 초신성이라 칭해지는 것이다. 내가 당시에 지켜보던 빛 덩어리의 모습은 거성의 붉은색은 아니었지만 하얀색을 띠고 있다가 불꽃의 노란색에 가까워져 가는 것이 별이 폭발해 초신성이 되기 직전의 모습이란 저것을 두고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라고 말할 수 있어 보이기는 했었다.
  결국, 처음 부풀어오르기 시작했을 때보다 3 배 이상은 커진 빛 덩어리는 자신의 기운을 주체하지 못한 채, 자신의 기운을 주변 일대로 퍼뜨렸으니, 그로 인해 폭음이 울려 퍼지고, 폭발이 일어나는 근처인 일행이 위치한 일대가 격렬히 진동하기 시작했다. 주변의 모든 것이 부서지고 붕괴하는 것만 같은 굉음이 울리는 것과 함께 빛이 공간 전체로 퍼져갔으며, 그 도중에 빛 덩어리가 자리잡은 주변 일대가 부서지고, 분쇄되어 재가 되어가는 모습이 잠깐 내 눈 앞을 스쳐 지나갔다.
  폭발과 함께 빛이 퍼져 가면서 기계 내부의 공간 전체가 빛에 휩싸이게 되었지만, 이상하게도 폭발이 일어나는 근처에 있던 내게는 그 빛 속에서도 열기나 충격 등이 다가오지 않았다. 감각만 없는 것이 아니라, 옷가지 등에 변화가 일어나거나 하지도 않아서 실제로 피해를 입거나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열기 등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어디까지나 에너지 확산의 영향을 받지 않는 정도에 불과했을 따름으로, 빛에 휩싸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을 어찌하지는 못했다.
  그렇게 빛 속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채, 빛이 사라지기를 바라고 있을 그 때, 폭발 속에서 또 다른 빛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새하얀 빛의 구체들로 이들은 심장 그리고 빛 덩어리가 있던 곳에서 주변 일대로 빠르게 흩어지며 사라져 가고 있었다.
  '괴물의 심장 안에 갇혀있던 영혼들이었으려나, 그 영혼들이 세나의 검이 심장의 핵을 궤뚫었을 때, 그 몸 속으로 퍼진 빛을 증폭시켰다고 하던데......'
  그 빛들을 보자마자 그것들의 실체가 무엇인지 바로 짐작해낼 수 있었다. 괴물의 심장 안으로 끌려들어간, 본래는 괴물의 심장 혹은 동력원에 갇혀 있던 그 혼들이었을 것이다. 구 세계가 멸망할 적, 괴물이라 칭해진 기계 병기들에 의해 학살당하고 붙잡혀 살해당한 후, 구 세계가 멸망한 이래로 기계의 몸 속에 어떤 식으로든 갇혀 있다가 이제 와서 혼들을 붙잡고 있던 심장이 파괴되자 폭발하는 빛 속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찾아 흩어져 가고 있던 것이었다.
  '저 혼들 중에 과거의 기억을 갖고 있을 이들은 얼마나 될까, 그리 많지는 않겠지?'
  이후, 혼들이 사라져 갈 무렵에 다시 혼잣말을 했다. 흩어진 혼들이 어떻게 될 지는 알 수 없겠지만, 적어도 바로 이전 때처럼 기계에 속박되거나 하지는 않겠지.



  소리가 그치고, 빛이 사라지면서 주변 일대가 어두워졌다. 공간 전체가 빛을 잃은 탓인지, 내가 서 있는 곳은 어둠의 한복판 같아 보였다. 내가 있는 곳이 공간의 어느 지점인지 가늠은 커녕,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대체, 어디가 어디인지 눈으로는 알 수 없는 어둠 속에 빠졌다고 생각하던 그 때, 먼 저편에서 하나의 빛이 떠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그 실체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 폭발 속에서 수없이 많은 혼들이 흩어져 간 와중에 심장이 있던 곳을 미처 떠나가지 못했을 어떤 혼이었을 것임은 분명해 보였다. 그 노랗게 보이기도 했던 하얀 빛은 처음에는 조용히 반짝이기만 했다가 곧 천천히 깜박임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먼 저편에 무언가 있음을 의식하며, 빛의 깜박임으로 멀리 보이는 이를 다가오게 하려 했던 것 같다.
  생각보다 그 빛과의 거리는 멀지 않았다. 몇 걸음 빛이 있는 쪽으로 다가가니, 금방 그 앞에 이를 수 있었다.
  내 시선 높이에 떠 있던 빛은 크지는 않았으나, 작다고 말할 것도 아니었다, 대략 축구공 크기 정도는 되어 보였다.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밝게 빛을 발하고 있었지만, 빛 자체는 눈이 부신 빛이 아니어서 가까이에서도 그 모습을 바로 볼 수 있었다. 빛은 내가 한 걸음 앞에 도달하자마자 깜박임을 멈추었고, 빛이 변화한 모습을 보자마자 나 역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Who are you? (Wuh ah yuh, 누구십니까?)" 내가 물었다. 그 빛의 실체가 옛 시대 사람의 영혼임을 확신하며, 그가 알아들을 수 있을 법한 말로 물어본 것이었다. 옛 브리태나 어는 구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익히고 배웠으며, 내가 했던 말은 기본적으로 간단한 표현이었기에, 그 정도면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물음에 반응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했던 말을 알아들었던 것이다.

Hu.......ayu...... nugunyago......?

  처음에는 이런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빛에서 이렇게 말을 건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You said, "Who are you?", right?
('누구냐' 라고 말했어, 그렇지 않아?)

  그가 내가 했던 말을 알아듣지 못할 경우도 생각해 보려 하였지만, 다행히도 그는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고, 그러면서 내가 건네었던 브리태나 어로 되묻는 듯이 화답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천천히 브리태나 어로 자기 자신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You want to know who I am. Yeah, I'll tell you right away.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겠지. 그래, 바로 알려주겠다)

  "My name is Yee Yuhn-soo (Yi Yânsu). Originally, I was a soldier in the defense of a country located in the far east of the continent of A-zia (Eyziâ). My mission is protecting people from murder machines called monsters, but it ended in failure, and since when, I've been sealed here. (내 이름은 이 연수. 본래 에이지어란 대륙의 극동단에 위치한 어느 나라의 방위군 병사였지. 괴물이라 칭해진 살인 기계 무리로부터 사람들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어. 그리고 언제부터였던가, 여기에 계속 갇혀 있었지)"
  영혼이 밝힌 바에 의하면 그의 이름은 이 (Yi) 혹은 연수 (Yânsu) 인 듯했다. (이후, 이름이 '연수' 임을 알게 되어 이후로는 연수로 칭한다) 이름과 함께 이어진 소개에서 그는 몇 가지 중요한 사항을 언급했으니, 방위군 소속의 병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것이 첫 번째였고, 자신의 적이었던 이들을 '괴물' 이라 칭해진 기계 병기들이라 칭한 것이 두 번째였으며, 기계 병기로부터 사람들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는 것이 세 번째였다.

Je voudrais confier une mission spéciale à toi...
그대에게 특별한 사명을 부여하고자 한다...

I will NOT obey to you.
나는 복종하지 않을 것이다.

그 수장은 그 젊은 군인의 의기와 용기를 높게 사고 싶었던 모양이야. 그래서 자신들에게 굴복한 다른 인간들에게도 주지 않았던 또 다른 '사명' 을 그에게 부여하려 했지. 자기들 딴에는 '아주 특별한 사명' 으로 여기었던 모양이야.

기계 병기는 그 젊은 군인의 영혼을 그의 육신에게 적출해 물질화한 후에 기계 장치 안에 봉입했어. 그리하여 그 기계 장치에 봉입된 채로, 그의 영혼은 당시에 괴물이라 칭해졌던 기계 병기군을 이끌었던 기욤에 의해 그가 개발한 거대 병기의 심장부에 이식되었을 거야, 그가 학살한 수없이 많은 이들의 영혼과 함께 말야.

  연수라는 영혼의 실체에 관해서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물론, 직접 언급이 이루어지거나 하지는 않았고, 연수라는 젊은 군인에 대해서는 괴물의 포격을 카리나, 아니, 영혼의 빛이 이루어낸 방패가 막아내면서 생성된 빛 속에서 그려진 형상들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기는 하였으나, 연수라는 인물의 일대기를 그려내던 형상의 마지막에서 괴물, 기계 병기 무리의 수장 급에 해당되던 이가 연수에게 남겼던 말을 기억하고 있어서 이를 통해 연수가 어떤 인물인지 짐작할 수 있었던 것.
  "You might lived as a soldier of a unit that was tasked with protecting citizens from 'monsters' near a city, and be also a leader of a group of soldiers. (당신은 어떤 도시 인근의 '괴물들' 로부터 시민들을 지키는 임무를 부여받은 부대의 부대원으로서 살아갔겠지, 그리고 그 병사들 중에서 한 무리의 리더이기도 했고)"
  그렇게 말하는 동안 영혼은 그저 조용히 자신의 빛을 깜박이기만 했을 따름이었다. 나의 말을 조용히 들어주려 하였던 것이었지도 모르겠다.
  "You would have been caught by a monster trying to fight to the very end, wouldn't you?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싸우려 했다가 괴물에게 잡혔을 거야, 그렇지?)"
  그러다, 내가 이렇게 자신에게 물음을 건네려 하자, 그것에 반응한 듯이 이전과는 다르게 빛을 발하려 하였으니, 내가 건네는 물음을 듣고, 크게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 짐작을 하면서도 다른 말 없이 영혼의 목소리를 들으려 가만히 있었는데, 잠시 후, 그로부터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How...... how did you know....... that thing? (어떻게 알았지, 그걸......?)"
  "I heard it somewhere. There's a young soldier who gave his life to defend a city in ancient era, even though his boss, the commander of the unit, was corrupted by monsters. (어딘가에서 들었어. 먼 옛날에 한 도시를 사수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젊은 군인이 있다고 말야, 자신의 상관인 부대장마저 괴물에 의해 타락했음에도 말이야)"
  "I see. (그랬었군)"
  "And the end was as I said before. Thus, I thought may be if there was the last soul left inside the monster's body, this place, maybe it was him. (그리고 그 끝은 이전에 말한 바대로였지. 그래서 생각했지, 괴물의 몸 속이란 이 곳에 마지막으로 남은 영혼이 있다면 어쩌면 그 남자가 아닐까, 라고 말야)"
  "The sacrifices of young soldiers in the war at that time were casual, is it just me? (그 당시의 전쟁에서 젊은 군인들의 희생이란 아무렇지 않은 일이었다, 나 뿐만의 일이겠나?)"
  그러자, 영혼은 마치, 그 일이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듯이 말을 건네었으나, 곧, 그 목소리는 이전과 전혀 다른 말을 건네었다.
  "You are right, I led the soldiers who tried to continue the resistance until the very end of the day, although of course the resistance ended in vain.... (네 말 대로다, 나는 당시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저항을 이어가려 했던 군인들을 이끌었지, 물론 저항은 부질없이 끝났다지만......)"
  이후, 그는 나에게 이렇게 물으려 하였다.
  "Then, I will ask, do you happen to know the story of a recruit who left before the last battle? (그렇다면, 묻겠다, 혹시, 마지막 전투 전에 떠나보낸 신병의 이야기도 알고 있는가?)"
  그 이야기는 이미 이전부터 들은 바 있었고, 그래서 그렇다고 답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은 계기에 대한 이야기도 해 주었다.
  "One of my friends told me this story, when she was a child, she met a ghost who was called the death knight, and he told her this story, that there was a recruit by his side from a faraway land, and the commander tried to send the recruit back to his hometown in some way. (친구들 중 한 명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 어렸을 적에 '죽음의 기사' 라 칭해진 망령을 만났는데, 그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거야, 자신의 곁에는 머나먼 땅에서 온 신병이 있었고, 부대장은 그를 어떻게든 고향으로 보내려 했다, 그런 것이었어)"
  "I see....... (그랬었군)" 연수가 이야기를 듣자마자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연수가 그 부대장이 맞다면, 이전부터 들은 바 있던 신병을 떠나보낸 그 지휘관이었던 것도 틀림 없을 테니, 그 신병을 언급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다른 것 (그의 전사한 다른 동료들) 을 제쳐두고, 마지막 전투 전에 자신이 떠나 보낸, 신병을 거론한 것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그것에 대해 물음을 건네려 하던 그 때, 그로부터 이런 이야기가 들려왔다.
  "It may not have been long before. I felt a light spreading beyond this prison. And beyond that light, I could see a brilliant soul. The spirit's energy was so intense that I could feel it even in this deep prison. (그리 머지 않은 때였을 거다. 이 감옥 너머로 하나의 빛이 퍼져가고 있음을 느꼈지. 그리고 그 빛 너머에 하나의 찬란한 영혼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었어. 영혼의 기운은 너무도 강렬하였기에, 이 깊숙한 감옥에서도 그 존재를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더니, 연수는 이렇게 이어 이야기를 풀어가려 하였다.
  "The spirit tried to stop the flames from the monster's maw with its own light. But the fire was so strong that it was too much for it. Still, the spirit tried to push the fire away with its own light, probably to protect the various beings behind it. (그 영혼은 괴물의 아가리에서 분출되는 불길을 자신의 빛으로 막아내려 하였어. 하지만 불길이 워낙 거세어, 그의 힘으로는 무리였겠지. 그럼에도 영혼은 자신의 빛으로 어떻게든 불길을 밀어내려 하였어, 자신의 뒤에 있던 여러 존재들을 지키기 위함이었을 거야)"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가 말하고자 했던 바가 무엇인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괴물의 흉부에 자리잡은 입에서 분출된 빛을 카리나가 빛의 보호막으로 막아내려 하던 그 때였다. 그 당시, 카리나는 역부족일 수 있음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어떻게든 괴물의 빛을 자신의 빛으로 막아내려 하고 있었다. 그 일련의 행동이 괴물의 뭄 속 깊숙한 곳에 갇혀있던 연수에게도 느껴졌던 것 같다. 다만, 연수는 그 모습을 볼 수는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혼의 움직임을 느끼는 정도에 그쳐서, 카리나를 혼으로 의식했을 것임이 분명했다.
  그렇게 연수가 느낀 것에 대한 해석을 마치고서, 내가 짐짓 모르는 척하며 말을 건넸다.
  "Her strength alone would not have been enough to stop the monster's flame. But at some point, suddenly a light of the spirits was created in front of her light, and the bright light blocked the monster's flame and led to its self-destruction. (그 자의 힘만으로는 괴물의 불꽃을 막아내기는 역부족이었겠지, 하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영혼의 빛이 그 자의 빛 앞에 생성되었고, 그 밝은 빛이 괴물의 불꽃을 막아내고, 괴물의 자멸을 이끌었어)"
  "......."
  "Looking at the sight, everyone said, there must have been help from the souls trapped in the monster. (그 광경을 보며, 모두 말했어, 괴물에 갇힌 혼들의 도움이 있었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에게 물었다.
  "It must have been you who drew the will of those souls, right? (그 혼들의 의지를 이끌어낸 것은 당신이었을 거야, 그렇지?)"
  "That's what happened. (그랬었지)" 연수가 답했다.
  As soon as I saw the flow of the shining spirit, I tried to watch it. It was because it really gave me hope for the first time in a long time since I was trapped here, it's the hope that I and all others trapped here could be freed and left with the breaking of the dark prison.
  Then, I began to feel that something was not unfamiliar with the shining soul. At first, I didn't know. Then, I felt a voice ringing in that light, and it was a cry of "We must protect everyone here." Then, I remembered what the recruit told me at the time.
  The first time I came to my unit, he said to me, "I want to keep everyone here with my own hands." But I didn't want them and other young men dying, so I sent some of the young men away, including the men, so I believed they would build up their strength and pay us back one day.
  However, mankind was destroyed, and I thought it would never come. But that's when something came up to recall his memory.

  그 빛나는 혼의 흐름이 보이자마자 그 흐름을 눈여겨 보려 하였어. 여기에 갇힌 이래로 내게 희망이란 없었던 내게 그 혼이 실로 오랜만에 희망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었지, 나를 비롯한 여기 갇힌 모든 이들이 그 혼이나마 어둠의 감옥이 깨지는 것과 함께 해방되어 떠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말야.
  그러다, 나는 빛을 발하는 영혼에서 뭔가 낯설지 않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어. 처음에는 알지 못했어. 그러다가, 그 빛에서 울리는 목소리를 느꼈지, '여기 있는 모두를 지켜야 한다' 라는 외침이었지. 그러다, 그 때의 신병이 내게 말했던 바를 떠올릴 수 있었어.
  처음 내가 있던 부대로 올 때,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지, "이 곳의 모두를 내 손으로 지키고 싶다." 라는 포부를 밝혔었지. 하지만 그 신병을 비롯한 아직 어린 청년들이 개죽음당하는 것을 나는 원치 않았고, 그래서 그 신병을 비롯한 젊은 병사들 중 일부를 나는 떠나보냈어, 그러면서 그들이 힘을 길러 언젠가 우리의 한을 갚아줄 것이라 믿기도 했었고.
  하지만, 인류는 멸망했고, 그런 때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었어. 하지만 그런 때에 그 신병의 기억을 떠올릴만한 무언가가 나타났던 것이지.

  이후, 연수는 자신과 함께 갇혀있던 부하 병사들의 혼들, 그리고 자신이 지키려 했던 도시 사람들의 영혼들을 찾아내어, 그들에게 이렇게 알렸다고 한다 : 자신이 떠나보냈던 그 신병이 돌아왔다고, 그 신병이 자신을 비롯한 사람들의 혼을 잡아먹고 가두어버린 괴물을 파괴하려 하고 있다고. 그리하여 영혼들은 자신의 힘을 그와 더불어 괴물의 몸 바깥으로 내려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카리나를 둘러싸는 모든 공격을 막아내는 빛이 생성되었겠구나.'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그렇게 혼잣말을 하였다. 그 때, 연수가 뭔가 말을 건네었다, 불길한 무언가가 있었다는 말이었다.
  "But there was something ominous around the shining horn. It was something like dark blue blood smoke, it was probably a horn. I don't know what it was, but it felt so ominous and vicious. (하지만 빛나는 혼 주변에 뭔가 불길한 것이 하나 자리잡고 있었어. 검푸른색의 피 연기와도 같은 무언가였지, 그것도 아마 혼이었을 거야. 그 실체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너무도 불길하고 흉악한 느낌이 들었어)"
  "You didn't know what it was, did you?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알지 못했겠지?)"
  내가 묻자, 연수는 그러하였다는 답을 하였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일을 떠올렸다. 세나, 카리나 그리고 내가 벽면에 손을 올린 일이 있었다. 벽면 내부에 갇힌 혼들이 세나 등이 손을 벽면에 대자마자 손에서 벽면 안쪽으로 빛이 스며들었고, 그것에 반응하는 듯이 영혼들이 이끌렸었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전혀 달라서, 내가 손을 벽면에 대자마자 벽면 안쪽으로 검은 피 같은 것이 스며들었고, 혼들이 그것에 반응해 공포에 질린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옛 문명 시대, '인간들의 시대 (Era Hominum, Era Øominum)' 라 칭해졌던 그 먼 옛날에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할 때가 종종 있었어요. 전쟁이라든지, 재난, 학살 같은 끔찍한 일들이 한 번씩 벌어졌다는 것이지요,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땅에는 인간의 피가 많이 흘러서 스며들었고, 그 땅 깊숙한 곳에 피의 기운이 자리잡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 피의 기운 속에서 영체가 태어날 때가 있었대요. 피의 기운과 피를 흘린 기억이 더해지면서 거기서 영체들이 자연적으로 태어나게 되었다고 하지요. 그 영체들은 피가 스며든 땅에 남은 피를 흘린 기억을 갖고 있어서 그것에 기반한 성격을 갖게 되었다고 해요.

  여기서 태어난 피의 영체가 있다면, 이 행성 전역에 걸쳐 기계에 의해 학살당한 불행한 사람들이 남긴 피의 기운에서 태어났겠지요. 그리고 그 영체의 자손들 중 일부가 인격체가 되고, 그들이 어떤 식으로든 자손을 남겨, 그 자손이 세상에 흩어졌는데....... 그 기운에 서린 피의 기억을 느끼고, 자신이 피를 흘린 기억을 떠올렸기 때문일 거예요.

  이에 대해 세나가 말한 바 있었다, 학살된 피에 의해 태어난 존재가 있다고, 그리고 그 기운을 이어받은 이들이 세상 곳곳에 흩어져 있다고. 그와 더불어, 그 집안, 베르티 가문의 선조 역시 그 자손 중 한 명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 때에도 연수는 뭔가 불길한 것이 느껴져서 두려웠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 그 손에서 퍼져나온 기운을 감지한 영혼들처럼, 연수 역시 그 기운을 느끼고, 그 때의 영혼들처럼 불길함을 느꼈을 수도 있을 법해 보인다. 다만, 그것에 대해 나는 실토를 차마 하지는 못했다, 그 흉한 기운에 빛 (카리나) 을 도와주려 했으면서도 불안했을 텐데, 그 실체를 함부로 밝히면, 연수가 나를 악인으로 여길 것임이 너무도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Aren't you curious about what it really is? (그 실체가 무엇인지 궁금하시지 않아요?)" 그 때, 연수에게 말을 거는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때, 나의 오른편에서 작은 무언가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 형상은 나 그리고 연수의 바로 근처까지 다가왔다. 소리 (Sori) 였다. 연수의 옛 삶을 보여주는 형상 앞에 있을 때 모습 그대로, 그 여자아이가 내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이었다.
  소리는 연수에게 그 실체가 궁금하지 않느냐고 묻고 있었으며, 연수는 빛의 형상만 보이고 있을 따름이었지만, 그런 소리의 물음에 긍정적인 무언가를 느끼고 있는 듯해 보였다. 이후, 소리가 연수의 바로 앞에 이르렀을 때, 연수의 빛이 잠깐이나마 이전과는 다르게 깜박거리며, 연수에게서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
  "You mean you know that.... (너는 알고 있단 말이겠지)" 그러자 소리가 그렇다고 답했다. 그러더니, 연수에게 이렇게 목소리를 내었다.
  "The dark blue energy you mentioned isn't that far away right now. (아저씨께서 말씀하신 그 검푸른색의 기운은 지금 그렇게 멀리 있지 않아요)"
  "What!? (뭐라고!?)" 이후, 연수의 몸체가 격렬히 깜박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렇다면 어디에 있느냐고 놀라는 목소리로 물었다, 마치 불길한 무언가가 자신의 근처에 가까이 다가온 것처럼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So where is it, then? (그렇다면, 어디에 있나, 그건?)"
  "It's right in front of you. (아저씨의 바로 앞에 있어요)" 소리가 답했다. 이후, 내가 "날 두고 하는 말이냐?" 라고 묻자, 소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리고 나에게 고개를 돌리고서 내게 이렇게 말을 건네려 하였다.
  "너도 직감했을 거야, 벽면에 손을 댔을 때, 검푸른색을 띠는 뭔가가 튀어나왔잖아, 세나 씨께서도 뭔가 귀띔할 만한 것을 말씀하신 것으로 아는데."
  그리고 소리는 연수의 오른편으로 걸어가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베르티 가문의 선조가 그 피의 정령들로부터 기운을 이어받은 자손들 중 한 명이란 이야기가 있었겠지.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에 해당되는 무언가를 베르티 가문이 대를 이어 이어받고 있음은 분명할 거야. 그러하지 않았다면, 네가 벽면에 손을 댔을 때, 그런 검푸른 기운이 벽면 안으로 스며들고, 영혼이 두려워하지는 않았겠지, 아잘리 씨가 그랬던 것처럼 말야."
  "무슨 말이야......!?" 그리고, 내가 묻자, 소리가 그 답으로써 이런 말을 건네었다.
  "너는 베르티 가문의 4 대 손이겠지, 그러니까, 그 피의 정령으로부터 이어받은 그 기운을 너도 품고 있다는 거야."

  이전에 세나 씨가 말했듯이, 그 기운은 학살에 의해 억울하게 죽게 된 사람들의 피에서 비롯된 거야, 그 기운은 살해당한 사람들의 괴로운 기억을 일깨우고, 그 기운을 품은 자는 그 기억을 통해 악을 증오하는 힘을 얻게 된다고 했지.
  너에게도 선조로부터 이어받은 비슷한 무언가가 있을 테니, 원한을 통해 힘을 얻고, 그 힘을 통해 원한의 근원을 파멸시킬 수 있겠지. 너는 저 아저씨를 비롯해 기계 몸에 갇힌 억울한 혼들의 원수를 갚을 수 있는 자로서, 저 아저씨 앞에 와 있는 것일지도 몰라.

  "What were you talking about just now? (방금 전까지 무슨 말을 하고 있던 건가?)" 그 때, 연수가 소리에게 물었다. 지금까지 소리가 내게 건넨 말은 연수에게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을 것이고, 그래서 그 의미를 알려달라고 소리에게 청한 것.
  그러자 소리는 옛 브리태나 어로 연수에게 그간 했던 이야기를 대충 요약해서 알려 주었고, 그러자, 연수가 바로 이렇게 물었다.
  "Is that true!? (그것이 사실이냐!?)" 그러자 소리는 조용히 "그러할 거예요." 라고 답했다. 그리고 그에게 이렇게 부탁을 했다.

  I and this girl have watched this and that about you before coming here. But it won't reveal the whole truth about you. Tell me all about what you have been through, because she here came here to take down the monster, and she needs to know a lot about you, the victim of the monster.
  Now you do not have to speak in a language that is not even your first language. I can understand you to a certain extent, and I can interpret it and speak it to her. I will interpret what she says and let you hear it.

  저와 저 아이도 여기로 오기 전에 당신에 대해 이런저런 것들을 지켜본 적이 있어요. 하지만 그것이 당신에 대한 모든 진실을 드러내지는 않겠지요. 당신께서 그간 겪으신 일에 대해 모두 말씀해 주세요, 여기 있는 저 아이는 괴물을 쓰러뜨리기 위해 여기로 왔으니, 괴물의 희생자인 당신에 대해 많은 것을 알 필요가 있으니까요.
  이제는 모국어도 아닌 말로 말씀하시지 않으셔도 돼요. 저도 당신의 말을 어느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고, 그것을 해석해서 저 아이에게 말해줄 수 있으니까요. 그 아이의 말도 제가 해석해서 당신께 들려드릴게요.

  이후, 소리는 연수를 바라보면서 그에게 뭔가 물음을 건네었고, 그러자 연수가 그런 그에게 답을 하였다. 처음부터 바로 뭔가 답을 하는 것은 아니었고, 처음에는 뭔가를 되묻는 듯한 목소리를 내기도 하고, 고민하다가 알았다는 듯한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짧은 대화 이후, 소리가 물음을 다시 건네자, 연수가 그 물음에 대한 답으로써 뭔가를 그에게 알려주려 하였고, 이후, 소리는 다시 나를 향해 돌아서서 이렇게 말했다.
  "우선 저 아저씨에 대해 물어보려 하였어. 이름이 무엇이고, 이전에는 무슨 일을 했는지, 나도 알아야 하니까. 아저씨의 이름은 '연수 이 (Yânsu Yi)', 본래는 대륙 동방에 있던 나라 '베다르 (Bedar, Bädar?)' 국군 소속의 군인이었어. 마지막 계급은 그들 말로 카피텐 (Kapiten) 을 뜻하는 말인가 봐. 아무튼, 베다르 국 서부의 대도시 중 한 지역을 사수하는 임무를 맡은 부대의 군인으로서 살아가고 있던 그런 사람이었대."

  본래 해당 지역은 나라의 서쪽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대, 북방에는 나름 높은 산이 자리잡고 있고, 그리고 남방 근처를 큰 강이 가로지르고 있던 내륙의 대도시였다고 했어. 그러다가, 모성의 이상 거대화에 의한 기상 이변으로 바닷물의 수위가 높아지고, 대륙의 여러 지역들이 물에 잠기면서 해당 도시도 고지대나 산악 지대가 아니면 전부 물에 잠겨서 사람들은 물에 잠기다 만 건물이나 고지대 위의 건물에 의지하며 살아가야만 했지. 다행히도 연수가 자리잡고 있던 부대는 고지대에 있었고, 그가 맡은 구역도 그 근방의 고지대라 화를 면할 수 있었던 것 같아.

  아저씨가 태어나기 전부터 행성계는 기상 이변으로 이전의 모습을 거의 잃어버린 것 같아, 본래 평지대였던 곳은 해저가 되어버리고, 인류가 고지대, 산악 지대였던 곳에 의지하면서 이전 시대보다도 인간의 삶은 더욱 어려워지고 말았대. 그럼에도 이전 시대처럼 일상의 삶을 이어가려 하던 인간이 더 많았고, 희망을 잃지 않으려 했던 인간들도 적지 않았기에, 인간이 번영하던 시대를 지나, 인간의 삶이 험악해졌음에도 그런 인간들은 여전히 적지 않았기에, 인간을 위험에서 보호하는 그들의 의무는 참으로 소중했을 거야.

  이후, 나는 소리의 오른편으로 걸어와서 연수와 마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리의 바로 앞에서 빛을 차분히 깜박이고 있었던 연수의 모습을 잠깐 응시하다가, 그런 연수의 모습을 왼편에서 바라보고 있던 소리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렇게 기상 이변으로 인간의 삶이 험악해지는 와중에 기계 무리까지 인류를 말살하려고 쳐들어왔다, 그런 말이지?"
  그리고, 그렇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는 소리에게 다시 물었다.
  "그리고, 인간들 중에 기계의 편이 되어 배반하려 한 자들도 있었고?"
  이 물음에도 소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에게 "이미 알고 있는 거잖아?" 라고 되묻기도 했다. 그 이후, 나는 소리에게 그 부대장이 어쩌다가 인류를 배반하고 기계의 편이 되려 하였는지에 대해 연수는 얼마나 알고 있느냐고 물으려 하였다. 부대장의 배신에 대한 연수의 입장을 들어보고 싶기도 했고, 또, 살아남거나, 기계의 세상에서 한 자리 차지하려는 욕심에 의해 그런 짓을 저질렀을 것이라는 추측 이외에 알려지지 않은 사유가 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던 것. 그러면서 소리에게 묻자, 소리는 곧바로, 연수에게 대화를 시도하였고, 잠시 후, 그는 나를 향해 돌아서고서, 내게 이렇게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아저씨도 그 작자가 어떻게 배반의 길을 택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는가 봐, 동료들이나 부하들로부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그는 그 모든 것을 세간에 떠도는 낭설 정도로 취급하고, 귀담아 듣지는 않으려 했대."
  소리가 언급한 바에 의하면 연수가 생전에 '괴물' 무리에 대해 알았던 것이라고는 그들이 자신이 지키는 도시 구역을 비롯한 여러 구역을 침범하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인간을 무차별적으로 사냥하고, 생포한 인간들도 그 피와 살을 취하기 위해 잔인하게 죽였다는 것 정도였다고 한다. 부대장이 어떻게 인간을 지키는 임무를 져버리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짐작되는 바가 있기는 했으나, 그가 인류을 배반하고, '괴물' 의 편이 된 이후로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고.
  "부대장은 원래는 주어진 임무에 충실한 평범한 군인이자 가장이었다고 해. 하지만 괴물 무리와의 전쟁이 장기화되고, 사람들이 지쳐가는 모습을 끊임없이 지켜봐 오면서, 인류에게 더 희망이 없다는 전망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듣고, 보게 되면서 전쟁의 종결 가능성에 대한 회의감에 빠지기 시작하다가, 가망 없고, 의미 없는 싸움에 지쳐간 끝에 '괴물' 무리에 굴복하기로 결심했다더라."
  "그러니까, 가망 없는 싸움에서 죽는 것보다, 적에 가담해서라도 사는 길을 택했다고 할 수 있겠네, 그렇지?"
  "......응." 이후, 내가 묻자, 소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부대장이 통솔하던 부대는 그가 소속된 부대 인근의 지역을 수호하는 임무를 맡은 부대로서, 해당 지역은 베다르라는 나라의 수도 내부에 있기도 했고, 전투 임무에서 매우 많은 성공적인 전과를 기록했기에, 베다르 중앙 정부로부터 높은 신뢰를 얻고 있었지. 그래서 베다르 국의 주요 거점으로 간주되어, 좋은 물자 및 장비를 지급받기도 했던 그런 곳이었대.
  하지만, 부대장의 배반으로 인해, 부대장을 따르던 부대원들 중 대다수가 '괴물' 의 편으로 전향하였고, 그로 인해 부대가 소유했던 모든 물자들이 '괴물' 의 것이 되어버렸고, 이후, '괴물' 집단은 전향한 이들을 앞세워 부대가 지키고 있던 지역 일대의 여러 마을들을 습격해, 마을 내에 있는 모든 것들을 죽이고 파괴하며, 폐허로 만들어 버렸지. 그나마 연수를 비롯한 일부 젊은 군인들이 여전히 인류의 편으로 남아, 연수를 대장 삼아 도시의 일부 구역 내로 들어오면서 해당 구역이나마 보전할 수 있었다는 것 같아.

  부대장의 배반은 여러 큰 여파들을 남겼어. 그의 부대가 수호하고 있던 지역은 베다르의 수도 핵심부와 이어지는 주요 길목 근처에 있었는데, 부대장이 부대를 배반하고, 지역을 수호할 수 있는 전력이 없어지면서 그 길목이 뚫리고 만 거야.
  연수가 지키고 있던 마을과 그 주변 지역을 비롯한 여러 지역은 무사했겠지만, 이미 베다르 수도 주요 거점은 함락되었고, 수도의 남은 지역 간 연결은 그로 인해 단절되었을 거야. 그 시점에서 연수를 대장으로 삼은 부대는 국가 정부와 연락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독립 세력화한 상태로 거점 수호에 나섰겠지.

  "아저씨 말에 의하면 그 이후로 가족의 행방을 전혀 알 수 없었대, '괴물' 무리에 의해 수도의 주요 시설들이 파괴되면서 간의 연락이 끊긴 것 때문에 타 지역에 살고 있던 가족들로부터 어떤 연락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대. 그 뿐만이 아니라, 부대원들 그리고 거점 근처 마을의 주민들 대다수도 마찬가지였지."
  연수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있던 소리가 길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다행히도 마을에는 구성원이 온전히 남은 가족들도 많았고, 그들은 그래도 나름 가정을 이룰 수 있었을 거야. 또한, 아저씨와 그를 따르던 이들이 마을 근처에 거점을 정한 이후로 한 동안은 '괴물' 무리의 침공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래서 잠시나마 평온한 시간이 이어질 수는 있었대."

  하지만, 그 일상은 이미 평범한 일상과는 거리가 있었을 것이다. 연수가 머무르던 부대 근방의 지역은 외부와의 교류는 거의 끊긴, 적 세력에 포위되어 고립된 도시 국가나 마찬가지인 상태였고, 지역 구성원들 중 대다수는 자신의 소중한 것들-물건, 사람, 동물들을 가리지 않고-을 많이 잃었으며, 마을을 지킬 수 있는 이들의 의지는 굳건했으나, 싸움을 위해 가질 수 있는 것들은 너무도 적었다.
  모든 것을 잃었다고 해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도시는 인간이 겨우 확보한 구역 이외에는 괴물 소굴로 바뀌어 버렸고, 괴물 소굴에서는 겨우 숨어 살던 인간들이 잔인하게 학살당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제라도 괴물의 무리는 인간의 영역을 침범해 모든 것을 유린할 수 있었고, 인간을 지키는 힘은 그런 괴물의 힘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괴물의 위협은 상존했고, 언제라도 현실화될 수 있는 공포였다. 그런 공포에 시달리면서 어떻게 모든 것을 마음 놓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을는지.

  "세상의 주도권은 이제 괴물들에게 있었겠지, 그들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인류의 미래를 끝낼 수 있는 시점에서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얼마 없었을 것 같아,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만큼, 미래를 위해 뭔가를 하기보다는 당장에 즐길 수 있는 것들을 즐기려 했을 것 같아, 어느 정도 일상을 유지하려 하면서."
  생각을 마치고, 내가 건네는 말에 소리는 조용히 "그렇지." 라고 답했다.

  괴물 무리는 인간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고, 그래서 인간은 그 기간 만큼은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을 거야. 괴물은 원한다면 얼마든지 인간의 영역을 지키는 힘을 분쇄하고 그 영역을 유린할 수 있었음에도 그러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상식적인 견해가 뭘까? 내부의 분열이 있었다던가, 아니면 다른 인간의 영역을 침범했기 때문이라 여기는 것이겠지. 하지만 때로 만물은 상식적인 판단을 하지 않을 때가 있어, 괴물들은 그런 상식적인 판단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거야.

  "...... 일부러 인간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이겠지? 그들이 조금씩 마음 놓고, 일상을 보내기 시작할 때를 노리고 있었을 거야, 높은 곳에서 떨어질 수록, 돌은 잘 깨지고, 행복할 때 마주할 수록 인간은 더욱 큰 충격 그리고 공포에 빠질 테니까."
  "그렇지." 소리는 내 말에 그렇다고 답했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잔존 군인들은 기계 전력 앞에서는 무의미하고, 그래서 괴물 무리는 얼마든지 인간을 뜻하는 때에 침공하고 유린할 수 있었을 것이라 이어 말했다.

  이후, 소리는 다시 연수에게 다가가서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상당히 긴 이야기들이 이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우선 소리가 길게 뭔가를 연수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간의 대화 내용을 연수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 같았다. 이어서 연수가 뭔가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고, 도중에 몇 번의 문답이 있었다.
  일련의 대화를 마치고서, 소리는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군인이 아닌 사람들의 삶에 대해 물어봤어. 대부분은 우리가 말했던 것처럼 그렇게 살았다고는 하더라. 하지만 그 와중에도 기약 없는 미래를 대비하려 했던 이들도 있었고, 이런저런 물품들을 지하에 묻어두는 이들도 있었대, 먼 훗날의 사람들이 그것들을 꺼내볼 것을 대비해서 말야. 그리고, 그 와중에 학생들은 가까운 미래를 위해 학업을 이어가야 했다는 이야기도 있어. 그리고 그 학생들 중에는 '내일 계획' 에 참여한다고 도시의 중앙 구역으로 떠나간 이들도 있었다는데, 계획에 참여한 학생들과 작별을 한 이후로 사람들은 더 이상 그들을 찾으려 하지 않았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래."
  "내일 계획이라면 혹시, 푸투로 계획을 의미하는 것 아니야?"
  "그렇지." 그 물음에 소리가 그렇다고 답했다.

  일상 속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사람들 사이에는 무력감이 만연해 있었대, 너무 많은 이들이 죽었고, 너무도 많은 것들이 파괴되었으며,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이 슬퍼했지만, 그 원흉인 괴물들을 이겨낼 힘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지.
  지켜낼 힘을 그나마 가진 이들은 괴물들에 투항해 버렸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렇지, 괴물 그리고 배신자들의 힘을 이겨내지 못한 인간들의 절망감은 깊었지만, 사람이 늘 절망할 수는 없었고, 그래서 어떻게든 그들의 일상을 보냈지만, 그런 삶이 절망을 온전히 감추지는 못했고, 그래서 일상 속의 무력감으로 드러났을 거야.

  "군인들도 사실은 다르지 않았어, 눈앞의 적과 싸워 이길 수 없다는 절망감과, 그들의 노리개로 간주되고 있다는 모멸감, 그리고 그럼에도 그들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무력감이 만연해 있었지. 어디든 절망이 만연해 있었고, 무력하게 괴물에게 당할 수밖에 없는 민가보다 싸울 무기가 있는 군에 있는 편이 차라리 낫다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잔존 부대의 지휘관, 연수를 비롯한 이들은 신병들이 민간인으로 돌아가기를 원했어, 그들이 민간인이 되어 가족으로 돌아가기를 원한 거야."
  "그것에 대해서는 이미 들은 바 있잖아."
  "그랬지. 신병들은 수가 얼마나 되든 간에 유의미한 전력이 되지 못하는 것도 있을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끝날 세상을 적어도 가족들과 고향에서 함께 보냈으면 한다는 인도적인 목적도 분명 있었겠지. 당장에 전력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신병이 언젠가 민간 구역에서 힘을 키워, 기계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이 되기를 바란 것도 있었을 거야."

  그와 같이 인간들은 많은 노력을 했지만, 멸망 그리고 절멸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괴물 무리가 본격적인 침공을 개시할 때를 알아차린 연수는 신병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기로 하였고, 그래서 그 신병을 비롯한 젊은이들을 돌려보낼 계획을 세웠고, 그 신병은 다행히 차량에 탑승해 돌아갈 수 있었지만, 나머지는 괴물 세력의 침공이 갑자기 시작되면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연수를 비롯한 군인들과 함께 괴물이라 칭해진 기계 무리와 싸우다가 죽어갈 따름이었을 것이다.

  "아저씨는 여전히 그 신병이 무사히 돌아갔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 같아,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고, 그 신병도 죽었을 것이라 했지만, 어딘가에 그 혼이 이 세상에 다른 형태로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었다고 했었지. 그러다가 카리나 씨의 의지를 느끼면서 그 분을 도와주기로 결심했던 것 같아."
  이후, 소리는 다시 연수에게 다가가서 그에게 다시 대화를 시도했다. 그리고 내 곁으로 돌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카리나 씨, 아저씨는 아마 이름을 모르겠지만, 그 분을 만나고 싶어하는 것 같아. 카리나 씨를 다시 보게 된다면, 그런 소망을 너에게 전해주었으면 좋겠어, 당장의 일은 아니어도 좋지만, 아저씨의 혼을 만나게 해 달라는 거야."

  "아르사나, 거기서 뭐해? 여태껏 찾아다녔잖아!"
  그 무렵, 뒤쪽에서 카리나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고, 그 소리에 놀라 뒤쪽으로 돌아서니, 정말로 카리나가 내가 있는 쪽으로 오른손에 검을 든 채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더니, 눈앞에 있는 빛-연수-을 바라보더니,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떤 여자애의 목소리가 그렇게 말했었어, 네가 어떤 영혼과 마주하고 있으니, 빛을 찾을 수 있다면 그 곳으로 가면 된다고. 대체 뭔 이유로 그 빛과 마주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나 싶었는데."
  그러더니, 그 빛과 빛 근처에 서 있던 소리의 모습을 한 번씩 둘러보다가, 빛이 깜박이는 모습을 다시 보기 시작하더니, 크게 깨달은 바가 있는 듯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아직 괴물의 몸 속에 남은 영혼이겠구나."

  카리나 역시 그 빛을 처음 보자마자 그 빛이 괴물의 몸 속에 아직 남아있던 영혼임을 바로 알아차리고 있었으며, 그래서 내게 그 영혼과 대화를 시도하고 있던 것이 아니냐는 짐작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후, 소리는 카리나의 모습을 가만히 보더니, 뭔가를 해야 한다는 식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고, 그 눈빛을 보자마자 그 뜻을 알아차렸는지, 그에게,
  "저 빛으로 다가가 보란 거지?" 라 묻는 듯이 말하면서 빛을 향해 다가가 보려 하였다.

  카리나가 빛을 향해 다가가려 하는 그 순간, 연수의 깜박이는 빛이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이미 괴물의 몸 속에 갇혔던 영혼들로부터 신세를 두 번이나 크게 졌던지라, 카리나 역시 왜 영혼의 빛이 밝아오는지는 짐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신의 말은 전혀 통하지 않을 거예요. 브리태나 어는 잘 알아듣는 것 같지만, 한계는 있는 것 같고......."
  "그래?" 소리가 카리나에게 연수에 대한 사항을 하나 언급하자, 카리나가 바로 소리에게 돌아서며, 그렇게 말을 건네었다. 이후, 소리는 그의 말은 자신도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으니, 자신이 그와 영혼의 통역 역할을 (나에게 영혼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처럼) 하겠음을 밝혔다.

  "당신이...... 여기에 여전히 남은 영혼인 거야, 그렇지?"
  이후, 카리나가 연수를 향해 돌아서더니, 그에게 조심스럽게 한 마디 말을 건네었고, 그러자 연수가 그에게 뭔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소리에 의하면 '그렇다, 여기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사람이다' 라는 뜻이었다는 것 같다.
  "아직 빠져나가시지 못한 거야?"
  카리나가 묻자, 연수는 다시 목소리를 내었다. 그 뜻은 '자신은 너무 깊은 곳에 갇혀서 미처 나가지 못했다.' 였다고 한다. 그러더니, 연수는 카리나에게 '여기에 있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라는 의미의 말을 이어 건네었다고 한다.
  "여기 있는 이들이라면, 괴물의 몸 속으로 들어온 이들을 말하는 것이겠지."
  그리고, 자신을 향한 물음에 대한 카리나의 대답 이후, 연수는 카리나에게 '여기까지 오면서 내가 왜 여기에 있게 됐는지, 그 영혼들이 왜 여기에 갇혔는지, 그리고 여기서 자신을 비롯한 영혼들이 무엇을 하려 했는지, 이미 알아차리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라는 의미의 말을 건네었다고 한다.
  "그 말 대로." 그러자 카리나가 연수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에게,
  "여기까지 오면서 당신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어, 당신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괴물의 몸 속에 갇혔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영혼이 저를 특별한 존재로 여기고, 저에게 나름의 가호를 내리려 했다는 것."
  라고 말하더니, 이어서 이렇게 이야기를 이어가려 하였다.
  "내가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것도, 당신을 비롯한 영혼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 그러면서 생각했어, 이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신을 비롯한 여기에 갇혔던 영혼들이 저를 당신의 부하였던 한 사람의 화신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이후, 조금 더 시간이 지날 무렵, 그는 연수에게 하나의 말을 건네려 하였다.
  "어렸을 적, 아주 오래 전에 어떤 이를 만난 적이 있어. '죽음의 기사' 라 칭해지며, 고향 사람들 모두가 두려워했던 이였지. 그리고 어쩌다가, 그 '죽음의 기사' 와 마주한 적이 있어, 전설 속의 죽음의 기사를 연상케 하는 검은 옷 차림의 남자였던가, 그래. 다리에는 힘이 없어 느릿느릿 걸을 수밖에 없고, 형체가 없어진 육신을 간신히 감싸는 검은 옷도 바스라져 가고 있어서 언제라도 소멸당할 수 있는 그런 존재였어, 무구도 망가진 데다가, 자신의 힘도 없어서 전설 상의 기사와는 달리, 애들하고도 싸울 수 없는 그런 불쌍한 존재였어."

  그런 데다가, 햇빛에 닿으면 점차 그 육신이 재가 되어가기까지 했었지, 그들은 괴물이라 칭해지는 사악한 존재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불행한 존재들이었어. 그럼에도, 빛의 정령에 의해 새롭게 창조된 세상에 받아들여진 존재가 되지 못했고, 그 때문에 빛 속에서는 재가 되어 죽어갈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어둠 속에서 살 수밖에 없었던 거야.
  그런 운명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죽음의 기사는 마치 오래 전 자신과 인연이 있었던 사람이기라도 한 것처럼, 내 곁에 계속 있으려 했어. 그러더니, 어떤 신병에 대해 이야기를 했었지.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부대로 와서 어찌어찌 살아가면서도 고향에 대한 걱정을 잊지 못했던 그런 병사였는데.

  그의 목소리를 대략 해석해서 소리가 연수에게 들려주자, 연수 역시 놀라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그런 느낌을 주는 목소리까지 내고 있었다. 그 뜻은 '그 신병이 어찌 됐는지 아는가?' 정도였다고 했다. 이후, 카리나는 소리의 말이 끝나자마자 바로 그에게 이야기를 이어가려 하였다.

  탈출선을 타라는 권유가 있었음에도, 결국 탈출선에 타지 않았지. 그 역시 그 죽음의 기사처럼 고향이 괴물들에게 유린되면서 고향을 잃고 만 거야. 그래서 절망 속에서 산야를 뛰어다녔다고 하는데, 그 이후로 그는 어떤 이야기를 하지 못했어, 그 이후까지 알지는 못했기 때문이겠지, 그 역시 부대장과 함께 전장에 나섰을 것이고, 신병의 행방에 대해서는 주변에 들려온 이야기를 통해서나 알 수 있었을 테니까.
  아마도 그 역시 병사로서 부대장과 함께 참가했겠지만, 결국에는 불가항력의 싸움을 거듭하다가 전사했겠지. 그리고 모종의 이유로 세상에 버림 받은 존재로서 되살아난 것일 테고. 온 몸에 더러운 무언가가 가득함을 느끼고 얼굴부터 씻으려 했지만 얼굴의 형상을 보고 놀라면서 계속 얼굴을 감추는 채로 살아갔던 것 같아.

  이후,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 죽음의 기사는 어떻게 되었느냐' 라는 의미의 물음에 카리나가 이렇게 답했다.
  "그는 나와 3 일 정도 동행했었어. 그리고 3 일 째에 몸에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었지. 그 역시 이상 징후를 알아차린 것 같았고, 그래서 신병에 대한 이야기를 남기고서, 내가 잠깐 다른 곳에 갔다 온 사이에 그 모습을 감추었어. 아마, 내가 모르는 어떤 곳으로 조용히 숨어들어 자신의 최후를 맞이했을 거야."
  그리고서, 그는 그 신병 역시 죽음의 저주를 받아 죽음의 기사가 됐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밝히고서, 정말 그러한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웬지 그러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음을 이어 밝히기도 하였다.
  "당신도 그렇고, 그 죽음의 기사 역시 나를 그 신병의 환생으로 여기고 있겠지. 아마 괴물의 몸 속에 같이 갇혀있던 당신 부하들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몰라. 내가 정말 그 신병의 환생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어쩌면, 정말로 죽음의 기사가 되어 어둠 속을 헤매다가 조용히 사라졌을지도 몰라. 다만, 당신을 비롯한 사람들이 그렇게 믿어준다면......"
  이후, 카리나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그에게 이렇게 말을 건네려 하였다.
  "그런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대로 해 볼 수 있을 것 같아, 고향을 잃고, 소중한 것을 모두 잃고 말았던 그 신병의 환생임을 내세워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거야, 그리고 그를 대신해서라도 괴물들로부터 사람들을 지키려 했던 이들의 비원을 대표할 수 있도록 해 보겠어. 그래도 되겠지?"
  그리고 더 크게 목소리를 내어 말을 이어갔다.
  "나 뿐만이 아닐 거야, 여기서 괴물들과 싸울 수 있는 모두가, 그 신병을 대신하도록 해 볼 게. 당신도 그 신병이 언젠가는 힘을 키워 괴물들을 물리치고, 자신들의 원수를 갚아줄 것이라 믿고 있었잖아, 그렇지?"
  "......"
  "괴물 녀석은 이것으로 끝이 아닐 거야, 분명 그 배후에 있는 녀석이 있을 거라고, 아엠세인가 뭔가하는 대장이 있었잖아, 그 녀석, 분명 괴물 같은 본 모습이 있을지도 모르는 거야. 그 녀석, 내가 해치워 줄게."
  "......"
  "당신들의 도움은 필요 없어, 두 번이나 수고했으면 더 나서지 않아도 될 거야. 이전에는 안에 갇혀있는 영혼들을 구하기 위해 다소 조심스러웠다면, 이후로는 그런 영혼들은 없을 거야, 있다면, 분명 그 대장 녀석의 추종자들이나, 그 배신한 부대장 같은 것들이나 있겠지. 그렇지 않아?"
  이후, 그로부터 대략, '너희들만으로는 힘들 수도 있을 것이다.' 라는 의미의 말이 들려왔다고 한다. 그리고, 이어서 '그럼에도 누구의 도움도 없이, 정말로 그 괴물과 맞서려 하겠다는 것이냐' 라는 의미의 말을 건네며, 그에게 물었다.
  "언제까지 당신들의 도움에 의지할 수는 없어."
  그러자 내가 카리나를 대신해서 화답했다. 그리고 이어서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녀석은 분명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야, 우리가 자신을 이겨낸 것은, 외부의 도움이 있었기 떄문일 것이라고. 그 도움 없이는 자기들을 상대할 수 없을 것이라 믿고 있을 것이고, 그 믿음을 바탕으로 우리를 도발하겠지. 그러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어."
  그러더니, 이어서 이렇게 말을 건네었다.
  "녀석은 지금 이렇게 겨우 문명을 재건한 세상을 다시 파괴하고, 세상 모든 생명체의 피를 먹을 생각에 사로잡혀 있겠지, 그런 녀석을 박살내려 하고 있어, 그 누구의 도움 없이 우리 힘으로 녀석을 박살낸다면, 되살아난다고 하더라도, 다시는 그런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거나 하지는 못할 거야."
  이후, 나는 그에게 이렇게 이어 말했다.
  "하지만 당신들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야, 필요할 때가 되면 그 때, 당신들을 부를게."
  "비록 저 애가 말한 것이기는 하지만, 나도 저 애의 생각과 다르지 않아. 비록 몇 번의 실수가 있었고, 그로 인해 당신들 없이 위험할 수 있는 처지에 놓이기도 했지만, 분명 그 때와는 다를 거야, 그리 믿고 있다고. 반드시 녀석을 물리치고, 당신들의 원수를 갚을 거야."
  그리고, 카리나가 그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에게 "그러니, 지켜봐 줬으면 좋겠어." 라고 이어 당부를 했다.

  그렇게 카리나가 연수를 향한 말을 마칠 무렵, 뒷편의 어둠에서 세 사람이 뛰어왔다. 먼저 온 이는 아잘리, 그리고 그 뒤를 세나와 잔느 공주가 따랐다. 그러는 동안 소리가 그들이 있는 쪽으로 돌아서서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려 하고 있었다.
  이후, 잔느 공주가 세나와 함께 연수의 바로 앞으로 다가왔으며, 이후, 세나가 연수의 곁에 머무르고 있던 카리나 그리고 나에게 그의 모습을 보겠다고 해서, 카리나에게 물러서라 하였고, 그 이후, 그를 이끌고 연수의 뒷편 근처로 물러섰다, 더 이상 연수에게 할 말이 있거나 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세나 역시 그가 영혼들이 갇힌 벽을 손에 댔을 때, 벽 안으로 빛의 기운이 스며들었고, 영혼들이 그 빛에 이끌렸음을 떠올리며, 연수 역시 세나의 모습을 보며, 뭔가를 느낄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이만 갈게." 그 때, 소리가 일행이 있는 우측 먼 저편으로 떠나가려 하면서 작별 인사를 건네었다. 그 동안 통역을 위해 내 곁에 계속 머무르고 있었는데, 이전 시대의 현지인이 온 이상, 자신의 통역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물러나 있으려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떠나가면서 소리는 어둠 속으로 그 모습을 감추었다.



  "누구냐고 말하고 있어요." 연수의 바로 앞으로 세나가 다가왔을 때, 연수가 목소리를 냈고,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오른편 곁에 있던 잔느 공주가 그 뜻을 바로 알려 주었다. 소리는 연수가 목소리를 낸 이후에 통역해서 알려주는 정도였는데, 연수와 같은 언어로 말할 수 있었던 잔느 공주는 확실히 빨랐다,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 뜻을 세나에게 알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대 행성계의 주민들 중 한 명이에요, 이름은 '세나 엘 테린' 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세나가 바로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고, 이어서,
  "옆에 있는 이는 본래 당신과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푸투로 계획' 에 참가했던 이들 중 몇 안 되는 생존자들 중 한 명이기도 해요. 이름은 '잔느 (Jeanne)' 이며, '잔느 공주 (Princesse Jeanne)' 로 알려져 있기도 해요."
  라고 잔느 공주에 대한 소개를 이어서 했었다. 그러자 연수가 그에게 말했다.

Gongzcu? Ânînara'y gongzcuyâtna?

  무슨 뜻이냐고 세나가 묻자, 잔느 공주가 '공주? 어느 나라의 공주였나?' 라는 뜻을 가진다고 알려줬다. 그 직후, 연수는 뭔가 깨달은 바가 생겼는지, 이전과는 다른 느낌의 차분한 목소리를 내며, 이렇게 목소리를 내려 하였다.

....... Ah, izce gyângnaßâ. Orä zcâne nârl bonzcâgi ißâ, zcikzcâp mannan gâsîn anyâtdaman. Zcãgyosunim'y tdariâtzci? Nugungaga gîrâkhe arlyâzwâsâ arlgoyßâtda.
Gî nugungaramyân, gî buniscizciyo? dangscin'y äyiniscâtdan.......
Gyâkkhago igguna.

  이후, 잔느 공주가 묻자, 연수는 차분하게 목소리를 내며, 화답했다. 그 뜻은 '기억하고 있구나' 였다고 한다. 대화 내용을 잔느 공주가 직접 알려준 바에 의하면 연수는 이미 잔느 공주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고 하며, 누군가가 그에 대해 알려주었음이 그 이유였다고 했다. 그리고 잔느 공주는 그가 누구인지 기억하고 있었으며, 연수의 애인이었던 여성이었다고 그에 대해 알려준 바도 있었다고 밝혔다.

Zcâ'y hakgyo sânbäyâßâyo. Gãhannassciyâtzciyo? Nîrl dangscine dähan gâkzcãrl itzcimothamyâ zcinäscyâtziyo. Ânzcen'ga zcânzcäĩ kgîtnago dangscingwa mannarltdäga orlgâra miggo ikgido häßâdangâsîro gyâghäyo.

  그 때,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가 뭔가를 들려주고 있었는데, 잔느 공주가 건네었던 말의 의미를 알려주는 것 같았다.

저의 학교 선배이셨어요. 강한나 씨였지요? 늘 당신에 대한 걱정을 잊지 못하며 지내셨지요, 언젠가 전쟁이 끝나고, 당신과 만날 때가 올 거라 믿고 있기도 했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직접적인 인연이 있기라도 했었나?
아니오, 시간제 직업으로서 미술 교습소에서 일하면서 몇 번 마주했고, 이후에 찻집에서 만나봤지만, 그와의 인연은 그것이 전부였어요. 당시에는 저도 학업과 일에 열중하고 있었고, 그 역시 달리 할 일이 있었던지라.......
과학자의 딸인데, 미술 교습소에서 일했다고?
예, 학업을 하면서 같이 했던 일이에요. 장래 희망을 그 쪽으로 정했고,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독립해서 그 쪽에서 일할 생각이었어요. 얼마 후에 미래 계획에 참가하게 되어서 그런 장래 쪽으로 일하거나 하지는 못하게 됐지만요.
그랬구나.......
네 아버지께서 참여하셨다는 미래 계획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나?
저도 자세히는 몰랐어요. 저도 아버지로부터 인류의 미래를 보전하기 위한 외우주 진출이라고 들었을 뿐이고, 아버지께서도 그 정도로만 알고 계셨던 것 같아요. 아버지, 어머니께서도 그러하셨고,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식들만큼은 괴물들이 창궐하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세상이 아닌 보다 나은 세상에서 살기를 바라며, 자식들을 계획에 참여시켰고, 자원해서 온 사람들도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랬구나.
다만, 외우주 진출이라고 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바가 있기는 했었어요. 우주 진출이라고 하면서 인간 동면에만 집착하는 그런 일면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다면, 지금도 그 계획의 실상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구나.
아니오, 여기 계신 분들께서 이것저것 알려주셔서 알 수 있었어요. 실제로는 외우주 진출은 하지도 않았고, 동면 장치는 고의적으로 오작동되어 사람들을 동사시켰으며, 애초에 계획 자체가 사람들을 끌어들여 죽이기 위한 박수현의 거짓 계획이었다는 것이었지요. 괴물들이라 칭해진 기계 병기들의 잔혹한 재앙에서 벗어나기 위해 계획에 참여한 학생들을 속여서 죽여버린 거예요.

  이후, 연수는 놀라면서 "박수현이라고?" 라는 뜻을 가지는 말을 했다. (이후로 계속 누군가가 밖에서 통역해서 목소리를 들려줘서 알 수 있었다) 연수는 잔느 공주와 그 부모에, 박수현까지 대략이나마 누구였는지 알고는 있었던 것 같았다.

네 아버지와 더불어 그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다. 내 나이 만한 사람이었지, 네 아버지의 먼 후배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싹싹하고 성실한 데다가, 재능도 훌륭해서 과학계의 미래로 추앙받던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이 뭔가 잘못된 일을 하는 정황이 있었나요?
나도 그 정도로만 알고 있어서 그에 대해서는 잘 몰랐어. 애초에 나는 관계자도 아니었기에, 더 알 방법도 없었지. 그의 실상이 그러하다는 것을 네 아버지는 알고 있었던가?
알고 계셨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버지께서도 어떤 말씀도 남겨주시지 않으셔서.......
뒤늦게서야 알았던 모양이로구나, 그 사람이 그 정도였다면, 나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그의 변질에 대해서는 알아차릴 수 없었겠지. 그래, 늦게라도 알아차릴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래서 너라도 어떻게든 살리려고 노력했을 테니 말이다.
그 사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미래는 절망 뿐이라는 생각으로 인해 미쳐버린 사람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어차피 인류가 그 지경에 몰린 이상, 차라리 내 손으로 멸망시키는 꼴이 낫겠다고 생각했던 것일지도 모르지.

  내가 이제까지 본 기록에 의하면 수현 파크 (박수현) 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어느 시점에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는 몰라도, 인류의 과오와 죄악을 비판하면서 인류는 멸망해 마땅하며, 기계들이 세상을 지배해야 한다는 신념에 가득찬 사람이었다. 또한, 인류가 아닌 동물이 세상을 지배해야 하며, 이를 위해 인류는 죽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던 세피라 로타 혹은 클리파 포타라 칭해지게 될 이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나온 상태였다.
  연수는 거기까지는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아마 알 기회 조차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클리파 포타에 의해 태어난 괴물들과 절망적인 싸움을 하느라,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을 테니.

  이후, 연수는 "그는 성실하고 도덕적인 사람들로부터 많은 감화를 받았고, 자연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깊이 깨닫고 있었다는데....... 어쩌다가 그리 되었는지 모르겠다."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수현 파크에 대한 언급을 마쳤다. 그러다가 옆의 세나에게 이렇게 묻는 목소리를 내었다.

  "저 공주와 같이 여기로 온 사람이지? 공주의 시종 혹은 호위 역할을 자처하는 사람인가?"
  "아니오,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자 세나가 바로 답했다. 그리고 그의 동료일 뿐이라고 자신에 대한 소개를 이어갔다. 그리고, 연수가 "그렇구나." 라는 의미의 화답을 할 무렵, 그에게 그간 주머니 안에 넣어두고 있던 그림을 꺼내면서 이렇게 물음을 건네려 하였다.
  "혹시, 이 사람들에 대해 아시는 바 있나요?"
  바로 자신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어느 가족의 사진으로 한 소년(?)을 중심으로 좌우에 소년과 소녀 그리고 뒤에 중년 남녀가 자리잡은 가족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으로 세나가 늘 품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 때, 소르나가 갖고 있기도 했고, 내가 소르나를 통해 받기도 했지만, 이후에 세나에게 돌려주었고, 그 때를 제외하면 늘 세나가 갖고 있었다).
  세나가 그 그림을 연수에게 보이자, 연수의 빛이 불안정하게 깜박였다. 죄책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었을지. 하지만 연수는 그 그림에 나온 가족들의 모습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사항이었을 것이다, 암만 그가 이런저런 사유로 여러 사람들과의 만남을 가졌다고는 하나, 그가 도시에 있던 모든 이들을 다 알거나 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누구인지는 모르겠다만...... 내가 지키고 있었을 곳에 있던 가족들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구나. 어떻게 그 그림을 갖게 된 거지?

  그 때, 연수가 낸 목소리의 의미는 대략 그러하였다. 그러자 세나는 그에게 이렇게 답했다.
  "이전에 어떤 곳에서 얻었어요. 땅 속에 반 즈음 묻힌 채 있던 것을 우연히 주워들어서 갖게 된 것이었지요. 그 당시에는 가운데의 어린 아이를 제외하면 검게 그을려 있어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는데, 환수들을 데려오기 시작하면서 그을음이 조금씩 씻겨졌고, 그렇게 온전한 모습이 보이게 된 거예요."

그리 되었겠구나, 아주 오래 전의 그림이었을 텐데......

  '오래 전의 그림' 을 언급하는 연수의 말 (을 재현하는 누군가의 목소리) 에는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았다.

환수란 것들을 데려오면서 그림의 그을음이 씻겨져, 가족의 원래 모습이 드러났다는 것도 신기하게 들리는구나. 그렇다면 그 환수들은 어쩌면 네 가족들과 연관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이후, 연수가 낸 목소리가 가지는 의미는 그러하였다. 이후, 연수의 목소리는 세나에게 그 가족들이 어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고 있게 되었느냐고 물었고, 그 물음에 세나는 자신이 알고 있던 사람으로부터 들었다고 우선 그렇게 답했다.
  "그 역시 어떤 지역의 여관 주인으로부터 어떤 일가족의 이야기를 들려줘서 알 수 있었대요. 그 이야기에서 일가족 중 10 대였던 소년은 소년병으로 징집되었고, 딸은 군수 공장에서 일하면서 부모와 헤어진 이후에 돌아오지 못하게 됐고, 그 이후로 부부는 어린 아들이나마 함께 괴물이라 칭해진 기계 무리의 영향에 놓인 자신의 나라를 떠나려 했지만, 탈출선은 결국 기계 병기들에 의해 격침되어 그들 역시 영영 돌아올 수 없는 처지가 됐다는 이야기였지요."

그런 일이 있었구나.

  연수의 목소리가 말했다.
  "그 일가족을 죽게 만든 것은 괴물이라 칭해졌던 기계 병기들일 거예요. 그리고, 그 기계 병기들의 수장은 지금 여기서 아엠세 (AMC) 라는 이름을 내세우며, 이 곳의 사람들을 지키는 군대의 수장 행세를 하고 있고요."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지?' 연수가 물었다. 연수의 원래 목소리조차 놀라움의 감정을 완연히 드러내고 있었다. (목소리의 의미를 통역해 주는 목소리는 여기에 분노의 심정까지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물음에 나도 그렇고, 세나도, 카리나도 당장에 대답을 하거나 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괴물 무리라 칭해지는 기계 무리 그리고 그 배후의 존재 (기욤, 수현 파크 그리고 포레 누아흐) 의 심리를 제대로 설명하려면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뭐 있겠어, 기계 녀석들이 인간의 뇌를 파먹고, 피와 살을 먹고 마시고 싶어한다는데."
  아잘리가 말했다. 그러더니, 이어서 연수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수장이라는 기욤부터 인간의 피와 살에 미친 놈이야. 밤피르가 드높은 존재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피와 살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는 말에 기계로 다시 태어났다니까. 그런 존재가 인간의 시대를 끝내고, 기계, 동물의 시대가 와야 마땅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것들에 영합해서는 마음대로 학살하고 다녔겠지, 달리 말할 것 있겠어?"

  그 시점에서는 행성의 자연 환경은 이미 한계에 치달아 있었고, 그 시점에서 인류는 극한으로 치닫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스스로 멸망할 운명이었어, 그럼에도 그 무리는 인류를 학살하고, 기계 세상을 만들겠다고 날뛰었고, 아무 생각 없이 날뛰던 대다수는 막장화한 환경 속에서 자멸했겠지, 그래서 빛의 정령이 세상을 수복할 때, 그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을 거야.
  그 남은 세력이 이제 세상이 수복되자, 포레 누아흐 등이 다시 깨어나서는 타락한 무리와 영합해서, 세상에 위협을 가하려 하고 있어, 그리고 기욤 역시 다시 깨어나서, 일을 벌이려 하고 있다고,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으니, 피의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그럴 거야.

  더 나아가, 아잘리는 연수에게 이런 이야기까지 이어갔다.
  "기계 녀석들은 인간들에게 산 채로 칼을 들이대서 살을 찢고, 사지를 절단하고, 내장을 파헤쳤어. 살과 내장은 태워서 코크스로 만들고, 뇌는 정보를 헤석해 전자 신호로 변환한 이후에는 살과 내장에 포함시켰고, 피는 물을 빼내서 기화시킨 데다가, 영혼까지 물질화해, 피에서 뽑아낸 수증기와 함께 플라즈마 융합의 재료로 써먹었겠지. 아마 그 녀석들은 그대로 두면 이 세상 사람들도 그런 식으로 써먹으려 할 걸?"
  "그런 이야기까지 할 필요는 없었잖아." 그 이야기를 듣고, 내가 짐짓 반발하는 척 말을 건네었고, 아잘리는 그런 나의 말에 바로 이렇게 반박했다.
  "저 아저씨에게 굳이 이런 말을 해 주지 않을 이유는 없어, 그 사람도 괴물 녀석들이 인간의 살과 피를 탐낸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니까. 나는 여기서 괴물들이 인간의 살과 피를 탐냈다는 말의 의미를 대충이나마 알려주려 한 것일 뿐이야."
  겉으로는 반발하는 척 하기는 했지만, 아잘리의 방식이 옳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어쩌면 당시에 나는 괴물들이 벌인 짓의 의미에 대해 카리나, 세나가 어떻게 말해 줘야 할 지 생각하고 있던 그 때에 아잘리가 직설적으로 연수에게 떠들어 줄 것을 원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 때, 연수에게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여자애가 말한 대로...... 괴물 녀석들은 인간의 살과 피를 탐했다, 나는 그렇게 알고 있었지.

  연수의 목소리는 대략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 말을 건네고서, 그에 의하면 자신도 산 채로 잡힌 부하들처럼 그리 되었고, 그래서 깨어났을 때에는 혼만 남아 괴물의 몸에 갇혀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고 한다.
  연수는 혼이 괴물에 속박된 채로 괴물의 몸 속에서 자신의 부하들, 그리고 도시에 있던 사람들과 그 혼이 칼에 베이고, 불에 타는 고통의 절규를 끊임 없이 들어야 했다고 한다. 하지만 때로 괴물의 인격이 괴물의 몸을 떠났고, 그 때마다 인간의 혼들이 다시 이성을 되찾았기에, 그 혼들을 이끌고 괴물의 몸을 움직여 보려 하였으나, 괴물의 인격은 괴물의 몸 밖에서 괴물의 몸을 자신과 그들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힘을 억누르고 그의 뜻대로 자기 몸을 움직이는 것으로 그와 사람들을 조롱해 왔다고 한다.

그런 그들이 다시 깨어나서, 또 학살을 벌이려 한다고......?

  "그런 거지." 연수의 말에 아잘리가 화답했다. 그리고, 일행이 싸우는 것은 연수를 비롯한 이미 죽은 자들의 원한을 갚는 것 뿐만이 아닌, 그런 일이 반복되는 것을 막는 것도 이유가 된다고 이어 그에게 말하기도 했다.
  "땅 속에 파묻혔던 과거의 존재가 이 시대의 사람들을 잡아먹는 짓거리를 막는 것은 물론, 사람들의 생명으로 영원한 삶을 추구하는 짓거리를 더 이상 허용하지 않겠다는 거야."
  그리고서, 아잘리는 나에게 그 모든 일을 세나 그리고 카리나, 두 사람에게 맡겼으면 좋겠다고 말하고서, 두 사람의 일을 지켜보고, 보조하도록 하자고 청했다. 그러자 나는 알겠다고 화답했다. 그러다가,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겼고, 그래서 잔느 공주에게 이렇게 청해 보았다.
  "공주님, 저 연수 아저씨에게 물어 봐요, 이전에 괴물이 웬 인간 여성의 모습으로 변장해 있었음을 알고 있었느냐고."
  "알겠어요." 그러자 잔느 공주는 알았다고 화답하고서, 곧바로 연수에게 연수 그리고 자신의 모어를 말하는 소리를 내었다, 뭔가 물음을 건네는 듯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으니, 내가 요청한 바대로 연수에게 물어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괴물의 본 모습을 마주하기 전, 괴물은 인간 여성의 행세를 하고 있었으며, 이후, 액체 덩어리 괴물의 형상을 드러낼 때에도 인간 여성의 모습을 흉내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힘을 잃어가면서 그 형상을 잃어가며, 본 모습을 조금씩 드러냈던 것.
  그 모습을 본 이후로 그 인간 여성의 모습은 누구에게서 유래된 것일지에 대해 의문을 계속 품고 있기는 했지만, 싸움이 이어지는 상황 하에서 그 의문에 대해 잊고 있다가, 연수를 보면서 그 의문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던 것으로 이후에도 그로부터 알고자 하던 것들이 많아서 여인의 모습에 대해 묻는 것을 참고 있다가, 그제서야 그것에 대해 묻게 된 것이었다.

그 여성의 모습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인가.

  나를 대신해 잔느 공주가 건네는 물음에 연수는 그 모습을 잊지 않고 있었느냐는 말을 건네더니, 잔느 공주에게 뭔가 말을 건네었다. 이후, 잔느 공주가 다시 그에게 물음을 건네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 이후로 그것에 대한 화답이었는지, 연수가 잔느 공주에게 다시 말을 건네는 듯한 소리도 들려왔다. 잔느 공주는 연수의 소리가 울리는 동안에는 연수를 향해 서 있다가 그 소리가 끝나자마자 나를 향해 돌아서서 이렇게 말했다.
  "그 여인은 연수의 연인이었던 이로, 전쟁으로 인해 결별하게 된 이였다고 했어요, 자신의 뇌를 통해 그 모습을 알아내게 된 것 같다는 말이 제게 들려왔었지요. 그 모습을 괴물 무리가 재현한 것을 통해 괴물 무리가 자신의 뇌를 뜯어내는 짓을 벌였음을 알게 되기도 했다네요."
  "그것을 통해 자신이 의식을 잃은 동안, 자신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몸이 해체당하는 짓을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거네요?"
  "그렇지요." 이후, 내가 건네는 물음에 잔느 공주는 그렇게 화답했다.

  이름은 한나 (Hanna), 그리고 성은 강 (Gã) 이었지요. 연수가 대학생이 된 이후부터 만났던 사이래요. 그 이후로, 연수가 군문에 들어서기로 결심하고, 장교로 임관한 이후로 장교 생활을 하는 동안, 줄곧 한나와 함께 살려 하였고, 진급을 거듭하면서 곧 결혼하겠다는 의사도 밝혔다고 했는데, 카피텐 (Kapiten) 으로 진급할 무렵, 괴물의 침공으로 인한 대전쟁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결혼을 무기한 미루게 되었다고 해요. 괴물 무리가 도시 근방으로 몰려오면서, 연수가 도시 인근의 부대로 떠나가면서 그와 결별하게 됐다고 했지요.

"Out of sight, out of mind."

  연수도 한나를 떠나보내거나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전쟁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면서 한나를 만날래야 만날 수 없었고, 한나를 더 이상 만나지 못하게 되면서, 결국 연수는 한나가 자신을 잊었을 것이라 여길 수밖에 없었고, 그 이후로 마지막 결전 때에는 한나가 이미 죽었을 것이라 믿기도 했었던 것 같아요.
  그도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 그간 겪은 일에 대해 감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에요. 한나와 영영 다시 만나지 못한 것에 대해, 군인의 길을 걸은 것을 후회하기도 했었대요. 하지만 후회한다고 다른 길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한나가 아니더라도, 살아남은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자신을 따랐을 이들을 위해 목숨을 다해 싸우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고 했었지요.

  "그렇게 된 것이지요." 이후, 잔느 공주는 그 한 마디 말을 마지막으로 연수 그리고 그의 연인이었던 한나에 대한 이야기를 마쳤다. (이후로, 연수의 연인이었던 여인은 한나로 칭한다)

  그 이야기가 끝날 무렵, 아잘리가 나에게 이제 나갈 때 아니냐고 묻더니, 언제까지 괴물의 몸 안에 있거나 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이어 말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었고, 이후, 나는 잔느 공주를 대신해 연수에게 다가가서,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아저씨, 이제 당신도 괴물의 몸 밖으로 꺼내려고 해, 언제까지 여기에 머무를 수는 없는 거잖아, 그렇지?"
  그러자 연수는 '그렇겠지.' 라고 답하는 듯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러더니, 자신에게 누군가에게 받은 무언가가 있다고 말하고서, 그 무언가로 모두를 괴물의 몸 밖으로 보낼 수 있을 것이라 이어 말하기도 했다.
  이후, 연수의 빛 앞에 하나의 밝은 금색 빛이 생성되기 시작하더니, 그 빛을 중심으로 새하얀 빛들이 모이면서 그 빛이 점차 커져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어른 인간의 상반신 정도의 직경을 가질 정도로 커졌다. 그 빛의 힘이 있다면 공간 내에 있는 일행 모두가 괴물의 몸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빛의 힘을 이용하면 괴물의 몸 밖으로 나갈 수 있다고 했지만, 만약 그 힘을 연수가 사용하게 된다면, 연수의 혼은 괴물의 몸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 힘을 누군가가 대신 가져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내가 그 힘을 차지해서 사용하기로 결심하려는 그 때, 누군가의 왼손이 나의 오른팔을 붙잡았다, 나의 행동을 만류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놀라면서 손을 잡은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려보니, 내 시선에 잔느 공주의 모습이 보였다.
  "그 분께서 하시는 대로 놓아두세요." 잔느 공주가 말했다.
  "이미 저 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아르사나 님을 비롯한 모든 이들을 구하겠다고 결심하셨다고, 그리고......"

살아 생전에 나는 그 누구도 지키지 못했고, 그 누구도 살아서 전장을 떠나게 하지 못했다. 이제 나는 영혼밖에 남지 않았고, 이제 와서, 내가 해방된다고 해서, 더 의미가 있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다. 차라리 나 자신이 소멸하는 한이 있더라도, 누군가를 구원하는 그런 역할을 맡아보고 싶다. 내게 그런 역할을 맡겼으면 한다.

  "...... 라고 제게 말씀하셨지요."
  "잔느 공주님, 정말이에요?" 그러자 내가 바로 물었고, 그 물음에 잔느 공주는 자신이 어떻게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할 수 있겠느냐고 화답했다. 그러다 문득, 연수가 가지게 된 힘을 나타내는 빛이 커져가는 모습을 지켜볼 무렵, 연수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 것을 떠올렸다. 그 무렵에는, 다들 빛에 시선이 집중되어 연수의 목소리에 관심이 멀어지고 있었는데, 잔느 공주만이 연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것이었다. (자신의 모어로 말하고 있다 보니, 절로 신경을 쓰게 되었던 것 같다)
  "누군가로부터 힘을 얻었을 때, 이미 결심했다고 해요, 그 힘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있는 것이며, 그 힘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할 것 같다고. 그러면서 어차피 모든 것을 다 잃은 자신이 그 몫을 책임져야 할 것이라 말했었지요."
  "저 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 곳의 누구도, 희생의 역할을 맡을 필요는 없다, 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내가 묻자, 잔느 공주는 그러하다고 답했다.

  잔느 공주가 답하고 얼마 지나지 않을 무렵, 연수 앞에 생성된 빛이 격렬히 빛을 발하면서 점차 커져가려 하고 있었다, 마치 일행을 감싸려 하는 듯이. 그 때, 연수가 브리태나 어로 나를 비롯한 일행에게 뭔가 말을 건네려 하였다.

This power will send you out of the monster's body. I wish it could get you back to your companions.
(이 힘이 너희들을 괴물의 몸 밖으로 보내게 될 거다. 그것으로 너희 동료들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군)

  이후, 나를 비롯해, 내 주변의 모든 이들이 빛에 감싸이며, 내 주변 일대의 모든 것들이 빛으로 감싸이게 되었다. 그리고 어딘가로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빛의 힘이 일행을 어딘가로 옮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무렵, 한 가지 알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 힘을 연수에게 전해준 자의 이름을 연수가 알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Let me know just one thing! Do you know who gave you that power?
(한 가지만 알려 줘! 너에게 그 힘을 전해준 이가 누구인지 알아!?)

  그 때, 빛을 뚫고 하나의 목소리가 일행이 있는 쪽으로 파고들었다. 그 목소리는 하나의 이름을 말하고 있었다.

Mari....... Mari Pahk......
(마리...... 마리 파크......)

  연수의 말은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아니었기에, 그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리나 잔느 공주 혹은 괴물의 몸 밖에 있을 누군가의 목소리에 의지해 이해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만큼은 그 의미가 무엇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 누가 듣더라도, (만약 그 사람이 고유 명사의 개념을 알 수 있다면) 고유 명사였음을 바로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마리 파크 (Mari Pahk, Marie Parque?), 연수가 알린 그에게 힘을 준 사람의 이름이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자세히 알 수 없기는 했으나, 대충 어떤 사람인지는 알아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에 대해 추측한 사항이 있다면 이러하였다 :

  그리고 성인 파크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사항이었다. 푸투로 계획을 창설하고, 잔느 공주를 비롯한 미래를 책임지기로 되어 있었을 사람들을 비롯한 인간들을 모두 죽이고, 이 행성계가 기계들의 세상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소망한 수현 파크와 같은 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름을 들은 이후, '마리 파크' 라는 인물에 대해 얼마나 아는지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연수에게서는 더 이상 목소리가 울려 퍼지지 않았다. 애초에 뭔가 물어볼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의미 있는 대답이 나오거나 하지는 않기는 했을 것이다.



Ensuite, le n ° 454 est-il un non-appel?
C'est ce qui s'est passé. Le plan d'origine était de terminer le développement des 455 esprits à partir de maintenant. Cependant, le n ° 454 se forme à un rythme très lent. Il n'y a pas de temps pour l'attendre car le centre de recherche et le pays ne sont pas en bonne position.
......
Quoi? Êtes-vous en train de dire qu'il ne peut pas y avoir de cessions n ° 454? .... Je vois. Alors....
......
J'ai vérifié le problème de l'esprit n ° 454. Ils disent que le pouvoir magique trop généré semble être le problème. Elle a dit qu'une fois ce problème résolu, nous pouvons créer un esprit n ° 454. Laissez le pouvoir de No. 454 pour environ n ° 455, et stockez les restes dans une chambre excédentaire.

  어둠 속에서 어떤 목소리만 들려왔다. 인간 남성들의 목소리로 옛 인류 시절에 들려왔을 것이었다. 어쩐지 454, 455 번에 대한 이야기만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마력과 생성이 언급되고 있었던 만큼, '마력 생명체' 의 일종일 것임이 틀림 없었다. 아마 455 개의 마법 생명체를 생성하려다가 454 번의 생성이 늦어서 폐기 여부를 고심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대화를 한창 듣고 있을 무렵,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나를 깨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르사나 님, 정신이 들어요?

  눈을 떠 보니, 어떤 여성이 내 곁에 앉은 채로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잔느 공주와 같은 의상에 목덜미 정도까지 내려가는 머리카락을 가진 이, 루이즈였다. 그간 예나의 비행선 안에 있다가, 모종의 일로 인해 비행선 밖으로 나와, 일행의 곁에 머무르게 된 것 같았다.
  깨어나자마자 바로 일어나서 주변 일대를 둘러보려 하였고, 그런 눈앞으로 사당의 모습 그리고 파괴되어 연기를 일으키는 괴물의 검은 뼈대가 보였다. 그와 더불어 나와 함께 괴물의 몸 속으로 들어갔었을 아잘리, 세나, 카리나 그리고 잔느 공주의 모습도 보였다. 이들은 이미 일어나서 괴물의 뼈대 앞에 괴물의 몸 밖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을 세니아, 나에티아나 등과 함께 모여 있었다. 그렇게 일행이 모두 무사함을 확인하고 나서, 나는 루이즈와 함께 세나, 카리나 그리고 잔느 공주 등의 곁으로 뛰어가려 하였다.

  "다들 무사해?" 아잘리 쪽으로 뛰어가서 일행에게 묻자, 아잘리가 즉시 나를 향해 돌아서서 "당연하지!" 라고 답했다. 그 후, 아잘리는 불길에 휩싸이기라도 한 것처럼 검은 그을음에 물든 괴물의 뼈대 쪽으로 돌아서면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말 연수인지 뭔지하는 아저씨가 마리의 힘이라는 것으로 우리를 여기로 돌려보낼 수 있었던 것 같아. 방금 전에 여기로 온 루이즈하고 나에티아나 등에 의하면 괴물의 몸체가 폭발하면서 빛에 휩싸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빛 속에서 더 작은 빛이 튀어나왔고, 그 빛이 사당 한 가운데에 이르렀을 때, 너를 비롯한 괴물의 몸 속으로 들어갔던 이들이 돌아왔다고 했어, 저 폭발 이후에 괴물의 뼈대가 저렇게 불타고 남은 것처럼 변해 버렸다고 하더라고."
  연수와 함께 있는 동안, 꽤 긴 시간이 지나간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연수가 갇힌 곳에 있는 동안, 나를 비롯한 괴물의 몸 속에 있었던 이들 모두가 기계 내부의 공간 속에서 자체적으로 흐르는 시간 속에 있었고, 그래서 그 긴 시간이 지나는 동안, 실제로는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던 것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어쩌면, 연수의 의식 속에 있었던 것일 수도?).
  이후, 아잘리는 루이즈에게 혹시 마리 파크 혹은 마리 파르크란 인물에 대해 아느냐고 물었고, 루이즈는 잘 모른다고 답했다고 한다. 다만, 대답을 할 때의 루이즈는 꽤 다급하게 답하려 한 것처럼 보여서, 정말로 모른다기보다는 모른 척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우리가 그런 것에 대해 알아서는 안 된다는 의사를 드러낸 것 같아 보였다고 이어 말하기도 했다.
  그렇게 아잘리와의 대화를 마치고서, 일행이 모인 곳으로 다가가 보니, 일행 사이로 루이즈 이외에 일행에 없던 이의 모습이 또 하나 보였다, 리사 선생님이었다.

  리사 선생님께서는 루이즈, 탐파, 사라가 탑승하고 있던 비행선으로 몰려오고 있던 기계 병기들을 지키는 역할을 엘베 족 일행-에오르 자매, 리 셀린-과 함께 맡고 있었다고 했다. 기계 무리가 격퇴된 이후, 예나가 비행선을 사당 인근에 착지시켜서 루이즈, 탐파, 사라를 내리게 하고서, 홀로 비행선에 탑승한 이후에 리사 선생님 그리고 엘베 족 일행의 무리에 합류하면서 그 이후로 이들이 기계 무리의 함대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면서 함대와 맞서게 되었다고 했다.
  리사 선생님께서는 일행이 괴물과 맞서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예나 그리고 엘베 족 일행과 함께 그 주변의 호위 함대와 맞서느라, 사당 쪽으로 올 겨를이 없었다고 했다.
  이후, 들려온 말에 의하면 엘베 족 일행은 그 시점에서도 글라이더에 탑승해서는 사당 주변의 상공을 맴돌고 있으면서 기계 무리의 습격에 대비하고 있다고 했는데, 정말로 사당 인근의 하늘을 바라보니, 먼 하늘 저편에서 녹색 날개를 가진 글라이더 3 대가 하늘 일대를 맴돌고 있어서 이전에 보았던 에오르 자매 그리고 리 셀린이 여전히 글라이더에 탑승한 채로 비행을 이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일대가 리사 선생님 그리고 엘베 족 일행이 기계 무리와 전면 대결을 펼쳤던 곳이지 않았을까.
  그 이야기를 들으며, 탐파, 사라의 행방이 궁금해졌는데, 루이즈에 의하면 사당 인근에 있던 알프레드가 있는 곳에서 그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사당 주변 상공 일대를 둘러본 이후, 나는 곧바로 일행의 모습을 보려 하였다. 하나의 싸움이 일단락되면서 카리나, 세니아 등 모두가 쉬고 있었지만, 각자의 손에는 도검을 비롯한 무장이 쥐어져 있었다, 나도 그러하였지만,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음을 모두 인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괴물이 폭발하기 전에 수없이 많은 빛들이 괴물의 몸 속에서 빠져나왔어, 괴물의 몸 속에 갇혀 있던 혼들이었나 봐."
  세니아가 말했다. 이후, 세니아는 카리나에게도 내게 말한 바대로 말하면서 그렇지 않겠느냐고 물었고, 그 물음에 카리나는 분명 그러할 것이라 답했다고 했다. 이후, 자신의 몸으로 부리던 개체가 박살났으니, 그 인격이라 할 수 있는 기욤이 올 것이라 말하고서, 대비를 해 둘 필요가 있음을 알렸다.

  이후, 일행은 이후에 있을 싸움에 대비해, 나름 대열을 갖추려 했다. 카리나, 세니아, 나에티아나는 일행의 좌측, 나와 아잘리는 중앙, 그리고 세나와 잔느 공주는 우측에 머무르려 하였다. 여기에 리사 선생님과 루이즈도 일행의 우측에 머무르려 하였으며, 루이즈도 무슨 이유 때문인지 일행의 곁을 떠나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루이즈 씨, 당분간 위험이 또 닥쳐올 텐데, 그대로 있어도 되겠어요?"
  내가 물었다. 그러자 루이즈는 그런 나의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처음에는 저도 물러나려 했었지만, 이번 만큼은 여러분의 곁에 있으려 해요. 저와 잔느가 살고 있던 곳에 함께 살던 사람들이 어떻게 최후를 맞이할지, 그 모습을 근처에서 지켜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남아있으려 하는 거예요."
  "알겠어요." 그러자, 나는 바로 알겠다고 답하고서, 그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만약의 경우가 생기면 잔느 공주님의 곁에 가 있어요, 잔느 공주님에게는 한 번씩 보호막 같은 것이 생겨서 공주님을 보호하려 하더라고요, 그 영향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잖아요."



  그 무렵, 어딘가에서 웃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매우 음침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로, 적어도 나에게는, 결코 낯설다고 할 만한 그런 목소리는 아니었다. 이전에 어둠의 사람으로 변장하고, 사당으로 들어설 무렵에 마주했던 '사당을 지키는 남자' 로 알프레드가 그 목소리마저 두렵다고 표현했던, 바로 어두운 옷과 천으로 온 몸을 감싸고 있었던 그 남자의 목소리였다. 괴물과의 싸움 이후로, 참으로 오랜만에 남자의 목소리를 다시 듣게 되었다.
  남자의 목소리는 일행이 바라보는 방향의 오른편, 동쪽 방향으로 사당으로의 진입을 위해 이용해야만 했던 다리 근처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드디어, 저 어둠의 괴물을 이 정도로 무력화시키시다니, 훌륭하십니다,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해 돌아서니, 과연 이전에 모습을 드러냈던 남자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었다. 낡은 어두운 색의 옷자락 사이로 드러난 검은 천에 감싸인 손으로 박수를 치며, 마치, 나를 비롯한 일행을 칭찬하고 있는 듯했으나, 얼굴을 감싸는 천 사이로 드러난 두 눈의 번뜩임은 악마의 사악함을 뿜어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미처 억눌리지 못한 증오심이 새어나오는 것처럼.
  "지브로아라고 했던가요, 이 고대 도시가 자리잡고 있던 땅 위에 세워진 세상은 이제, 고대 도시가 낳은 괴물의 재앙으로부터 영원히 해방될 수 있게 되었소이다. 아니, 해방될 수 있어야만 했다, 라고 함이 마땅할까요."
  그렇게 박수를 치며, 걸어 온 남자는 이후, 괴물의 불태워진 뼈대 앞으로 다가가더니, 그을음 진 뼈대를 등지고 서서, 일행과 마주하며 서려 하였고, 그렇게 서 있으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이어서 내려 하고 있었다.
  "저는 여기서 당신들의 싸움을 시작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소이다. 괴물이 일으키는 절대적인 힘에 의해 이 사당에서 바다로 떨어지려 하실 때부터, 기어이 다시 올라오시어, 마침내 스스로의 힘과 지혜 그리고 용기로써 괴물과의 싸움을 이어가시다, 마침내 승리하실 때까지 말이오."
  그렇게 한참 일행을 칭찬하는 듯한 발언을 이어가다가, 곧, 그는 눈매를 더욱 날카롭게 바꾸면서 더욱 음침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허나, 참으로 안타깝게 되었소이다. 괴물의 몸은 이렇게 무력화되었건만, 무력화된 것은 어디까지나 그 몸체일 뿐, 괴물의 몸체를 움직인 주체이자, 괴물의 진정한 실체라 할만한 것들은 그 몸 밖을 빠져나와, 이 지브로아 일대를 떠돌게 되었으니 말이오. 그리 되었으니, 괴물의 몸체가 생명이 다함으로 일단의 평화는 찾아오겠으나, 그것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오, 언젠가 그것들이 자신들이 의지할 또 다른 육신을 차지해, 또 다시 세상에 재앙을 내리려 할 것이오이다."
  그렇게 예언을 하듯,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간 남자는 "그 때는 길어도 몇 년 안이 될 것이오이다." 라는 말을 덧붙였다. 진정한 괴물의 실체가 사라지지 않은 이상, 몇 년 안에 또 다른 괴물이 또 다른 지역에 나타나, 세상에 해악을 끼치리란 말이었다.
  남자가 언급한 괴물의 몸 밖을 떠나, 지브로아를 떠도는 이들이 무엇인지는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전에 세나가 괴물의 심장을 파괴하면서 괴물의 몸을 떠나간 혼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세나 역시 그 의미를 알아차린 듯, 바로 표정이 굳었으나, 아직 남자의 발언이 끝나지 않은 것 같아서, 일단은 세나, 카리나 등의 행동을 제지하려 하였다.

  "당신들께서는 아마, 여기로 오시면서 하나의 어구를 알게 되었을 것이도, 이 우 익스 우 이 (I-V-X-V-I). 이라는 어구였을 것이오. 그것을 온전히 읽으면 '이라 바나 엑스 바나 이마지네 (Ira Vana eX Vana Imagine)', 즉, '공허한 환상의 공허한 분노' 란 뜻을 가진 말이 되지요. 다만, 거기까지 알아차리지 못하신 분들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사실, 저 이우익스우이는 괴물의 이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괴물이 때로, '이우이후이우이' 란 괴이한 울음 소리를 낼 때가 있었는데, 그것이 괴물의 이름으로 인식되어, 그와 비슷한 라틴어 이름으로 칭해졌고, 그 이름이 어찌하다보니, 이 세상에 전래되어, 후세 사람들에 의해 자의적으로 해석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내가 아는 바로, 괴물이 그런 울음 소리를 냈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괴물은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아니었으나, 분명 모종의 언어로 말을 할 수 있었고, 잔느 공주가 그 모종의 언어로 괴물과 소통한 적도 있었다. 그것마저 모어가 아니었으며, 실제 모어는 루마 제국에서 서민의 언어로 쓰였다는 프랑키나 어였다. 그것까지 알고 있는 내 앞에서 남자는 괴물이 짐승의 울음 소리를 내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거짓말임을 바로 눈치챘다.
  "그런 이야기는 여기서 처음 듣는 것입니다만." 그 때, 일행의 좌측에서 카리나가 다가와서 남자의 말에 바로 반박했다,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카리나는 죽음의 기사와 만났을 때도 그렇고, 자주 가브릴리아 일대를 오가던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 쪽 사정에 나름 밝은 편이었다. 그럼에도 괴물이라든가 I-V-X-V-I 의 유래라든가, 그 유래에 대한 이야기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고 했다. 괴물 때문에 선박 항행이 어려워진 고충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으면 들었지, 그런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제가 외지인이라고 해도, 아저씨께서 말씀하신 바가 사람들에게 널리 퍼졌다면, 어떻게든 저도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수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그런 이야기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어요. 아저씨께서 말씀하신 '이후이후' 어쩌고에 대해 사람들이 널리 알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러자 남자는 전혀 당황하는 듯한 모습 하나 보이지 않고, 바로 카리나의 물음에 대한 답을 하였다.
  "그것은 여러분의 식견이 좁아서 생기는 편견일 따름이겠지요, 외지 출신이라는 이유도 있을 것이고요. 하지만 제가 말씀드린 바는 이미 엄연히 여러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이미 퍼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괴물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바다를 괴롭힌 괴물의 실체를 파악하려 했겠지요, 그리고 모두가 그 괴물의 실체를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다만, 그것을 외지인들에게 함부로 발설하지 않으려 했겠지요, 외지인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자신들의 고향에 이 땅의 실체를 알리고, 이 땅에 대해 부정적인 발언을 하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런 이야기가 아주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아니겠지."
  이후, 내가 카리나에 이어 남성과의 대화를 이어가려 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이어가려 하였다.
  "방금 전에 저 애가 말한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아저씨가 말한 바에 대해 모른다는 것은 분명 거짓말일 거야. 이 세상의 사람들 중 일부는 아저씨가 말한 대로, 괴물의 실체를 알려고 했을 것이고, 그것을 어떻게든 이 일대나 바깥 사람들에게 알리려 하였을 거야, 왜냐? 사람이란 비밀을 언제까지 마음 속에만 담아둘 수 없는 그런 족속이니까, 말야. 그런 사람의 특성으로 인해, 괴물에 대해서는 분명 여기저기서 이야기가 퍼져서 알 사람들은 알았겠지."
  그리고, 이어서 그에게 이렇게 말을 건네려 하였다.
  "만약, 그 말 대로, 이 땅의 실체를 알리지 않으려고, 이 땅에 대한 부정적인 발언이 두려워, 이 땅의 사람들이 괴물에 대해 아무것도 알리지 않으려 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괴물에 대한 이야기를 사람들은 하지 않으려 할 것이고, 그 이야기가 바깥으로 쉽게 퍼져나가지는 못하겠지. 우리는 괴물에 대해, 지브로아를 들른 어떤 할아버지를 통해 이야기를 들었다지만, 그 분께서도 지브로아인 입장에서는 외지인이야, 우리와 다를 바 없어. 만약 아저씨가 말한 바대로였다면, 지브로아의 괴물에 대해 할아버지께서 이야기를 쉽게 들으실 수는 없으셨을 거야."

  "또, 아저씨가 말한 대로, 괴물의 이름이 '이후이후' 같은 울음 소리에서 유래가 되었다면, 그 울음 소리를 들은 사람이 있어야 할 텐데, 그것에 대해서는 어떤 이야기도 없어. 그것에 대해서는 그 사실을 은폐하려 했을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내가 말했지? 사람은 비밀을 늘 마음 속에만 둘 수는 없다고. 분명, 어떤 식으로든 그런 이야기가 세상 밖으로 드러나서, 믿거나 말거나 식으로 전파되었을 거란 말이지. 그것에 대한 '썰' 도 과연 없었을까? 무슨 말인지 알겠지? 괴물에 대해 내게 이야기를 해 주셨던 할아버지 분께서도 그런 울음 소리에 대해서는 아마 금시초문일 거야. 그 분께서 그 울음 소리에 대해 이야기를 듣거나 해서 알게 되셨다면, 내게 무슨 악의를 느낀다고, 그것에 대해 알리시는 것을 마다하시겠어?"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사실이라고 치자, 우리는 여기서 괴물의 실체를 목도했고, 괴물의 몸 속에 있던 것들이 무엇인지 다 보고 왔어. 그리고, 지금 여기서 살아서 돌아간다면, 그 모든 것을 이야기하겠지. 그 모든 것이 헛소리라 믿는다면, 우리가 저 지브로아로 갈 수 있게 하는 게 어때? 그 이야기를 떠들 수 있도록 말야. 만약, 네가 말한 바대로 사람들이 믿고 있다면, 분명 지브로아 주민들은 내 이야기를 쉽사리 믿거나 하지 못하고, 반발하고, 더 나아가, 우리에게 적의를 드러낼 거야, 아저씨를 처치하고, 마을을 구하러 왔다는 사람들이 도리어 마을 사람들에게 미움 받는 거야, 아저씨 입장에서는 아주 즐거운 광경 아니겠어? 하지만, 아저씨는 그렇게 할 생각 자체를 안 하는 것 같아, 그렇지?"

  이후, 내가 하는 말에 이어, 아잘리가 이어 남자에게 쏘아붙이듯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우리가 살아서 여기로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는 것 같아, 눈빛만 보면 알 수 있어. 말로는 칭찬을 하고 있지만, 나를 증오하고, 용서치 못한다는 감정은 전혀 숨기지 못하는 것 같더라고. 우리가 헛된 것들만 보고 헛된 것들이나 지껄여댈 것 같으면, 굳이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게 할 이유는 없어. 무슨 말인지 알겠지? 나를 비롯한 여기 있는 모두가 살아서 여기를 떠나지 못하게 할 이유가 아저씨에게는 있다는 거야."
  그리고, 아잘리가 건네었던 말에 이전보다 더욱 눈빛을 번뜩이는 남자에게 내가 한 마디 말을 덧붙였다.
  "원치 않는 것이겠지, 나를 비롯한 여기 패거리가 떠들어 댈 것이 말야, 괴물과 아저씨에 대해서 말야, '괴물의 주인'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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