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꺼번에 몰려온 피로를 감당하지 못하고 잠시 낮잠에 빠진 적이 있다. 그 때, 내가 눈앞에서 본 광경. 그것은 갑주로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던 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등까지 내려갈 정도의
길이를 가진 그 검은 머리카락을 가졌던 여인. 그는 마치 인형와 같은 표정을 지으며 쓰러져 있었다. 그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으며, 어떠한 괴로움도, 아픔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 그 때, 내가 나설 수 있었더라면, 너를 이 지경에서 구원해낼 수 있었을 텐데......."
그 당시, 나는 쓰러진 여인의 모습을 보며, 조용히 슬퍼하고 있었다, 구원할 수 있었던 이를 구원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를 느끼면서.
이 일은 실제로 내가 겪었던 하나의 일로서, 실제로 10 여 년 전 즈음에 있었던 일이었다. 그 때, 나는 라무란(Lamuran) 성계라는 곳의 대륙 동부에 위치하고 있던 카렐(Karel) 이라 칭해진 나라에서
'카렐 민족 해방 전선' 이라는 이름을 가지는 조직이 카렐 주의 수도인 아세이(Asei) 의 남부 중심인 '카난(Kanan)' 구역에서 주 정부군과 대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나선 바 있었다.
그 때, 나는 전장이 되어버린 카난의 시가지를 돌아다니다가 카난 중앙 구역 일대의 건물들로 둘러싸인 대로(大路)에서 주 정부군으로 추정되는 기갑 보병들이 하얀 바탕에 핏빛 십자가 무늬가 그려진
한 무리의 병기 군단과 정면 대치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주 정부군의 기갑 보병들은 대개 지상에 머무르고 있었지만 반란군, 즉 민족 해방 전선군의 병기들은 건축물의 옥상과 공중에서 폭격을 행하며,
이 보병들을 거의 일방적으로 공격하고 있었다.
나는 시가지의 한 곳에서 이들을 도와주지 않고, 그저 지켜보고 있었다. 밝은 심상을 유지하는 주 정부의 그림자에 해당되는 이면을 대면하는 역할을 맡고 있으면서 수많은 이들을 비정하게 해쳐왔음을
생각해 보면, 이들에게 동정의 여지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장갑 보병들 사이로 보이는 푸른 기사와 같은 모습을 보이며, 어깨에 새하얀 비둘기의 문장과 그 뒤에 자리잡은 검 모양의 그림이 그려진 모습을 보며, 나는 그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하나둘씩 보병들이 쓰러지고, 그 푸른 갑주 역시 집중되는 미사일 포격에 의해 계속 타격을 받은 끝에 치명상을 입고 시가지에서 쓰러져 있었다. 이렇게 장갑
보병들이 전멸되자, 공중에 머무르고 있던 병기들 중 수송을 맡고 있었을 법한 거대 비행기들이 건물의 옥상에 자리잡은 포대들을 잡아 끌고, 이어서 이들을 비롯한 병기들이 일제히 동쪽의 먼 곳으로
나아가며 상황은 종료되었다.
상황 종료 이후, 나는 곧바로 그 푸른 장갑 보병을 향해 나아갔고, 이어서 그의 앞에 앉아, 그를 바로 눕힌 다음에 그의 투구를 벗겨 그의 본 모습을 보았다. 그 때 본 모습이 꿈에서 나타났던 모습과
같았다. 오른쪽 눈은 실명되어 있었으며, 왼쪽 눈은 초점이 없었다. 두 눈 모두 실명했다가 왼쪽 눈에는 기계 눈을 이식했던 것이 그 이유.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하에 그를 구하려 하였지만, 투구를
벗겼을 때, 그는 이미 절명한 후였다. 그 모습을 보며 했던 말이 꿈에서 했던 바로 그 말이었다.
그 여인과 나는 이전에 만나 알고 있던 사이였다. 그 때로부터 5 년 전, 그는 학교에서 평범한 학생으로서 살아가던 소녀였다. 그리고 부모를 잃고, 생활 기반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가 페니르
레난즈(Fenir Lenanz) 라는 이의 도움을 받아 학업을 이어가기나마 할 수 있었으며, 그 대가로서 장갑 보병으로서 당시 카렐의 수도 아세이에서 암약하고 있던 기계 병기의 반란을 저지하는 임무 수행을
하고 있었다.
천사의 타락이 이렇게 쉽게 일어날 수 있었단 말인가. 무구한 소녀와 같았던 모습에 어울리는 천사와 같은 순수한 심성을 가지고 있던 그는 싸움이 거듭되면서 점차 광기에 물들기 시작하고,
전투에 특화된 악마와 같은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전투가 끝난 이후에도 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리기에 이르고 있었다.
나는 그 시점까지 그와 함께 있었다. 그리고 후유증에 시달리는 그에게 치료를 할 기회 역시 마련하려 하고 있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세니티아로 데려가, 세니티스(Senitis) 의 사제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소녀는 카렐 주 정부군의 특무 장갑 보병으로 임명되어 있었다.
이 일을 두고 나는 그가 장갑 보병으로서의 삶을 살도록 하였던 페니르의 행위에 의한 일이라 간주하고, 그에게 찾아가 진상을 물었다. 그러나 페니르는 그에 대해 묵묵부답으로만 일관할 뿐,
말을 이으려 하지도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종결되어 있었고, 소녀는 전사가 되어 버렸다. 이런 상황을 되돌리는 일은 사실상 무리에 가까웠으나, 그렇다고 해서 원인을 제공하였던 페니르에게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 그를 강제로 세니티아로 데려갈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할 경우, 그는 두 번 다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될 터, 사람을 구해야 하겠지만 이로 인해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는 일을
나는 원치 않았고, 그래서 나는 이미 늦은 상황 하에서 아무런 행동조차 취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페니르를 용서할 수 없었다, 상황이 끝났다 할지라도 죄악의 원흉인 페니르를 가만히 내버려두면, 자신의 행위에 대해 어떤 죄의식조차 가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가 가질 것임이 분명했기에 죄악에 대한 처단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바로 그에게 주먹질을 가해 그를 쓰러뜨리고, 지금껏 쌓였던 분노의 표출까지 한 이후에서야,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후, 나는 한 동안 그 소녀에 대해서는 잊고 살기로 한 바 있었다. 그러면서 그의 모습을 다시는 보지 않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로부터 5 년이 지난 후, 그에 대해 완전히 잊고 있었을 무렵,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그를 시신으로나마 만나게 된 것이었다.
한 사람이 어두운 운명의 길을 걷게 되면, 이를 막을 수 있는 방도는 없다. 그러나, 그 길을 걷기 전의 지경에서 밝은 길로 인도할 수는 있다. 그러한 기회가 주어져 있다면, 그리고 기회를 활용할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 사람이 걷게 될 어둠의 운명과 이어진 문을 피하게 할 수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할 수 없다면, 적어도 어둠의 운명에 놓인 이를 더욱 짙은 어둠 속으로 이끌어 내는 행위를
저지하는 일 정도는 이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가끔, 그 소녀의 모습과 타락해 버린 여인의 모습을 떠올리면 그에 대한 생각을 반드시 하게 된다.
그와 더불어 후회의 사념도 가진다, 소녀가 어둠의 운명을 선택하게 된 일은 그 일을 제대로 막지 못한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인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마 악행을 저질렀음이 명백하기에 지옥의 어딘가에서 고통을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 잔학성이나 아름다운 모습이 인정을 받아 악마나 몽마가
되어 있을까. 혹시 그를 만날 수 있다면 그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 때, 내가 바로 나서주지 못해 미안했다." 라고. 여구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여구가 있어봐야 결국에는 변명에 불과할 따름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