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 동부의 고원 지대에는 끝이 없는 듯이 펼쳐져 있는 거대한 풀밭이 자리잡고 있다. 수많은 풀들과 꽃잎 그리고 나무들의 고향인 이 곳. 대륙 동부 지대로의 여행을 이어가는 도중에 나는 그 고원
지대를 우연히나마 들르면서 그 곳에서 며칠의 낮밤을 보내게 되었다.
이제는 항시 불어오는 바람과 그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새들이 주된 손님이 되어버린 고요한 풀밭이지만 한 때, 이 곳은 '영웅들의 낙원' 이라 칭해지며, 인근에 살던 유목 기마 민족들에 의해 받들어지고
있던 곳이었다. 수많은 적들을 쓰러뜨린 강대한 전사들이 이 '낙원' 에서 영원한 삶을 누린다는 것이었다.
풀밭의 한 가운데에 조용히 누워 있으면서 하늘을 올려다보기 시작하는 순간에 소리 없이 불어오는 바람이 여전히 차가웠다. 이제 겨울의 기간이 3 주도 남지 않았다지만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리려 하는지, 차가운 바람의 기운이 세찬 바람에 실려 나의 옷자락을 파고들었다.
한 동안 두 손을 머리 뒤에 올린 채, 이들을 베개삼아 한 동안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문득 떠오른 바가 있어서 가슴 위에 올려놓았던 책을 오른손으로 들고 하나씩 책장을 펼쳐 그 책장에 쓰여진
오래된 글자들을 읽기 시작하였다. 그 책장에는 이 곳에 관한 하나의 신화와 그 신화에 엮인 전설들이 수록되어 있었다.
그 신화의 주 무대는 '낙원' 이라 칭해지는 이 초원 지대. 신화 속 세계의 주된 일은 이 초원 지대에서 강건한 전사들이 각 세력의 이익을 위해 출진, 정면에서 대결을 펼치는 일이었다. 군주의 광기에
의해 구성되었을 전사들의 무리는 들어올 때부터 고요한 평화를 누리고 있던 초원의 생명을 짓밟으면서 잔혹한 기운을 내보내고 있었으며, 이들의 저편에서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잔혹한 기운과 함께 생명을
빼앗아가며 한 무리의 군단이 들어온 후, 하나의 신호와 함께 두 냉혹한 은빛, 검은빛 물결이 초원 전체를 아우르며 뒤엉키는 것이었다.
뒤엉킨 금속빛 물결은 이윽고 하나의 혼돈으로 변해갔으며, 불꽃이 화살에 실리며 풀밭의 일부를 지옥의 색으로 물들여 가는 광경이 이어서 나타나고 있었다. 계책도, 지혜도, 마법도 없는 전장은
정면 대치를 하는 전사들의 창검이 부딪치는 소리만이 전장의 주를 이루고 있었으며, 대등한 힘을 갖춘 이 세력들의 싸움은 그 일대에 살고 있는 생명들까지 죽음의 기운에 휘말려 들게 해, 하나의 파멸을
불러오는 것으로 끝나고는 하였을 것이었다.
이 모든 파멸이 끝난 후, 금속빛 물결이 잦아진 그 자리에는 지옥의 광경을 모사한 것처럼 보이는 정경만이 남았다고 한다. 이러는 사이, 이 대지보다 높은 곳에서 초록빛이 만연했던 세상이
회색빛으로 변하고, 이윽고 어둠 속에서 검은빛 사이로 붉은 줄기가 핏줄기와 같은 무늬를 그리는 광경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지옥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다시 초록빛 풀밭으로 변해갔으니,
그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전사들의 몸은 낙원에서 영원한 안식을 가진다고 믿었다.
그리고 죽음의 기운은 하늘 위로 올라 하나의 무늬를 그리고, 그 죽음의 기운이 발하는 냄새를 맡으며 한 무리의 까마귀들이 몰려와 시체를 뜯어먹고는 하였다. 그 모습을 두고, 하늘에 그려진 무늬는
죽은 이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과 같아,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선택받은 전사들이 하늘로 오르는 길이라고 믿었으며, 까마귀들의 모습을 두고, 육체의 고통에서 전사들을 영원히 해방시키고, 시체들
위로 몰려오는 까마귀들을 선택받은 전사들의 영혼을 길 위에 올려놓는 '까마귀의 모습을 한 여신' 이라 믿었다.
까마귀 여신에 관한 이야기를 할 즈음, 그 때마침 까마귀 떼가 하늘을 떠도는 광경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이 까마귀들의 모습을 보며 그 사람들이 시체에 갇힌 혼을 해방시켜 주는 구원의 여신들이라고
그들에 대한 믿음을 가졌던 것이었을까.
"언제나 까마귀들이 불행의 전도사였을 리는 없어."
마녀의 상징이기도 하고, 때로는 악마의 가호를 받는 밤의 상징으로 여기어지기도 하는 까마귀들은 요즘 사람들에게는 탐탁치 않게 여기어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시대에 따라 사물의 상징하는 바가
달라지는 원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동물인 까마귀에게도 어김없이 적용되니, 까마귀는 축복의 대상인 적도 있었다.
우탄은 그 기마 민족의 주신이었다. 그는 신의 전사로서 자격이 적합한 자를 항시 찾고 있었으며, 그 가호를 받은 자에게 무한한 힘을 전해주어 전장의 운명을 주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 자는
결국 전장에서 쓰러질 운명을 받아야만 했으며, 낙원에서 신의 세상으로 등극, 그 곳에서 신의 전사로서 간택되어 앞으로 있을 불의 재앙에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이 되도록 하였다고 한다.
우탄이 주신이었다지만 신계에는 그 우탄의 운명조차 결정짓는 운명의 여신들이 있었고, 그 여신의 전언에 우탄 역시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전사자들을 선택하고, 또 우탄이 가호를 내리는 세력을
도와주기 위해 싸우는 여신들을 우탄이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중에 운명의 여신 중 한 명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여신들은 언젠가 어둠의 재앙이 신계를 휩쓸리라는
예언을 한 바 있었고, 이를 어찌할 수 없었던 우탄이 전사들을 간택해, 이들을 막아내도록 하기 위해, 이런 과정으로 신의 전사를 선발하려 한 것이었다. 때로 이런 신의 전사를 선택할 겸,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왕국을 멸망시키기 위해 우탄은 전쟁을 선동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우탄과 신들의 멸망은 어쩌면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언제까지나 투쟁만을 반복하며 살 수는 없었기에. 우탄의 신계를 끝내 집어 삼켜버린 어둠의 재앙 역시 이런 사람들의 열망을 반영한
그런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우탄과 그의 신계가 사라졌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낙원' 이라는 이름의 초원에서 영웅들은 그렇게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싸움을 피할 수 없는 존재이다. 풍요로운 땅을 개척하기 위해, 양식을 찾기 위해, 때로는 자신에게 몰려오는 위협을 몰아내기 위해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싸움을 거듭해 와야만 했다. 하지만
사람은 또한 이런 싸움을 거듭할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살육과 포식이 일상화된 육식동물보다도 사람들은 사냥에 빨리 지치고, 평온 혹은 평화를 추구한다.
이러하니 사람들이 점차 평화를 추구하게 되면서 전쟁으로 영광을 얻었던 신 역시 다른 존재에게 그 자리를 내 주고 사라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전설에 관한 그 얇은 책을 덮으며, 나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데, 그 때, 까마귀 한 마리가 조용히 나에게 날아왔다.
"내가 손을 올려주기를 바라는 건가."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왼손의 손등을 위로 올려, 까마귀가 그 위에 앉도록 해 주었다. 그 까마귀의 색은 유난히 밝아 거의 은색에 가까운 모습을 띠고 있었다. 그 까마귀는 여느 까마귀와 다를 바
없이 한 동안 손등에 앉은 채, 주변 일대를 조심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후, 그는 날아가기 전에 나에 대한 무슨 미련이라도 남은 듯이 비행을 주저하였으나, 결국 날아가 나의 곁을 떠났다.
"우탄이라는 신이....... 실제로는 없을 줄 알았는데, 원래는 있었나, 보네."
그 까마귀는 백피라는 돌연변이 증상에 의해 은색을 띠고 있을 것임이 분명해 보였으나-흰색 호랑이, 흰색 뱀은 희귀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돌연변이에 의한 비정상이다-, 신화에 관한 책을 읽은
후에 그 모습을 보기도 하고, 더욱이 그 까마귀는 유난히 사람인 나를 찾고, 그 곁을 쉬이 떠나려 하지 않았음을 상기까지 하니, 까마귀의 여신들 중에서도 유별난 존재인 '운명의 여신' 이 현신한 형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깐이나마 들었다.
"백피이기도 하고, 사람의 곁에 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다가오기도 했다, 사람의 곁을 쉽게 떠나려 하지 않았으니, 그 기회를 잘 노리면 내 곁에 항상 둘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백피 증상-태양의 빛을 받으면
쉽게 위험해진다-이 있어서 보살핌이 유난히 필요하기도 해서 그의 삶이 지속되기를 원한다면 곁에 두고 있어야 할 필요도 있어 보였다.
'그래도 어떻게든 잘 지내겠지.'
그러나 결국 나는 그 까마귀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암만 보살핌이 필요 없다 하더라도, 강제적으로 까마귀를 데려다 내 품에 두는 것은 왠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백피
증상이 우려스러웠지만 그로 인해 위험해졌을 때, 어떻게든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 괜찮으리라 믿었다.
그 믿음대로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