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니티아의 북반구에 위치하고 있는 대륙, 라르니온(Larnion). 그 중에서도 북부에 해당되는 넓은 산악 구역은 가는 곳마다 단풍나무와 소나무로 울창하며, 곳곳에 호수들이 자리잡고 있어서 나무들과 함께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가고 있다. 인접한 남부 구역이 '금지된 구역' 이고, 그 구역에서 사람들이 나간다는 소문이 있어서 한 때는 위험한 구역으로 여기어져, 사람들이 해안 지대를 제외하면 잘 찾아가지 않는 편이었으나, 이미 금지된 구역에 자리잡은 세력이 괴멸하고, 남부 구역의 자연 상태가 회복되어 가면서 위험하다는 세간의 인식도 점차 사라져 가, 그 경관을 보기 위해 가는 경우가 이전에 비해서는 많아졌다.
대개 볼 수 있는 단풍나무는 크기가 크면, 이파리도 갈색을 띠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단풍나무들은 이파리가 크기도 크거니와, 색도 불긋하면서도 무척이나 선명해 사이마다 자리잡고 있는 밤나무 이파리의 노란색, 그리고 유난히 깨끗한 푸른 하늘과 그 하늘의 모습을 비추는 호수의 색이 그 단풍잎들의 색과 어울리며 화려한 풍경을 만들어 내고는 한다.
그 중에서 북서부에 위치한 호수가 제일 크며, 그 호반 일대는 바람이 거세게 부는 곳이라 하여 근래 들어 '바람의 호수' 라 칭해지기도 한다. 내가 들른 곳은 바로 그 호수가 위치한 숲의 한 구역이다.
호반의 서쪽을 향하다 보면, 문명의 흔적과도 같은 유적이 나무와 덩굴 속에 묻힌 채, 푸른 하늘의 모습을 그대로 비추는 호수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 하여, 고대 문명의 자취를 찾는 이들에게 새로운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지만, 그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고, 나는 그저 호수 위에 배를 올리고 그 배 위에서 호수의 수면과 그 주변 경관을 바라보는 일에만 관심이 있을 따름이었다.
간혹 바람에 날아온 이파리들이 배 위로 떨어지기도 하였고, 수면 위에 놓인 빨간 단풍잎들이 떠 있는 모습을 보고, 이를 건져 올리기도 해서, 꽤 많은 이파리들을 구해올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모두 초록 기운이 빠진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라서 일부는 아직 초록 기운이 덜 빠져나가, 연두색을 띠는 경우도 있었으나, 단풍잎들은 한결 같이 붉게 물들고 있었으며, 얼마나 붉은 지만 차이가 나고 있었다.
그렇게 주워온 단풍잎들과 밤나무 잎들은 대략 20 여 장 정도. 이들을 모두 수집하고 말려 놓기는 했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은 잘 보관해 둔다고 하더라도 우주 공간에 놓고 오지 않는 이상, 결국에는 색이 바래고 말라서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이유. 그러면서 이파리들을 가져가기 전에 이를 보존할 수 있는 수단을 통해 보존하도록 하려 하였다.
그러다 말고, 그렇게 보존하기 전에 이파리를 가지고 어린 시절에 했던 일을 떠올리며, 나는 우선 짐을 풀고, 그 짐 안에 들어있던 물건들을 하나씩 꺼냈다. 그 중에는 도화지가 올려진 판자 하나가 있었으며, 이는 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림판을 올려놓고 처음으로 한 일은 이파리에 물감을 칠해서, 그 물감이 칠해진 이파리를 도화지에 잠깐 붙였다가, 다시 떼어놓는 것으로서, 그렇게 도화지에 붙었다가 떨어지는 이파리들은 이파리에 칠해진 색을 띠는 자신의 흔적을 남겨, 종이 위에 무늬를 그리고 있었으니, 이들이 하나 둘씩 모이면서 노란색, 빨간색을 띠는 이파리의 형상이 하나씩 도화지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간혹 이 중에는 초록 기운이 무늬처럼 남은 것도 있었으며, 이 경우에는 초록 기운이 남은 부분을 먼저 칠하고, 나머지를 단풍의 색으로 칠해, 희미하게 남은 부분까지 덮도록 하니, 제법 비슷하게 모양새를 갖추는 형상들이 그렇게 해서 나오게 되었다.
주로 어린 아이들이 하는 간단한 일이기는 하지만, 문득 옛 생각이 떠오르기도 해서 이파리의 형상을 남겨두기에는 좋은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해서 일단 그런 식으로 이파리들의 흔적을 종이에 남겨 두어, 이들이 도화지 가득, 자리잡아 하나의 화려한 무늬를 구성하도록 하고서, 나는 바로 다음 작업에 들어갔다.
이후, 내가 그린 것은 바로 주변 산의 풍경과 나무, 그리고 호수의 수면을 채화로 그리는 일로, 물감을 대충 마련해 팔레트 위에 몇 가지 색깔을 띠는 물감을 올리고, 그 물감으로 대충 산과 나무 그리고 수면의 모습을 칠하고서 대충 마쳤다. 무엇이든 대충 칠해놓기만 한 그림이기는 하였으나, 내가 그려서 그런지, 다 그려놓은 모습을 전체적으로 감상하니 그럴 듯해 보이기는 했다.
그렇게 두 가지 일을 마치고서야 나는 그림판과 물감을 정리하고, 보존을 위해 마련한 시약을 가져와 이파리를 하나씩 담갔다가 빼내는 방식으로 이파리들을 투명한 막이 감싸도록 하고서, 그 이파리들을 짐 안에 넣어놓았다. 여행의 흔적을 마련하는 일을 마친 후, 나는 이제서야 다시 마음을 놓으며 배 위에 조용히 누웠고, 그 이후에 한 동안 잠들고 있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났을 때, 배는 서쪽의 유적이 바라보는 호반에 이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