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그렇고, 여러분, 병들을 사실 생각 있어요? 좋은 병들 많이 있어요~."
이후, 상점의 고양이 소녀는 나와 아네샤에게 병 살 것 있느냐고 묻고서, 좋은 병들이 많이 있으니, 하나 골라서 살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그 병들은 근본이 유리라고 하지만 초록색, 금색, 푸른색의 다양한 색을 띠고 있는 작은 병들의 모습에서는 마치 보석을 보는 것과 같은 영롱함이 느껴지기도 했었다. 물론 병을 살 만한 돈은 미리 마련해 두기는 했지만, 이런 장식품에 들일만한 자금적 여유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고, 또 유리 제품이라는 특성 상, 깨질 위험도 매우 커 보여서 사고 싶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어도, 결국 그 생각이 바로 사그라졌다.
"죄송합니다만, 사지 못할 것 같아요."
"안 사실 거예요? 안 사실 거면, 가라옹~." 그러자 고양이 소녀는 바로 서운해하다가 정색을 하더니, 나와 아네샤에게 얼른 가라고 말했고, 별 수 없이 가게를 떠나갔다. 그렇게 골동품 상점을 떠나 아와레 북부의 중앙 거리로 나아가는 동안 나의 왼편 곁에서 나와 동행하고 있던 아네샤가 나에게 말했다.
"한 때는 정보를 알려주고 친절히 대하더니...... 서운하네."
나에게 말을 건네는 그 목소리에서 진심으로 당혹스러움과 서운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래도 그의 심정이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은 아닌 것이, 병들을 사 줄 것을 기대하면서 이것저것 가르쳐 주려 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고, 그러면서 그 소녀에 대한 미안함이 느껴지기도 했었다. 사실, 골동품 상점의 고양이 소녀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네샤 역시 나와 비슷하게 그 심정을 이해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가 보여준 태도의 돌변 때문에 너무 당황했고, 그것이 서운함으로 이어졌었다고.
그리고 북부 거리의 중앙 광장으로 나아갈 무렵, 나는 광장 일대에 흩어져 있었던 요정 소녀들 그리고 고양이 소녀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곳곳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고, 줄넘기 놀이 등을 하고 있었다. 일부 요정들은 건물 위를 오가면서 뛰어놀기도 했는데, 건물들이 대체로 높이가 낮다 보니, 뛰어다니면서 별 문제가 있거나 하지는 않아 보였다.
나는 그 광경을 광장의 남쪽 가장자리 즈음에 있는 벤치에 나란히 앉아서 보고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아이들이 뛰어노는 풍경을 보면서 많은 것들이 생각나고 있었고, 특히 친구들과 함께 놀러 다니던 어린 시절이 많이 생각나고는 했다.
"어렸을 때, 저렇게 막 뛰어놀고는 했었지?"
"지붕 위를 거침 없이 뛰어다녔지~."
"나무 위가 아니라...... 맞아, 너는 그랬었지." 이에 나는 조용히 미소를 띠면서 답했다. 아닌 것이 아니라, 아네샤를 비롯한 일부는 나무 위가 건물 위를 오가면서 건물 위에 올라선 들고양이들, 살쾡이들이나 새를 쫓아다니고는 했었으며, 일부는 지붕 위를 점거한 살쾡이 무리와 싸우기도 했었다. 아네샤는 그 때, 새들을 괴롭히는 살쾡이, 들고양이 무리를 보고 화가 나서 그들과 싸우려 했었다. 그 때 내가 그런 그를 도와주려 하면서 그것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기에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
"진정 말썽쟁이였어, 너, 정말." 그 이야기를 하고서 나는 아네샤에게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 그렇게 말했고, 이에 그는 조용히 미소를 띠다가 나에게 살다 보면 그런 장난은 한 번 정도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이후, 내가 들은 이야기로는 나 같이 이상한 사람은 없었다고, 어렸을 때에 밖에 돌아다니기보다는 집에서 책을 읽거나 아니면 무언가를 만드는 것에 집중하는 편 아니었느냐고 물었고, 이 물음에 내가 바로 답했다.
"나는 그런 것들이 재미 있었어, 그래서 여느 바람의 정령들 같지 않다고 하더라."
"그러니까......" 이에 아네샤가 그를 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다가 어느새 나도 아네샤, 세미아 등과 어울리면서 바깥 세상을 자주 오가는 이가 되어 있었다고 말하고서 어렸을 때의 나를 두고 누가 그런 이가 될 것이라 예상할 수 있었겠느냐고 그런 나에 대한 말을 건네기도 했다.
"내가 스스로 변했다기보다는 너와 같은 이들을 만나고, 너의 모습에 감화된 것이겠지. 너는 정말 심한 장난꾸러기이기는 했지만, 활발하게 바깥 세상을 뛰어다녔던 너를 한편으로는 동경하기도 했었어. 그래서 너와 가까워지고 싶었고, 나 스스로도 그로 인해 변해간 것 같아."
"그래서, 너는 살면서 어느 때가 좋았어, 어렸을 때야? 아니면 나와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아니면......"
"세미아, 리마라, 나리 등과 함께 여기저기 돌아다닐 때."
그러자 내가 바로 답했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있으니까 여러모로 좋았다고 말하고서, 덕분에 아르나이에서 여러 추억도 가져 보고, 또 루데스에서 바다 구경도 함게 같이 해 보는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너무 좋다고 이어 말하기도 했다. 이런 말은 진심으로 했던 것이, 실제로 친구들이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살았을지에 대해 틈만 나면 진지하게 의문을 품은 적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번 여행 도중이든, 아니면 여행 끝난 이후가 되든, 해변으로 놀러가면 수영복도 한 번 입어봐야지?"
이후, 아네샤는 나에게 이렇게 물음을 건네었다. 한 번 수영복을 입어보면 안 되겠느냐는 질문이었다. 수영복이라는 것을 입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지라-그래서 바닷물 안으로 해변에 놀러갔을 떄에는 들어간 적은 없었다-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며 아네샤가 그런 나에게 이어 말했다.
"여태껏 놀러갔을 때마다 수영하러 한 번도 가지 않았었잖아, 이번에는 가 봐야지!"
"그렇기는 한데......" 그러한 아네샤의 말에 곤란해 하고 있던 그 때 마침, 리피와 리지 그리고 피다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들 중에서 적갈색 양갈래 머리를 하고 하얀 원피스 차림을 한 리지가 나를 보더니, 나와 아네샤를 향해 다가가서는 바로 나에게 말을 걸려 하였다.
"두 분, 라니아 씨의 집으로 가 보시지 않으실래요? 라니아 씨의 집에 클라리스, 미라 씨를 비롯해 루시언 할아버지께서도 와 계세요!"
"루시언 할아버지께서?" 그 이야기에 나도 그렇지만 아네샤도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닌 것이 아니라 라니아의 집에 와 있었을 클라리스, 미라를 루시언 노인이 직접 찾아왔다는 것은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를 전해주기 위함이었을 것임이 분명해 보였음이 그 이유였다. 이에 나는 그간의 대화를 중단하고 바로 그 쪽으로 가겠음을 밝혔다.
"알았어! 바로 거기로 가 볼게!"
차라리 다행이다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 이전까지 곤란한 질문에 직면하고 있었는데, 그 질문을 면피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음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아네샤는 이전의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지 못한 것이 못내 미더웠는지 언젠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듣겠노라고 다짐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엘피, 피다 그리고 리지와 함께 날갯짓을 하며 날아가려 하면서 다급히 다가간 라니아의 집 바로 앞의 마당에서는 클라리스와 미라 그리고 야누아가 한데 모여 서 있었으며, 그런 그들의 바로 앞에 붉은 셔츠와 갈색 바지 차림을 한 루시언 노인이 집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 모습을 집의 북쪽 인근에서 잠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루시언 노인은 세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조용히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오늘 저녁에 그 쪽으로 가겠다는 건가."
"예, 저녁에 먀미아 성계의 아테다르마로 가려고 해요, 그 곳에도...... 섬에서 발견되었던 그 수많은 영혼들을 연료 삼고 있던 사악한 병기가 있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요."
"아테다르마에 수많은 묘족들의 영혼들이 사악한 병기들에 의해 붙잡혀 연료가 되어 있어요. 게다가 하므자 (Hamuza) 라는 묘족의 용병 대장이었던 자가 거듭해서 묘족들을 끌어모아 아테다르마의 기계 군단 근거지를 정벌하겠다고 원정을 단행했지만 원정을 진행할 때마다 하므자와 그 추종자들을 제외한 이들은 그 누구도 돌아오지 않았지요. 마지막 때에는 그 자신마저 사라졌지만...... 아무튼, 묘족의 배신자라 할 만한 그 자를 잡아내는 것에도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하구먼." 클라리스에 이어 야누아가 먀미아 성계로 가는 이유에 대해 말하자, 루시언 노인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고, 이어서 클라리스 그리고 야누아와 미라의 모습을 한 번씩 둘러보면서 그들에게 차분히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래, 그들이 무엇을 이끌고 너희들에게 닥쳐올지는 모르겠다만...... 너희들은 충분히 강해, 너희들이라면 그들의 위협을 모두 떨쳐내고 잘 해낼 것이라 믿는다. 더욱이, 그 곳 사람들 중에도 그 정도면 의기를 가지고 행동을 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고, 그들 역시 너희들을 도울 테니, 앞으로의 일이 크게 걱정이 되지는 않는구나."
그리고서 그는 클라리스에게 시선을 향하며 그를 향해 차분한 목소리를 내며 말을 이어갔다.
"클라리스, 일찍이 나는 너를 두고 그 전설적인 용사이자 대왕인 카믈로의 아흐튀흐 (Arthur de Camelot) 를 계승할 자로 점지된 자라 말한 바 있었다. 그래서 어렸을 때에는 늘 말했었지, 아흐튀흐 대왕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어 달라고 말이다."
"그러다가 얼마 후에는 결국 그만두셨었지요?"
이후, 미라가 건네는 물음에 루시언 노인은 그렇다고 답을 했다,
"그랬는데, 실은...... 미라." 그러자 클라리스가 잠시 미라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서 그에게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라가 "왜, 왜?" 라고 물음을 건네자 그런 그의 물음에 답을 하려는 듯이 차분히 목소리를 내면서 이어 말을 건네려 하였다.
"실은...... 할아버지께서 하셨던 그 말씀을 들으며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있었어, 할아버지께서는 나를 특별한 이로 보시고 나에 대해 그렇게 말씀하신 것 같았지만, 나는 내가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어. 나는 왕국이니 뭐니 그런 것은 관심 없었고, 그저 아이들과 같이 즐겁게 놀고 싶을 뿐이었던 거야."
"그렇다면, 할아버지께서는 그것을 알아차리시고.......?"
클라리스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미라가 건네는 물음에 루시언 노인이 눈을 감은 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랬었지." 라고 화답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라니아로부터 아이가 나아갈 길은 결국 아이가 정하는 법이라는 말을 들었고, 또 클라리스, 미라 정도면 자신이 갈 길을 자신이 알아서 결정할 수 있을 것이라는 조언을 들으면서 전설의 왕 그리고 기사들과 같은 존재가 되어달라는 말은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었지. 그리고 지금 너희들을 보니, 라니아의 말대로 너희들이 너희들 뜻대로 살아가도록 놓아두는 것이 너희들에게는 답이었던 것 같구나."
이후, 루시언 노인은 마을의 큰 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면서 이제 집으로 가겠음을 그들에게 알렸다. 그러다가 세 소녀들과 함께 그를 지켜보고 있었을 라니아를 향해 돌아서서는 그에게 한 가지 전할 부탁이 있음을 알리고서 그에게 "아이들을 잘 부탁하네." 라는 한 마디 말을 건네고서는 다시 길 쪽으로 돌아섰고, 그 이후로는 다른 말 없이 큰 길을 따라 남쪽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는 동안 클라리스, 미라, 야누아와 이들의 뒤에서 클라리스, 미라 그리고 루시언 노인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라니아는 그가 남쪽 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는 그의 뒷 모습을 말 없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늘 농담 같이 마을을 나가겠다고 하셨었는데."
"이번에는 진짜인 것 같아." 한 동안 네 사람이 말 없이 라니아의 집 근처에서 가만히 서 있던 정적 속에서 야누아가 루시언 노인에 대해 말을 건네었고, 그 말에 미라가 바로 화답했다. 이후, 야누아가 미라에게 루시언 노인에 대해,
"얼마나 오래 마을 밖에 계실 것 같아?" 라고 묻자, 미라로부터 기약이 없다는 대답이 들려왔다. 이후, 미라는 야누아에게 "어쩌면......." 이란 말이 들려왔지만 그 이후로는 말을 꺼내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아마도 영영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음을 의미하는 말이었겠지만 차마 야누아에게는 건네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야누아는 차마 더 잇지 못한 말을 들으면서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대략 짐작하고 있음을 알리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후, 클라리스와 미라는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가고, 이후에 야누아는 라니아를 불러서 같이 집으로 가려고 했다. 그 때, 라니아의 곁으로 집에 머무르고 있던 린나와 모니카가 뛰어왔고, 그런 두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라니아는 린나, 모니카에게 잠시 클라리스, 미라의 집으로 가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자 모니카가 그런 라니아 그리고 야누아를 보면서 물었다.
"두 분만이 아셔야 할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있는 거예요?"
"그렇단다." 이에 라니아는 자상하게 목소리를 내며 그렇다고 답하고서 날이 어두워지면 돌아오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이에 린나, 모니카는 알았다고 화답하고서 집을 나섰고, 이후, 라니아의 집 근처에 이르렀던 나와 아네샤 그리고 일행과 함께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엘피, 피다, 리지와 마주하게 되었다.
"언니들도 지켜보고 계셨던 거예요?"
"응, 우리와 앞으로 한 동안 동행하실 분들의 사정을 어느 정도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모니카가 건네는 물음에 내가 답했다. 그리고 이번만큼은 당장에는 알아서는 안 되는 이야기 같다고 말하고서, 린나, 모니카에게 그렇지 않느냐고 물었고, 이 물음에 린나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화답을 했다.
"예, 엄마하고 야누아 언니께서 집에서 뭔가 대화를 하시려 하시는데, 뭔가...... 저희들이 알아서는 안 되는 이야기 같았어요."
"그랬구나." 이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한 그의 말에는 나도 대략 공감하고 있었던 것이, 야누아와 단 둘이서 주고받고 있을 대화가 그들만이 알고 있어야 할 비밀을 품고 있을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에는 언젠가 알 수 있을 기회가 있기는 하겠지만, 당장의 일은 아닐 것이고, 그러할 필요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면서 나는 아이들 그리고 요정들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가 보려 했다.
이후, 나는 요정들 그리고 어린 고양이 소녀들을 따라 남서부 광장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리고 요정들이 남서부 광장의 풀밭을 날아다니며 놀고, 또 고양이 소녀들이 광장의 서쪽에 자리잡은 연못에서 장난감 물고기를 낚는 놀이를 즐기고 있는 광경을 지켜보다가 잠시 쉴 겸, 남서부 광장의 한 가운데에 자리잡은 탑의 한 부분-남쪽 부분-에 기대어 앉아, 린나, 모니카가 연못에서 낚시를 하다 말고, 다른 어린 고양이 소녀들과 함께 술래잡기를 하며 놀고 있던 광경을 지켜보려 하였고, 이에 아네샤가 그런 나의 오른편으로 다가가서는 탑에 몸을 기대며 나의 오른편에 서려 하였다.
"이후의 싸움도 잘 해낼 수 있겠지?"
"여하가 있겠어?" 이후, 내가 짐짓 아네샤에게 건네는 물음에 아네샤는 바로 당연하다는 듯이 답을 하였다. 그리고 그 동안 아테다르마를 점거했다는 기계 병기들 그리고 그 기계 병기와 한통속이 된 이의 행보를 돌아보건대, 자신에게는 결코 적이 되지 않을 것이라 장담하기도 했다.
"다소 과장을 보태자면, 그런 녀석들은 나 혼자서도 몽땅 해치워 버릴 수도 있다고!"
그리고서 아네샤는 이전에도 자신과 함께 보았듯이, 그 기계 병기들은 대단해 봐야, 얼마나 대단할 것도 없고, 결국에는 섬에 출몰했던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장담하기도 했다. 그러자 내가 그런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장담해?"
"뻔하지 뭐." 그러자 아네샤가 즉답을 하고서 그것에 이어 그 이유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네들이 어떤 녀석들이었어? 결국에는 아무것도 모르던 사람들, 연약한 사람들 꼬드겨 죽여서는 그 피와 살 그리고 영혼을 핵융합 발전기에 돌리기나 했던 녀석들이잖아? 그런 약한 자들을 죽이면서 힘을 구축할 생각만 하는 것들과 그들이 거느렸던 병기들과 맞섰을 때, 어땠어? 다소 위험할 때가 있기는 했어도 결국에는 큰 어려움 없이 궤멸시킬 수 있지 않았어? 그네들도 결국 그런 녀석들일 거야, 힘 없는 이들 앞에서는 전설 속의 마수 같지만, 조금이라도 힘을 가진 자들 앞에서는 짐승만도 못한......"
"그러하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바로 화답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아네샤가 아테다르마의 기계 병기들 역시 그렇게까지 유별나지는 않을 것이라 장담하는 것에도 일리는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 역시 참혹하게 멸망한 고양이 나라의 부흥이라는 명분 하에 선동당한 순박한 고양이들의 육체와 영혼을 에너지원 삼으려 하는 약자들에게만 가혹한 병기들일 것임이 분명해 보였기에. 그런 녀석들이 앞으로 닥쳐올 적이라면 상대가 어떻게 나서든 결코 질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그런데, 루시언 할아버지는 인간이라 하셨지."
"그랬지." 이후, 아네샤가 물음을 건네었고, 그 물음에 내가 차분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답했다. 이후, 아네샤는 나에게 한 가지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라니아 씨께서 어렸을 적에도 그 분께서는 할아버지이셨던 거예요?
그렇지요. 인간의 평균 연령은 대략 80 세 정도로 오래 살 수 있으면 100 ~ 120 세까지는 살 수 있다고 했는데, 할아버지께서는 아마도 그 영역 혹은 그 너머에 이르셨을지도 모르겠어요. 한 가지 신경 쓰이는 바가 있다면 그 나이 대에 이른 사람치고는 너무 젊어 보이신다는 거예요.
루시언 할아버지께서는 생각보다 나이가 엄청 많으신 분 같아, 어쩌면 인간의 상식적인 나이보다 더 많은 분이실지도 모르겠어.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루시언 노인 그리고 라니아를 처음 만났을 때의 대화 내용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뭔가 내가 알고 있었던 '인간' 의 상식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 같았다고 그 이야기에 대한 회고를 해 보기도 했었다. 아네샤 역시 처음에는 그 모습을 보며 들었던 생각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인간 정도로 여기고 있었는데, 한 번씩 노인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뭔가 다른 생각이 들었던 모양으로 노인이 겉으로는 인간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인간과는 다른 무언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그것이었다.
"그러니까...... 할아버지께서는 인간처럼 보이시지만 실제로는 인간이 아닌 어떤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거야."
"인간이 아닌 존재시라고?"
"응." 이에 아네샤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리고 그 대답에 이어, 본래는 인간이었겠지만 모종의 사정에 의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었을 것이라 그에 대한 추측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루시언 노인이 홀로 마을을 떠나는 것도 그가 인간이 아닌 무언가가 된 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추측을 이어 하기도 했다.
"어쩌면......." 그리고서 그는 무언가 짐작되는 바가 있는 듯한 말을 건네려 하였지만, 막상 나에게 그것에 대해 말하려 하니, 정리가 잘 되지 않았는지, 그 이후로 말문이 열리거나 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서 그는 나에게 이전에 하려 했던 말 대신에 하나의 물음을 건네려 하였다.
"클라리스 씨, 미라 씨 등께서는 할아버지께서 영영 돌아오지 못하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시고 계실까."
이 물음에 나는 이미 그러할지도 모른다고 예상하고 있을 것이라 답하고서, 그들로부터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듣거나 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에 대한 각오는 이미 해 두고 있는 것 같았다고 그들에 대한 추측을 말했다.
그 이후로 나는 아네샤와 함께 탑 그리고 그네 근처에서 놀고 있던 린나와 모니카 그리고 요정들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그들의 요청이 들어와 그들의 놀이에 잠깐 함께 하기도 했었다. 특히 린나가 나와 아네샤가 같이 놀아주는 것을 유난히 좋아했던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창 요정들 그리고 고양이 소녀들과 놀아주는 동안 남쪽 하늘 높이 떠올라 있던 태양은 점차 서쪽 하늘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보면서 나는 이제 북쪽 경계로 나아갈 때가 되었다고 여기며 요정들 그리고 고양이 소녀들과 헤어지기로 하고, 마침 탑 부근으로 나와 아네샤를 향해 뛰어오던 린나 그리고 그를 따라 오던 요정 리피, 리지에게 다가갔다.
"얘들아, 지금까지 뭐하며 놀고 있었어?"
이제 북쪽 길목으로 가기 위해 헤어져야 한다는 말을 남기기 전에 우선 그들에게 무엇을 하며 놀고 있었는지에 대해 물으려 하였고, 이후 그들로부터 이런저런 놀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중에는 나에게는 낯선 것들도 있었고, 나와 아네샤 등이 어렸을 때에 즐겼던 놀이들도 있었다. 술래잡기라든지, 사방치기, 공 차기 놀이, 시소 등은 어렸을 때에 한 번 이상은 해 봤던 놀이들이었다. 다만, 장난감을 가지고 성 쌓기라든지, 풍선을 들고 뛰어다니는 것 등은 해 보거나 하지는 않았었다.
"고리 (Gnia) 돌리기도 했었잖아." 허리 높이로 고리를 들어올려서 허리로 고리를 돌리는 놀이 혹은 운동을 지칭하는 말로, 아네샤, 세미아 등은 어렸을 때부터 자주 했었고, 나도 아네샤의 권유에 따라 고리 돌리기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
"언니들도 고리 돌리기를 해 보신 적이 있어요?"
"그럼! 어렸을 때 정말 열심히 했었는데!" 이에 린나가 신기해 하면서 고리 돌리기에 대해 물었고, 이 물음에 아네샤가 활짝 웃으면서 해맑게 목소리를 내며 화답했다. 그리고 얼마나 고리를 잘 돌리는지 지금도 보여줄 수 있다고 린나, 모니카 앞에서 자랑스럽게 외치기도 했었다. 그리고 고리를 가져와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지만 모니카가 나와 아네샤를 보더니, 나에게 어디 가려 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고, 그러면서 나에게 물었다.
"언니들, 이번에는 어딘가 멀리 가시려 하시는 것 같아요."
"응." 모니카의 물음에 내가 답했다. 그리고 클라리스, 미라 등과 함께 먀미아라는 행성으로 갈 것이라 말하고서 원래는 그래서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린나, 모니카 등과 만나려 한 것이었음을 밝혔다. 이에 린나가 모니카에게 "이제 이 곳을 떠나려 하시는 것 같아." 라고 말하더니, 나를 보면서 말했다.
"어머니께서 야누아 언니와 함께 북쪽 교외에 가신다고 하셨어요, 클라리스, 미라 언니 그리고 야누아 언니를 배웅하기 위해 나가신다고 하셨는데, 그 때, 언니들도 가시는 거예요?"
"린나가 그러고보니 참 많은 것을 알고 있었네."
그러자 아네샤가 그런 린나를 보면서 감탄하는 듯이 그에 대해 말했고, 이에 린나는 다소 장난기 어린 웃음을 띠면서 그에게 "그럼요, 이래봬도 알 것은 다 안다고요~." 라고 화답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서 일행이 도시의 북쪽 경계에 이를 즈음에는 어머니-라니아-가 떠나는 이들을 배웅해 주려 할 것임을 밝히고서 반드시 어머니에게 인사말을 전해줄 것을 부탁했다. 이후, 그들은 바닷가로 가려는 듯이 남쪽 방향을 향해 나아가며 나와 아네샤가 있는 그 주변에서 멀어져 가려 하였다. 린나와 모니카는 떠나갔지만 요정들은 내 곁에 그대로 남았다. 이후, 리피가 나를 보더니, 나에게 온화하게 목소리를 내면서 청했다.
"자아, 이제 북쪽 교외로 나아가도록 하지요."
그리하여 요정들을 따라 건물들 사이의 거리를 지나며 도시 북쪽의 광장에 이르렀다. 그리고 내가 북쪽 구역의 집들 사이에 자리잡은 광장에 이르렀을 무렵에 내가 나의 오른편에 있던 리피, 리지의 모습을 보면서 물었다.
"클라리스 씨나 미라 씨 그리고 저희들이 먀미아로 갈 때, 여기 계신 분들도 같이 가실 것인가요?"
"예, 저희들도 클라리스 씨를 따라 같이 먀미아로 가려고 해요."
그러자 리피가 나의 물음에 그렇게 답했다. 그리고 어디서든 어떻게든 클라리스, 미라 등이 활약하는 모습을 계속 지켜보려고 한다고 앞으로 할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에 이어 클라리스, 미라 등과 함께 있다면 먀미아에 도사리고 있는 악의 기운도 두렵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도 보여주고 있었다. 그 정도의 믿음을 갖고 있다면 그들이 어디로 가든 적어도 리피는 어디든 따라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리지도 따라갈래?" 그리고서 리피는 리지 그리고 엘피에게 같이 가겠느냐고 묻자, 엘피는 가지 않겠다고 답했다. 하지만 리지는 리피의 물음에 먀미아까지는 따라가겠지만 그 이후는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리고 자신을 보호해 줄 또 다른 이가, 그러면서 클라리스, 미라 등의 여정과 함께 할 수 있는 이들이 있다면 계속 클라리스 등을 따라갈 의향이 있을 수는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무척 까다롭네." 이에 리피는 그저 환하게 웃으면서 그에게 그렇게 말할 따름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리지에게 이번만큼은 따라가 주는 것이냐고 물었고, 이어서 리지에게서 "물론! 당연하지!!!" 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엘피가 피다와 함께 린나, 모니카를 따라간다면서 일행의 곁을 떠나간 이후, 나와 아네샤는 리피, 리지를 따라 도시 북부의 광장을 지나 집들 사이의 큰 길을 따라 나아가면서 먼 저편에 있는 도시 북부의 경계 지점으로 다가갔다. 경계 지점으로 다가가면 다가갈 수록 그 부근에 자리잡고 있는 이들의 그리고 그 저편에 보이는 풀밭의 모습이 더욱 분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북쪽 경계 즈음에 있는 이들은 클라리스와 미라, 야누아에 리에타까지 있었다. 리에타는 이번에는 등짐까지 짊어지고 있어서 멀리 떠나갈 것임이 분명해 보였다.
"어라? 저기 보이시는 분은 리에타 씨 아니에요? 리에타 씨께서 무슨 일로.......?"
그런 리에타를 보자마자 리피가 내 머리 위로 날아 올라서는 의아함을 드러내는 목소리로 물음을 건네려 하였고, 이에 내가 그 역시 따라가려 하는 것 같다고 그의 행동에 대한 추측을 그 물음에 대한 답으로써 하였다. 그리고 일단 그들의 바로 앞으로 다가가 보자고 리피, 리지 등에게 청해 보았다.
리피, 리지를 데리고 도시의 북쪽 경계 부근에 모여있던 이들의 바로 앞에 도달하였을 무렵, 나의 눈앞으로 길을 떠나려 하는 이들, 클라리스, 미라, 야누아 그리고 리에타가 나란히 서 있으면서 그들의 바로 앞에 서 있던 라니아와 서로 마주보며 대화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역시 라니아 씨께서 그 곳에 계셨네." 그 모습을 보며 나의 왼편에서 나와 동행하고 있던 아네샤가 말했고,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아네샤에게 린나와 모니카가 도시를 떠나기 전에 라니아에게 작별 인사를 해 달라고 당부하였음을 잊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잊지 않고 있지!" 이 말에 아네샤가 바로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답을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앞장서서 도시의 북쪽 경계 근방에 모인 다섯 사람을 향해 다가가려 하였고, 이후 그들이 주고 받는 대화를 들어볼 수 있었다.
"원래는 마냐하타에서 동생들을 불러서 같이 아테다르마로 가려 했었던 것이지?"
"예, 그랬는데, 마냐하타에서 아샤란 등이 이미 출발했고, 동생들도 그들과 같이 갔다고 해서 곧바로 아테다르마로 가는 것으로 일정이 바뀌었어요."
라니아가 건네는 물음에 야누아가 바로 답했다. 그리고 원래 일정 상으로는 자신 그리고 동생들 중 하나가 아테다르마 요새에 선 진입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 자신만큼은 서둘러 가야 할 필요가 있음을 이어 밝히기도 했다.
"그렇다면 마냐하타에는 나 혼자 가는 거냐옹?"
"목숨을 건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싶다면 같이 가도 괜찮아."
이에 리에타가 당황하면서 마냐하타에는 혼자 가는 것 아니냐고 물었고, 이 물음에 야누아가 조용히 미소를 띠며 목숨을 건다는 것의 의미를 알고 싶다면 가 봐도 좋다고 말했다-그 목소리에 장난기가 있어서 농담삼아 말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리에타가 그 말을 듣더니, 야누아, 클라리스에게 그렇다면 자신도 가 보겠다고 말하고서 이에 야누아는 물론, 클라리스까지 진짜로 놀라고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이어서 클라리스가 그런 리에타에게 물었다.
"리에타, 진짜로 가려는 거야? 그 곳이 어떤 곳인지는 알 텐데?"
"그럼, 알지!" 그러자 리에타가 답했다. 그리고 클라리스 등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갈 생각이라고 말하고서 무슨 일이 생기면 자신에게 와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자 라니아가 그런 그를 보더니, 리에타에게 부탁의 말을 건네었다.
"이번 모험에는 리피 등의 요정들도 따라갈 모양이던데, 그들을 지켜주는 역할을 맡았으면 좋겠어."
"그들도 같이 갈 것 같아요." 그러자 리에타가 요정들 역시 아테다르마로 따라갈 것 같다고 말했고, 그 말에 라니아가 흠칫 놀라면서 "그래?" 라고 묻는 듯이 화답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서로 대화를 이어가던 이들 앞으로 다가가자 라니아가 나와 아네샤 그리고 일행을 따라 온 요정들을 보더니, 어서 오라고 청했고, 이어서 나와 아네샤 역시 자신의 곁에 모인 이들과 함께 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이후, 라니아는 아테다르마로 앞장서서 나아가는 역할을 맡은 클라리스, 미라 등에게 따라올 것을 청했고, 이에 아테다르마로 가기로 한 클라리스, 미라, 리에타 그리고 야누아가 라니아를 따라 도시의 북쪽 경계 너머의 풀밭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아와레의 북쪽 교외의 풀밭, 옛 문명이 남긴 건물들의 폐허가 곳곳에 수풀 이불을 덮은 채 잠든 광활한 초원으로 저녁 때가 가까워지면서 햇빛이 상공의 왼편 너머에 이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하늘 위로는 어느새 하얗게 빛을 발하는 원형의 커다란 마법진 하나가 보이기 시작했으니, 라니아가 그 마법진을 가리키면서 아테다르마로 이어지는 마법진이라 설명을 했다. 이후, 리에타가 마법진을 향해 앞서 달려가면서 라니아에게 상공의 마법진에 대해 라니아가 직접 꾸민 것이냐고 묻고, 라니아가 그 물음에 그렇다고 밝게 목소리를 내며 답하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저 마법진을 통과하면 아테다르마로 갈 수 있어."
이후, 라니아가 마법진이 위치한 그 바로 아래의 풀밭에 머무르며 말했고, 이어서 아테다르마로 가게 될 이들에게 이렇게 청했다.
"이 마법진을 통과한 이후에도 마법진은 그대로 놓아둘 거야. 원래 마법진이 쓰이고 나면 악용의 여지를 남기지 않기 위해 제거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 마법진은 요정족이나 정령들이 아니면 이용할 수 없도록 되어 있어서 기계 병기들에 의해 마법진이 악용되거나 하지는 않을 거야. 혹시라도 위험의 여지가 생기면 돌아오거나 구원을 요청할 수 있도록 마법진을 남겼으니까, 무슨 일이 생기면 이 쪽으로 반드시 돌아올 수 있도록 해야 해, 알았지?"
"알겠어요." 이에 클라리스, 야누아가 동시에 알겠다고 답했다. 이후, 라니아는 자신이 서 있던 곳에서 오른편으로 물러나려 하면서 "자아, 이제 가려무나." 라고 클라리스 등에게 말했다. 이후, 그는 클라리스 등을 따라 온 나와 아네샤를 보더니, 나와 아네샤 그리고 요정들을 향해 다가가면서 말했다.
"이제 먀미아 성계로 가시는군요."
"예, 제가 해야할 일을 위해 가는 것은 아니지만, 성계에 자리잡은 이들을 가만히 놓아둘 수는 없기에 가려고 해요."
라니아가 온화하게 목소리를 내며 나에게 말을 건네자, 내가 바로 화답했다. 그러자 라니아는 활짝 웃으면서 "그러하시군요." 라고 말을 건네고서 이미 클라리스 등에게는 몇 번이고 이야기를 해 주었지만 아테다르마의 병기군은 섬의 병기군 그리고 랑슬로를 이용했던 이들과 마찬가지로 약자들을 핍박할 때에만 강한 존재들이며, 조금이라도 힘을 가진 자들 앞에서는 무참히 쓰러질 뿐일 것이라 말한 다음에 그들에게 겁 내지 말아줄 것을 당부했다.
"여러분들이라면 잘 해내실 것이라 믿어요. 먀미아 성계에 자리잡은 어둠을 걷어내는 데에 큰 역할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랄게요."
이에 나는 알겠다고 화답을 한 이후에 잘 해낼 테니, 너무 걱정하지는 말아달라고 화답했으며, 아네샤 역시 같은 말로 화답했다. 이후, 리피, 리지가 라니아를 향해 다가가더니, 그에게 클라리스, 미라 등을 잘 보필하고 있겠음을 알렸고, 이에 라니아는 보필을 잘 하거나 하지 않아도 좋지만, 반드시 무사히 돌아와야 한다고 답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라니아는 도시의 경계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역할은 끝났다고 말하고서 나와 아네샤에게 이렇게 작별 인사말을 건네었다.
"옛 세니티아 성계의 인류는 세니티아 이외에도 베라티사 (Beratisa), 아르데이스 (Ardeis), 조하르 (Zohar) 그리고 루마 (Luma) 등의 성계에도 삶의 터전을 꾸려 왔었어요. 하지만 이들의 세상과 문명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됐지요. 이러한 행성계들을 찾아가는 것이 인류의 흔적을 찾는 데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인류를 찾아나서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음에 대해서는 늘 명심하고 있기를 바랄게요."
이후, 라니아가 도시 남부의 마을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을 무렵, 도시의 큰 길을 따라 어떤 사람이 조용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오른손에 주머니 하나를 쥐고 있는 채로 길을 떠나고 있었던 사람으로 시내 마을의 여느 사람들과 다른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에 그 모습을 보자마자 그가 루시언 노인임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라니아는 마을로 돌아가는 도중에 노인과 마주했다.
"이제 진정 떠나시는군요." 라니아가 루시언 노인을 보면서 말했다. 이전에는 없었던 진지함과 공손함이 느껴지는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웬지 라니아의 마음 속에서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저런 느낌이 교차하고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이후, 노인은 잠시 말 없이 라니아의 모습을 보고 있다가 계속 그의 모습을 보면서 말을 이어가려 하였다. 이후로는 그 동안 들었던 두 사람의 대화만을 적어본다.
처음 만났을 때에는 꽤나 어렸었는데...... 그 때 생각이 나는구먼, 그 때에는 내 수명이 다할 때까지 네가 어른이 되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라고 생각했었지.
할아버지께서는 마을에서 애들을 처음 볼 때마다 늘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루나미아에게도 그런 말씀을 하셨잖아요.
그랬었지. 사실, 늘 그랬었지. 너 뿐만이 아니라 마을에서 애들을 만날 때마다 늘 그렇게 말하곤 했었지. 그랬는데...... 어느새 이제는 그 애들이 자라고, 어른이 되고, 그 중 일부는 애 엄마가 되어 있더구나.
이후, 잠시 동안 말 없이 서 있던 노인이 라니아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네 친구들과 함께 일자리 찾아 떠난다고 했을 때가 생각나는구먼. 그냥 공부해서 일자리 찾아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려고 그랬었나 보나 했다. 그렇게 떠나간 자네와 자네 친구들을 잊고 지내면서 살다가, 루마라는 곳에서 자네 그리고 자네와 함께 떠나갔던 아이들의 소식을 우연히 들었을 때에는......
많이 놀라셨죠?
그래...... 사실 많이 놀랐었다. 너무나도 뜻 밖의 일이라, 당황하기도 했었다네.
하지만 그 곳으로 간다고 솔직하게 말씀드릴 수 없었어요. 그 일 때문에 나간다고 하면 할아버지께서 저와 친구들을 가만히 놓아두시지 않으실 것 같아서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위험한 곳에 가려 하느냐고 말했을 게다. 그 때에는 너희들을 믿지 못했지, 그저 너희들이 이 편안하고 평화로운 곳에서 오랫동안 행복하게 지내길 원했었어. 하지만 너와 네 친구들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로구나.
그랬었죠. 한 때는 이 곳이 제 생활의 전부일 것만 같았는데....... 어느새, 이 곳에서의 생활이 그냥 지루해지기 시작했고, 그래서 바깥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있던 친구들을 따라 이 세상 밖으로 나가려 한 것이었지요. 저도 그렇게 떠나갔던 이들 모두 평화로운 삶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자극을 원했던 것 같아요.
그런 자극을 충족하기 위해 그런 곳으로 갔던 모양이로구먼.
그랬었어요. 그랬던 곳에서 참 많은 일들을 겪었어요.
그러다가 어찌하여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었나?
바깥 생활을 오랫동안 하다 보니, 문득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생각이 들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활동을 마치고 난 이후, 다른 이들은 전부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저는 아직 그럴 마음은 없었고, 바깥 세상을 더 경험해 보고 싶어서 여행을 이어갔었던 거예요.
그래도 참 잘 됐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 때 돌아온 친구들 중 하나가 그 애들을 낳고, 그 친구와 네가 그 애들, 그리고 클라리스, 미라 그리고 리에타 등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습을 보면서 바깥 세상에서 정말 많은 것들을 보고 배워왔구나, 싶었지.
그 대화 도중에 루시언 노인의 그 말에 라니아는 그저 조용히 미소를 지을 뿐, 달리 말을 잇지 않고 있었다.
그 아이들은 자기 어머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고 있나?
잘 모르겠어요. 그 애들이 그것에 대해서는 별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어서.
아무래도 이것은 야누아와 그 자매들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라니아의 친구들 중에서 애를 낳은 친구는 아마도 야누아의 어머니였을 것이고, 그래서 루시언 노인이 언급했던 애들은 모두 야누아 자매였을 것이다. 라니아를 처음 만났을 때에는 그는 아직 어린 아이였고, 그와 그의 친구들을 아이들이라 표현할 정도면 노인에게 라니아는 아주 어린 아이에 해당되었을 것임은 분명해 보였다.
아직은 잘 알지 못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무 조급해 하거나 하지는 말게. 그들이라면 언젠가는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잘 알게 될 날이 있겠지.
하지만 루시언 노인은 그에게 아이들이 어머니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해서 그것에 대해 급히 알려주거나 하지는 말고 계속 그들을 지켜보고 있어줄 것을 당부하고서, 그들도 언젠가는 스스로 자신들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알 기회가 있을 테니, 그 때를 기다려 보라고 청하기도 하였다. 이후, 루시언 노인은 이제 자신은 간다고 말하고서, 그와 마주한 후, 그와 대화를 이어가다가 그를 지나치고 북쪽 길목을 따라 나아가려 하는 노인의 뒷 모습을 바라보려 하는 라니아에게 마지막 당부할 말이 있다면서 그에게 이렇게 말을 건네려 하였다.
"자네에게도, 그리고 마을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도 각자의 삶이 있겠지. 그 삶을 보람되게 보낼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장례식 같은 것은 치르지 않아도 좋다. 다만, 이런 늙은이가 한 때 이 마을에 살았다는 기억을 남길 수 있다면, 하다 못해, 그 기억이 마을에 사는 자네와 같은 몇몇 사람들에게 전승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할 수 있다네."
그리고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는 채로 라니아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래...... 잘 지내고, 자네에게도 남은 삶이 있겠지? 그 삶을 값치게 채워주길 바란다."
이후, 노인은 라니아가 생성한 마법진을 통해 공간 전이를 시도하려는 클라리스, 미라 등의 일행과 마주하게 되었다. 노인의 모습을 보면서 클라리스는 크게 놀라거나 하지는 않았다. 마치 언젠가는 다가올 일을 맞이하는 듯, 그의 모습을 차분히 마주하고 있었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나는 이제 먼 곳으로 떠나간다. 아마도...... 기나긴 여행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혹시 내가 운이 좋다면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영영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어. 돌아올 것에 대한 바람은 가지지 않아도 좋다. 다만, 한 가지 부탁은 지켜주었으면 한다."
그리고서 그는 클라리스 그리고 그의 곁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던 미라 그리고 야누아에게 라니아를 잘 보살펴 줄 것을 당부하고, 또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라 할 수 있는 일을 반드시 수행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줄 것을 부탁했다.
"아테다르마에서 서럽게 죽어갔을 옛 고양이 제국의 백성들을 구원하고, 계곡에서 무자비한 적들과의 싸움에서 죽어갔을 황제 콘스탄치노 (Kõstãcino, Konstancino) 와 제국 부흥군의 원한을 갚기 위한 일이겠지. 그 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그들의 원혼을 달래줄 날이 언젠가는 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반드시 자네들이 해야할 일인 것은 아니겠지만, 이번 대에 성사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겠구나."
그리고서 그는 마지막으로 이들을 지나쳐 북쪽의 길목 너머로 나아가려 하면서 그에게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인사말을 건네었다.
"말이 길어진 것 같구나. 다들, 라니아의 말을 잘 듣고, 바라는 바, 이루고자 하는 바를 이루는 삶을 살아가길 바란다."
이에 클라리스 그리고 야누아는 말 없이 예를 갖추는 모습을 보이면서 노인을 떠나 보냈다. 이후, 노인은 마법진이 위치한 일대를 지나치고서 그 너머의 폐허들이 곳곳에 보이는 풀밭 너머를 향해 조용히 발걸음을 옮기어가면서 클라리스 등에게서 멀어지다가 점차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내 눈앞에서 사라져 갔다. 그러는 동안 클라리스, 미라 그리고 야누아 등은 그렇게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을 먼 길을 떠나가는 루시언 노인의 모습을 그저 말 없이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노인을 떠나 보내고 한참 시간이 지날 무렵, 날이 저물기 시작할 즈음이 되어서야 클라리스 등은 먀미아를 향하는 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마법진 근처에서 그간 있었던 일들을 지켜보고 있던 리에타까지 마법진이 자리잡은 곳에 모이기 시작하고, 나와 아네샤 그리고 리피, 리지가 그 근처에 이르렀을 때, 리에타가 클라리스를 보면서 말했다.
"이제 할아버지께서는 어떻게 되는 거냐옹? 돌아오시지 못하시는 것 아니냐옹?"
"......." 이에 클라리스, 미라 그리고 야누아도 잠시 동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클라리스가 조용히 목소리를 내며 리에타의 물음에 답을 하였다.
"할아버지께서는 영영 돌아오시지 못할 거야."
그 동안 말을 하지 않고 있었겠지만, 모두 짐작은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노인이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말에 모두 다른 말 없이 공감을 표하고 있었다. 클라리스가 리에타의 물음에 대답을 한 이후, 미라가 클라리스 그리고 리에타를 향해 돌아서면서 말했다.
"얼마 전에 할아버지께서 라니아 아줌마를 만나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어, 자기는 이제 살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지. 라니아 아줌마께서 그 말씀을 들으시면서도 딱히 놀라시지 않으셨던 것을 보면 그런 말씀을 예전부터 자주 하셨던 것 같아."
이후, 미라가 밝힌 바에 의하면 루시언 노인은 라니아가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는 말을 가끔씩 했었다는 모양으로 자신에게 살 날이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게 되었을 때에 마을을 떠날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서 그는 이전에 라니아나 야누아의 어머니 등에게 그들이 어른이 되는 모습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늘 했었음을 밝히고서 어쩌면 그러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는 추측을 드러내기도 했다.
"할아버지께서는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오셨던 거야? 라니아 아줌마께서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이셨다면 굉장히 오래 사셨다는 것인데."
"잘은 모르겠어. 하지만 수 천 년 넘게 이 곳에서 살아오셨던 것 같아."
이후, 야누아가 건네는 물음에 미라가 답했다. 그 이후, 미라는 클라리스와 라니아에 대해 할아버지가 어떤 존재인지 대략 짐작은 하고 있어 보인다고 말하고서 클라리스에게 할아버지가 어떤 이였는지 알고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도 라니아 아줌마께 들은 이야기이기는 해. 아줌마께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할아버지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아차리고 계셨던 것 같아."
그 때, 리피와 리지가 클라리스의 곁으로 다급히 날아가려 하였다, 그 동안 마을에 자신들과 함께 살았던 유일한 인간인 듯해 보였던 루시언 노인에 관한 이야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클라리스를 마주 보고 있던 미라의 머리 위에 리지가 머무르고 리피가 클라리스의 오른 어깨 위에 앉으려 할 즈음, 클라리스로부터 루시언 노인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루시언 노인은 인간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의 고향은 당연히 아와레 (Aware) 가 아니며, 에즈리스 (Ezris) 대륙도 심지어 알바레스 (Albares) 행성계도 아닌 곳이었다. 그의 고향은 옛 인류의 고향이라 칭할 수 있는 곳, 현 시점에서는 세니티아 (Senitia) 행성계라 칭해지는 곳. 즉, 루시언 노인은 구 인류 (Oldhomoj, Vecchi Umani, Pluila Yitora, Lari-umandr) 라 칭해지는 옛 세니티아 인 (Larihn Senitiayi) 이었던 것. - 나를 비롯한 일행이 찾아나서는 것이 바로 옛 세니티아 인들의 후예들이었다.
옛 세니티아의 사람들은 크고 작은 나라를 건설했으며, 나라마다 다른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하지만, 그가 옛 세니티아의 어느 나라에 살았던 인물이었는지에 대해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다. 다만, 그는 브레타니아 (Bretania) 라 칭해지는 나라의 중세 (Mezepoko, Haonjelukh) 초기 시대의 인물이었다는 것 정도만 알려져 있을 따름. 그 오래되고도 오래된 시대의 인물이었지만 세계의 멸망을 겪으면서도 그 영혼의 성질이 변하지 않은 채로 이 행성계로 전이해 온 존재였다고 한다.
영혼의 성질이 변하지 않았다. - 이 말의 의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구 세계 인류의 영혼이 이토록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도 성질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은 실은 매우 큰 의미를 가지는 일이다. 옛 인류의 발상지이자 인류 세계의 중심지였던 구 세니티아를 비롯한 인류 세계가 멸망하면서 해당 세계에 속해 있던 영혼들, 현실 세계의 영혼들 뿐만이 아니라 사후 세계, 정신 세계의 영혼들-신, 천사, 악마들-마저 그 여파를 피하지 못했고, 현실 세계와 사후 세계, 정신 세계들의 멸망과 함께 풀려나온 영혼들 중 대다수는 이후, 본연의 성질을 거의 잃은 채 방황하다가 새로운 세계가 창조되자 그 영향을 받아갔다.
하지만 이러한 세계의 변화 속에서도 변화, 변질을 겪지 않은 영혼들도 극소수나마 있었다고 하는데, 아마 루시언 노인은 그런 영혼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구 세계 멸망의 여파를 겪으면서 영혼이 본연의 성질을 잃지 않은 것은 그만큼 그 영혼이 강인하였음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루시언 노인에 대한 클라리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구 세계의 멸망 이후에 수많은 영혼들, 심지어 신과 천사, 악마들이라 칭해진 존재들마저 멸망의 여파를 피할 수 없어 본연의 성질을 잃고 말았다는데, 그 여파를 견디어 낸 만큼, 그는 강인한 영혼의 소유자였으리라고 클라리스가 루시언 노인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이후로 클라리스와 미라가 서로 간의 대화를 주고 받는 형식으로 루시언 노인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이후로는 그 대화 내용을 그대로 적어 본다 :
할아버지께서는 젊은 시절에는 강인한 용사이자 기사이셨을 것이라 여기고 있었지?
응, 우리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께서 너 그리고 나를 한 번씩 부르셔서 사람들을 지키는 용사가 되어달라고 늘 부탁을 하셨잖아, 그래서 늘 그렇게 생각했었어, 할아버지께서는 본래 기사이셨고, 기사가 되면서 나라의 수많은 사람들을 지키는 존재가 되겠다는 맹세를 하고, 그 맹세를 지키려 하신 분이셨을 것이라고.
나도 같은 생각이었어, 그러면서 어쩌면 할아버지께서는 브레타니아라 칭해진 왕국에서는 아주 높은 지위를 가지신 분이셨을지도 모른다고 여기기도 했어. 클라리스, 너는 루시언 할아버지가 본래는 어떤 사람이었을 것이라 생각해?
나도 확실치는 않기는 한데, 보통 인간의 경지를 초월할 정도로 강인한 기사이셨다면......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예전에는 강한 힘을 바탕으로 자신의 왕국을 세우는 사람들이 많았대. 그래서 어쩌면 할아버지께서도.......
정말일까? 나는 별로 믿음이 가지 않아.
믿고 말고는 할아버지를 보았을 사람들의 생각에 달린 일이겠지. 아무튼, 할아버지께서는 본래 정말 강하신 분이셨을 거야.
그런데, 할아버지의 모습을 볼 때마다 표정이 늘 우울해 보였어, 죄책감이라 할 수 있을지, 아니면 회한 (Regret) 이라고 할 수 있을지. 그런 한 (Resent) 의 심정이 그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고 계신 것 같아 보였던 거야. 만약에 네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왕국에서 왕 혹은 장군으로 살아가시다가 크나큰 일을 겪으시고 그로 인해.......
그 말 대로일 거야, 모종의 이유로 인해 크나큰 사건을 몇 차례 겪으시고, 그 여파로 몸과 마음이 모두 무너지신 분 같아 보이셨어. 자신이 잃어버린 무언가에 대한 회한을 깊이 느끼시고 계셨던 것 같아. 네 말대로 그것은 죄책감 같아 보였고, 그래서 아마도 할아버지께서 그간 겪은 비극이 자신의 과오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기고 계셨던 것 같아.
이후, 야누아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루시언 노인은 왜 떠나려 한 것인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클라리스 그리고 미라에게 건네려 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할아버지께서는 왜 떠나려 하신 것이지?
너도 들어서 알 거야, 본래 할아버지께서는 진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모종의 이유로 인해 자신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던 영체의 일종이라 할 수 있어. 라니아 아줌마의 어린 시절에도 할아버지께서 노인의 모습을 가지고 계셨던 것은 할아버지의 육신은 오래 전에 죽은 상태였고, 그 영혼만을 남기신 채로 옛 세니티아의 마지막 은거지 그리고 이 곳에서 삶을 이어가시고 계셨기 때문일 거야. 수 천년이 넘는 시간을 왕국을 떠나 은거한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살아가시며 변화해 갔고, 변화해 가는 세상의 모습을 지켜보시고 계셨던 것이지. 할아버지를 잘 알고 있는 이들이라면 모두 짐작하고 있었을 거야. 라니아 아줌마는 물론, 미라도 알고 있을 거야. 야누아, 너도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 이미 짐작하고 있지 않았니?
그래, 그간의 일화를 통해 인간과는 다른 무언가이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고 있기는 했어. 그런데, 그 수 천년 동안의 영혼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모종의 힘 같은 것이 있어야 하지 않아? 그러하지 않고서야 영혼만 남으신 분께서 어떻게.......
라니아 아줌마께서 말씀하셨어, 아마도 그 분의 영혼에 깃든 마력이 그 분의 형상을 유지시켜 주었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 마력에도 결국 한계는 있고, 그래서 할아버지께서는 언젠가 그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실 것이라 말씀하시기도 하셨지. 할아버지께서도 그것을 이미 아시고 계셨고, 그래서 아줌마께 언젠가는 자신이 사멸해 가는 모습을 보이게 될 것이라고, 늘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하셨지, 그러면서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어, 자신이 점차 연기로 변해 사멸해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고, 그래서 때가 되면 마을에서 떠나가게 될 것이라고.
"지금까지 할아버지께서 그렇게 되실 것임을 너나 미라 등의 마을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야누아의 그 말에 미라가 바로 답했다, 지금까지 알고 있기는 했지만,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애써 하지 않으려 했을 뿐이라고.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는 루시언 노인이 슬퍼하거나 우울함에 빠질 것 같아 그런 이야기를 차마 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마을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 하기도 했다.
"클라리스, 미라, 아직 남은 이야기 있냐옹?"
그 때, 뒤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리에타가 클라리스 등에게 아직 남은 이야기가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클라리스는 더 있기는 하지만 아직 할 이야기는 아니라고 답하고서 남은 이야기는 이후에 언젠가 하도록 하겠음을 알리고서 그간 감추어두고 있었을 날개를 펼치기 시작하였다. 하늘색 빛을 발하는 세모꼴 날개를 펼치고 클라리스가 마법진이 위치한 곳으로 날아가기 시작하자 미라 역시 같은 형상의 날개를 펼친 이후에 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이어 야누아와 리에타 역시 하얗게 빛나는 날개를 펼치면서 비행을 개시하니, 그리하여 클라리스의 일행 모두가 먀미아를 향하고 있을 마법진과 이어진 곳으로 가게 되었다.
"라르나 씨, 아네샤 씨, 저희들도 가요."
그 동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을 리피, 리지 역시 나와 아네샤에게 어서 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갈 것을 청했고, 그리하여 리피와 리지의 권유를 따라 나부터 날개를 펼치고 날갯짓을 하며 마법진을 향해 가능한 빠른 속도로 날아가기 시작했고, 이어서 아네샤가 그런 나의 왼편에서 나와 함께 비행을 이어갔다. 처음에는 나보다 뒤쳐지고 있었지만 계속 가속을 이어가더니, 마법진 근처에 이르렀을 무렵에는 나를 앞질러 가는 모습을 보이기에 이르렀다.
그 무렵, 마법진 너머로 나아가기 직전의 클라리스 일행이 가까이에 보였고, 리피, 리지가 클라리스의 곁으로 재빨리 나아갔다. 이후, 나와 아네샤가 이들 일행의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 마법진을 통과하기 시작했고, 그리하여 나와 아네샤는 아테다르마 고양이 일족을 괴롭혔던 기계 병기 군단을 향해 나아가려는 클라리스 일행을 따라 아테다르마로 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