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먼 곳으로 여행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가 아침 해가 내려올 즈음에 돌아왔다. 도중에 아르나이의 도시인 나이사(Naisa) 에서 딸기로 만든 잼을 사 왔는데, 일단 잼이 담긴 유리로 만들어진 병을 찬장 안에 넣어놓은 다음에 침대에 앉았다. 그리고 침대 가까이에 있는 책장을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책장에 꽂힌 책 몇 권으로 시선을 향하다가 이들 중에서 파란색을 띠는 표지를 가진 책을 책장에서 꺼내었다.
  책장의 책들은 크게 세 종류로 이루어져 있다. 좋은 내용으로 이루어진 책과 알 수 없는 내용으로 이루어진 책, 그리고 나쁜 내용으로 이루어진 책들로. 좋은 내용으로 이루어진 책은 몇 번 읽어도 가치가 있는 책들이다. 동화도 있고, 세상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마음이나 심성과 관련된 책도 있다. 편안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고, 이를 통하여 착한 마음씨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야 하고, 올바른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어서 누구라도 읽으면 참 좋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나쁜 내용으로 이루어진 책은 읽어서는 안 되는 책들이다. 신화 비슷한 여러 괴상한 이야기 혹은 태고 시대의 세상을 살아가는 법에 관한 이야기가 주가 되는 책들이다. 흥미롭기는 하지만 신의 질서를 따르지 않는 자들에 관한 이야기는 역시 태고 시대는 악의 시대였음을 깨닫게 해 주기만 할 뿐, 다른 그 무엇도 주지 않는다. 정말 나쁜 책들. 그래도 태고 시대가 악의 시대였음을 증명하기 위한 책들이기에 계속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알 수 없는 내용으로 이루어진 책들은 거의 대부분이 태고 시대에 쓰여진 책들로 여러 알 수 없는 이야기로 이루어진 책들이다. 무슨 이야기 책 같은데, 실제 내용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많고, 간혹 보면 기호와 문자 그리고 숫자의 모임만이 종이에 '그려진' 경우도 있다. 흥미를 겸하여 태고 시대에 어떠한 책이 있었는 가에 대한 관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목적이 이러한 책들을 보는 가장 큰 이유가 되겠지만 나쁜 책들은 아니라고 여기어진다.
  내가 펼친 푸른색 표지의 책은 세 번째에 해당하는 책이었다. 처음부터 금속으로 만들어진 문고리를 잡았을 때 갑자기 자극이 일어나는 현상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 이후에 나타나는 내용 전개 중에 '전기', '자기', '물리량' 이나 '전자', '전하', '물질의 구조' 같은 이해할 수 없는 말들로 가득하였다. 그러다가 이상한 글자나 기호가 나타나기도 하고, 알 수 없는 암호문 비슷한 글자들도 나타났다. 물론 나는 이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었고 책장을 이리저리 넘기며 글자들의 모습만 구경하다가 책을 덮고 다시 책장에 책을 꽂았다.
  다음에 그 옆에 있는 책을 가져왔다. 태고 시대에 쓰여진 듯, 낡은 그 책은 이전에 쓰여진 책과는 분명히 다른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우연한 사고로 두 다리를 잃고 어려운 삶을 살게 된 이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망을 이루기 위하여 온갖 시련을 극복하고 마침내 소망을 이룬 다음에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내용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는 책이었다.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었지만 그래도 무난히 책을 읽고 그를 통하여 무언가를 얻을 수 있었다. 간만에 좋은 책, 그것도 태고 시대에 쓰여진 좋은 책을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밤이 되자 잠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아자이아(Aseia) 를 만나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자 아자이아는 미소를 띠며 나에게 말하였다.
  "좋은 책이네. 태고 시대에 있었던 일을 소재로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일단은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소망을 가지고 있으며 그를 이루겠다는 굳은 의지를 가지며 그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면 반드시 그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알리는 책이잖아."
  그 말을 듣고서 나는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때 아자이아가 방금 전에 자신이 한 말에 이어지는 말을 하였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왠지 모르게 가엾다는 느낌도 들었어. 희망마저 절망으로 바뀌어진다는 태고 시대에서는 세상을 자기 멋대로 움직이려 하는 귀족들이 있어서 이야기 속의 주인공과 같은 존재를 이용하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낡은 도구 버리듯이 버림 받게 하였다고 하니. 그 역시 귀족들에게 이래저래 이용만 당하다가 마침내 슬프게 삶을 마쳤겠지. 귀족들만 없었다면........"
  그 이후, 그 아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한 번 자신이 하는 이야기를 이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 뿐만이 아닐 거야. 수많은 사람들이 귀족들 때문에 자신의 꿈을 망치고는 하였대. 그리고 귀족들 중에는 그렇게 파멸한 사람들을 죄를 지은 존재로 여기게 하여서 동정하는 이들 조차 없게 하였다는 말도 전해지고 있어. 그래서 태고 시대에서는 누구라도 귀족이 아니면 꿈을 이룰 수 없었다고 하지."
  그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밝았던 나의 표정은 곧바로 우울해지고 말았다. 역시 태고 시대의 이야기라는 점이 문제였던 것일까? 그래도 그 이야기는 많은 이들을 행복하게 해 주리라고 믿고 있었는데, 너무 아쉬웠다. 아까운 이야기였다. 그 때 그러한 나의 심정을 알아차린 듯, 아자이아가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야기 자체는 훌륭하였는데....... 역시 태고 시대였다는 점이 문제였어.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수의 정령들이 태고 시대에 관해서는 단편적이나마 알고 있다고 하니, 그 점만 아니라면 많은 이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으리라고 여기어지는 책이야. 누군가가 시대 배경을 바꾸어서 이 이야기를 다시 썼으면 좋겠어. 비록 그 이야기가 진실된 이야기가 아니라 할지라도. 확실히, 어떠한 난관에 부딪쳐도 소망을 이루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반드시 그 소망을 이룰 수 있다는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필요해."
  "그래, 나도 그 생각에는 동감하고 있어." 아자이아의 말에 내가 공감한다는 뜻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 아자이아의 나중에 그 책을 소개해 달라는 부탁의 말을 전달 받고서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정말 아자이아의 말대로 그 책을 누군가가 현재나 가까운 과거로 시대 배경을 바꾸어서 이야기를 다시 썼으면 좋겠다. 그렇게 된다면 모든 정령들이 태고 시대의 특성에 관한 생각에 구애받지 않고 그 책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느끼면서 이를 두고 감동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