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다.

비가 내린다.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있다.


  지금 창밖으로 비가 내리는 모습이 보이고 있다. 수많은 빗방울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그에 따라 바깥의 여러 사물들이 물에 적셔진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바깥에서부터 소리가 수많은 물방울들이 지면과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여느 때보다 더 큰 소리, 지금 이 순간이 올해 들어서 가장 많은 비가 내리는 때일지도 모른다.
  사실 이 비는 오늘부터 내린 비가 아니었다. 한 동안 하늘을 드리우던 구름 사이로 햇살이 밝게 세상을 비추면서 시작된 어제 아침이 지나고 오후에 들어서면서 구름이 다시금 태양의 빛을 가리며 날이 어두워지더니 어느 순간부터 하늘 곳곳에 번개가 번쩍이기 시작하고 마침내 갑작스럽게 큰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창가에서 그 기세를 보며 다음날까지 이어지겠다 싶었는데 그 예측대로 지금 이렇게 빗방울들이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비가 내리는 바깥의 모습을 조용히 감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바가 있어서 책상의 서랍 안에 넣어두고 있던 글이 쓰여지지 않은 책을 꺼내서 책상 위에 올려놓고서 그 첫 장을 펼쳤다. 책장에 그 무엇도 쓰이지 않은지라 첫 장부터 종이는 무척 깨끗하였다. 그 첫 장을 바라보며 펜을 들고 그 위에 무언가라도 글자를 쓰려 하였다. 잠시 후 종이의 첫 장 윗 부분에 검은 색의 작은 글씨로 '비가 내린다' 라는 글자들이 쓰여지고, 그 아래 줄에는 '비가 하늘에서 내린다' 라는 글자들이 쓰여졌다.
  하지만 그 이후의 나는 그 어떠한 글자도 종이에 쓰지 않았다. 나의 생각을 바탕으로 글을 쓰는 일을 처음으로 시작하였기 때문인지 무엇을 어떻게 써야할지에 대한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 동안 그로 인한 고민을 하고 있다가 잠시 글 쓰는 일을 쉬고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을 내리고서 펼쳤던 책을 다시 덮고 펜을 그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서 자리에서 일어나 건너편 끝에 위치한 침대로 다가가서 그 위에 앉았다. 그리고 창가를 통해 드러나는 하얀 하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동안 만큼은 마음이 평온할 수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그 대신 해야할 일을 하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나의 마음을 크게 누르고 있었다. 그 일이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바로 답을 내릴 수 있었다. 해야 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일이지만 하지 않고 있는 일, 방금 전까지 내가 하고 있던 일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서 바로 시작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마음 속에 두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다시 그 일을 시작한 이후에 있을 어려움을 떠올리며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러갔을는지. 그 동안 비가 내리는 기세가 많이 약해졌는지 빗방울이 사물과 부딪치는 소리는 이제 거의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비가 그쳤을 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면서 바깥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비는 여전히 많이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전에 비하면 조금 약해졌다는 느낌은 분명하였다. 그러한 바깥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서 다시 자리에 앉은 다음에 펜을 들고 책의 첫 장을 펼쳤다. 무언가라도 글을 쓰고 싶었지만 당장에 글이 쓰여지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비가 내리는 광경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고 마침내 한 장을 채우지는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길이를 가진 글을 쓸 수 있었다.
  아직 날이 저무는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많은 시간이 흘렀으리라는 짐작을 할 수는 있었다. 그와 함께 책의 첫 장을 어느 정도 채운 글자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겨울철 때만 하더라도 날이 저물었을 지금의 하늘을 보기도 하면서 글에 대한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시간을 끌기만 하고 있었던 나 자신의 모습에 대한 후회를 하였다. 무언가 일을 시작하였으면 어느 정도라도 진행해 놓고 있어야 그 이후에 쉬면서도 마음 속에 무언가가 남는 일이 없는데, 어째서 나 자신은 그러한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방금 전 까지만 하더라도 근처에서 들려오고 있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직도 비는 많이 내리고 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 있게 밖으로 나가서 놀고 싶어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왠지 모르게 부럽다. 옷이 젖는 일 조차 달가워하지 않는 나 자신의 모습 탓인지도 모르겠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