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디찬 겨울 바람이 서쪽 하늘에 드리워진 태양 아래로 펼쳐진 들판을 지나친다. 그 날카로움에 작은 물방울조차 얼어붙은 곳의 들판은 새하얀 얼음 조각의 모임을 이불삼아 조용히 휴식의 시간을 가지고, 그 모습을 눈에 덮힌 나무들이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따름. 어둠에 감싸여져 가는 하늘 아래로 새하얀 얼음 조각들의 모임에 덮인 대지가 펼쳐지고 있었다. 구름의 색보다도 순수한 하얀색, 천국의 궁전은 분명 그러한 색을 띠고 있을 것이다.
  그 순수한 색을 가진 대지를 걸을 때마다 작은 얼음 조각들을 밟을 때 나는 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들려온다. 눈이라는 존재 자체가 얼음과 근본이 같기 때문일까. 그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길을 걷는다. 그리고 하얀 눈으로 인해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 나무들 중 하나를 향해 다가가 본다.
  기둥까지 눈으로 덮여있는 나무. 그 주변에는 숱한 발자국들이 대지에 새겨져 있었으며, 이들은 나무 근처에 서 있는 작은 눈 사람을 둘러싸고 있었는데, 이들은 누군가가 이미 다녀갔음을 친절히 알려주고 있었다.
  "이미 누군가가 다녀간 모양이네."
  그 모습을 보며 조용히 혼자서 말하였다. 그리고 눈사람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곧 그 너머로 펼쳐진 대지를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여러 발자국이 새겨져 있기는 하였으나, 눈에 의해 평소와는 달라진 면모를 보이게 된 대지의 전반적인 모습은 하얀 평면, 그 자체였다.
  이전에도 들른 적이 있었던 곳이었지만, 또 한 번 들른 지금에 이르면서도 싸늘한 바람만이 지나치는 눈에 덮힌 대지라는 광경은 변하지 않고 있다. 아마 몇 해 후의 이 시점에 다시 이 곳을 들러도 대지는 분명 이와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을 것이다. 그러한 대지를 잠시 더 바라보고 있다가 시선을 올려 하늘을 보기 시작하였다. 어두워져가는 하늘은 이전처럼 맑기만 하였다. 작은 구름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과거에는 바람이 구름에서 온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는데, 그 생각이 틀렸음을 알아낸 일은 그렇게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잠깐 하늘의 모습을 보다가 다시 앞을 바라보며 나무 곁을 떠나려 하였다. 그러다가 바로 앞에 자리잡은 돌무더기가 눈에 덮힌 광경을 지나치고서 한 그루 큰 나무를 향해 다가가는 도중에 이전에 이 곳을 들렀을 때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 때, 나는 다시 들렀을 때처럼 바람이 흩날리는 대지 한 가운데에 서 있으면서 과거에 무엇이 자리잡고 있었는지를 알아내려 하였었다. 하지만 알아낸 것은 거의 없다시피. 무엇도 남아 있지 않은 대지에서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분명히 알아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과거에는 거대한 도시나 문명의 산물이 자리잡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 그 문명의 소산들이 사라지고 흔적조차 소멸해 간 지금에 이르러서는 무엇이 자리잡고 있었을지에 대한 추측을 상상이나 과거의 기록을 토대로 행할 수밖에 없다.
  사실, 그 일은 지금을 살아가는 나를 비롯한 사람들에게는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과거에 분명 무언가 큰 존재가 있었을 것이다. 과거의 인간들은 이렇게 거대한 대지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언가 큰 존재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무언가 큰 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문명도 인간이라는 존재도 사라졌지만, 대지는 그대로 남았다. 인간이 남겼을 수많은 일들에 관한 기억을 말 없이 품고 있으면서.
  대지는 언제나 평온하다. 나는 그 평온한 대지 위를 홀로 걸으며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진다. 눈으로 덮혀있는 광경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서. 그러다가 잠깐 멈추어서 허리를 숙이고 두 손으로 눈을 뭉친 후에 서쪽 하늘 높은 곳을 향해 던졌다. 하얀 덩어리는 세차게 어두워져가는 하늘을 향해 나아갔다. 하지만 곧 그 덩어리는 서쪽 하늘의 석양 바로 위에 닿기도 전에 힘을 잃더니 아래로 떨어져 마침내 대지를 덮힌 하얀 얼음 조각들의 무리와 하나가 되었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