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의 곳곳에 세리사(Cerisa)
(1) 라는 이름을 가지는 꽃들이 피어나 겨울의 기운을 보내고, 봄의 기운을 맞이하려 하는 하늘 아래의 곳곳에 화창히 피어나는 때가 왔다.
물론 하늘에 겨울의 기운이 물러나면서 봄의 기운이 그 자리를 서서히 대신해 가기 시작한 때는 그 이전의 일이었지만 그 때 이후로 서서히 피어나기 시작한 포르세아(Forsea)
(2)
와 아잘렌(Azalen)
(3) 이라는 이름을 가지는 꽃들이 가지마다 피어나 초록 기운을 조금씩 되찾아가기 시작하는 세상을 노란색으로, 또 분홍색으로 물들이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이고, 아잘렌 꽃들이 피어난 이후에는 꽃눈이 트일 때가 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며칠은 더 소요되리라 생각했기에 그 꽃들이 그 날 이후 하루 아침만에 화창히 피어난 모습을 보면서 예상 외로
빨리 피어난 그들의 모습에 대해 놀라기도 하였다.
조금 늦게 피어났더라면 그 때까지 이런저런 준비를 하다가, 꽃들이 피어나자마자 바로 종이와 판을 들고 밖으로 나섰을 텐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제 져서 꽃잎을 흩날릴지 모르는 세리사들의
모습을 그리지 않을 수는 없어서 그렇게 꽃들이 활짝 피어났을 때가 되자마자 나는 조용히 창고에서 지금껏 넣어두고 있던 종이와 그것을 받치기 위한 목판자 그리고 그림을 그리기 위해 활용하고 있는
수단인 색연필들을 꺼내어 종이와 판을 왼손으로 그리고 색연필들이 들어있는 통을 오른손으로 잡고 있으면서 급히 밖으로 나갔다.
처음에는 급하게 걸었으나 집을 벗어난 이후부터는 비교적 차분히 발걸음을 옮기려 하면서 마을 곳곳에 심어진 나뭇가지마다 피어난 아잘렌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려 하였다. 그러는 동안
세리사보다도 먼저 피어난 아잘렌들은 처음 피어났을 때와 같이 한결 같은 활짝 피어난 모습을 보이고 있으면서 자신의 모습을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을 지나는 이들에게 드러내고 있었다.
마치 어린 소녀를 위한 작은 분홍빛 드레스를 연상케 하는 꽃의 모습, 그래서일까 그 꽃의 모습을 보면서 '분홍빛 치마' 에 비유하고 있는 어떤 문구를 본 기억이 있으며, 그와 더불어 나와 잘 아는
사이인 리파(Lyfa) 라는 이름을 가지는 소녀가 실제로 그 꽃의 모습을 보면서 그 꽃의 모습과 흡사한 드레스를 입은 어린 꽃의 요정, 그 모습을 상상하기도 했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 바 있다.
사실 이 아잘렌은 '아잘렌 에세라(Azalen Esera)' 라 하여 순수한 면모를 가지는 꽃이라 칭해지고, 이후에 피어나는 아잘렌은 '아잘렌 바나사(Azalen Vanasa)' 라 하여, 보다 이전의 에세라와 비슷한
면모를 가지지만 보다 성숙한 느낌을 전해준다고 한다. 그러하기에 이들 중 에세라는 깨끗하고 순수한 심상을 전해주기에 '어리고 순수한 소녀' 에 비유가 될 수 있을 것이며, 이후에 피어나는 바나사는
더욱 크고 화사한 모습을 보이기에 '성숙한 아름다움을 지닌 소녀' 로 간주될 수 있을 법하다. 이렇게 바라보는 느낌은 자세히 보았을 때, 조금은 다를지라도 모두 봄의 화사함을 더하는 순정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꽃들이라 칭할 수 있으리라.
그 아잘렌들을 바라보며 마을의 동쪽 구역을 벗어나 그 너머로 보이는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이전에는 가 보지 않은 곳으로서 길 좌우로 세리사 나무들이 줄지어 머무르고 있으면서 그 위로
뻗어난 가지들마다 하얗게 꽃들을 피우고 있는 광경이 눈앞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길의 좌우에 머무르는 나무들이 만들어 낸 그 가지들이 하늘 위로 자라난 모습은 마치 나뭇가지로 이루어진 커다란 아치 모양을 연상케하고 있는데, 그 가지들이 여럿 모이니, 그야말로 하나의
커다란 천장을 이루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하늘의 모습을 가릴 정도는 아니고, 하늘 위로 뻗어난 가지들이 지면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나의 눈앞으로 그 모습을 드러낼 정도에 이르고 있었다.
그 나무들을 지나다가 그 나무들 사이에 머무르고 있는 금속 기둥으로서 그 꼭대기에 수정으로 이루어진 팔면체로 감싸이고 있는 작은 등이 자리잡고 있는 곳-어둠 속에서 길을 편하게 가기 위한
장치의 일종이다-을 발견하자마자 그 근처에 앉았다. 그 곳에서 그림을 그리기 위한 일이었다.
나무 판자 위에 도화지를 올려놓고 연필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동안, 나는 나뭇가지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려 하였고, 그러하다보니 자연히 그 시선이 가지 위로 피어난 꽃들을 향하게 되었다.
피어나 있는 시간이 비교적 짧다하여 '한 짧은 시간 속의 아름다움' 을 상징한다고 알려진 꽃, 세리사. 다섯 개의 희끄무레한 꽃잎을 가진 그 작은 꽃 자체는 아잘렌에 비하면 화려하지 않지만,
그것의 아름다움은 여럿이 모여 하나의 색을 띠는 광경을 만들어내는 것에 있다. 나뭇가지 위에 피어난 그 수많은 꽃들의 모임은 자신들의 고향인 나무를 새하얗게 물들이며 묘한 광경을 만들어낸다.
시간이 지날 때마다 색이 달라지는 것도 그 꽃의 매력이라면 매력이다. 실제로는 중심 쪽의 색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분홍빛으로 변해 가는 것이라지만 멀리서 보면 꽃들이 연분홍빛으로 변한
것처럼 보여 이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전하게 된다.
세리사는 그 작은 모습과 새하얀 색을 띠다가 분홍빛을 띠기 시작하는 모습으로 인해 '순정을 품은 소녀' 로 간주가 되고는 한다. 순정을 드러내듯이 새하얀 모습이 점차 사랑을 알게 되면서 그
마음을 상징하는 분홍빛으로 변해 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꽃의 모습을 보면서 나뭇가지를 그린 후, 자그마한 꽃의 모습을 하나씩 그려내려 하는데, 갑자기 나의 왼편 뒤쪽에서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며 나를 부르려 하고 있었다. 이에 놀라 잠시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보니, 그런 나의 눈앞으로 리파의 모습이 보였다. 리파는 나의 근처에 머무르고 있으며 나의 그림을 감상하려 하는 듯이 허리를 굽힌 채, 무릎 위에 손을 올린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세리사들을 그리고 있네, 이번에는 처음 같은데."
"응, 이전에는 기대하지 않은 색을 띠고 있어 조금 실망해서 그리지 않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 풍경을 한 번 정도는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 물음에 내가 그렇게 화답을 한 이후에 리파를 향해 고개를 돌린 채, 그에게 물었다.
"올해는 꽃의 요정, 그 모습을 그리지는 않는 거야?"
"이번 해에는 달리 할 일이 있어서......." 이에 그렇게 답을 하는 리파. 그 이후, 나는 조용히 그림을 그려 나아가다가 그림으로 시선을 향한 채, 그에 대해 궁금한 바에 관한 물음을 건네려 하였다.
"그런데 리파는 정말 꽃의 요정이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여기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있겠지?" 물론 세니티아에는 그런 요정이 존재하지 않아,-세니티아의 요정들은 빛에 관한 요정들이다- 쉽게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인 탓인지 그는 꽃의 요정이 실제로
있다는 말을 바로 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곧 그는 어디인지는 몰라도 은하계의 어딘가에는 꽃의 기운으로 이루어진 요정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음을 밝힌 이후에,
"그 곳에 간다면 그 모습을 실제로 볼 수 있겠지."
라는 언급을 하고서 어지간해서는 세니티아의 요정들과 크게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겠지만, 그래도 그 모습을 보는 일은 이전까지 보지 못한 것을 보는 일로서 꽤 신기한 경험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정말 그러할지를 살짝 의심하면서 물었다.
"정말 그러할까."
"그러하겠지." 그러자 그는 시간의 지체 없이 바로 그렇게 화답을 하였다.
(1) - 벚꽃
(2) - 개나리
(3) - 진달래 / 철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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