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등성이의 한 곳에 위치한 어느 돌담. 과거에는 왕국의 성이 자리잡은 곳이라 하나, 지금은 돌담과 그 안쪽에 드문드문 자리잡은 돌더미들만이 남아있다. 그래서 과거에 왕국이 있었다는 사실을 사서를 비롯한 사료를 참고하지 않는 한, 확인하기는 어렵다.
  한 때는 사람들이 분주히 오갔을 돌담 주변은 이제는 인적조차 드문 곳이 되어 있었다, 간혹 정령들이 수련을 위해 오기도 하지만, 지금 같이 가을도 겨울도 아닌 이 때에 오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이런 돌담길을 조용히 거닐면서 그 너머의 돌더미들을 유심히 바라본다, 왕국의 옛 모습이 어떠하였을 지를 상상하면서.
  그러면서 돌더미들 사이를 조용히 걷고 있다가, 흥미로운 물건 하나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이제 갈색을 띠기 시작한 억새풀에 둘러싸인 돌담에 위치한 작은 민들레. 이제는 피어날 때도 거의 지나갔을 법한 시기에 이 꽃은 뒤늦게 꽃을 피웠다가 이제는 꽃잎을 떠나 보내고, 갓털들로 새로운 꽃을 만들고 있었다. 화초 자체는 자라기 힘든 탓인지 가녀린 모습이었으나, 갓털 꽃 자체는 풍부하다시피 할 정도로 컸다.
  '그래, 꽃이 자라기 힘들다면 꽃씨라도 많이 만들어 두어야 안심이 되겠지.'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그렇게 혼잣말을 하고서 조용히 꽃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꽃 줄기로 왼손을 내밀고, 그 꽃을 꺾어서 갓털이 흩날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꽃을 들어올렸다. 다행히도 바람은 격하게 불지 않아서 그로 인해 홀씨들이 날아가는 광경은 보지 않을 수 있었다.
  조용히 바람을 만든다, 그 바람에 의해 홀씨를 실은 갓털이 힘을 받아 일제히 갓털의 머리를 떠나, 아기새가 둥지를 떠나듯이, 그들의 마지막 둥지를 떠나간다. 이들은 천천히 굽이진 궤적을 그리며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흩어져 갔다. 한 몸에서 태어난 형제 자매들이 그렇게 각자 다른 길을 선택하고, 그 중에서 씨앗이 싹을 틔울만한 곳에 이른 이들은 조용히 꽃을 피워내기 위한 때를 기다릴 것이다. 물론 억새풀들로 둘러싸인 돌무더기 사이에서 그러할만한 곳에 이를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무렵, 갑자기 나를 등지는 방향으로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고, 그와 동시에 씨앗들이 내 앞의 먼 저편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하였다. 억새풀 사이에 떨어질 민들레의 씨앗들이 불쌍해서 나를 대신해 하늘이 바람을 불어준 것이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들은 적어도 억새풀들로 가득한 대지를 지나, 먼 곳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참 다행스러운 일이라 칭할 만 하다.

  그러다가 하늘 높이 날아간 씨앗들을 바라보면서 문득 한 가지 상상이 떠올랐다, 사실 그 민들레꽃은 왕국에 남은 혼으로서, 씨앗을 바람에 흩날리며, 자신의 자손이 꽃의 모습으로나마 널리 퍼지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라는 상상. 그런 상상을 하면서 하늘에 운을 맡길 수밖에 없는 덧없는 소망이겠지만, 후손을 남겨 그 후손들이 자신의 명맥을 이어가게 하고 싶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는 했다.
  이후, 나는 조용히 돌무더기들 중 하나에 앉아 있으면서 왕국의 성이 위치하고 있었을 곳으로 조용히 시선을 향하였다. 아마 왕족들은 왕국이 멸망하면서 어디론 가로 끌려가거나, 하는 방식에 의해 왕국을 바로 떠났을 것이다. 떠난 이는 왕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 휘하의 신하들과 기사들 그리고 사제들도 왕국이 멸망하면서 각자 자신들이 머무를 수 있는 곳을 찾기 위해, 혹은 포로가 되어 어찌할 도리 없이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성에서 왕국을 위해 일했을 이들 중 하찮게 여기어진 이들이라면 왕국에 남았을 터이다. 그리고 왕국을 떠날 수 없었던 민중 역시 모든 것이 사라진 왕국의 영토에 남았을 것이다.
  민들레꽃이 왕국에 마지막으로 남은 혼이라면 그 혼의 실체는 남겨진 민중의 마지막 후예일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 생각이 사실이라면 살아있을 적에는 가졌을 망국민으로서의 의식조차 꽃으로 환생하면서 잊어버리고, 어려워진 삶 속에서 자신이 더 많은 후손들을 남겨, 가급적이면 이들 중 다수가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땅에 도달해야 한다는 사념만이 꽃에 남아, 돌무더기와 억새풀 사이에서 가녀리게 피어나면서도 수많은 씨앗들을 흩뿌렸을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을 이어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는 동안 어느새 민들레 씨앗은 하늘 저편으로 사라져 있었다, 그렇게 가을에 마지막으로 이 대지에 피어난 민들레 꽃 역시 겨울을 맞이하려는 바람 속에서 사라져 갔다. 그 광경을 바라보니, 아쉬움의 감정이 바로 다가왔다. 이제 곧 겨울이 시작될 것이고, 겨울의 시작은 곧 한 해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는 시기와 일치한다고 생각하니, 지나온 한 해를 보다 충실히 보낼 수 있었는데, 라고 생각하니 지금껏 참아왔던 아쉬움이 몰려온 것이었다.
  이제 10 일 즈음 지나면 겨울이고, 또 491 년의 마지막 달이 된다. 한 해를 정리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는 만큼, 당분간은 바빠질 것 같다. 그래도 지난 해처럼 한 해 정리를 나 혼자 하지만 않을 수 있다면 나름 즐거울 것 같은데, 누가 나의 일을 같이 해 줄까. 아미아라면 괜찮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