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는구나."
  꽃도 다 지고, 날도 슬슬 더워져 가기 시작했던 지난 17 일에서부터 18 일에 이르기까지 하루 종일 유난히 많은 비가 쏟아져 내렸다. 비가 오면서 날씨가 이전에 비해 많이 서늘해지기는 했지만 그런 나날이 오래 지속될 것 같지는 않을 것이다.
  18 일 즈음에는 밖에 나와 있기는 했지만, 날이 많이 흐려지기도 하고, 근처에는 달리 갈 곳도 없어서 밤이 되기도 전에 집으로 돌아와서는 안방의 책상에 앉아, 조용히 책을 보는 일에만 집중하였다.
  한 번 쏟아지기 시작한 비는 끝이 없는 듯이 내리며 마을 주변 일대의 대지를 적시고 있었다. 빗소리가 거세게 울리기 시작하면서 책에만 신경을 집중할 수 없어 잠시 창가를 내다 보며, 회색을 띠는 구름이 드리워진 하늘 위로 빗방울들이 쏟아지는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작년 이 맘 때, 라넬리스의 그 곳도 그랬었지, 꽃이 유난히 많이도 피었던 곳이었는데......."

  작년, 그러니까 491 년의 같은 날이었다. 그 날은 내가 여행을 위해 라넬리스의 수풀 지대를 들르고 있었는데, 갑작스레 세찬 비가 쏟아지는 탓에 그 비를 피하기 위해 수풀의 한 곳에 자리잡은 나무를 찾아 그 나무 밑에 숨어 있어야 했었고, 그 당시 우산이라고는 한 개도 없어 비가 잠시 그쳤던 그 다음날 아침까지 그 곳에 줄곧 머무르고 있어야만 한 적이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우연찮게 다른 방향에서 길을 걷던 어떤 승려 할아버지와 함께 머무르고 있으면서 그와 더불어 라넬리스의 사정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나는 별 다른 이야기에 대한 기대를 하지는 않고 있었으나, 의외로 뜻밖의 것을 그로부터 듣게 되었다.

  우선 그 할아버지께서는 나와 자신이 머무르고 있는 곳에 관해 혹시 아느냐고 물었고, 이에 처음 방문했던 내가 잘 알지 못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답을 하자, 할아버지는 미소를 띠며 실례했다는 말을 한 그 이후에 다시 들를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드니, 들려주도록 하겠음을 밝히면서 곧바로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모습을 보이려 하였다.

  당시, 승려 할아버지와 내가 걷고 있던 초원 지대는 과거에는 시가지였던 곳으로서, 한 때는 지역 일대에서 가장 번성하는 구역이기도 한 곳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지역 일대에 자리잡고 있던 나라의 수장이 자기 멋대로 국왕임을 선포하고, 힘에 의한 통치를 시행하려 하자, 민중의 의지를 무시한 그의 처사에 수많은 이들이 자유를 위해, 정의를 위해, 그 도시에 집결해 오만한 그의 힘에 굴복하지 않는 의지를 보인 바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왕은 이러한 민중들을 '잡스러운 쓰레기들' 로 여기었으며, 자신이 거느리는 최신예 병기들로 민중들을 짓밟고, 시가지 전체를 불태워 폐허로 만들어 놓은 후에 '저주받은 시가지' 로 간주하고, 폐허에 소금을 뿌린 채, 방치해 두었다고 한다.
  이후, 희생당한 이들의 결의를 존중하고 본받으려 하는 자들이 계속 왕국에 모습을 드러내었으나, 왕과 왕가, 그리고 이들을 따르며, 세력을 키운 귀족들은 이들의 자신에 대한 도전을 철저히 봉쇄하기 위해, 이들을 서서히 몰락시켜 갔다. 이를 위해 이들은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생각에 어긋나는 이들을 소리 없이 처단함은 물론, 비뚤어진 생각을 가진 지식인들을 끌어들여, 그들이 자신들에 맞서는 주장을 펼치려 하는 이들을 몰아붙여 그들의 의지를 꺾도록 하였다.
  이러한 강압과 비뚤어짐의 힘 앞에 끝내, 그 당시의 민중들은 '사악한 기운에 오염된 자들' 로 여기어지며, 그 지역 일대가 '악마의 소굴' 로 간주되고, 퇴마를 위해 오는 자들까지 나타날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승려 할아버지께서는 당사자들에게는 무척 억울한 일이었겠지만, 이런 일을 만들어낸 그들의 힘을 어느새, 대다수의 사람들이 감당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고, 이로 인해 진실을 밝혀내려 한 이들이 있어도, 받아들여지지 않아, 그리하여 이들이 원하였던 바는 그 나라가 존속하는 동안, 그 어느 때에도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었음을 밝히셨다. 이들의 진심과 의지에 관한 발언은 그 어느 때에도 배제가 되었으며, 그저 귀족들이 주장하는 그들에 대한 생각만이 세상의 표면 위로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창검 혹은 총이 힘을 일으키는 절대적 수단이 될 수 있다-이러한 주장을 한 이 역시, 창검으로 나라를 이끌었으며, 무자비한 통치로 많은 이들을 고통에 빠뜨린 존재였기에, 그의 주장을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창검과 총포로 지배하는 힘이 사람의 의지에 어긋나게 될 경우, 그 의지를 받아들이려 하는 또 다른 힘에 의해 그 힘이 몰락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승려 할아버지께서는 불의가 정의를 힘으로 억누르며 일어난 왕국은 건국하자마자 배덕과 타락을 감당하지 못한 채, 뒤흔들려 갔으며, 교역의 중심이기도 한 그 국가가 타락해 망가져 가는 모습을 이웃나라가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한다고 이야기를 이어 나가셨다, 이후 이야기는 사실, 이 나라들이 이전의 민중 봉기에 대해 긴장한 것은 그 나라가 민중에 의한 쇄신을 겪을 경우, 다시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여, 자신들이 만만하게 보고 노릴 수 없었기 때문인데, 이제 그들이 '악의 상징' 으로서 철저히 배제되고, 기존의 타락한 세력들이 나라를 뒤흔들며, 민중이 그로 인해 고통에 처해 국가에 대한 결속력이 약해지면서 그 국력이 약해질 때를 지켜볼 수 있게 되었음을 밝히는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야기는 이런 국가들의 움직임에 대한 우려는 곳곳에 있었으며, 그에 대한 대비를 주장하는 자들도 많았으나, 국가는 이들을 두고 '사악한 기운에 오염된 자들' 로 여기면서 이들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박해하거나 나라에서 추방함으로써 이들의 생각을 무시하였고, 끝내 사람들의 뜻을 저버리며 이어간 왕국의 삶은 끝내, 이웃나라들의 침입으로 인해 멸망하는 것으로써 종말을 맞이하였음을 밝히고 있었다. 멸망한 왕국의 권신과 일족들은 민중을 포섭하려 한 국가들에 의해 처참하게 처형당했으며, 왕국의 영토는 점령한 국가들에 의해 분할되어 각 국가들의 일부가 되어 갔으며, 사람들 역시 국가의 분할 점령과 함께 분할되는 대로 흩어지면서 왕국의 영토를 분할한 국가들의 일부가 되어갔다고 한다.
  그 누구도 나라를 바꾸기 위한 뜻조차 가지지 못한 탓에 나라를 쇄신하지 못하다가, 대를 이어 억울함과 분노를 품고 있던 민중들의 편이 되어주겠다고 이웃나라가 선언을 하자, 바로 '자유와 정의' 를 추구하고자, '배덕으로 가득찬 자신들의 나라' 를 저버리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민중을 포섭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간 국가들이 그 민중의 뜻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들을 대하려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어떠한 이야기도 들을 수 없었다.
  이후에도 그 지역에서는 5 월 이 맘 때가 되면 항상 세차게 비가 내리며, 이를 두고 사람들은 때가 될 때마다 하늘이 그 슬픔을 기억하며, 흘리는 눈물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그 모든 것들이 떠나갔으나, 슬픔만큼은 하늘에 영원히 각인되었을 것이라면서.

  회상을 끝마친 이후에도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회상을 마친 이후에 흐린 하늘 아래로 비가 내리는 광경을 바라보게 되니, 기분이 많이 우울해졌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혹시 내가 머무르는 마을도 먼 옛날에는 실은 힘을 가진 자들의 배덕 혹은 어리석음으로 인해 억울하게 희생된 자들이 있어서, 그 원혼들이 화사한 계절이 지나가려 하는 이 때에 슬픔에 겨워 눈물을 흘리고, 그 눈물이 빗방울로서, 하늘에 내리게 하면서 먼 훗날의 후손들이 자신들의 슬픔을 이해해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책을 덮고 조용히 샤프 판을 꺼내어, 그 위에 말들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내가 나 자신을 상대로 정해, 한 사람이 두 배역을 받는 게임을 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내 곧, 말들이 가지런히 놓여진 샤프 판을 가만히 바라보는 채, 아무 행동도 하지 않으려 하였으며, 그러는 동안 여러 생각들이 마음 속을 오가며, 그로 인해 머리가 아파 오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고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말들과 판을 정리하며 혼잣말을 하였다.
  '오늘은 그냥 일찍 자야 하겠다.'
  하루의 남은 시간을 그냥 잠으로 보내더라도, 잠을 자지 않는 한, 마음 속을 오가는 수많은 생각들을 차분히 정리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